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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2010년대애니메이션 (2)
이 세상의 한 구석에 [この世界の片隅に / In This Corner of the World] (2016)

[이 세상의 한 구석에]의 시작은 주인공의 나레이션이다. 그리고 이 나레이션은 영화가 끝날때까지 외화면에서 존재감을 잃지 않는다. 나레이션으로 시작하는 영상물들은 결국 작품 속 세계 인식을 나레이션에다 기준을 맞출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 나레이션의 주인공인 우라노 스즈의 입장에서는 [이 세상의 한 구석에]는 평범한 일상물이다. 호감을 가진 남자가 있지만 중매로 구레 시에 사는 공무원 슈사쿠에게 시집간 스즈. 호죠 가의 시집살이는 그리 쉽지 않지만 스즈는 특유의 밝고 느긋함으로 어려움으로 견뎌나간다. 코노 후미요는 스즈와 호죠 가의 일상을 구성할 디테일을 빼곡히 알고 있고, 카타부치 스나오 역시 원작자의 정보를 충실하게 전달하며, 모든 디테일을 평등하게 다룬다.

하지만 영화 시작에 등장하는 시대를 알리는 자막이 뜨는 순간 관객은 이 이야기를 미시사에만 맞춰 볼 수 없게 된다. [이 세상의 한 구석에]는 2차 세계 대전 말기 히로시마 현 구레 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한 구석에]은 미시사를 구성하는 나레이션과 캐릭터하고 거시사를 구성하는 자막과 원경이 서로 보이지 않는 기싸움을 하고 있는 작품이다. 스즈는 역사의 큰 그림을 파악하지 못한다. 하지만 구레는 명백히 전시 상태이며, 스즈가 만나는 사람들은 얌전하지만 분명하게 당시 일본 사회의 어둠을 담아내고 있다.

원작자 코노 후미요는 자신이 그리는 미시사가 미시사로 머물수 없다는걸 알고 있다. 원작 [이 세상의 한 구석에]는 히로시마 원폭을 다룬 전작 [저녁뜸의 거리]의 피해자 코스프레 또는 가해자로써 일본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비판에 대한 대답도 담았기 때문이다. 코노는 다시 한번 [저녁뜸의 거리]의 영역으로 돌아간다. 그러면서 자신의 할머니가 경험했던, 전쟁 이전의 역사를 미시사로 구성하면서, 당시의 디테일이 담고 있는 정치성을 독자가 스스로 생각하게끔 유도했다. 클라이맥스를 차지하는 태극기 시퀀스는 일견 작위적이다 싶을 정도로, 미시사에서 정치성을 발견하지 못했던 자신의 무지함을 반성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가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카타부치 스나오는 코노 후미요와 똑같은 방식을 취할 수 없다. 일단 애니메이션을 보면 알겠지만, 원작은 중심 사건 없이 에피소드 형식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2시간 이내의 통일된 각본을 쓰기 까다롭다. 카타부치 스나오는 원작을 각색하면서 야마다 요지가 2000년대 후반에 내놓았던 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을 떠올린 것 같다. 야마다 요지는 일련의 2차 세계 대전 영화에서 일상적인 영역에 어떻게 비일상적인 정치가 개입하는지를 다루었다. 카타부치는 야마다 요지의 성과를 이어받아 풍부한 일상사적 디테일들이 어떻게 거시적인 역사와 연결되는지, 관객이 어떻게 이걸 받아들어야 하는지 나레이션과 후경 간의 대립을 통해 질문한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섬뜩한 부분 역시, 일상을 그리는 스즈의 순진한 나레이션과 대사가 아무렇지 않게 일본 제국의 군국주의적 사상을 담아낼때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스즈에겐 폭탄은 형형색색 폭죽처럼 그려지고, 국가가 주입한 "결전복"이니 "대일본제국의 함"이니, "여자의 장기인 죽창" 같은 슬로건들은 순진한 목소리와 함께 하면서도 동시에 긴장 관계를 이룬다. 외화면에서 흐르는 목소리가 내화면에서 쏟아지는 폭격 소리 같은 부조리를 인지하지 못하고 상황을 동화적으로 포장할때 카타부치 스나오의 목표가 어디 있는지 알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그 긴장 관계를 읽어야 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오직 관객만이 스크린 외부 음향과 내부 음향 간의 대립을 재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긴장 관계가 깨지는 순간, 영화는 스즈의 비정치성을 산산히 깨트린다.

영화의 초반부. 스즈는 어렸을때를 회고하면서 아이를 납치하는 요괴에 대한 얘기를 한다. 이후 이어질 현실적인 본편과 뚝 떨어진 이 환상적인 플래시백은 다소 이질적이다. 하지만 이 회고는 스즈의 유아적인 세계를 보여주면서, 스즈의 나레이션이 현실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는걸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스즈는 주체적으로 주변 현실을 로맨틱하게 포장하고 씩씩하게 살아가지만, 딱 한번 주체적인 환상을 박탈당하는 순간이 있다. 바로 스즈의 실수로 하루미가 죽었을때다. 이 순간 카타부치는 냉정하게 추상적인 이미지들로 이뤄진 장면들에다 스즈를 밀어넣는다.

더 이상 일상의 안온함은 스즈를 보호해주지도, 포근하게 상상할 여지를 주지도 않는다. 잘려나간 팔처럼, 전쟁과 군국주의는 스즈에게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긴다. 이 상흔이 어떤 의미인지 펄럭이는 깃발 앞에서 깨닫게 되는 순간, [이 세상의 한 구석에]에서 세상 한 구석 역시 세상의 일부였음을 깨닫게 한다. 어떤 지점에서 스즈의 울부짖음과 눈물어린 대사는 직접적으로 정치성을 담은 원작보다도 훨씬 통렬한 구석이 있다. 바다 건너의 식량으로 이뤄진 자신에 대한 회의와 자조. 그 회의와 자조가 한 인물의 유아적인 세계 인식을 깨트리면서 [이 세상의 한 구석에]는 정치 애니메이션으로써 자신의 위치를 선언한다. 단지 작위적일 정도로 메시지를 꾹꾹 눌러담았던 원작과 달리 애니판에서는 이 부분의 연출이 평상시와 다를바 없이 그려지는게 아쉽다.

[이 세상의 한 구석에]는 일본인들에게 원체험처럼 남아있는 원폭의 이미지인 하얀 빛을 드러내는 애니메이션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이미지를 보여줄때 카타부치 스나오가 인용하는 영화는 이마무라 쇼헤이의 [검은 비]다. 두 영화 모두 한 개인이 가족에 편입되려고 할때 핵폭탄이 터지고, 인물들은 하얀 빛을 맞이한다. 마치 프레임에 있는 인물들을 전부 삭제 혹은 정화하려는 것처럼. 어쩌면 당신은 [이 세상의 한 구석에]를 [검은 비]의 프리퀄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검은 비]가 핵폭탄 이전의 세계에 대해 간략하게 다루는 것처럼 [이 세상의 한 구석에]는 핵폭탄 그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결국 바다 건너의 식량으로 일상을 유지하던 시대는 끝났다. 그 시대가 끝난 자리에서 [이 세상의 한 구석에]는 핵폭탄으로 부모가 죽은 고아 소녀를 입양하는 것으로 애니메이션을 마무리짓는다. 하루미와 팔은 돌아오지 않지만 역설적으로 스즈는 호죠 가로 대표되는 '세상의 한 구석'에 입양되고 입양함으로써 세상에서 살아갈 자격을 얻는다. 반대로 친가족이었던 우라노 가는 전부 죽거나 죽음이 예정되어 있다. 스즈가 알고 있던 두 세계 중 예전부터 알고 있던 (구)세계가 멸망하리라는 암시. 그리고 새로운 세계에서 상흔을 안고 살아갈 스즈 부부. 카타부치 스나오는 후반부를 일종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상황으로 설정한 뒤, 그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할지 고민한다. 그리고 총체적으로 고아가 된 일본인들이 서로를 입양하는 것에서 살아갈 힘을 찾아낸다. 

영화의 결말은 다시 아이를 납치하는 요괴다. 하지만 그 요괴는 더 이상 아이를 납치하지 않는다. 바구니는 텅 비어있고, 스즈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스즈는 어른이 되어 정화된 (것처럼 보이는) 신세계를 살아간다. 영화는 거기서 마무리짓는다. [이 세상의 한 구석에]은 철저하고 객관적인 역사 인식으로 그 시대를 돌아보는 작품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이 포근하면서도 현실적인 애니메이션은,  [검은 비]를 감싸고 있던 필사적인 삶을 행한 의지라던가 [유레카]에서 꿈꾸었던 대안 가족이 어떤 역사적 맥락을 지니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그 점에서 [이 세상의 한 구석에]는 요새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보기 드물었던 나와 세계 간의 관계를 생각하는 미덕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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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거북 [La tortue rouge / The Red Turtle] (2016)

(누설이 있습니다.)

미카엘 두독 드 위트의 [아버지와 딸]은 그 자체로 걸작이었다. 삶과 죽음, 이별의 순환을 마음 아프게 그려낸 이 단편 애니메이션은 그전까지 조용하게 애니메이션을 만들던 두독 드 위트의 명성을 단숨에 세계적인 위치로 올려준 작품이었다. 그에게 관심을 기울인 사람들 중에는 스튜디오 지브리쪽 사람들도 있었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구애가 여러차례 이어졌지만 이번에 리뷰할 [붉은 거북]이 나오기까지는 14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늦은 나이에 장편 데뷔하게 된 두독 드 위트의 장편은 어떻게 이뤄져 있는가?

두독 드 위트는 그동안 대사가 없는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왔다. 그의 드라마는 지극히 추상적이다. 인물들의 디테일은 최소화되어 있고, 어떤 행위 ([아버지와 딸]에서 가장 중요한 행위는 기다림이었다.)의 반복이나 강조, 변주로 극을 꾸려간다. 그 와중에 불쑥 튀어나오는 이미지가 영화 내내 이어지는 액션을 보조하며 의미를 불어넣는다. 두독 드 위트는 대사를 비롯한 디테일이 영상의 기초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감독이다. 단편에서 이 전략은 매우 성공적이였다. 어차피 짧은 길이에서 복잡한 서사를 다룰수 없다면 최소한으로 줄이는게 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편에서는 이 전략은 항상 성공적일수 없다. 알레고리와 메타포 이외에 채워야하는게 많기 때문이다.

우선 밝혀두자면 [붉은 거북]은 그의 단편에서 그리 멀리 떨어진 장편은 아니다. 캐릭터 설정과 대사가 없다는 점, 서정적인 생로병사에 대한 성찰이라는 주제, 간결한 작화가 그렇다. [붉은 거북]은 두독 드 위트의 단편들처럼 알레고리와 메타포로 서 있는 애니메이션이다. 하지만 달라진 점도 있다. 두독 드 위트가 장편으로 넘어오면서 가장 먼저 달라져야고 생각했던 것은, 풍경의 스케일이였던 것 같다. 기본적으로 소박한 스케일이였던 그의 단편들과 달리 [붉은 거북]은 장편의 자유를 확실히 누리겠다듯이 광활한 하늘과 바다로 대표되는 자연의 스펙터클에서 애니메이션을 꾸려간다. 그 점에서 보자면 [붉은 거북]은 [아버지와 딸]의 해변가와 언덕을 확장시킨 영화라 할 수 있다.

[로빈슨 크루소]식 난파극을 자처하는 [붉은 거북]이 재미있는 점은, 난파 이전 과정을 생략한 채 처음부터 물에 빠져 있는 남자를 보여주며 시작한다는 점이다. 당연하겠지만 두독 드 위트는 그의 이름이 무엇이고, 이전엔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즉 이 남자에게는 그동안의 과거나 뿌리가 없다. 심지어 환영에서도 당연히 등장해야 할 가족이나 친구는 등장하지 않으며, 생뚱맞게 현악단만이 그가 육지하고 연결고리가 있었음을 암시할 뿐이다. 

[붉은 거북]이 감독의 단편처럼 알레고리와 메타포로 세워진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을 생각해보자. 이 사실을 비틀자면, 두독 드 위트는 디테일이 필수적인 공동체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초기 단편 두 개는 지극히 우화적인 액션만을 그렸고, 관계로 시선을 확장한 [아버지와 딸]에서도 딸은 분명 가정을 이뤘지만 딸의 가족은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딸은 아버지라는 원형적인 상징에 매달려 행동을 반복한다. [붉은 거북]의 남자 역시 공동체와의 고리를 끊은 채 바다로 향하다가 지극히 개인적인 장소인 무인도에 표류한다.

[붉은 거북] 초반부는 섬을 나가려는 남자의 시도를 꾸준히 보여준다. 하지만 그 시도는 계속 좌절된다. 전형적인 난파극 전개지만 상술했듯이 이 남자에게 어떠한 과거나 뿌리가 없다는걸 생각해보면 섬 밖을 나가려고 하는 의도는 조금 복잡하다. 이 남자는 가족보다는 막연한 문명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의지가 강해 보인다. 뭔가 자신의 죽음으로 슬퍼할 사람들보다는 그것이 안겨주는 편안함을 먼저 떠올리고 그리워한다고 할까. 그에 답하듯이 두독 드 위트는 남자의 탈출을 방해하는 캐릭터로 붉은 거북을 등장시킨다. 

어쩌면 남자가 무인도에서 탈출하려는 이유는 단순히 다른 사람들이 있는 육지로 돌아가려는게 아닌, 자연인 무인도에 정착을 거부하려는 제스처로 읽어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애니가 제시하는 변곡점은 그래서 흥미롭다. 남자는 자신을 섬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는 존재가 붉은 거북이라는걸 알게 된 뒤 우연히 해변가로 온 붉은 거북을 죽인다. 그리고 후회하던 와중 붉은 거북이 여성으로 변한걸 알게 된다.

[붉은 거북]의 흥미로운 부분은 살해와 죽음의 모티브다. 첫번째로 살해와 죽음 모티브가 행해지는 이 시퀀스에서 남자의 동기를 이해하긴 어렵진 않다. 섬 밖으로 나가려는 시도가 좌절해 분풀이했다는게 선명히 명시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체 왜 살해당한 붉은 거북은 인간 여성으로 변하는가? 이는 소통의 벽에 대한 붉은 거북의 답이라 생각한다. 붉은 거북과 남자는 '다른 종'이다. 그렇기에 두 존재는 통하지 않고, 결국 소통의 시도는 파국을 맞이한다. 하지만 남자는 문득 후회하고, 그 후회에 답하듯이 판타지적 전환을 불러일으킨다. 두독 드 위트는 소통의 파국이 결국 타자였기에 때문에 일어났으며, 그에 대한 답은 각자가 지닌 간극을 줄이는 것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로맨틱하지만 동시에 주체가 완전히 동화되지 않은 해결책이라는 점에서 [붉은 거북]은 어떤 선을 그어두고 있는데, 이는 결말의 정서하고도 연결된다고 본다.

여자와 남자가 아이를 낳으면서 붉은 거북은 가족의 이야기로 나아간다. 이 부분부터 남자는 문명과 육지에 대한 미련은 없는 모습을 보인다. 관계가 형성되면서 문명과 땅은 남자에게 머나먼 무언가로 다가온다. 와중에 아들은 남자가 갔던 길을 반복한다. 남자가 빠진 절벽 아래 바다에 떨어져 빠져나오는 장면은 두말할것도 없이 아버지의 길을 따르는 아들의 모습이다. 재미있는 것은 아들이 성장하는 과정을 그림에도 부부가 늙는 과정을 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들은 애니의 3분의 2가 흘렀음에도 젊은 시절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심지어 아들이 장성한 성인이 됬을때에도 여자는 물론이고 남자 역시 약간의 시간만 흐른 것처럼 보인다.

여기다 스포일러가 되는걸 각오하고 적자면, 이 순간 두독 드 위트는 아들이 섬을 떠나는 계기를 준비한다. 두독 드 위트는 바다에서 건너온 유리병에 아들이 호기심을 보이는 것에서 아들과 아버지, 문명 간의 고리를 마련한다. 시간이 지나도 부서지지 않는 문명의 부산물에서 아들은 매혹을 느낀다. 그 매혹이 실체화되는 계기는 또 파괴와 죽음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두독 드 위트는 이 시퀀스에서 무수히 쓰러진 나무들을 보여주면서 파괴된 세계를 형상화한다. 이 이미지의 강렬함 때문에 우리는 아들이 소리를 지르며 남자와 여자를 찾아다니는걸 보는 동안 그들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함에 빠져든다. 다행히도 기우로 밝혀지만, 남자와 여자가 성치않은 몸으로 나타나는 장면은 분명 죽음의 기운이 묻어나온다. 아들은 이 사건을 통해 이 섬이 아닌, 저 너머 문명만이 자신을 보호해줄거라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 해일이 밀려오는 장면에서 3.11 도호쿠 대지진을 떠올릴수도 있겠지만, 이 역시 3.11이 다뤄야 할 죽음과 공동체의 붕괴가 다뤄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간접적인 연결에 그쳐야 할듯 하다.

아들이 이별을 준비하게 되는 첫 징후는 다시 바다 속 거북 무리를 만나면서 이뤄진다. 자연을 연상케하는 붉은 거북과 문명을 연상케하는 계단이 아들 앞에 나타나는 환영 장면은 작중 상징을 함축한 시적 표현이라 쳐도, 아들이 떠나는 날 남자와 여자가 마치 구조 신호를 보내듯이 연기를 피우는 샷은 좀 이상하다. 정작 아들은 배를 타고 사라지지 않고, 헤엄쳐 붉은 거북들과 함께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샷 연결만 보자면 부부가 준비한 신호는 아들을 데려갈 붉은 거북을 위해 준비된 것처럼 보인다.

두독 드 위트는 유리병을 제외한 문명적 요소가 이 섬에 나타나는걸 거부하고 있다. 아들을 문명으로 데려갈 존재 역시 인간이 아니라 자연의 대변인인 거북이 데려가게 만든다. 하지만 남자와 여자는 아들을 따라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미 그들은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보면 땅이 아닌 하늘에서 이뤄지는 환상 시퀀스로 처리된 점도 의미심장하다. 붉은 거북에서 인간이 된 여자가 허공에서 정을 나누는 순간 남자는 얼마 안 되는 문명과의 연결고리가 사라지고 자연과 동화된다. [붉은 거북]은 두독 드 위트의 알레고리와 메타포가 개인과 자연에서 비롯된 걸 잘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 그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원형의 이미지에서 자기 세계를 구축한다.

아들이 떠나면서 [붉은 거북]은 다시 죽음의 이미지를 불러온다. 아들이 떠난 이후 부부는 갑자기 늙기 시작한다. 당연한 순리겠지만 장성한 아이가 자기 세상을 찾아 부부를 떠나는 순간, 부부에게 남은건 노화와 소멸 뿐이다. 두독 드 위트는 이런 세상사의 진리를 노화 이미지의 압축과 대조로 정리해낸다. 하지만 어느 정도 정정한 여자와 달리 남자는 먼저 죽는다. 두독 드 위트는 여자가 죽은 남자를 놔두고 다시 붉은 거북이 되어 흐느끼며 바다로 돌아가는 걸로 애니메이션을 마무리짓는다. 붉은 거북에서 인간이 되었지만, 결국 최후엔 붉은 거북이 되는 이 구조를 통해 두독 드 위트는 여자가 온전히 인간이 된게 아니라는걸 암시한다. 

여자의 변신은 차라리 인간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했지만 결국엔 자신의 본질을 받아들이고 쓸쓸히 떠나가는 모습에 가깝다. 간극을 줄이려고 노력했지만 영원히 좁힐수 없는 간극이 있었으며, 결국엔 그걸 최후에 인정해야 한다고 두독 드 위트는 생각하는 것일까? 하지만 두독 드 위트는 애도를 담은 붉은 거북의 눈물을 통해 그런 간극을 좁히지 못했음에도 무위는 아니였다고 말한다. 그 점에서 [붉은 거북]은 원형적인 가족 관계에서 출발해 이별과 소멸을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아버지와 딸]의 장편 리메이크이기도 하다.

[붉은 거북]은, 단편에서 장편으로 그럴싸하게 넘어오는데 성공했지만 아직 채워야 할 빈 칸이 많아 보이는 애니메이션이다. [붉은 거북]은 움직임과 스케일, 이미지의 원초적인 매력에 대한 두독 드 위트만의 개성을 장편 애니메이션에 이식하는데 성공했지만 알레고리와 메타포로 이뤄진 단순한 서사는 장편에 완벽하게 들어맞는다고 보기엔 힘들다. 지나치게 단선적인 구조라고 할까. 짧은 러닝타임인데도 리듬이 단조로운 점도 아쉬움을 더한다. 알레고리와 메타포 자체가 원형적인 만큼 고루한 서사의 반복이라고 비판을 가할 구석도 있다. 

하지만 [붉은 거북]은 잃은것보다는 얻은게 많은 애니메이션이다. 특히 후반부 같은 경우엔 두독 드 위트 특유의 서정적인 표현을 통해 자연과 문명의 대조, 우리가 늘상 겪어야 하는 이별의 의미를 잘 잡아내고 있다. [붉은 거북]은 그 점에서 데뷔작으로써는 나쁘지 않은 출발이다. 두독 드 위트가 자신의 리듬감을 어떻게 발전시키느냐에 따라 그의 커리어가 결정될듯 하다. 아니면 그냥 단편 작업에서 만족할수도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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