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번째 창문
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2016 (12)
더 라스트 가디언 [人喰いの大鷲トリコ / The Last Guardian] (2016)

(누설이 있습니다.)

우에다 후미토는 걸작 [완다와 거상]을 내놓은 뒤, 10년 이상을 침묵해왔다. 그의 신작 [더 라스트 가디언]은 원래 PS3로 나올 게임이었으나, 계속 미뤄졌다. 심지어 PS4 런칭작으로도 선정되지 않았을 정도니깐. 우에다 후미토 본인은 이미 개발을 다 해뒀다고 말했지만, 게이머들에게 [더 라스트 가디언]은 불로초나 다름 없는 존재였다. 다행히 2015년부터 발매 계획이 잡히기 시작하더니, 2016년 본격적으로 공개되었고 그해 연말 게임이 나왔다.

우선 우에다 후미토 팬들이라면 이 게임이 [이코]와 [완다와 거상] 어디에 있는지 궁금할 것이다. 답은 [이코]다. [완다와 거상]은 극도로 단순화된 오픈 월드에 플레이어를 던져놓고 보스를 차례대로 찾아가는 과정 자체를 퍼즐화하는 신선한 시도를 취했다면, [더 라스트 가디언]은 [이코]처럼 고립된 신비로운 무대를 배경으로 선형적으로 이어지는 스테이지와 퍼즐을 풀어가는, 전통적인 퍼즐 어드벤처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 심지어 주인공을 잡아 이끄는 그림자 괴물에 이은 적 골렘 병사도 건재하다. 우에다 후미토가 장르를 창조하는 게 아닌, 장르를 재발명하는 타입의 게임 개발자이긴 해도 [더 라스트 가디언]은 명백히 [이코]의 정신적 후속작에 가깝다.

하지만 [더 라스트 가디언]은 [이코]의 자기복제하는 게임은 아니다. 두 게임은 '동반자'라는 요소를 공유하지만, 접근하는 방식은 다르다. [이코]의 요르다는 신비한 동반자라는 개념을 내세웠지만, 궁극적으로는 주인공과 같은 위치에서 행동하는 인간이었다. 요르다는 RPG 게임의 NPC 동료를 재해석한 캐릭터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더 라스트 가디언]의 동반자 식인 독수리 토리코는 다르다. 그러니깐 정말로 보기 힘든 타입의 상호작용을 하는 동반자다.

우선 이 토리코는 엄청나게 '크다'. 실제로 토리코를 보게 되면 그 크기에 흠칫 놀라게 될 것이다. 프레임에 꽉 들어찬 토리코는 그 자체로도 스펙타클이다. 우에다 후미토는 전작에서 거상을 만들듯이 토리코라는 생물을 만들어간다. 플레이어는 토리코를 풀어준 이후, 토리코를 데리고 다니며 유도해야 한다. 토리코를 타고 올라 발판으로 삼거나 날아서 이동하며, 퍼즐 도구로 쓰이거나 그림자에게 공격받는 플레이어를 대신 지켜준다. 어떤 부분에서는 집에서 키우는 동물과 같이 행동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고질라나 킹콩처럼 행동하는 이 생물은 정말 특이한 감흥을 안겨준다. 개새라는 말은 적어도 제대로 짚은 셈이다. 토리코는 창작물 통틀어 독특하게 만들어진 괴수다.

우에다 후미토와 소니 재팬 스튜디오가 이 게임에 오랫동안 매달렸던 이유도, 이 토리코라는 생명체를 게임에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할지에 대한 고민 때문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더 라스트 가디언]은 직관적인 게임은 아니다. 우에다는 각 상호 작용 포인트를 소비에트 몽타주 이론가들이 숏을 이어붙이는 것처럼 '법칙은 있되 설명은 없이' 배치한다. 그리고 조작을 최대한 단순화한 뒤, 인물들의 반응에서 그 상호 작용 포인트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파악하도록 유도했다. 때문에 우에다 후미토 게임을 플레이를 플레이어는 끊임없이 스테이지에 배치된 상호 작용 지점을 학습하고 상상해야 한다. 여기까지는 우에다 후미토가 이전에서 선보였던 게임들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캐릭터 그 자체로 레벨 디자인이 되는 [더 라스트 가디언]에서 플레이어가 상상해야 하는 부분은 더욱 정교해졌다. 요르다랑 달리 토리코는 그 크기 때문에 이동할 수 없는 구간이 있고, 반대로 토리코 혼자서 이동 가능한 구간이 있다. 토리코의 속성에 맞춰 고안된 퍼즐들라던가 실상 지극히 단순한 조작 체계도 한 몫한다. 플레이어는 이런 다양한 지점들을 끊임없이 생각하며 토리코를 조종해야 한다. [더 라스트 가디언]은 동료 NPC를 위해 배치된 불가능과 가능의 경계를 움직이는 레벨 디자인와 결합하는 실험을 하는 게임이다. 

와중에 [더 라스트 가디언]은 서스펜스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우에다 후미토는 개별 스테이지마다 토리코와 소년을 떼어놓으려고 애를 쓴다. 좋은 호러 게임이 그렇듯이 [더 라스트 가디언]은 위협으로 스스로 들어가도록 플레이어를 유도하고, 거기서 빠져나올 방법을 생각토록 하게 한다. [이코]에서 고안했던 서스펜스 설계를 답습하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몇몇 지점에서 우에다 후미토는 무성 영화만이 가능한 순수한 서스펜스에 도달하는데 성공했다. 음향과 조명, 캐릭터의 동선과 액션을 배치하는 것으로 우에다 후미토는 비디오 게임의 액션이 어떻게 이뤄져야 할지 질문한다.

변함없이 좋은 부분도 있다. 우에다 후미토는 1급 비주얼 아티스트도 꿀리지 않을 자기만의 세계관과 미적 일관성이 있으며, [더 라스트 가디언]에서도 여전하다. 그는 여백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잘 아는 시각 예술가다. 첫 풀 HD 게임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우에다 후미토는 그 드넓은 공간을 자유자재로 늘렸다가 줄인다. 탑 밖을 빠져나와 거대한 절벽과 텅 빈 허공으로 둘러싼 성을 토리코와 함께 보고 있으면 그 원초적인 풍경에 눈물이 더럭 날 정도다. [더 라스트 가디언]은 장대한 프레임을 살릴줄 아는 몇 안되는 게임이라 할 수 있다.

서사는 어떠한가? 후미토 특유의 쓸쓸한 느낌의 전개부터 설명 없이 상상하게끔 만드는 부분은 여전하다. 사실 [이코]랑 크게 다를 게 없는 [더 라스트 가디언]의 서사를 독특하게 만드는 부분도 괴수 장르에서 비롯된다. 우에다 후미토는 로딩 화면에 단서를 던져두었다. 16세기 박물학 서적에서 가져온 이 가상의 생물 일러스트들은, 과학이 막 움트던 시절 가질 수 밖에 없었던 상상과 현실이 뒤섞인 모습을 띄고 있다. [더 라스트 가디언]은 자연의 법칙을 객관적으로 분석할 수 없는 세계가 어떤 공포과 미신을 만들어냈는지, 회상을 통해 보여준다. 이때 마을 사람들의 반응은 공포보다는 체념이 가깝다.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한 시스템에 대한 원망과 체념. 

사실 이 체념은 우에다 후미토 전작을 장악하고 있는 감정이기도 하다. 그는 고립된 공간에 자리잡고 있는 부조리한 세계의 법칙을 개인이 파괴하는 이야기에 계속 끌린다. 그 세계에 속한 사람들은 그 법칙 때문에 고통받으며, 소년들은 그 법칙을 파괴하는 모험을 떠난다. 제물로 바쳐진 이코는 같이 나가기 위해서 기어이 요르다의 어머니인 여왕를 죽여야 했고, 완다는 위험과 파국을 무릎쓰고 부조리하게 죽은 소녀를 살리기 위해 기어이 악마를 부활시켜야만 했다. 하지만 두 작품과 달리 [더 라스트 가디언]은 더 나아간다. 파괴 이후 마무리짓는 두 작품과 달리, [더 라스트 가디언]은 내부의 법칙을 파괴한 그 이후의 삶을 짧게지만 다루고 있다.

이미 [더 라스트 가디언]의 결말은 정해졌다. 토리코와 소년의 우정은 지속될 수 없다. 일련의 모험 끝에 악습을 파괴했더라도, 그들은 두 종족 간의 경계선상에서 헤어져야만 한다. [더 라스트 가디언]의 결말이 그토록 처연한 멜로드라마로 다가온다면, 고립된 공간에서 성립한 피해자-가해자의 우정이 세계의 인습과 화해불능이라는걸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에다 후미토는 부조리한 법칙이 만든 피해자와 가해자를 억지로 화해하게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파국의 카타르시스에 탐닉하지 않지 않는다. 그는 서로의 영역에서 삶을 이어가도록 암시하게 한다. [더 라스트 가디언]이 좀 더 성숙해진 작품이라면, 부조리한 법칙이 만들어낸 한 사회의 상처와 트라우마를 대하는 태도에 있을 것이다.

[더 라스트 가디언]의 단점은, 우에다 후미토 뇌 속에서 이뤄진 정교하고 복잡한 사변들이 매끄럽게 구체화 되지 못하는 지점에 있다. 그는 토리코의 조작에 시뮬레이션의 흔적을 보이지 않기 위해 불편함을 감수하고 과감한 생략을 가했다. 그 결과는 비디오 게임스럽지 않은 불편함과 피곤함을 감수해야 한다. 토리코를 불러와 지시하는 과정은 단순하지만 직관적이지는 않다. 그 불편함을 받아들일 수 있냐, 없냐에 따라 [더 라스트 가디언]에 대한 평은 갈릴 것이다. 그리고 오랜 개발 기간 동안 누적된 소스 코드의 복잡함으로 쾌적하지 못한 플레이라는 점도 아쉽다. 도중에 버벅거리는 부분이라던가 팝인 같은 부분은 긴 개발 끝에 지쳐서 다듬지 못한 부분이 있다고 본다.

[더 라스트 가디언]은 어찌보면 타이밍을 놓친 불운한 게임이다. 이 게임이 예정대로 PS3 시절에 나왔다면, 기술적인 문제는 크게 걸림돌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이와 별개로 효율적이지 않은 명령 체계 역시 게이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하다. 하지만 우에다가 이 게임을 버리지 않고 개새를 깎은 이유도 납득이 되긴 한다. 적어도 [더 라스트 가디언]처럼 과감하게 레벨 디자인과 NPC 동반자, 인간과 비인간 캐릭터 간의 실험을 밀어붙인 게임은 보기 힘들다. [더 라스트 가디언]이 우에다 후미토 최고 걸작으로 꼽히지는 않겠지만,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공치진 않았다는 증거로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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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르 [Elle] (2016)

(강력한 누설이 있습니다.)

아마 크레딧이 지나가자마자 얼굴이 벌개질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파울 페르후번은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당당하게 강간 현장에서 벌어지는 노골적인 소리를 외화면에서 흩뿌린다. 엉뚱하게도 영화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샷은 강간 장면이 아닌 검은 고양이의 정면 응시 샷이다. 때문에 파울 페르후번이 [엘르]에서 취한 시점이 고양이의 시점 아닌가라는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관객이 그 착각에서 혼란스러워하는 동안, 두번째 샷에서 이미 강간은 다 끝난 상태다. 하지만 피해자인 미셸은 울지 않는다. 오히려 덤덤하게 일어나 청소하고 욕조로 들어가 목욕을 한다.단 두-세번째 샷을 통해 파울 페르후번과 [엘르]는 장르 관습에서 완전히 이탈해버린다. 이미 네덜란드 영화계와 할리우드를 자기 방식으로 조교시킨 음탕한 네덜란드 애처가이자 정숙하고 침착한 사디스트인 파울 페르후번은 이번엔 뻔뻔하게도 이자벨 위페르를 내세워 프랑스 영화계를 조교하려고 한다. 

강간 사건이 잠깐 물러난 자리에 이어지는 것은 미셸의 일상이다. 미셸의 일상은 (이자벨 위페르가 [다가오는 것들]에서 편안한 연기해냈던) 프랑스 중년 지식인 캐릭터가 누리던 일상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에릭 로메르의 기적이 일어날 자리엔 강간이 일어났다. 자연히 [엘르]는 완전히 이상한 방향으로 일탈한다. 페르후번은 외부인의 입장에서 프랑스 지식인 사회를 깔깔 비웃으면서 발기발기 찢는다. 남의 아이를 임신한 여자랑 살겠다며 찌질하게 구는 징징거리는 아들, 무례하기 그지 없는 아들의 여친, 안 팔리는 주제에 폭력만 휘두르다 이혼당한 지식인 전 남편, 섹스에 환장한 어머니의 젊은 남친, 낙하산이라고 미셸을 경멸하는 게임 회사 직원... 미셸의 일상은 루이스 부뉴엘과 마르코 페라리의 경박함과 미카엘 하네케의 서늘함을 품고 사정없이 해체된다. 미셸이 가족과 친구들을 불러모아 만찬을 하는 시퀀스에서 날아다니는 위선과 경박함, 부글거리는 성적 에너지는 페르후번이 부뉴엘이 시전했던 풍요로운 부르주아의 식탁을 작살내는 쇼트들을 존경하고 있다는걸 여실히 보여준다.

여기서 미셸이 게임 회사 사장이라는 점은 상당히 중요하다. 출판게에서 일하다가 낙하산으로 업계에 뛰어들었다는 뒷설정은 미셸의 위치를 극명하게 잘 보여준다. 미셸은 전통 지식인 사회에서도 떨어져 있고, 신세대가 주축이 된 게임 업계에서도 한발짝 떨어져있는 아웃사이더다. 전통 지식인 사회와 이혼했지만, 발 붙이고 싶어하는 게임업계와도 사이가 냉랭한 상태에서 강간이 끼어들게 된다. 슬슬 미셸의 캐릭터가 잡히기 시작하는데, 미셸은 강간 사건을 '게임'으로 보고 있다. 미셸은 게임의 NPC를 뛰어넘어 플레이어가 된 뒤, 최종적으로 '프로듀서'가 되고자 한다. 디자이너를 총괄하는 프로듀서.

이때 미셸이 개발하는 게임은 [스틱스: 마스터 오브 섀도우]다. 간과하기 쉽지만, 페르후번은 여기서 중요한 단서를 남겼다. [스틱스: 마스터 오브 섀도우]는 고블린이 주인공인 안티 히어로 잠입 게임이다. 이 게임의 비중은 의외로 크다. 내용이 직접적으로 언급되는건 아니지만 페르후번은 이 게임의 개발 과정과 그에 관련된 소동들을 서브 플롯으로 삽입한다. 심지어 미셸은 게임 모델링을 활용해 만든 (자신을 성적 대상으로 삼은) 포르노 영상을 찾아내기도 한다. 하지만 이미 강간 사건을 겪은 미셸에게는 이런 모욕 따윈 아무것도 아니다. 영상을 만든 엔지니어는 미셸을 성적 대상으로 삼았지만, 미셸은 오히려 그 성적 대상화를 역으로 반격한다. 미셸은 그 영상을 보고 인상을 한 번 찌푸리고는 차분하고 남자의 팬티를 벗겨 성기를 유심하게 관찰한 후 냉정하게 모욕을 준다. 페르후번은 이 서브플롯을 통해 미셸이 강간당하는 여성이 아니라, 강간하는 고블린에 가깝다는걸 명백히 한다.
 
그런데 이 게임의 진상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이 게임의 결말에서 주인공인 복제 고블린은 무도덕한 본체 창조주 오크 마법사를 소멸시키고 본체 스틱스의 정체성을 차지하게 된다. 정체성의 문제라던가 아버지 살해라는 모티프라는 점에서 이 게임의 플롯은 미셸의 과거사나 주변 환경과 묘하게 맞물려 들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대체 '복제'인 미셸은 누구를 죽이려고 하는가? 미셸이 죽이고 싶어하는 원본은, 경건하고 온화한 중산층 기독교인이었다가 무자비한 살인마로 돌변한 아버지다. 미셸 역시 그 죄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내심 불편하게 여기(는 것처럼 보인)다. 강간 사건은 미셸이 안고 있는 불편함을 수면 위로 올려보낸 셈이다.

[엘르]가 이상한 안티 히어로물이라 할 수 있다면, 중후반부 강간범의 정체가 드러난 뒤 미셸이 취하는 행동에서 비롯된다. 미셸 앞집에 사는 강간범 파트리크는 묘하게 미셸의 아버지와 닮아있다. 멀쩡한 중산층 부부의 가장으로 위장하고 있지만, 속은 미셸 그 이상으로 비틀린 범죄자다. 미셸은 파트리크의 비틀린 욕망을 알아차리고 그를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도구로 활용한다. 거센 바람이 부는 날 창문을 닫아달라고 파트리크에게 부탁해 같이 정리하는 미셸의 시퀀스는 사실상 둘의 섹스 시퀀스나 다름없다. 이 장면이 불편하다면 초반부의 강간 시퀀스의 뉘앙스와 행위를 그대로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도무지 정상적인 사고방식은 아니지만, 페르후번과 위페르는 이미 미셸을 욕망에 충실하고 재주가 많은 고블린이라고 정의내렸다. 고블린은 인간의 규율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마음껏 충족할 수 있는 존재다. ("하하하. 당최 알아먹지 못하는구나? 살거나 죽거나... 이제는 더이상 내게 명령할 수 없어.") 무도덕한 지식인에게서 태어난 - [엘르]에서 탄생은 축복이 아니라, 한낱 조롱거리에 불과하다. 조시의 흑인 아이는 정숙한 여성상에 대한 빅 뻐큐에 프랑스 백인 지식인 사회가 두려워하는 악몽이며, 또다른 고블린이다. - 고블린은 우연한 계기로 자신의 뒤틀린 욕망을 인정하게 되고, 중산층의 위선을 차분하게 까발린다. 미셸의 생각을 읽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우리가 미셸의 입장을 따라갈수 있다면 그건 고블린의 내면이 어떻게 설계되어있는지 알아차린 이자벨 위페르의 공이 크다.

영화 후반부, 미셸은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도 병으로 잃는다. 하지만 어머니 유골은 소동으로 제대로 뿌려지지 못한 채 허겁지겁 막을 내리고, 아버지 시체 앞에서 미셸은 대놓고 비웃고 경멸한다. 미셸에게 부모의 죽음은 차라리 본체로부터 해방에 가깝다. 미셸은 무책임한 창조주를 직접 소멸시키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 소멸을 애도하지 않고 경멸하는 것으로 복수를 완수한다. 이 순간 미셸이 책임지고 있는 게임이 동시에 완성되는건 당연하다. 미셸은 게임 완성 축하 파티에서 작가 남편과 게임 업계의 뚜쟁이가 된 뒤, 친구 안느에게 안느의 남편과 바람 피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안티 히어로 고블린은 이렇게 탄생한다. 이 잔칫날의 배경 음악으로 '삶에 대한 욕망'과 '고립시키자'가 나오는 건 고블린과 페르후번의 사악한 유머일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강간범 파트리크다. 파티에서 나온 미셸은 파트리크를 불러내 헤어지자고 선언한다. 페르후번과 위페르는 이 선언을 통해 폭압적인 관계를 완전히 뒤집어버린다. 강간하려고 발악하려는 파트리크를 똑바로 응시하는 미셸의 얼굴 샷은 그 점에서 로라 멀비가 지적했던 시선의 권력 관계를 명백히 의식하고 있다. 미셸은 파트리크에 고개를 숙이지 않음으로써 파트리크를 부끄럽게 만든다. 미셸은 부모를 죽일수는 없었지만, 강간범 파트리크의 존재 이유를 빼앗을수 있었다. ("날 봐라! 스틱스! 내가 네 운명을 선택하는 것을 보라고.") 파트리크는 발악하다가 자멸하고 곧 이어 상황을 모르는 빈센트의 손에 살해된다.

[엘르]의 클라이맥스는 철저한 아이러니다. 어느 누구도 파트리크와 미셸이 이상한 관계를 맺었다는걸 모른다. 빈센트의 살인은 정당방위로 경찰에서 인정한 합법적인 폭력이 될 것이다. 아내인 레베카 역시 범죄자 파트리크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초반부 남성들에게 모욕당한 미셸은 마지막에 게임의 프로듀서로써 성공한다. 그 '게임'은 진짜 '게임'이기도 하고, 강간범과의 파워 게임이기도 한다. 미셸은 파트리크를 죽이면서 법을 비롯한 남성의 장치를 빌리지 않고 빛으로 위장한 "어둠의 주인"이 된다. 미셸이 키우다가 언급 없이 사라진 검은 고양이는 그 게임으로 인도하기 위한 환상이었던 것일까?

이 아이러니로 이뤄진 안티 히어로 극을 실제 여성들이 동의하기는 힘들 것이다. 우리는 많은 여성들이 강간의 공포에 떨며 살아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미셸의 행동은 도무지 현실로 옮길수 있는 종류의 행동이 아니다. 어떤 여성들에게 [엘르]의 미셀은 결국 남성이 ([엘르]의 원작, 각본, 감독 모두 남성이다.) 만들어낸 기벽증으로 가득한 환상 (까놓고 말해 히토미 꺼라 식의)으로 다가올 것이다. 페르후번은 여성들의 연대를 보여주는 것으로 예상된 비판에 대답한다. 미셸은 불명예스럽게 이사가는 레베카를 위로한다. 이때 레베카는 풀이 죽은듯 보여도 이겨낼 기운이 있어보인다. 그리고 남편과 이혼을 결심한 안나랑 미셸이 얘기를 나누면서 앞으로의 미셸의 인생은 어둠 없이 안나랑 즐거울 것이라는 암시를 남긴다. 당신은 이 고블린이 맞이한 결말에 납득할 수 있는가? 이 연대가 정말로 진실하게 느껴지는가? [엘르]는 강력한 에너지로 밀어붙인 뒤, 관객을 회색 영역에 남겨놓는다는 점에서 파울 페르후번다운 영화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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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 러버스 앤 베어 [Two Lovers and a Bear] (2016)

킴 누옌의 [투 러버스 앤 베어]의 도입부는 광활한 설원이다. 두 남녀가 제트스키를 타면서 나아가는 장면에서 설원이 가져다 주는 원초적인 쾌감이 느껴진다. 그 다음 쇼트에서 그들은 얼음을 뚫어 낚시를 한다. 아 이 도입부는, [투 러버스 앤 베어]의 감수성이 얼음에 기반해 있으며 내용과 구조가 어떻게 흘러갈지 암시하고 있다. '부모의 구속력은 지대하다'는 대사는 그들이 부모와 관련된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다는 걸 보여주며, 단단한 얼음을 뚫는 행위는 영화 내내 이어질 두 사람의 사투를 예감케 한다.

그걸 증명하듯이 [투 러버스 앤 베어]는 차가운 영화적 공기 속에서 끊임없는 하강 곡선을 그리는 영화다. 킴 누옌은 벡터의 충돌을 통해 전제를 세운다. 주인공 로만은 남쪽에서 북쪽 알래스카로 도주해왔다. 로만에게 남쪽은 부모로 대표되는 고통이며, 오직 설원에서만 자신의 고통을 삭일 수 있다. 하지만 로만의 연인인 루시는 알래스카는 끊임없는 고통이며 남쪽 이야말로 도주할 수 있는 공간이다. 사랑하는 두 남녀의 벡터는 어긋나 있으며, 이는 영화 내내 끊임없는 충돌과 고통을 불러일으킨다. 섹스는 도무지 '들어가지지' 않고, 로만은 술에 취해 자신을 집 안에 유폐 시킨다.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욕망은 번번히 좌절되며, 떠날 날이 다가올수록 사랑은 어쩔수 없는 하강 곡선을 그린다. 이 고전적인 전제는 [투 러버스 앤 베어]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다.

하지만 [투 러버스 앤 베어]가 이 고전적인 멜로드라마 전제를 풀어내는 방식은 비 전형적인 구석이 있다. [투 러버스 앤 베어]는 차가운 영화적 공기로 성큼성큼 들어가는 두 사람의 사투를 서서히 추상화 한다. 두 연인과 곰에 대한 사변조의 농담은 그렇다 쳐도, 로만과 루시의 눈에만 보이는 불쑥 내습하는 루시 아버지는 영화의 멜로드라마에 또다른 층위를 형성한다. 킴 누옌은 멜로 드라마를 유령, 판타지적 존재와 결합시킨다. 그리고 그것을 통합하는 누옌의 연출은 공간의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전후 현대 영화의 기조와 맞닿아 있다. 

어느 지점에서는 [투 러버스 앤 베어]는 상처받은 연인들의 사랑 얘기가 아닌, 전장에서 살아남은 소년병들의 트라우마를 형상화 하는 영화처럼 보인다. 로만과 루시는 과거에 부모와 지독한 전쟁을 치뤘으며,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전쟁의 후유증을 홀로 감당해야 한다. 상처는 공유되지 않으며, 사랑으로 버티는 것도 두 연인에게는 버겁다. 이 막다른 골목에서 두 연인의 선택은 자살에 가까운 무모한 여정이다.

킴 누옌은 지극히 추상적인 액션이나 무드를 지속시키면서 심리적 불안을 구축한 뒤, 일거에 해소하는 방식으로 쾌감을 구축하기도 한다. 로만이 얼음 틈에 끼어서 탈출하는 신을 보자. 이 신은 서사와 무관하게 길게 찍혀 있기에, 해소되지 않은 불안함을 안고 바라봐야 한다. 그리고 로만이 힘겹게 탈출에 성공했을 때 누옌은 화이트 스트라입스의 'Seven Nation Army'를 설원 화면과 함께 틀어주면서 그 쾌감을 관객과 공유케 한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차지하는 벙커 폭파 장면도 그렇다. 혹한에 유일한 피난처를 부수고 나간다는, 상당히 개연성 없고 답답한 장면이지만, 막상 영화 속에서는 루시의 공포와 로만의 결단에 압도되어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물론 이는 데인 드한과 타티아나 마슬라니라는 훌륭한 두 배우의 호연 때문에 가능한 마법이기도 한다.

[투 러버스 앤 베어]의 모든 장면들이 킴 누옌의 의도대로 통제되는 것은 아니다. 두 연인과 곰에 대한 농담은 문학적 상징과 영상 언어와 충돌해 어색하며, 곰이 등장해 로만과 얘기를 나누는 장면은 생뚱 맞은 유머에도 불구하고 전개하고 잘 엮여 있지 않다. [투 러버스 앤 베어]의 단점은 관념적인 주제 의식이 로맨스가 디디고 있는 현실과 충돌하는 부분에 있다. 누옌은 지속적으로 멜로 드라마의 통속성에서 탈출해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하려고 시도하지만, 아직 그는 많은 시행착오가 필요해 보인다.

하지만 종종 통제를 잃고 관념적으로 흘러가더라도 하더라도 [투 러버스 앤 베어]엔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귀중한 가치가 있다. 캐릭터의 어리석음 마저 받아들이는 성숙함이다. 킴 누옌은 전작 [르벨]처럼 매정한 세상에 상처받고 미숙한 미성년들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한다. 특히 잊기 힘든 엔딩은 더욱 그렇다. 로만과 루시는 처음부터 이뤄질 수 없는 커플이었고, 끝내 살아남지 못했다. 하지만 킴 누옌은 저 멀리 날아가는 헬리콥터와 두 연인이 잠든 얼음 덩어리 쇼트를 통해 로만과 루시의 지난한 사랑과 투쟁이 의미 없지 않았다고 말하며, 그들이 더 이상 고통받지 않길 기원한다. 적어도 이 순간 누옌이 지닌 간절함과 아름다움은 그 누구보다도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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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에드만 [Toni Erdmann] (2016)

마렌 아데의 [토니 에드만]에 대한 정보를 처음 들었을때, 약간의 신랄함을 동반한 유쾌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가 시작했을때 그 예감은 완전히 박살났다. 영화의 첫 샷은 문이다. 금방이라도 열릴것 같은 문은 예상과 달리 빨리 열리지 않았다. 그렇게 초조하게 기다리는 동안 드디어 택배 기사가 나타나고 문이 열리지만, 분장하고 나타난 토니 에드만은 생뚱맞다. 유머는 빗나가고, 리듬과 리액션도 그렇게 활기차지 않다. 빈프리트/토니 에드만은 사람들이 웃길 바라지만 그를 대하는 사람들과 영화를 보는 관객은 무표정하게 그를 응시할 뿐이다. 결국 그는 허겁지겁 유머를 접을수 밖에 없다.

차라리 이 영화의 도입부는 초라하게 몰락한 히어로의 일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제임스 맨골드의 [로건]하고 닮아있다. 빈프리트 몸에 붙어있는 혈압측정기는 그의 육체가 죽음으로 다가가고 있다는걸 보여주고 있으며, 피아노 강습은 짤린데다 부인과는 이혼한지 오래다. 같이 살고 있는 개 역시 죽어가는 중이다. 오히려 어떤 부분에서는 [토니 에드만]은 [로건]보다도 훨씬 매정하다. 빈프리트는 자신이 슬프고 지쳐있다는걸 직시하지 못하고 계속 우스꽝스러운 유머를 던지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간다. [토니 에드만]은 잔인할정도로 평범한 세상에 사는, 어느 누구도 받아주지 않는 늙은 피에로의 분장에서 영화를 시작한다. 그리고 후술하겠지만 이 도입부는 후반부에 등장하는 '히어로의 불가능성'과 연계된다.

[토니 에드만]를 이해하려면, 샷 내 대화와 행동이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지, 그것이 어떤 뉘앙스를 띄며 맥락을 형성하는지 봐야 한다. 먼저 주목해야 하는 대화는 빈프리트와 어머니의 대화다. 죽어가는 개를 안락사시키지 그러냐라는 어머니의 말에 대한 빈프리트의 대답은 웃기기 보다는 날이 서 있다. "양로원에서 안락사 일을 하고 있어요. 하지만 어머니를 안락사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것."이라는 빈프리트의 대답은 블랙 유머적 비꼬기에 가깝다.  대체 왜 빈프리트는 어머니를 그런 가시돋힌 말을 내뱉는 것일까? 어떤 멜로드라마적 사연이 있어서?

아니다. 마렌 아데는 여기서 두 캐릭터의 세대와 그들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를 주목하길 바란다. 그리고 이 영화가 독일 영화라는 것도 주지하길 바라고 있다. 이 부분은 단서가 없으면 독일 바깥 사람들은 파악하기 어려운 문제다. 다행히도 아데가 영화 마지막에 단서를 던져놨기에 놓쳤더라도 그 부분을 본 뒤 이 영화의 도입부를 다시 본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빈프리트 어머니와 빈프리트는 독일의 한 시기를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전후 세대인 빈프리트는 그걸 알고 있다. 그는 어머니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그 세대가 저지른 나치 범죄를 혐오한다. 그 점에서 빈프리트의 대사는 죽음은 당신 생각과 달리 간단히 이뤄지는게 아니지만, 어머니와 빌리를 사랑하니 안락사시키진 않겠다라는 복잡미묘한 선언인 셈이다. 그리고 그 복잡미묘함과 간극이야말로 [토니 에드만]이 영화 내내 구축하고 있는 이상한 리듬을 이해하기 위한 단서다.
 
서로 사랑하지만 어쩔수 없이 배어있는 세대의 결점에 충돌하고 밀려나는 [토니 에드만] 속 가족 관계는 빈프리트와 그의 딸 이네스로 이어진다. 그들이 영화에서 처음 만났을때 빈프리트의 분장이 이네스의 옷에 '묻는다'. 이네스는 아무렇지 않게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얼룩을 지워내려고 애쓴다. 얼룩이 묻고 그걸 닦아내려고 애쓰는 행동은 [토니 에드만] 내에서 자주 나오는 행동이며, 상술한 세대론과 겹쳐 생각해보면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이네스는 아버지의 얼룩과 흔적을 필사적으로 지워내려고 한다. 그에 대답하듯이 이 시퀀스에서 관계의 어색함은 더욱 증폭된다. 아버지는 딸의 깜짝 생일 파티가 있는지 알지도 못한 채 들어왔고, 딸은 이 상황을 의례적인 일이라 생각하고 자신의 일로 도피한다. 빈프리트가 이네스랑 대화를 나누려고 할때 이 불편함과 어색함은 실체화된다. 자신을 일부러 외면하는 딸에게 차라리 가짜 딸을 고용하겠다는 아버지의 블랙 유머적 비판은 딸의 무덤덤한 환영에 막혀버린다. 소통의 시도였던 유머가 통하지 않는 셈이다.

[토니 에드만]이 놀라운 지점은 애완견 빌리의 죽음 시퀀스와 딸을 찾아가는 첫 장면이다. 빈프리트의 슬프고 지쳐있는 감정이 처음으로 구체화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이젠 빈프리트에겐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어머니는 빌리의 죽음을 애도할줄 모르며, 루마니아로 떠나버린 딸은 빌리를 애도할수도 없다. 아내는 이미 타인이 된지 오래다. 오로지 혼자서 애도를 완수해야 하는 것이다. 어둠 속에서 빌리의 무덤을 판 뒤 마당 한 구석에 빈프리트가 쓰러져 있는 샷은 그 점에서 슬프고 두렵다. 이 샷에서 빈프리트는 빌리의 시체랑 닮아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샷이 끝날때까지 그는 일어나지도 않는다. 이 장면만 떼놓고 보면 빈프리트는 빌리를 따라 죽어버린것만 같다. 마렌 아데는 이 시퀀스에서 빈프리트를 정물처럼 다루면서 죽음과 애도, 슬픔의 감정을 한 세트로 묶어서 보여준다.
 
[토니 에드만]은 여기서 장면을 끊고 바로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 있는 이네스가 일하는 직장으로 넘어간다. 아마 어느정도 영화의 언어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당황했을 것이다. 독일과 루마니아가 아무리 EU로 국경을 열었다고 해도, 물리적인 거리를 무시할 정도는 아니다. 그런데도 빈프리트 (나아가 몽타쥬)는 물리적 거리를 무시한 채 집에서 이네스의 직장으로 워프한다. 그가 하는 행동은 더 황당하다. 출근하는 이네스 앞에서 마치 자신이 왔다는걸 시위하듯이 스윽하고 따라다닌다. 하지만 이네스는 몇 번 슬쩍 보고 난 뒤 그냥 재빠르게 가버린다. 이네스는 빈프리트가 왔다는걸 알았지만, 거기서 아는체했다면 자신의 커리어가 작살난다는걸 알기에 그 자리에서 빈프리트를 무시한다. 물리적 거리를 무시하고 딸 앞에 나타난 빈프리트의 동선이 슈퍼히어로적 황당함과 비현실성이 묻어나온다면, 이네스의 무시는 현실의 냉엄함을 드러낸다. 영웅 서사에서 영웅은 소중한 이의 죽음으로 각성한다면 빈프리트는 빌리의 죽음을 통해 유머의 영웅로써 다시 태어난다. 하지만 마렌 아데는 그 탄생마저도 무덤덤한 리액션으로 초라하게 처리한다.

이네스는 대신 자신의 비서 안카를 빈프리트에게 보내 환대한다. 이네스의 이런 행동은 마치 아버지를 직접적으로 접촉하고 싶지 않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이처럼 영화 내내 이네스는 누군가의 대리로써 일하거나 대리를 보내 자신의 의사를 대신하는데, 공교롭게도 이네스의 직업은 기업의 아웃소싱과 관련된 상담역이다. 이네스를 극도로 효율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도 가장 치열하고 냉혹한 최전선에 있는 것이다. 이네스는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을 졸라매고 자신의 가치를 기업에 맞추려고 한다. 빈프리트가 이네스를 떠나는 순간까지 이뤄지는 시퀀스들은 이네스 나아가 자본주의의 리듬이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지 보여주고 있다. 빈프리트의 묵언 시위에 대해 대답하듯이 이네스는 가장 공적인 영역에 가장 사적인 인물인 아버지를 데려가 자신의 리듬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보여주고 과시하려고 한다. 전후 세대의 투쟁과 낙관주의는 현실에 적용되지 않는다는걸 보여주기 위해.

하지만 그런 과시는 좀처럼 이네스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고객은 이네스의 제의에 대해 건성으로 넘겨들으며 이네스는 비위를 맞추기 위해 고객의 부인과 함께 원하지도 않는 쇼핑을 하러 가야 한다. 빈프리트의 블랙 유머는 "가짜 딸을 고용하겠다"라는 사적 영역에서 이뤄진 유머를 공공연연하게 공적 영역에 뿌리고 다니며, 루마니아 사람들은 자신을 향한 독일인들의 시혜적 태도 ("우에카라메센"이 가장 어울리는 단어일것이다.)에 불편함을 숨기지 않는다.

별다른 액션 없이 앉아서 대화하는 샷으로 이뤄지는 [토니 에드만]의 중반부는 가식 아래 벌이는 우스꽝스러운 정치사회적 혈투다. 하나의 샷 속에서도 대화 샷들은 어색하게 빗나가고 행동과 표정 속에선 냉담한 순간과 수직적인 권력 관계가 비져나온다. 그것은 성차이기도 하고 자본주의적 차별이기도 하고 국가간의 관계이기도 하다. 빈프리트의 삶이 죽음과 소멸, 잔인할정도로 평범한 실패의 비극에 갇혀 있다면 이네스의 삶은 효율 중심의 가식적인 관계와 사회적 편견으로 끊임없이 고통받는다. 마렌 아데는 빈프리트의 초라함을 보여줬던 긴 리듬의 샷을 이용해 이네스의 일상을 파헤친다. 그리고 거기서 나치 시절 착취한 뒤 사탕발림이 담긴 독일 자본주의에게 착취당하는 루마니아의 현실부터 시작해 성차별과 신자유주의의 냉엄함을 인물들의 관계 속에서 담아내고 있다.

빈프리트는 이 과정을 보면서 딸이 지금 어떤 위치에 있고 어떤 심경인지 알게 된다. 이네스를 향해 그러고도 인간이 맞냐는 빈프리트의 일갈은 당연하겠지만 신자유주의를 향한 이상주의의 일갈이며 딸에 대한 안타까움이 담겨있는 발언이다. 사실 이네스도 자신이 비인간적이며 행복하지 않다는걸 알고 있다. 지금 행복하냐고 묻는 빈프리트에게 이네스는 대놓고 말한다: "행복이요? 그건 제게 너무 먼 단어에요." 치즈 강판이라는 생일 선물로도 해소되지 않고, 마음껏 푹 잘 수도 없는 이네스의 스트레스는 결국 푹 자다가 전화를 놓치는 사건으로 폭발하고 만다. 아버지의 방문이라는 사건과 클라이언트의 환심 사기라는 사건이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는게 밝혀진 뒤 빈프리트는 물러나기로 한다. 이때 마렌 아데는 빈프리트를 따라다니던 카메라를 이네스에 맞춰놓고 이네스의 심적 고통을 활짝 열어보인다. 이네스는 아버지를 사랑하지만, 자신의 리듬엔 아버지의 방식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것도 깨달아버렸다. 빈프리트도 그 사실을 깨닫고 사라지는 걸 선택한다. 유머의 히어로는 이렇게 패배를 인정하고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까지만 했다면 [토니 에드만]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두 세대 간의 갈등을 그려낸 드라마로 끝났겠지만, 마렌 아데는 이 지점에서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꺾는다. 아버지가 떠난 후 이네스는 아버지를 위해 짐을 싸다가 찧은 발톱을 제거하려다가 옷에 피를 묻힌다. 아버지에 대한 얼룩진 감정을 어떻게든 지우려고 애쓰는 이네스. 그런 이네스 앞에 갑자기 빈프리트는 가발과 틀니를 낀 채 "독일 대사이자 컨설턴트 업무를 하는" 토니 에드만이 되어 이네스와 직장 동료들 앞에 나타난다. 이네스는 반평생 들었던 "시덥잖은" 유머를 신선한 유머인 마냥 받아줘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이 부분에서 [토니 에드만]은 비밀 정체성를 다루는 히어로 영화 구조를 뒤집어 영화를 진행한다. 비밀 정체성을 가진 히어로의 진짜 정체성이 드러나는 히어로 영화랑 달리, [토니 에드만]은 진짜 정체성일때 실패하는 히어로가 비밀 정체성을 착용하고 다시 나타나 판을 뒤엎는다.

[토니 에드만]이 이상한 영화라면, 무수한 롱테이크를 골라 선택해 잘라서 붙인 영화의 편집 방식을 비롯해 영화가 리듬을 구축하고 강조하는 방식이, 내러티브 영화의 관습을 인정하면서도 기이하게 뒤틀고 있다는 점이다. 전반적으로 초라하고 생뚱맞아보이고, 느릿한 페이스로 진행되는 영화지만 하나하나 뜯어보면 동시에 치밀하고 유기적으로 직조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이네스의 회의 장면을 길게 묘사하는 시퀀스가 있다. 토니 에드만이 난입하지 않고 이네스의 진지하고 성실한 태도에 따분함을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이 시퀀스가 영화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는 그 다음 시퀀스들에서 충분히 설명된다. 

마렌 아데는 샷 나아가 개별 시퀀스 속에 등장하는 서사적 장치를 관객들의 머릿속에 각인시키도록 한 뒤, 토니 에드만이 등장한 이후 그 요소를 계속 패러디하고 모방한다. [토니 에드만]이 웃긴 이유는 이전 시퀀스에 등장했던 요소들이 다음 시퀀스에서 기상천외하게 변주되고,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생뚱맞음과 어색함을 모면하려는 인물들의 행동이 더욱 기괴하게 몰아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웃음은 인물의 불가능성으로 대표되는 현실의 벽에 부딪쳐 애매하고 너저분한 회색 지대로 떨어진다. 마렌 아데는 이렇게 유기적으로 직조된 리듬을 마음대로 구부러트리며 인물들을 굴러가게 만든다. 영화가 다 끝나고 난 뒤 시퀀스들을 분석해보면 정말 말도 안되게 황당한 개별 사건들이 개연성 있게 연결되어 있다는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구부러짐을 담당하는 토니 에드만은 어떤 캐릭터인가? 그는 이네스처럼 상담역에 종사하고 있으며 유창하지만 나사 빠진 비지니스 영어를 사용한다. 대놓고 이네스를 패러디한 캐릭터인 셈이다. 거기다 인생에 방귀 쿠션 말고 대안이 있냐는 이네스의 비난에 진짜로 방귀 쿠션으로 등장해 성차별적인 직장 상사를 비웃고, 애완견 빌리의 죽음은 45년 된 애완거북의 죽음으로 패러디된다. 마지막으로 그는 치즈 강판에 간 치즈 가루를 연상케하는 가루를 머리에 흩뿌린다. 그야말로 처음은 비극으로, 두번째는 희극으로 재현되는 셈이다. 전반부의 서사적 장치들이 황당하게 비틀려서 등장하는 동안 이네스의 대응과 행동도 괴상해진다. 정사를 나누던 도중 애인의 정액을 케이크에 묻혀서 먹는다던가 아버지를 마약 파티로 데려가 마약을 하는 모습을 노출하는 과정은 도무지 상식적인 행위라 볼 수 없다. 이네스의 기행 역시 전반부에 등장했던 서사적 요소의 극단적인 패러디라고 보는게 좋을 것이다.

물론 이런 패러디조차도 생뚱맞고 어색하기 그지 없다. 비밀 정체성은 시작하자마자 딸에게 간파당한지 오래고 빈프리트도 이 게임을 딱히 엄격하게 진행할 생각이 없어보인다. 빈프리트가 이네스 집에 숨어들어 이네스의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에서 시작해, 그레이티스트 러브 오브 올 독창회로 끝나는 파트는 그 점에서 영화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어느 정도 구분되었던 토니 에드만과 빈프리트의 정체성이 흐려지면서 빈프리트가 가지고 있는 낙관주의가 마냥 긍정적으로 끝나지 않는다는걸 보여주기 때문이다. 토니 에드만의 활기는 차가운 신자유주의적 해고에 가로막히고 애원과 '유머를 잃지 마세요.'라는 진심어린 충고는 공허한 공수표처럼 남발될 뿐이다. 풀이 죽은 토니 에드만에게 이네스는 당신이 믿는 이상주의가 얼마나 공허한지 아냐고 쏘아붙이지만 금세 눈물을 흘리고 만다. 죽음을 가볍게 다루는 빈프리트의 어머니의 비윤리성과 달리 토니 에드만의 유머와 삶의 지혜는 이네스도 내심 공감하지만 쉽게 성립될 수 없다는걸 알기 때문이다. 마렌 아데는 여기서 다시 인물의 불가능성을 끌어들여 분열된 정체성을 지닌 채 세대 간의 깊은 간극을 받아들여야 하는 피에로의 슬픔을 부각시킨다.

하지만 반전이 일어난다. 쉽게 가라앉지 않은 서운함을 억지로 누른 채 터져나오는 이네스의 그레이티스트 러브 오브 올은 정말로 굉장하다. 마렌 아데는 지나치게 늘어지는 도입부와 불안한 음정, 노골적으로 서운함을 감추지 않는 이네스의 표정에서 얼룩과 간극 속에 서 있는 인물을 그려낸다. 그리고 곡을 진행하면서 감정을 고조시키며 비명처럼 터져나오는 절창 부분에서 곡이 가지고 있던 달콤한 감상주의와 이상주의를 어떻게든 간극을 좁히고 달라지고 싶어하는 인물의 고통이 시너지를 일으켜 우스꽝스러운 비명을 잡아낸다. 행복해보이(지만 이네스를 수족으로 부리는 독일 자본주의의 착취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는)는 루마니아 대가족 앞에서 벌어지는 독일 핵가족 구성원이 벌이는 복잡한 감정의 전투라는 점에서 이 시퀀스는 [토니 에드만]의 웃픈 순간들과 정치사회적 맥락을 집약한 명장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독창이 끝난 뒤 이네스는 냉담한 표정으로 떠나가고 빈프리트는 또다시 실패했다고 자조한다. 하지만 다음 시퀀스에서 이네스는 자신의 생일 파티를 희한한 방식으로 일그러트린다. 토니가 방귀 쿠션으로 성차별적인 구실을 대며 단합을 강요하는 강압적인 대화의 리듬을 일그러트렸다면 이네스는 옷을 입다가 다 벗어버린 뒤, 찾아온 사람들에게 황당한 이유를 대며 게임에 참여하라고 한다. 물론 이 게임은 외부자였던 토니와 달리 마냥 공평한 관계로 이뤄지지 않는다. 비서 안카 같은 경우엔 상사인 이네스의 눈치를 보고 있는게 명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네스는 자신과 상사 게롤트, 안카의 거추장스러운 갑옷을 다 벗겨버리면서 직장 내 관계를 무화시키고 우스꽝스럽게 만들어버린다. 이네스는 토니 에드만의 유머를 받아들여 신자유주의를 그럴싸하게 속인 뒤 벗겨버린다. 그리고 영문도 모른채 우스꽝스러워진 사람들을 보면서 다시 태어난 듯한 해방감을 만끽한다. 와중에 동료인 슈테프나 남친이 이 놀이에 동참하지 않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들은 이네스의 갈망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신자유주의에 매몰되어 있다. 아마 이 시퀀스가 끝난 뒤, 그들은 자연히 이네스랑 멀어졌을 것이다.

이때 털을 뒤집어 쓴 쿠케리가 등장한다. 이 쿠케리는 영화가 끝날때까지 탈을 벗지 않지만 쿠케리의 행동을 보면 그게 누구인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인물들이 이 쿠케리가 누군지 쉽게 알 수 없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층위가 발생한다. 그리고 이걸 받아들이는 인물들의 행동도 흥미롭다. 당혹하면서도 호기심을 가지는 안카와 꽃을 받고 감사를 표하는 이네스, 그리고 쿠케리를 알아차리지 못하다가 놀라는 게롤트의 대조는 이들의 권력 관계를 생각케 한다. 쿠케리가 새해맞이 축제에 등장하는 악귀를 쫓는 불가리아의 탈이라는걸 생각해보면 왜 마렌 아데가 쿠케리를 누드 파티에 불러왔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쿠케리와 홀딱 벗은 이네스는 완벽하게 대조되지만 각자의 방식으로 신자유주의의 우스꽝스러움을 강조하고 만끽한다. 그리고 그 우스꽝스러움이 마무리되려는 순간, 마렌 아데는 쿠케리와 이네스를 바깥으로 내보낸다. 그리고 이네스의 시점 샷으로 쿠케리를 쫓아가면서 쿠케리가 다정하게 아이들과 노는 모습을 본다. 직후 이네스는 쿠케리를 '아빠'라 부르며 포옹한다. 이네스의 응시를 통해 아파트 내에서는 모호했던 쿠케리의 정체가 확연해지는 순간 이네스와 빈프리트는 마침내 얼룩을 묻히지 않고 포옹에 성공한다.

하지만 이 포옹에서 영화는 끝나지 않는다. 몇 번의 행복한 장난 이후, 이네스는 서서히 뒤로 빠지면서 엉거주춤 집으로 돌아간다. 결국 그들은 가면을 써야 짧은 포옹을 나눌수 있으며 그것조차도 냉엄한 현실에 어정쩡하게 끝난다. 이네스에겐 끝나지 않은 생일 파티가 있으며, 빈프리트도 그걸 안다. 그 점에서 이 장면은 완벽한 봉합이라기 보다는 짧은 면회에 가깝다. 하지만 빈프리트는 애써 막지 않는다. 이네스도 애써 머물지 않는다. 이전 시퀀스의 눈물과 실망과 달리 그들은 그렇게 끝날 수 있다는걸 인정하면서 서서히 멀어져간다. 마렌 아데는 빈프리트의 쇠잔한 육신을 다시 꺼내들어 마지막 파트를 장식한다. 기나긴 접촉 시도 끝에 이뤄진 행복한 포옹. 하지만 빈프리트 역시 자신의 어머니처럼 죽음을 향해 다가가고 있으며 이네스의 셔츠에 튄 피는 끝내 깨끗하게 지워지지 않는다. 마렌 아데는 그런 그림자와 얼룩을 무시하지 않고 긍정과 부정을 담아 두 사람의 관계를 그려낸다.

[토니 에드만]의 결말이 빈프리트 어머니의 죽음에서 시작한다는 점은 어찌보면 논리적이다. 마렌 아데는 선언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을 기억하는 세대는 이제 완전히 죽었다. 부녀는 그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다음 차례는 빈프리트일것이다. 하지만 이네스는 여전히 바쁘고 원하던 중국은 가지 못한 채 독일에서 더 멀어진 싱가포르로 간다.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어보인다. 그걸 알듯이 빈프리트는 이네스를 데리고 어두운 창고로 들어가서 어머니 세대가 가지고 있었던 어둠을 반추한다. 그리고 빛으로 가득찬 바깥으로 나온 부녀는 인생에 대한 상투적인 교훈을 나눈다. 상투적이지만 맞는 말이고, 마렌 아데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토니 에드만]의 마지막 놀라움은 그 뒤에 있다. 틀니와 나치 시절 모자를 쓴 이네스의 사진을 찍기 위해 빈프리트는 카메라를 찾겠다고 사라지고, 기다리던 이네스는 틀니와 모자를 벗는다. 그리고 마렌 아데는 빈프리트를 기다리며 골똘히 상념에 잠긴 이네스의 얼굴 샷을 보여주면서 영화를 마무리 짓는다.

몇몇 평자들은 이 결말을 상당히 우울한 통찰을 담고 있다고 지적했다. 두 사람으로 대표되는 세대의 간극이 채워지지 않을 것이며, 부모의 소멸만이 예정된 이네스의 현실은 달라진게 없다고. 궁극적으로 비극으로 끝나는 영화라고. 분명 [토니 에드만]이 도달한 결말은 아무것도 달라진게 없어보인다. 하지만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토니 에드만]의 결말은 단순히 비극으로 환원되지 않는 어떤 회색 지대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네스는 더 이상 전화로 도피하지 않으며, 스스로 틀니와 할머니의 모자를 찾아내 쓰고 빈프리트를 향해 웃어보인다. 일단은 마렌 아데는 두 사람의 포옹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빈프리트가 영화적으로 소멸했을때 (결말 이후 그가 돌아오든 돌아오지 않든 영화는 그걸 보여주지 않기에 소멸했다고 봐야 한다.) 이네스는 그걸 벗는다. 윗 세대의 물건은 분명 자신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겠지만 그것이 이네스의 개성이 될 수 없다. 이네스는 아버지가 그랬듯이 (바더 마인호프로 대표되는 독일 68세대가 과거와의 결별 시도는 극렬하기로 유명했다.) 자신도 자신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는걸 깨닫고 고민한다.

이네스의 고민은 마렌 아데 본인의 고민이기도 한다. 자신과 부모 세대의 간극을 인정한다는 것. 곧 다가올 부모 세대와의 이별을 받아들인다는 것.할머니 세대의 과오를 저지르지 않고, 부모 세대의 유머를 가져오면서도 변화한 현실의 벽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  마렌 아데는 그 질문에서 영화를 멈춰세운다. [토니 에드만]이 성숙한 영화라면 긍정과 부정을 모두 껴안은채 창작자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영화적으로 치열하게 사유한다는 점에 있다. 그렇기에 나는 이 영화와 마렌 아데 감독을 지지할 수 밖에 없다. [토니 에드만]은 어설프고 너저분한, 평범한 관계의 회색성을 포착하며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치열하게 그려내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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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거북 [La tortue rouge / The Red Turtle] (2016)

(누설이 있습니다.)

미카엘 두독 드 위트의 [아버지와 딸]은 그 자체로 걸작이었다. 삶과 죽음, 이별의 순환을 마음 아프게 그려낸 이 단편 애니메이션은 그전까지 조용하게 애니메이션을 만들던 두독 드 위트의 명성을 단숨에 세계적인 위치로 올려준 작품이었다. 그에게 관심을 기울인 사람들 중에는 스튜디오 지브리쪽 사람들도 있었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구애가 여러차례 이어졌지만 이번에 리뷰할 [붉은 거북]이 나오기까지는 14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늦은 나이에 장편 데뷔하게 된 두독 드 위트의 장편은 어떻게 이뤄져 있는가?

두독 드 위트는 그동안 대사가 없는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왔다. 그의 드라마는 지극히 추상적이다. 인물들의 디테일은 최소화되어 있고, 어떤 행위 ([아버지와 딸]에서 가장 중요한 행위는 기다림이었다.)의 반복이나 강조, 변주로 극을 꾸려간다. 그 와중에 불쑥 튀어나오는 이미지가 영화 내내 이어지는 액션을 보조하며 의미를 불어넣는다. 두독 드 위트는 대사를 비롯한 디테일이 영상의 기초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감독이다. 단편에서 이 전략은 매우 성공적이였다. 어차피 짧은 길이에서 복잡한 서사를 다룰수 없다면 최소한으로 줄이는게 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편에서는 이 전략은 항상 성공적일수 없다. 알레고리와 메타포 이외에 채워야하는게 많기 때문이다.

우선 밝혀두자면 [붉은 거북]은 그의 단편에서 그리 멀리 떨어진 장편은 아니다. 캐릭터 설정과 대사가 없다는 점, 서정적인 생로병사에 대한 성찰이라는 주제, 간결한 작화가 그렇다. [붉은 거북]은 두독 드 위트의 단편들처럼 알레고리와 메타포로 서 있는 애니메이션이다. 하지만 달라진 점도 있다. 두독 드 위트가 장편으로 넘어오면서 가장 먼저 달라져야고 생각했던 것은, 풍경의 스케일이였던 것 같다. 기본적으로 소박한 스케일이였던 그의 단편들과 달리 [붉은 거북]은 장편의 자유를 확실히 누리겠다듯이 광활한 하늘과 바다로 대표되는 자연의 스펙터클에서 애니메이션을 꾸려간다. 그 점에서 보자면 [붉은 거북]은 [아버지와 딸]의 해변가와 언덕을 확장시킨 영화라 할 수 있다.

[로빈슨 크루소]식 난파극을 자처하는 [붉은 거북]이 재미있는 점은, 난파 이전 과정을 생략한 채 처음부터 물에 빠져 있는 남자를 보여주며 시작한다는 점이다. 당연하겠지만 두독 드 위트는 그의 이름이 무엇이고, 이전엔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즉 이 남자에게는 그동안의 과거나 뿌리가 없다. 심지어 환영에서도 당연히 등장해야 할 가족이나 친구는 등장하지 않으며, 생뚱맞게 현악단만이 그가 육지하고 연결고리가 있었음을 암시할 뿐이다. 

[붉은 거북]이 감독의 단편처럼 알레고리와 메타포로 세워진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을 생각해보자. 이 사실을 비틀자면, 두독 드 위트는 디테일이 필수적인 공동체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초기 단편 두 개는 지극히 우화적인 액션만을 그렸고, 관계로 시선을 확장한 [아버지와 딸]에서도 딸은 분명 가정을 이뤘지만 딸의 가족은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딸은 아버지라는 원형적인 상징에 매달려 행동을 반복한다. [붉은 거북]의 남자 역시 공동체와의 고리를 끊은 채 바다로 향하다가 지극히 개인적인 장소인 무인도에 표류한다.

[붉은 거북] 초반부는 섬을 나가려는 남자의 시도를 꾸준히 보여준다. 하지만 그 시도는 계속 좌절된다. 전형적인 난파극 전개지만 상술했듯이 이 남자에게 어떠한 과거나 뿌리가 없다는걸 생각해보면 섬 밖을 나가려고 하는 의도는 조금 복잡하다. 이 남자는 가족보다는 막연한 문명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의지가 강해 보인다. 뭔가 자신의 죽음으로 슬퍼할 사람들보다는 그것이 안겨주는 편안함을 먼저 떠올리고 그리워한다고 할까. 그에 답하듯이 두독 드 위트는 남자의 탈출을 방해하는 캐릭터로 붉은 거북을 등장시킨다. 

어쩌면 남자가 무인도에서 탈출하려는 이유는 단순히 다른 사람들이 있는 육지로 돌아가려는게 아닌, 자연인 무인도에 정착을 거부하려는 제스처로 읽어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애니가 제시하는 변곡점은 그래서 흥미롭다. 남자는 자신을 섬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는 존재가 붉은 거북이라는걸 알게 된 뒤 우연히 해변가로 온 붉은 거북을 죽인다. 그리고 후회하던 와중 붉은 거북이 여성으로 변한걸 알게 된다.

[붉은 거북]의 흥미로운 부분은 살해와 죽음의 모티브다. 첫번째로 살해와 죽음 모티브가 행해지는 이 시퀀스에서 남자의 동기를 이해하긴 어렵진 않다. 섬 밖으로 나가려는 시도가 좌절해 분풀이했다는게 선명히 명시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체 왜 살해당한 붉은 거북은 인간 여성으로 변하는가? 이는 소통의 벽에 대한 붉은 거북의 답이라 생각한다. 붉은 거북과 남자는 '다른 종'이다. 그렇기에 두 존재는 통하지 않고, 결국 소통의 시도는 파국을 맞이한다. 하지만 남자는 문득 후회하고, 그 후회에 답하듯이 판타지적 전환을 불러일으킨다. 두독 드 위트는 소통의 파국이 결국 타자였기에 때문에 일어났으며, 그에 대한 답은 각자가 지닌 간극을 줄이는 것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로맨틱하지만 동시에 주체가 완전히 동화되지 않은 해결책이라는 점에서 [붉은 거북]은 어떤 선을 그어두고 있는데, 이는 결말의 정서하고도 연결된다고 본다.

여자와 남자가 아이를 낳으면서 붉은 거북은 가족의 이야기로 나아간다. 이 부분부터 남자는 문명과 육지에 대한 미련은 없는 모습을 보인다. 관계가 형성되면서 문명과 땅은 남자에게 머나먼 무언가로 다가온다. 와중에 아들은 남자가 갔던 길을 반복한다. 남자가 빠진 절벽 아래 바다에 떨어져 빠져나오는 장면은 두말할것도 없이 아버지의 길을 따르는 아들의 모습이다. 재미있는 것은 아들이 성장하는 과정을 그림에도 부부가 늙는 과정을 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들은 애니의 3분의 2가 흘렀음에도 젊은 시절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심지어 아들이 장성한 성인이 됬을때에도 여자는 물론이고 남자 역시 약간의 시간만 흐른 것처럼 보인다.

여기다 스포일러가 되는걸 각오하고 적자면, 이 순간 두독 드 위트는 아들이 섬을 떠나는 계기를 준비한다. 두독 드 위트는 바다에서 건너온 유리병에 아들이 호기심을 보이는 것에서 아들과 아버지, 문명 간의 고리를 마련한다. 시간이 지나도 부서지지 않는 문명의 부산물에서 아들은 매혹을 느낀다. 그 매혹이 실체화되는 계기는 또 파괴와 죽음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두독 드 위트는 이 시퀀스에서 무수히 쓰러진 나무들을 보여주면서 파괴된 세계를 형상화한다. 이 이미지의 강렬함 때문에 우리는 아들이 소리를 지르며 남자와 여자를 찾아다니는걸 보는 동안 그들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함에 빠져든다. 다행히도 기우로 밝혀지만, 남자와 여자가 성치않은 몸으로 나타나는 장면은 분명 죽음의 기운이 묻어나온다. 아들은 이 사건을 통해 이 섬이 아닌, 저 너머 문명만이 자신을 보호해줄거라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 해일이 밀려오는 장면에서 3.11 도호쿠 대지진을 떠올릴수도 있겠지만, 이 역시 3.11이 다뤄야 할 죽음과 공동체의 붕괴가 다뤄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간접적인 연결에 그쳐야 할듯 하다.

아들이 이별을 준비하게 되는 첫 징후는 다시 바다 속 거북 무리를 만나면서 이뤄진다. 자연을 연상케하는 붉은 거북과 문명을 연상케하는 계단이 아들 앞에 나타나는 환영 장면은 작중 상징을 함축한 시적 표현이라 쳐도, 아들이 떠나는 날 남자와 여자가 마치 구조 신호를 보내듯이 연기를 피우는 샷은 좀 이상하다. 정작 아들은 배를 타고 사라지지 않고, 헤엄쳐 붉은 거북들과 함께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샷 연결만 보자면 부부가 준비한 신호는 아들을 데려갈 붉은 거북을 위해 준비된 것처럼 보인다.

두독 드 위트는 유리병을 제외한 문명적 요소가 이 섬에 나타나는걸 거부하고 있다. 아들을 문명으로 데려갈 존재 역시 인간이 아니라 자연의 대변인인 거북이 데려가게 만든다. 하지만 남자와 여자는 아들을 따라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미 그들은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보면 땅이 아닌 하늘에서 이뤄지는 환상 시퀀스로 처리된 점도 의미심장하다. 붉은 거북에서 인간이 된 여자가 허공에서 정을 나누는 순간 남자는 얼마 안 되는 문명과의 연결고리가 사라지고 자연과 동화된다. [붉은 거북]은 두독 드 위트의 알레고리와 메타포가 개인과 자연에서 비롯된 걸 잘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 그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원형의 이미지에서 자기 세계를 구축한다.

아들이 떠나면서 [붉은 거북]은 다시 죽음의 이미지를 불러온다. 아들이 떠난 이후 부부는 갑자기 늙기 시작한다. 당연한 순리겠지만 장성한 아이가 자기 세상을 찾아 부부를 떠나는 순간, 부부에게 남은건 노화와 소멸 뿐이다. 두독 드 위트는 이런 세상사의 진리를 노화 이미지의 압축과 대조로 정리해낸다. 하지만 어느 정도 정정한 여자와 달리 남자는 먼저 죽는다. 두독 드 위트는 여자가 죽은 남자를 놔두고 다시 붉은 거북이 되어 흐느끼며 바다로 돌아가는 걸로 애니메이션을 마무리짓는다. 붉은 거북에서 인간이 되었지만, 결국 최후엔 붉은 거북이 되는 이 구조를 통해 두독 드 위트는 여자가 온전히 인간이 된게 아니라는걸 암시한다. 

여자의 변신은 차라리 인간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했지만 결국엔 자신의 본질을 받아들이고 쓸쓸히 떠나가는 모습에 가깝다. 간극을 줄이려고 노력했지만 영원히 좁힐수 없는 간극이 있었으며, 결국엔 그걸 최후에 인정해야 한다고 두독 드 위트는 생각하는 것일까? 하지만 두독 드 위트는 애도를 담은 붉은 거북의 눈물을 통해 그런 간극을 좁히지 못했음에도 무위는 아니였다고 말한다. 그 점에서 [붉은 거북]은 원형적인 가족 관계에서 출발해 이별과 소멸을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아버지와 딸]의 장편 리메이크이기도 하다.

[붉은 거북]은, 단편에서 장편으로 그럴싸하게 넘어오는데 성공했지만 아직 채워야 할 빈 칸이 많아 보이는 애니메이션이다. [붉은 거북]은 움직임과 스케일, 이미지의 원초적인 매력에 대한 두독 드 위트만의 개성을 장편 애니메이션에 이식하는데 성공했지만 알레고리와 메타포로 이뤄진 단순한 서사는 장편에 완벽하게 들어맞는다고 보기엔 힘들다. 지나치게 단선적인 구조라고 할까. 짧은 러닝타임인데도 리듬이 단조로운 점도 아쉬움을 더한다. 알레고리와 메타포 자체가 원형적인 만큼 고루한 서사의 반복이라고 비판을 가할 구석도 있다. 

하지만 [붉은 거북]은 잃은것보다는 얻은게 많은 애니메이션이다. 특히 후반부 같은 경우엔 두독 드 위트 특유의 서정적인 표현을 통해 자연과 문명의 대조, 우리가 늘상 겪어야 하는 이별의 의미를 잘 잡아내고 있다. [붉은 거북]은 그 점에서 데뷔작으로써는 나쁘지 않은 출발이다. 두독 드 위트가 자신의 리듬감을 어떻게 발전시키느냐에 따라 그의 커리어가 결정될듯 하다. 아니면 그냥 단편 작업에서 만족할수도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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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빙 [Loving]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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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3 - [Deeper Into Movie/리뷰] - 미드나잇 스페셜 [Midnight Special] (2016)

"나 임신했어." 고요한 어둠 속 여자의 얼굴에 이 대사가 깔리면서 제프 니콜스의 [러빙]은 시작한다. [러빙]이 흥미로운 점은 이미 두 사람의 관계가 어느 정도 완성된 상태에서 시작한다는 점이다. 그러니깐 시작 부분이 없이 처음부터 전개 단계에 들어선다고 할까. 두 사람이 어떻게 사랑에 빠졌는지 그런 이야기들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니콜스는 생각한다. 아마 그들은 아이스크림 트럭에서 아이스크림을 사먹다가 사랑에 빠졌을수도 있고, 동네 학교에서 친해졌을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은 이미 사랑에 빠져있고, 변치 않을 것이다.

제프 니콜스는 러빙 부부가 가진 사랑의 견고함의 증거로 임신을 제시하면서, 관객이 처음부터 두 사람의 관계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길 원한다. 니콜스의 의도에 화답하듯이 다소 어색하게 웃는 남자의 얼굴과 말이 나온다. "그거 잘 됐네." 도래한 사건과 사건에 대한 긍정, 조엘 에저튼과 루스 네가의 표정과 간단한 샷/리버스 샷, 짧은 대사를 통해 [러빙]은 시작하자마자 평범하지만 중요한 변곡점을 그려낸다. 그들은 어둠 속 고요에 있지만, 기쁨의 순간을 맞이했다.

어떤 평자들은 이 영화의 도입부가 니콜라스 스파크 소설이나 다름없다는걸 인정하자고 했는데 절반은 맞는 말이다. [러빙]은 일상의 통속성을 영화적이지 않다고 내치지 않고, 그걸 끌어안으면서도 새로운 각도로 보여주려고 하는 영화기 때문이다. 때문에 [러빙]에서 식사 장면이라던가 가족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평범한 장면들의 비중이 높은 것은 당연하다. 러빙 부부를 불멸로 만들어 준 [라이프] 지의 사진을 찍는 그레이 빌렛이 러빙 가족을 방문하는 시퀀스는 일상의 통속성에서 아름다움을 꺼내고자 하는 니콜스의 관점이 강하게 반영된 장면이라 할 수 있다. 빌렛은 자신이 겪었던 비일상적인 사건들을 아이들과 러빙 부부에게 들려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평범한 일상의 순간에서 잠깐의 틈을 빌어 특별한 순간을 잡아낸다. 고요하지만 분명하게 끓어오르는 감정의 순간을 잡아내는 이 시퀀스는, 오히려 사람들이 흔하게 생각하는 통속성의 개념이 얼마나 게으른지 증명하고 있다. 

그렇게 자동차 경주 장면, 미장이 일을 하는 리처드의 일상, 밀드레드 가족과 함께 즐겁게 식사를 하는 리처드의 장면이 지나가고 [러빙]은 두번째 변곡점에 들어선다. 공터에서, 리처드는 밀드레드를 데려다 놓고 여기다 당신, 나아가 우리들의 위한 집을 지을거라고 말한다. 이때 니콜스의 카메라는 버지니아 캐롤라인 카운티의 드넓은 땅을 보여준다. 땅에서 비롯된 잉태에 대해 그 잉태에 걸맞는 기둥과 벽돌을 쌓겠다는 다짐으로 화답하는 것이다. 니콜스의 영화들은 한 개인이 존 포드에서 기원한 "땅과 거기에 뿌리박은 공동체에 물리적으로 정박"하는 샷에 도달하고자 했으며 [러빙]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러빙]의 도입부에는 의미심장한 샷이 있다. 자동차 경주를 즐겁게 관람하는 리처드와 밀드레드 부부를 바라보는 익명의 청년들을 담은 샷이다. 이들은 익명적 존재로 머물지만 그렇기에 이 샷은 어딘가 불길함을 안겨준다. 러빙 부부는 그들을 인식하지 못하지만, 그 백인 집단의 응시가 절대로 축복이나 인정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러빙 부부가 그들의 관계를 공적으로 인정받으러 워싱턴 D.C.에 갔다온 뒤 일이 터지고 만다. 버지니아 주가 연방 정부는 인정해도 우리 주는 인정하지 못한다며 그들의 관계를 훼방놓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러빙 부부는 1950년대 미국 남부에서 금기시되었던 흑백 커플이기 때문이다.

이 간단한 사실에서 비롯된 차별에서, [러빙]은 행복한 부부의 이야기에서 집으로 대표되는 행복이 이 땅 위에서 뿌리박기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한 화두로 넘어간다. 만약 당신이 [로건]을 거쳐 이 영화로 왔거나 그 반대라면 [러빙]을 [로건]에 등장하는 먼슨 부부의 프리퀄이라 생각할수도 있을 것이다. 두 영화에서 집은 언제나 파괴될 위기에 놓여있으며 어른인 부부는 힘겹게 그 집을 지키거나 돌아가려고 한다. 결정적으로 니콜스 역시 맨골드처럼 도회적 요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작중에서 밀드레드가 버지니아 주 정부랑 싸우기로 결심한 계기가 지극히 도회적인 자동차와 콘크리트라는 위협에서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떠올려보라.

제프 니콜스가 이 실화를 영화화하는 프로젝트를 수락한 이유는, 남부 백인 지식인으로써 부채 의식과 더불어 그만의 관심사를 풀어낼 기회라 생각했던 것은 분명하다. 지금까지 그의 영화에서 가족은 항상 불안 위에 서 있으면서도 신뢰와 사랑으로 헤쳐나가는 과정을 그렸다. 하지만 이전까지 불안의 근원이 모호하게 설정되었다면 (코스믹 호러였던 [테이크 셸터], 장르화된 메타포로 다뤄졌던 [머드]와 [미드나잇 스페셜]) [러빙]은 그 불안이 어디서 오는가를 응시하고 그려내는 영화다. 

[러빙]에 땅에 정착하려는 부부를 거부하는 것은 부당한 공권력이며, 나아가 익명의 시선에 숨어있는 차별이다. [러빙]이 현명한 부분은, 그런 일상을 엄습하는 차별을 형상화하는데 멜로드라마틱한 묘사를 배제하고 독특한 방식으로 구체화된다는 점이 있다. [러빙]에서 이뤄지는 인종 차별은 마치 잡히지 않는 기체 또는 공기처럼 그려진다. 러빙 부부는 다른 인종차별 영화에 나오는 피해자들처럼 극단적인 폭력이나 수난은 당하지 않는다. 밀드레드가 소송을 걸기로 마음 먹은 뒤, 인터뷰에서 '저희를 비난하는 분들도 많지만'이라고 언급하긴 하지만 [러빙]은 그 비난하는 얼굴들을 직접적으로 등장시키지 않는다. 그저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무표정한 익명의 사람들의 응시 샷만이 그 자리를 차지할 뿐이다. 러빙 부부가 사랑을 나눌때에도, 평범한 일상을 그릴때에도 그 익명의 응시 샷들은 갑작스럽지만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상기시킨다. [러빙]에서 무표정한 응시 샷들은 [테이크 셸터]의 불길한 멸망의 징조 샷처럼 어떤 영화적 공기다.

이 기체로써 응시 샷들은 러빙 부부의 일상에 침입하지 않지만, 분명히 위협적이다. 그것은 백인 청년들이나 카운티 경찰처럼 경멸을 담은 응시기도 하며, 임신한 밀드레드의 배를 바라보는 흑인 점원처럼 '앞날이 걱정된다'라는 식의 체념의 응시기도 하다. 그리고 이렇게 모여진 기체로써 응시 샷들은 버지니아 주 정부로 대표되는 공권력을 통해 악의적으로 실체화된다. [러빙]이 관객을 눈물짓게 만든다면 작위적이지만 무서운 폭력 앞에 단단한 개인들이 힘없이 수그리는 순간을 통렬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러빙 부부가 버지니아 주 법정에서 고개를 수그리고 추방 명령을 언도받을때 니콜스는 흰색으로 이뤄진 빛과 색감을 강조해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백인 중심주의/차별이 그때 얼마나 당연하게 여겨졌던 '공기'였던지, 그 공기로써 악의가 쉽게 사라지는 성질의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니콜스는 인물들의 불가능성이 사건이 아닌 어떤 공기에 짓눌려 나타는 것이라는걸 잘 알고 있다.

[러빙]은 그 기체처럼 그려지는 차별을 그리면서, 거기에도 상대적인 격차가 있다는 점도 명시한다. 이 격차는 백인인 리처드와 흑인인 밀드레드가 겪는 수난의 강도에서 먼저 제시된다. 니콜스는 같이 차별받는 두 사람이 같은 시간 속에서 어떤 액션과 제스처를 취하고 있는지 대조하면서 격차를 제시한다. 리처드는 얼마 안 있어 환한 바깥에 서게 되지만, 밀드레드는 감옥 구석에 웅크려서 언제 올지 모르는 해방을 기다려야만 한다. 그리고 니콜스는 그 상대적인 격차 속에서 백인이 겪어야 하는건, 일종의 훈육이라고 말한다. 직후 경관이 리처드를 불러놓고 "너같은 무지렁이는 모르겠지. 울새는 울새끼리, 종달새는 종달새끼리 살아야 한다는 건."라고 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때 그의 표정과 몸짓은 마치 법칙을 모르며 까부는 철없는 아이를 혼내는 어른의 모습이다. 이 훈육의 제스쳐야말로, 니콜스가 생각하는 차별의 작동방식이라 할 수 있다.

노동자며 사회가 제공하는 기초 교육만 받았던게 분명한 리처드와 밀드레드는 차별 구조를 객관적으로 인식할 견식은 가지지 않았다. 러빙 부부는 차별에 본능적인 부당함을 느끼면서도 그걸 저항할 방법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다. 소수자 커뮤니티에 확고하게 뿌리박은 밀드레드랑 달리, 리처드의 상황은 훨씬 복잡하다. 리처드는 그 커뮤니티가 겪는 차별의 부차적인 존재에 가깝다. 설정상 리처드는 밀드레드와 같은 흑인들과 같이 살았으며, 그의 아버지 역시 흑인 밑에서 일을 하면서 한번도 그들을 혐오하지 않았다. 리처드의 아버지는 작중에서 등장하지 않지만, 우리는 리처드가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일을 물러받았을거라는 추측은 할 수 있다. 그렇게 리처드가 믿었던 당연하다고 생각한 가치관이 흔들리는 순간, 상술한 기체로써 위협의 샷들이 리처드의 불안감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영화에서 리처드의 불안이 드러나는 시퀀스가 몇 군데 있다. 먼저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밀드레드랑 같이 친구의 도움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시퀀스를 보자. 이 시퀀스를 찍으면서 니콜스는 [러빙]보다 먼저 찍은 [미드나잇 스페셜]을 의식했던게 분명하다. 한밤중 도로라는 시공간 설정과 조심스럽고 신중한 배우의 연기, 자동차라는 수단이 그렇기도 하지만 이 장면엔 [미드나잇 스페셜]에서 언제 들통날까봐 두려워하는 로이 일행의 불안함이 그대로 옮겨와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조엘 에저튼도 그대로 옮겨왔다.) 두번째는 소송 때문에 대중에 노출된 이후로 불안에 떨며 두려워하다가 해코지한다고 쫓아온다고 착각한 채 미친듯이 돌아오는 리처드의 귀갓길이다. 니콜스의 영화에 익숙한 관객들이라면 이 시퀀스에서 보여지는 긴장감이 [테이크 쉘터]와 [머드], [미드나잇 스페셜]에서 비롯된 것이라는걸 알 수 있다. 기체/공기로써 불안감이 남성 주체에게 들이닥치는 순간, 남성은 자신이 딛고 있는 땅이 무너질 공포에 휩싸인다. 제프 니콜스는 그 명제에 관심을 가지고 잘 그려내는 감독이다. 

[러빙]은 그럼에도 리처드가 차별에 싸우기로 마음먹은 밀드레드처럼 위대해질수 있었던 이유를, 기체/공기로써 내습하는 불안과 공포를 감수하면서도 쉬운 길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리처드의 흑인 친구가 답을 내놓지 않았는가. 리처드가 밀드레드랑 헤어졌다면 리처드는 차별에서 벗어날 수 있다. 리처드는 그 말에 쉽게 반박하지 못하지만, 그는 돌아와서 밀드레드에게 "나는 당신을 지켜줄수 있어."라고 말한다. 헤어진다는게 쉬운 답이라는걸 알면서도, 그 구조를 전문적으로 분석할 두뇌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그는 포기하지 못한다. 그저 가장 단순한 말과 행위을 되뇌이면서 자신의 불안감을 달래며 밀드레드와 함께 나아가고자 한다. 그 장면이 아름답고 감동적이라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하고 아름다운 행위와 접촉을 각인시키고 불안과 공포를 이겨내게 만들기 때문이다.

영화의 후반부는 그 단순하고 아름다운 행위를 방해하는 기체로써 차별을 명징하고 물리적인 '행동'으로 반대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부부를 도와주는 변호사 필 허시콥의 첫 등장 샷이 활기차게 움직이는 발과 다리라는 점은 흥미롭다. 물리적으로 걷는 샷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 변호사가 (버지니아 주 변호사와 달리) 러빙 부부와 같이 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필과 버니 코헨은 성공하고 싶다는 야심이 넘치지만, 분명한 선의로 갑갑했던 상황을 풀어낼 수 있는 믿음을 보여준다. 이들은 그레이처럼 러빙 부부에게 없었던 객관적으로 문제을 분석할줄 아는 지성으로 부부와 함께 그걸 넘어설 방법을 함께 고민한다.

하지만 [러빙]은 그들에게 과한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대법원에서 최종 변론을 펼치는 감동의 순간. 니콜스는 러빙 부부를 법정에 참석시키지 않고, 변호사에게도 두 샷 정도만 할애한다. 그리고 교차 편집으로 두 샷을 평온한 러빙 부부의 일상 위에 사운드 몽타주로 겹친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다는 소망. 접촉의 아름다움.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는 행위의 숭고함. 법정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끌어올 수 있었으면서도 니콜스는 단호히 일상으로 향한다. 프랭크 카프라와 존 포드를 위시한 미국 영화의 대가들이 그렇게 믿었던 가치관이 무엇인지 말한다. 그 단순한 사랑을 부당하게 탄압하는 공기에 저항하고 같이 걷겠다고. 그렇게 말하면서 [러빙]은 법정 영화로써 안티 클라이맥스적 모양새임에도 강력한 울림을 안겨준다.

그리고 마지막은 다시 응시다. 마지막으로 대법관들에게 할 말이 있냐고 물어보는 변호사 듀오에게 리처드는 잠깐 먼 곳을 응시한다. 대체 그는 뭘 응시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 다음 대답과 눈빛이 모든 걸 대답하고 있다. "나는 내 아내를 사랑한다고 전해줘요." 리처드의 응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땅의 리듬과 단순한 방식을 믿으며 기체로써 불안과 차별을 이겨내고자 하는 의지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영화는 그들이 마침내 집을 짓는데서 마무리 짓는다. 비록 마지막은 짧았지만 그저 사랑하는 것 밖에 할 수 없었고, 그 사랑을 드러내는 것조차도 쑥스러워하고 침묵했던 사람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사랑은 영원한 무언가가 된다.

그 점에서 버지니아 주 정부가 후레자식을 만든 죄를 범했다고 러빙 부부를 비난하는 순간 패배는 정해졌다. 그들의 성명은 지금까지 쌓여온 땅의 리듬 뿐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리듬 나아가 영화를 이루는 샷과 몽타쥬의 연쇄와 리듬을 부정하는 짓이기 때문이다. 니콜스에게 땅의 리듬은 영화적 리듬이라는걸 생각해보면 이 언급은 의도적이다. 이미 니콜스는 리처드와 밀드레드가 그런 울타리 없는 땅 위에서 자신만의 리듬을 이어오며 대부분의 관객들이 소망하는 평범하지만 아름다운 순간을 샷과 몽타주의 연쇄로 쌓아오는걸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제프 니콜스는 [러빙]을 통해 지금 이 시대, 나아가 미래 세대를 위해 믿음을 가져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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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손자 베스트 [Great Patrioteers] (2016)

[우리 손자 베스트]가 처음 공개되었을때, 이 영화에 대한 반응은 소수의 호평 사이에 대다수의 거부감으로 나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는 정치적으로 불공정한 사람들의 패악질을 주인공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개빻은 한남"인 어버이연합과 일베 이용자를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불러일으켰으며, 그 결과는 흥행 실패였다.

하지만 [우리 손자 베스트]가 정녕 그렇게 단순하게 내쳐야 하는 영화인가? 이 영화에 대한 비판들을 읽으면서 어딘가 핀트가 어긋나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현실을 반영했다고, 자동적으로 훌륭한 영화가 될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다. 그런 믿음은 루카치의 순진한 믿음이나 다름없기도 하니깐. 하지만 [우리 손자 베스트]가 놀라운 점은 그동안 [잉투기]나 [불청객]처럼 디씨 문화권에 있는 영화들이 안전하게 섭취할 수 있도록 제거되었던 불경함과 천박함을 (그게 잘못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안고 돌파하려는 정치 영화를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그런 돌파가 성공적이였나는 비판은 가할 수 있겠지만, [우리 손자 베스트]가 돌파한 길은 어느 누구도 가지 않았던 영화다.

초반부에서 모두가 혐오를 표한 장면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교환이 피씨방에 들려 [리그 오브 레전드]를 플레이하다가 옆자리에서 백남기 시위 영상을 보는 남자를 발견하고, [리그 오브 레전드]의 김상현 성우 목소리와 합성한 결과물을 화면 위에 크게 틀어놓는 장면 말이다. 나 역시 이 장면을 보면서 불편하기 그지 없었다. 다른 평론가들도 지적했지만 이 장면은 게임의 유희가 현실의 무거움을 희화화시켰기 때문이다. 디제시스 바깥에 덧붙여진 김상현 성우의 목소리는 디제시스 안 영상에 담긴 현실의 폭력성을 무화시키고 현실의 시공간을 [리그 오브 레전드]의 소환사의 협곡과 같은 하나의 가상으로 만들어버린다. 당연히 정상적인 가치를 지닌 사람이라면 혐오감을 표출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이 장면이 없었다면 [우리 손자 베스트]가 지금과 같은 강력함을 지닐수 있었을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이 장면이 의미가 있는 이유는 [우리 손자 베스트]가 강력한 주관적인 세계로 진입한다는 의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 주관의 세계는 민주화를 모욕으로 사용하는 일베/디씨의 세계기도 하며, 어버이연합의 세계기도 하다. 포챈이나 디씨, 2채널로 대표되는 이 세계는 유희의 감각으로 모든 심각한 사건을 일그러트리고  자신의 왜곡된 신념에 따라 이미지를 조작하고 퍼트린다. 합필갤과 무수히 널려있는 노알라 짤과 고인 모독적인 짤들을 떠올려보라. 그 짤들은 기본적으로 '조롱'과 '유희'를 무장하고, 사회가 합의한 가치를 훼손하면서 현실의 가치를 흔드려고 한다. [우리 손자 베스트]는 그런 짤들이 가지고 있는 '클로즈 업의 폭력성'을 차용해 첫 시퀀스를 구성한다. [우리 손자 베스트]는 지아장커의 [세계]의 가짜 랜드마크 공원처럼 왜곡된 시뮬라크르로 넘쳐나는 세계다.

그렇기에 [우리 손자 베스트]는 자신만만한 합성 몽타쥬를 지난 이후로는 클로즈 업 대신 풀 샷을 쓰면서 그들의 진짜 정체를 파악하기 시작한다. [우리 손자 베스트]가 내세우는 문제의 핵심은 바로 '발기불능'이다.  먼저 교환을 살펴보자. 그는 섹스에 환장하지만 정작 제대로 섹스를 하지 못한다. 야동이 백그라운드로 깔리면서 여성기 짤을 찾아 합성하는 장면이라던가 잠자고 있는 여동생의 팬티를 찍어 올린다던가, 우연히 만난 여자랑 섹스를 하다가 야동 신음 소리를 흉내내는 장면에서 감독은 교환의 세계가 열화복제된 시뮬라크르로 가득차 있으며, 그에게 '섹스'와 '오르가즘'은 타인과 절대로 함께 할 수 없고 오로지 차용하고 왜곡해야만 누릴 수 있는 행위라는 걸 보여준다.

교환이 어머니가 다른 남자랑 섹스하는 장면을 훔쳐본 뒤, 근친상간적인 상상을 하는 장면은 불쾌하지만 문제의식의 핵심을 건드리고 있다. 교환은 어머니의 욕망 이미지를 왜곡해 자신을 그 위치에 '배치'하는 것으로 왜곡된 성욕을 충족시킨다. 김상현 성우의 목소리가 백남기 시위 장면에 덧붙여지면서 타인의 죽음을 협곡의 전투로 만든것처럼 교환은 타인의 섹스 장면에 자신을 '편집'해 집어넣는다. 이 과정에서 어머니의 욕망은 교환에게 아무런 상관이 없어진다. 그 장면에 어머니가 아니라 모르는 여자와 아버지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교환 자신의 '자위'다.

이렇기에 교환이 그 왜곡된 편집과 이미지에서 벗어나 실제적인 행위로 넘어가면 초라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우선 그는 테러를 결심하면서도 먼저 온 사람에게 선수치기를 당하며, 그나마 행한 납치 역시 후술하겠지만 우스꽝스럽게 끝난다. 인간적인 교류를 할 수 있는 상대 티파니는 전화 너머 영어를 쓰며, 만나는 것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당연히 그는 티파니를 찾아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는 "한남충"이기에 자신보다 약한 박카스 할머니에게 욕과 폭력을 휘두르는 것 밖에 못하기 때문이다. 그가 숙희에게 화를 낸 이유도, 약자에 대한 본능적 혐오과 더불어 자신의 자위라는 마지막 보루를 숙희가 마음대로 침입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친절하게도 감독은 벌거벗은채 성기만을 가린 교환을 찍은 뒤 킬킬거리며 사라지는 여성과 교환이 자기 성기를 빨려는 행위를 통해 교환의 발기불능과 초라한 남근을 강조한다.

교환이 정수에게 끌리는 이유도 정수가 교환과 달리 실제적인 폭력을 휘두를줄 아는 틀딱 어버이 연합이기 때문이다. 정수가 교환의 카메라 렌즈를 부러트리는 장면은 분명한 남근의 메타포다. 즉 교환은 자신의 남근을 부러트린 정수에게 발기 가능성과 자신의 수컷성을 회복할 롤모델을 발견한 것이다. 이런 정수의 모습은 교환의 파탄난 가족을 대체할 강력한 가부장상이기도 하다. 교환의 아버지가 운동권 세대이면서도 가정에 무력하며 나아가 아예 가족 해체를 자연스럽게 여기는 모양새를 보이는것과 대조된다. 일련의 매우 유아적인 발상이기에 그들이 만난 후 일련의 조우가 우스꽝스러운 코미디로 흘러가는건 영화적으로 당연하다.
 
하지만 영화는 정수 역시 교환과 다를바 없다는 것도 폭로한다. 정수가 집착하는 남근은 국가 유공자 메달을 받는 것이다. 하지만 정수는 국가 유공자 메달을 받지 못하고, 자랑하려고 데려온 진짜 손자는 짜증내며 사라진다. 정수의 이런 모습은 [우리 손자 베스트]에서 보여주는 발기불능성은 국가와 파시즘의 문제로 확장된다. 교환이 넘쳐흐르는 자극적인 시뮬라크르에 목을 매며 현실을 왜곡한다면, 정수는 파시즘 국가의 인정에 목을 매며 현실을 왜곡한다. 그렇기에 그들의 만남과 친목은 코미디임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절박해보이고 슬퍼보인다.

그들이 절박하고 슬퍼보이는 이유는, 이미 영화 안에서 답이 제시됨에도 그걸 거부하기 때문이다. [우리 손자 베스트]는 초장에 프레임 가득히 채워진 일베/디씨 언어가 가지고 있는 왜곡된 시뮬라크르가 가지고 있는 저열한 폭력성을 돌파할 방책을 서사 내에서 제시하고 있다. 김수현 감독은 서브플롯에서 김상현 성우를 본인 역으로 출연시킨다. 이 순간 [우리 손자 베스트]는 메타적인 요소를 함유하게 된다. 한국 리버럴을 상징하는 김상현 성우가 등장하면서 초반부의 파괴되고 모독된 성우의 목소리는 분명한 육체를 가지게 된다.  그 점에서 상현이 교환을 경찰서에서 불러내 교환에게 써내린 댓글을 스스로 읽게 하는 장면은 매우 상징적이고 기묘한 통쾌함을 안겨준다.

그리고 기 기묘한 통쾌함은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교환의 납치 실패극으로 이어진다. 교환은 납치해온 상현에게 자신의 정치적 신념에 반하는 메시지를 읽도록 협박한다. 자신이 만들어낸 "화면 가득히 덜렁거리는" 파시즘 시뮬라크르와 맹신하며, 그 시뮬라크르의 재료를 제공한 현실의 인물이 자신 아래 굴종하도록 협박하는 셈이다.  하지만 상현은 아무렇지 않게 해낸다. 직후 상현은 교환에게 반격해 자신이 했던 행위를 다시 돌려준다.

당연한 일인게, 상현에게 교환의 행동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현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고 우아하고 신랄하게 교환과 교환으로 대표되는 일베충들의 발기불능성을 확인시켜준다. 어찌보면 성우의 목소리만을 시뮬라크르로 포섭하려는 짝퉁 파시스트를 향한 육신을 지닌 성우 자신의 유물론적인 반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점에서 [우리 손자 베스트]는 연대와 신념, 사랑을 추구하는 가치가 어째서 '대안 현실'이니 '위선'이니 같은 공격에도 왜 쉬이 꺾이지 않는지 독특하게 증명하고 있다.

이처럼 상현 뿐만이 아니라 [우리 손자 베스트]의 여성 캐릭터들은 발기 불능된 남성들과 달리 최소한 긍지를 지키고 있다. [우리 손자 베스트]은 다양한 여성 캐릭터들이 가지고 있는 긍지를 하나씩 꺼내보인다. 그건 교환의 어머니처럼 성적 대상화와 딸에게 폭행을 당하고도 [새드 베케이션]의 치요코를 연상케하는 소름끼칠정도로 순수한 모성애이기도 하며, 교환의 여동생 미선이나 티파니처럼 어떤 가치로도 재단되지 않는, 주체적인 에너지와 욕망을 지니며 살아가는 현대 한국 여성의 초상이기도 한다. 그 캐릭터성에 대해 비판할 점이 없다는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우리 손자 베스트] 내에서 그들은 정수와 교환처럼 긍지를 잃거나 추잡해지지 않는다. 

이 여성들 속에서 가장 흥미로운 여성은 숙희다. 박카스 아줌마인 숙희는 정수에게 학대당하고 교환에게도 뺨을 맞으며 욕을 듣는 밑바닥 여성이다. 하지만 숙희는 절망하지 않으며 계속 살아간다. 정작 정수와 교환이 발기불능성에 우울해하는 동안, 숙희는 자신을 좋아하는 할아버지에게 고백을 듣고, 그와 함께 일생을 같이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잡게 된다. 이를 알게 된 정수의 반응은 욕설과 폭력이다. 그 장면 이후 그들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렇게 모멸받은채 사라지는 것인가? 아니다. 그들은 정수와 교환과 달리, 서사 내에서 관계의 가능성을 확인받았으며 정수의 폭력이나 욕설과 상관없이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지속해 갈 것이다. 그렇기에 직전 할아버지의 대사는 사무친다. "우리 평생 패배자로 살았잖습니까. 남은 일생이라도 승자로 살아가봅시다."

하지만 정수와 교환은 그런 승리 방법을 승리라 생각하지 못하고 그들을 모욕하며 클라이맥스에 돌입한다. [우리 손자 베스트]는 이 순간부터 갑자기 샷 간의 인과관계가 흐트러지며, 추상적인 결말로 달려간다. 정말로 정수는 암에 걸린 것일까? 교환은 정수를 죽인 것일까? 여기에 대답은 없다. 마지막에 남은건 우스꽝스러운 형식으로 자신의 죽음마저도 시뮬라크르로 교체한 정수와, '내가 찾은 팩트는 바로 나다.'라고 말하며 광장에서 어설프게 춤추는 교환의 풀 샷이다. 

이 결말에 이르면 영화는 다소 주저하고 있다는게 보인다. 김수현 감독은 이들이 어디로 갈지 확신하지 못한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인과관계가 불분명한 이 결말엔 모종의 아이러니가 있다는 점이다. 그들이 영화 내내 추구한 왜곡된 시뮬라크르로 가득찬 소극笑劇과 그 소극 속에서 피워낸 관계는 어떤 면에서 보자면 무의미했고 또한 절실하고 간절했다. 그들은 끝내 숙희나 상현처럼 '진짜' 관계를 맺을 수 없었지만, 그들의 관계는 자신이 만들어낸 시뮬라크르를 뛰어넘어버렸다. [우리 손자 베스트]라는 제목은 그 점에서 그 양면성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이 제목엔 일간 베스트를 연상케 하는 왜곡된 가치관과 신념이지만, 동시에 정말로 '우리' '손자' '베스트'라는 칭찬을 담고 있다. 그런 칭찬 속에서도 일베충 교환은 여전히 왜소하고 작은 성기를 연상케하는 프레임 속에서 어설프게 춤춘다. 교환은 주어진 발기불능성을 딛고 정말로 행복해질수 있을까?

[우리 손자 베스트]에서 등장하는 교환이 일베충의 모든 모습은 아닐것이다. 영화 촬영이 끝난 뒤 일어난, (김상현 성우의 후배 성우가 겪었던) 끔찍한 사태와 집단 광기는 교환 앞에서 먼저 테러를 벌였던 또다른 일베충의 모습이 우리 사회에 도사리고 있다는 걸 보여줬다. "그나저나 사회정의를 외친다고 밥줄을 끊는다던가 그런 일이 일어나는데..."라는 영화 속 김상현의 대사가 현실에서도 정말로 일어난 것이다. 그것에 대한 영화 역시 나와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는 그들의 언어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는가? 그리고 그걸 어떻게 영화적으로 형상화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있었는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우리 손자 베스트]는 그 질문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가 자신이 믿는 긍지라는 가치를 답으로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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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나잇 스페셜 [Midnight Special] (2016)

2013/05/10 - [Deeper Into Movie/리뷰] - 테이크 쉘터 [Take Shelter] (2012)

2013/12/04 - [Deeper Into Movie/리뷰] - 머드 [Mud] (2012)

제프 니콜스의 SF라는 얘기를 들었을때, [미드나잇 스페셜]이 어떤 영화가 될지 조금 상상이 안 가긴 했다. 2007년 [샷건 스토리즈]에서 출발한 제프 니콜스는 기본적으로 지역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다. 그의 영화는 카와세 나오미나 스와 노부히로, 아오야마 신지처럼 어떤 지역을 떠나면 성립하지 않는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니콜스는 테렌스 맬릭이나 리처드 링클레이터 같은 희귀한 사례를 제외하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미국 중남부 서민-화이트 트래시들의 삶에 애정을 느끼고 거기서 출발한다. (심지어 아칸소는 맬릭이나 링클레이터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영역이다.) 아칸소 백인 하층민들을 소재로 삼았던 [샷건 스토리즈]와 [머드]. 오하이오와 버지니아라는 남부라는 문화적 친연성을 지닌 곳에서 영화를 만든 [테이크 쉘터]와 리뷰 예정인 [러빙]... 그가 지금까지 만들어왔던 영화는 영화 언어에 미처 포섭되지 않았던 문화와 역사가 담겨 있다.  그 점에서 제프 니콜스는 동시대 감독 중에서도 미국에서만 성립 가능한, 가장 미국적인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다. 그런 감독이 장르의 세계에 들어선다니 기대와 걱정이 앞설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드나잇 스페셜]은 생각보다 멀리가지 않았지만 상당히 넓어진 영화다. [미드나잇 스페셜]의 배경인 루이지애나 주는 전작들과 그렇게 떨어져 있지 않다. 하지만 이야기나 연출 면에서 니콜스는 장 르누아르부터 시작해 테렌스 맬릭으로 이어지는 유구한 자연주의 영화의 전통과 스티븐 스필버그와 존 카펜터 같은 장르 영화의 거장들을 만나게 하고 있다. 즉 지역 영화가 가지고 있는 디테일을 품고 탈지역적인 장르 요소들을 도입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그의 전작을 보지 못했거나 평범한 관객들이라면 [미드나잇 스페셜]에서 장르로 대표되는 탈지역적 요소를 먼저 발견하고 심심하게 여길 가능성이 높다. [미드나잇 스페셜]이 다루고 있는 장르적인 요소들은 너무나 구닥다리기 때문이다. 아니 시대가 언제인데 [E.T.]나 [스타맨]에 기독교 구세주 SF 설화를 도입하나? 비주얼은 왜 이렇게 안 멋져? 모름지기 SF 영화란 삐까번쩍 해야지! 이런 반응도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는 지극히 논리적인 선택이다. 상술했듯이 니콜스는 아직은 완전히 다른 공간으로 떠날 생각이 없이, 자신의 땅에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다. 즉 장르를 생각하고 지역을 생각하는게 아니라 지역에서 장르를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미드나잇 스페셜]은 지역이 품고 있는 문화를 장르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으로 장르 영화를 만든다. 그리고 그 지역은 바이블 벨트와 늪지대, 황량한 모텔과 주유소, 신흥종교단체로 가득차 있다. [미드나잇 스페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장르 영화보다는 지역 영화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니콜스는 장르를 사랑하면서도 자신이 지역 영화를 만든다는걸 명백히 인식하고 있다. 

그 결과 [미드나잇 스페셜]은 심심한 장르 설정과 익숙한 추격전 플롯에서 불구하고 단단하게 뿌리박은 영화 언어 속에서 생경할 정도로 낯섬과 아름다움을 전해준다. 그것은 대부분의 장르 영화들이 가볍게 여겼던 '공간'의 특성 (이는 지역적인 특성이기도 하며 시네마스코프 화면비와 같은 영화적 특성이기도 하다.) 이 강하게 대두되어서 생기는 부분도 있으며 (이 부분은 분명 존 카펜터에게 배운 것이다.), 한국에서는 생소한 미국 남부 고딕의 전통이 새로운 활력을 얻었기에 생기는 부분이 있다.

사실 이런 "공상과학"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비주얼 설계라는걸 생각해보면, [미드나잇 스페셜]이 보여주는 비현실적인 비주얼은 어떤걸 접하고 생각했기에 저런 리듬의 저런 비주얼이 가능한지 묻고 싶을 정도다. 어떤 부분은 바이블 벨트에서 자란 지식인이라는 이점에서 비롯되는 부분도 있다. 영화 마지막에 등장하는 특정 종족의 묘사는 분명 성경에서 비롯된 천사의 이미지를 연상케 한다. 하지만 어떤 장면은 단순히 문화적 이점이라고 넘길 수 없는 부분도 있다. 주유소 시퀀스에서 알튼이 기적을 부리는 장면이 그렇다. 느긋하면서도 갑자기 비현실적인 상황이 관객 앞에 툭 떨어지는 이 시퀀스는 경이롭다.

이런 태도는 영화 속 샷과 몽타주를 구성하는 방식하고도 연관된다.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들이 그렇듯이 제프 니콜스는 서사에 따라 차곡차곡 누적되는 샷과 몽타주의 구조를 믿는 고전적인 부류의 영화 감독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뉴욕 감독'이였던 제임스 그레이랑 달리 니콜스는 미국 남부 영화인이기에 가능한 느긋한 리듬이 있다.  도입부는 니콜스만의 느긋한 리듬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시드니 루멧의 [허공에의 질주]가 그랬듯이 우리는 로이와 알튼 일행이 누구이며 무엇 때문에 도망가는지를 알려면 기다려야 한다.

이는 속도를 중시하는 장르 영화로써는 그렇게 효율적인 방법은 아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미덕이 있다. 니콜스는 자신만의 샷과 몽타쥬 방식으로 천천히 쌓아올리면서 인물들의 불안과 상실, 기쁨과 긴장 같은 감정들은 신중하게 끌어낸다. 그렇기에 니콜스가 선택한 샷엔 신기할 정도로 헤아릴수 없는 인간을 위시한 피사체에 대한 강력한 믿음이 가득하다. 마이클 섀넌을 비롯한 연기진들의 연기는 그런 확고한 믿음으로 세워진 샷에서 시작한다.

그 점에서 그는 F.W.무르나우의 [선라이즈]와 장 르누아르에서 발원한 자연주의/휴머니즘 영화의 충실한 후예기도 하다. 우직한듯 보여도 [미드나잇 스페셜]의 인물 관계나 묘사는 어떤 위악이나 아이러니가 담겨있지 않다. 알튼, 로이와 사라의 가족 관계라던가 어딘가 어벙해 보이는 연구원 폴 세비어, 회의주의자 루카스 모두 단단한 존재들이다. 제프 니콜스의 영화가 가지고 있는 강점 중 하나가 바로 위악이나 비극으로 빠질 수 있는 캐릭터에게 단단한 뿌리를 부여한다는 점이다. 

[미드나잇 스페셜]은 아마도 니콜스의 바이블 벨트적인 성향을 가감없이 고백하는 영화기도 할 것이다. 상술하기도 했지만 기적을 일으키는 알튼과 알튼이 속한 특정 종족은 성경에 등장하는 천사와 사도, 신을 떠올리게 한다. 그 점에서 무신론자에게 [미드나잇 스페셜]은 거슬릴 수도 있다. 하지만 [테이크 쉘터]에서 니콜스는 지식인으로써 현실을 근심하면서도 미국 남부인 특유의 독실하게 뿌리박힌 어떤 '믿음'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고자 했다는걸 잊으면 안된다. 

누설 때문에 적을 수 없지만 [미드나잇 스페셜]은 구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던지는 영화기도 하다. 인간 관계에서 이뤄지는 믿음과 사랑에서 출발해 '믿으면 지옥 같은 이 세상에서 구원받아 천당간다' 식의 구약식 죄의식과 맹목적인 믿음을 부정하고 이 지구가 그렇게 나쁜 공간이 아니라는 믿음으로 새로운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이 점에서 [미드나잇 스페셜]은 '백인의 의무식 구원주의'에 빠진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와 다르다. 제프 니콜스의 지역 영화적 특색은 여기서 다시 한번 발휘한다. 이 땅을 떠나지 않더라도 행복해질수 있다고, 그건 당신들도 마찬가지라고. 니콜스는 그렇게 믿고 있다. 그리고 그 믿음은 루카스 같은 회의주의자/무신론자인 글쓴이마저도 긍지를 가지게 할 정도로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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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아리우스 [Aquarius] (2016)

[아쿠아리우스]의 오프닝을 장식하는 것은 인물보다도 브라질 동남부 해안도시 헤시피의 옛날 모습을 찍은 사진들이다. 흑백으로 이뤄진 이 사진들이 배치된 이유는 명백하다: 클레베 멘돈사 필로에겐 어떤 인물보다도 헤시피라는 공간이 중요하다. 그는 헤시피라는 공간이 거쳐왔던 역사를 짧게라도 좋으니 관객들이 학습하길 바란다. 이런 욕망에는 매우 향토적인 이유가 있을지 모르겠다. 필로의 고향은 바로 헤시피이며, 그의 전작 [네이버링 사운즈] 역시 헤시피가 배경인 영화다.

낡은 엽서 같은 사진들에서 시작한 영화는 다음 시퀀스에서 곧 인물로 좁혀들어간다. 하지만 필로는 곧장 시놉시스를 보고 상상할법한 클라라의 현재로 들어오지 않는다. 반대로 그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 클라라의 과거에서 영화를 시작한다. 필로는 클라라와 친족들이 모여서 이모할머니의 생신을 축하하는 장면을 통해, 아쿠아리우스가 아직 허물어질 필요가 없었던 그 시절의 순간을 각인시키려고 한다. 이 시퀀스가 가져다주는 행복함은 뒤에 이어질 치열한 암투와 과부로 살아가는 클라라의 현재와 대비되기도 하다. 
 
이때 필로는 꽤나 인상적인 몽타쥬를 보여준다. 젊은 클라라가 아파트 안에 놓여진 장롱을 슬쩍 시선을 던지자, 장롱 샷이 등장하고 직후 짧은 플래시백 형식으로 클라라가 남편과 함께 장롱 위에서 섹스를 했던 순간을 보여준다. 어떤 물체가 개인의 기억을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필로는 알랭 레네 같은 현대 영화의 유산을 의식하고 있다. 너무나도 거침없이 이어지는 몽타쥬 연결이라던가 높은 노출 수위를 통해 관객은 클라라라는 인물의 가장 내밀한 부분에 들어서게 된다. [아쿠아리우스]는 이 시퀀스를 통해 명백히 클라라의 개인적인 영역을 영화의 중심에 놓는다. 

오프닝이 끝나고 '클라라의 머리카락' 장으로 넘어오면 (이 영화는 여러개의 장으로 이뤄져 있다.) [아쿠아리우스]는 본격적으로 전개에 들어간다. 이 파트를 시작하는 시퀀스에서 필로가 사용하는 카메라의 움직임도 탁월하다. 필로는 아쿠아리우스 주차장에서 철거 담당자들이 차에서 내리는 동안 잠자고 있는 클라라의 모습을 부감 트래킹 샷으로 보여준다. 약간 과시적인 기색이 있긴 하지만 필로는 집 안에서 밖으로 이어지는 흐름과 공간의 대조를 통해 클라라의 삶이 어떤식으로 흔들릴지 설명한다. 바깥과 벽, 그리고 사적인 공간의 대조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이 있다.

이제 아쿠아리우스는 세월이 지나 사람들이 빠져나갔고 철거되어야 할 옛 건물이 된지 오래다. 하지만 클라라는 떠나지 않는다. 디에고가 주장하는 바로는 개발업자는 못마땅해하지만 클라라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둘 간의 긴장감이 감돌면서 은밀하면서도 추잡한 협박이 이어진다. 재미있는 점은 이 과정이 압축적으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필로는 클라라의 일상을 느긋하게 풀어내면서 아쿠아리우스 철거를 다루고 있다. 클라라는 할 말이 많은 재미있는 캐릭터고, 그걸 다루는 과정은 꽤 흥미진진하다.

그렇다면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던지겠다: 클라라는 왜 아쿠아리우스를 떠나지 않는가? 표면적으로 클라라는 아쿠아리우스를 굳이 버려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는 점을 든다.  실제로도 필로가 보여주는 아쿠아리우스라는 공간은 낡긴 했어도 디에고가 주장하는것처럼 당장 철거해야 할 건물처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클라라가 디에고에게 저항하는 이유는 훨씬 복잡하다. 영화 초반부에 분명한 단서가 던져진다. 지역 언론과 인터뷰를 하면서 클라라는 자신이 구입한 중고 존 레논의 LP와 관련된 에피소드를 들려주면서 자신이 LP나 책에 매료되는지 설명한다.

그 점에서 [아쿠아리우스]는 현대 영화가 발명해낸 '시공간의 역사성/정치성'에 대해 흥미로운 관점을 드러내고 있는 영화다. 이토 케이카쿠식으로 말하자면, 이 영화는 '데드 미디어'로 대표되는 물질적인 매체의 정치성을 드러내고 있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 데드 미디어는 음반이나 책부터 시작해 궁극적으로는 유방암으로 도려내야만 했던 클라라의 유방과 아쿠아리우스라는 건물로 이어지고 있다. [아쿠아리우스]는 소멸하기 마련인, 눈에 보이는 물체의 역사성과 개인의 미시사를 영화에 이끌어들이고 있다. 클라라가 돈을 훔치고 잠적한 가정부의 환영과 자신의 가슴에서 피가 흐르는걸 동시에 보는 환상 장면은 [아쿠아리우스]가 '데드 미디어'의 역사성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요컨데 [아쿠아리우스]는 SF 장르에서 볼 수 있었던 문제의식을 현대극에 이식하고 있는 셈이다.

중요한 점은 [아쿠아리우스]는 데드 미디어를 고리타분하게 그려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클라라는 스마트폰이나 MP3 같은 새 문물을 거부하지 않는다. 그것들 역시 클라라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배어들어 있다. 클라라가 매력적인 캐릭터는 시간이 낳은 흔적을 무시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캐릭터라는 점이다. [아쿠아리우스]에 등장하는 인상적인 시퀀스는 정치적인 저항과 데드 미디어의 가치가 만나는 부분이다. 윗집에서 클라라를 쫓아내기 위해 난교파티를 벌이는걸 목격하고 돌아온 클라라는 친구가 알려준 남창 파울로를 불러낸다. 격렬한 섹스를 나누던 도중 파올로가 클라라의 도려낸 유방을 눈치채고 당황해하자 클라라는 아무렇지 않게 파울로의 손을 도려낸 가슴에 올려놓는다. 1980년대 섹스 심벌로 유명했던 소니아 브라가의 스타 아우라와 캐릭터의 당당함이 만나는 인상적인 장면이라 할 수 있다.

클라라, 나아가 필로가 저항하는 건 새로운 문물이 아니라 데드 미디어의 역사성과 개인의 미시사를 경제적인 이득을 빌미로 강제로 제거하려고 하는 정치적인 억압이다. 재미있는 점은 이 영화에서 디에고로 대표되는 재개발업자들이 클라라의 일상을 파괴하고 위협하는 방식은 심증만 있지 명쾌한 물증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이다. 클라라가 부끄럽다고 비난하고 사라지는 옛날 이웃집 주인의 아들, 난장판을 벌이다 갑자기 사라진 난봉꾼들, 수상한 흔적을 봤다고 클라라에게 귀뜸하는 안전요원의 증언, 갑자기 나타나 아쿠아리우스를 제멋대로 리모델링하는 인부들...

이처럼 [아쿠아리우스]가 개인을 향한 탄압을 영화적으로 구성하는 방식은 어딘가 불투명하고 미스터리한 구석이 있다. 물론 관객들은 영화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단들이 디에고가 사주한거라는 의심 (혹은 확신)을 가지지만, 디에고는 그런 확신을 교묘하게 회피하고 딱히 묘안이 없는 클라라는 골머리를 썩인다. [아쿠아리우스]가 심오한 주제의식과 달리 의외로 흥미진진한 영화인 이유도 이런 인과관계의 은폐에서 생기는 서스펜스에 있다. 즉 '가시적'인 데드 미디어를 파괴하려는 정치적인 탄압은 '비가시적'으로 전개되는데, 이 대조를 통해 필로는 서스펜스를 만들어내며 정치적인 메시지를 구축한다.

당연하겠지만 [아쿠아리우스]의 역사성/정치성은 브라질 현실에 기반해있다. 우리는 [아쿠아리우스]를 보면서 헤시피의 역사, 지역별로 나눠져 있는 빈부격차, 인종과 경제 문제를 알 수 있다. 클라라는 자신의 조카들을 데리고 자신의 가정부인 라제네가 사는 빈민가로 데려가면서 헤시피의 역사를 설명하기도 하고, 백인 재개발 업자를 만나 당신네 가족들 (클라라 가족은 메스티소쪽으로 그려진다.)이 부자가 된건 얼마 안 되었으니 처신 잘하라는 협박을 듣기도 한다. 필자를 비롯한 대부분의 외국 관객들은 [아쿠아리우스]가 드러내는 지역적 특색에 대해 마음 깊숙히 공감할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아쿠아리우스]가 영화라는 매체가 가질 수 있는 "동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기록하는 박물학적인 매체"라는 점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다는건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아쿠아리우스]의 결말은 그 점에서 상당히 논리적이고 강렬한 반격이다. 내부자의 고발을 들은 클라라는 사람들과 함께 위층으로 올라간다. 거기서 클라라네가 발견한 것은 거대한 흰개미 둥지다. (흰개미가 건물을 붕괴시킬 수 있는 무시무시한 곤충이라는건 다들 알 것이다.) 클라라는 이 흰개미 둥지를 떼내 디에고의 회사를 방문한다. 아니라고 계속 발뺌하는 디에고에게 클라라는 화가 나서 이걸 보라며 들고 온 흰개미 둥지를 책상에 던진다. 필로는 이 흰개미 둥지를 접사한 샷으로 영화를 마무리 짓는다.

분명 이 결말은 브라질 현실에 대한 필로의 직설적인 일갈이며, 영화 내내 은밀한 방식으로 진행되던 디에고 일당의 진상짓에 짜증을 내던 관객들에겐 '사이다'같은 결말이다. 데드 미디어가 비가시적인 억압을 박살내는 장면이라는 점에서도 논리적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결말을 보면서 시원함을 느끼면서도 조금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이 결말은 그 뒤 분명히 이어질 클라라와 디에고가 법정에서 이어질 진흙탕 싸움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직 클라라의 승리만을 암시할 뿐이다. 그 점에서 [아쿠아리우스]의 결말 샷은 너무 쉽고 단순하게 이뤄져 있다. 필로가 이 사실을 몰랐을 리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아쿠아리우스]의 결말 샷은 필로가 만들 또 다른 영화의 시작 샷이기도 하다. 마치 박근혜 탄핵안 가결이 끝이 아니라, 시작인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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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가로의 여행 [岸辺の旅 / Journey to the Shore] (2015)

2013/08/26 - [Deeper Into Movie/리뷰] - 절규 [叫 / Retribution] (2006)

죽은 남편이 돌아와 여행을 제안한다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해안가로의 여행]의 기본 뼈대는 판타지 장르에서는 참신하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해안가로의 여행]의 도입부는 신비롭다. 장을 보고 팥죽을 만들던 주인공 미즈키는 문득 뒤를 돌아본다. 미즈키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남편 유스케가 서 있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듯이. 하지만 우리는 그 곳엔 방금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없었다는 걸 안다. 심지어 친절하게 유스케는 자신이 실종되었다는걸 죽었다는 걸 말해준다. 

이 장면이 매력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영화에서 이전 프레임까지 볼 수 없었던 것이 등장했을 때, 우리는 당혹감과 경외감을 느낀다. 현재까지 만들어진 영화는 지구의 물리학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물론 [스타워즈]나 [그래비티]처럼 무중력을 현실로 가정한 공간에서 영화를 진행한다면, 사람들은 당연히 그 무중력을 당연하게 여길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서는 중력이 ‘없다’는 사실이 처음부터 관객들 뇌리에 강하게 박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구라는 공간에서 영화를 찍던 도중 중력을 거스르는 장면이 등장하면, 우리는 당황하며 이전 컷과 이후 컷을 따로 분리하려고 한다. 그 전까지 강하게 세워져 있던 현실의 프레임이,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면서 허물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어떤 허구의 마술이 일어난다. 그 마술이야말로, 영화라는 매체의 진짜 매력 중 하나 아닐까 싶기도 하다.

유령은 무엇인가? 분명한 것은 유령은 현실에 속하지 않은 것이기에 인간이 등장하는 식으로, 자연스러운 편집이나 샷을 통해 등장하지 않는다. 평범한 장르 영화의 유령들은 이 부분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기요시의 유령들은 그것이 어디서 왔는가, 를 깨닫게 해준다. 기요시의 유령들이 영화 탄생 후 무수하게 등장한 마술 중에서도 기억할 가치가 있다면, 그는 숏의 구성과 연결, 사소한 소품들이나 몸짓, 그림자와 색채에서 중력과 무중력을 구성할 줄 아는 감독이기 때문이다.

[해안가로의 여행]의 마술을 담당하고 있는 유스케를 보자. [절규]의 여자 귀신이 그랬듯이, 우리는 그의 모습을 쉽게 잊을 수 없다. 아사노 타다노부라는 훌륭한 배우가 연기를 했다는 점도 있지만 유스케의 복장이라던가 (실제로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인상이 깊었던 것은 유스케의 주황색 코트였다. 옷의 색이 하나의 캐릭터화된다는 느낌이였달까. 같이 다니는 미즈키의 무채색 옷과 대조되서 그런걸지도 모르겠다.) 대사 사이에 등장하는 어떤 침묵의 간극, 무심하게 일어날 수 없는 현실을 흘러내보내는 행동거지에서 우리는 그를 쉽사리 부정할 수 없게 만든다. 그렇기에 분명히 죽었을 유스케가 살아있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장면들을 보면서 그 터무니없음에 당혹해 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이 받아들임은 전작들과 달리 절망이나 묵시록과는 거리가 멀다. 반대로 절박한 멜로드라마적 물기라고 봐야 할 것이다. 미즈키가 큰 흔들림 없이 자연스럽게 유스케의 유령을 받아들이는 것도, 오히려 그 멜로드라마적인 물기에 잠겨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유스케가 돌아오길 기대하며 썼다는 기원문은 미즈키가 중력을 거르는, 어떤 영화적 현상을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유스케의 제안에 미즈키처럼 따라 여행을 떠나게 된다. 후술하겠지만, 유스케와 미즈키의 여행은 일종의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은유라 할 수 있다. 단적으로 유스케는 자신이 없었던 지난 3년간 자신이 겪었던 일들과 사람들을 미즈키가 체험하길 원한다. 유스케가 보여주는 이야기엔 지박령처럼 한 자리에 머물며 죽음을 인지 못하는 유령도 있으며 반대로 유령을 잊지 못해 살아가는 사람의 얘기도 있다. 즉 유스케가 어떤 영화적인 사건이라면 미즈키는 관객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유스케와 미즈키가 처음으로 찾아간 신문 배달을 하는 시마카게라는 할아버지를 보자. 중간의 반전으로 시마카게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으며 지박령처럼 그 장소에 머물고 있었다는게 밝혀진다. 이 에피소드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시마카게가 머무는 장소다. 미즈키가 그 장소에 들어섰을 때, 관객들은 그 장소가 죽은 장소라는걸 쉽게 알아차린다. 혼자서 머물기엔 지나치게 넓은 공간, 보이지 않는 사람들, 어두운 그림자, 어딘가 빛바랜 가구들... 에피소드 마지막에 등장하는 반전은 그런 소멸해버린 시간과 공간을 기요시가 호러 장르에서 구축했던 어법을 빌어 서늘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 곳은 영화의 마법이 드러나는 최초의 장소이기도 하다. 특히 시마카게가 만드는 꽃 사진 콜라쥬는 그런 마법의 일부이자 총화라 할 수 있다. 잠든 시마카게를 데려와 침대에 눕히던 미즈키와 유스케를 뒤로 조명이 서서히 밝아지면서 꽃 사진 콜라쥬가 등장한다. 이때 다음 컷에서 카메라는 트랙인을 하면서 콜라쥬를 확대해 보여준다. 벽 한가득 차 있던 꽃 사진 콜라쥬는 화면 가득히 채워진다. 그리고 미즈키의 넋을 잃고 바라보는 리액션 컷이 붙는다.

동시에 이 장면은 유령이 가지고 있는 어떤 사연과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유스케의 등장이 그랬듯이, 꽃 콜라쥬 역시 유스케와 미즈키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신을 드러낸다. 그렇기에 시마카게가 침대에서 잠들었을 때 조명이 어두워지면서 벽에 붙은 꽃들을 비추는 인공적인 조명 연출은, 마치 그가 사라지기 전에 남기는 유언처럼 조용하고 쓸쓸한 아름다움이 있다. 비록 시마카게는 외롭게 살다가 인생을 마무리했지만, 그가 살아있던 흔적은 그렇게 현계에 남아 관객들의 멜랑콜리를 자극한다.

이렇게 빛을 조절해 다른 시공간에 속한 것 (유령)을 불러와 어떤 아름다움과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연출은 유스케가 두 번째로 데려가는 곳인 중년 부부의 음식점 에피소드에서도 이어진다. 음식점에서 일을 돕던 미즈키는 우연히 집안에서 피아노를 발견한다. 피아노를 연주하던 미즈키는 후지에에게 갑작스러운 제지를 받게 되고, 후지에와 후지에 여동생 마코의 사연을 듣게 된다. 후지에가 괴로운 과거를 얘기할 때 영화는 관객이 알아차리기 힘든 속도로 조명을 서서히 어둡게 한다. 후지에가 사과하고 싶다고 털어놓는 순간, 미즈키와 관객 눈 앞에 마코가 나타난다. 이제는 있을 리가 없는 사람이 다시 등장했을 때, 우리는 강한 기시감을 느낀다. 마코는 유스케와 같은 시공간에 속해있다가 불현듯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미즈키는 놀라지 않는다. 미즈키는 마코에게 피아노를 쳐달라고 부탁한다. “자신의 템포에 맞게, 천천히”. 마코가 피아노를 칠 때, 어두웠던 방은 아름다운 음악 소리와 함께 서서히 다시 빛으로 채워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코는 환하게 웃는다. 마코가 환하게 웃는 순간 우리는 소녀가 원하던 것을 이뤘다는걸 알게 된다. 그리고 그 다음 컷에 후지에의 마코는 사라지고 없다. 마코가 떠난 방엔 빛과 두 사람의 눈물로 채워진다.

상기했듯이 기요시는 유스케의 등장을 평범하면서도 낯설게 처리하면서 유령이 어디서 왔는지를 상기하게 했다. 그렇다면 유령이 자신의 얘기를 마무리한 뒤엔 어떻게 사라져야 하는가? 먼저 전에 등장한 시마카게는 이룰 수 없는 소망을 품고 있다. 시마카게의 아내는 돌아올 수 없다. 그렇기에 시마카게가 사라지는 장면은 평범한 일상을 마무리하듯이 어느 누구도 목격하지 못한 채 조명이 어두워지면서 서서히 사라진다. 하지만 마코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마코는 후지에의 고백 속에서 뭘 원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한 공간에 계속 머물며 죽은줄도 모르고 살아가던 시마카게와 달리, 마코는 후지에의 염원이 불러낸 존재로 그려진다. 그렇게 원하는걸 이룬 마코는 환한 웃음과 함께 밝은 빛이 채워지면서 불현듯 사라진다. 이런 식으로 기요시는 각 유령마다 가지고 있는 사연을 파악하고, 어떻게 사라질지 연출하고 있다.

후지에와 마코 에피소드가 끝나고 기요시는 문득 여행을 갑자기 중단한다. 유스케가 토모코라는 애인이 있다는걸 안 미즈키는 유스케와 다투던 도중 돌아가서 물어보겠다고 뛰쳐나온다. 그 다음 샷에서  미즈키는 자신의 집에서 잠이 깬다. 이때 기요시는 시마카게가 사라진 이후의 공간을 보여주던 방식으로 미즈키의 집을 보여준다. 이 시퀀스 자체는 현실과 비현실간의 간극을 환몽 구조로 보여주는 흔한 시퀀스이지만, 신문들과 고지서가 보여주는 물질성과 현실성은 영화 내 맥락에서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유령과 함께 보냈던 시간들이 헛된게 아니라 정말로 있었다고 말하는듯한 무언의 주장이랄까. 

토모코와의 대화 끝에 미즈키가 유스케를 부르는 장면은, 미즈키가 유스케의 유령이 절대로 비어있는 시간이 아니라는 결론 끝에 나왔던 거 아닐까. 그 점에서 미즈키의 집에 등장했던 죽은 식물들과 고지서들은 시마카게의 낡은 꽃처럼 유령과 얽혀있던 시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같은 어조임에도 이전에 쌓인 성찰에서 다른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그렇게 그들은 다시 여행을 떠난다. 의심을 품고 있던 관객들조차 이 영화의 세계가 유령이 어떤식으로 살아가는지 받아들이게 된다. 유스케가 세 번째로 찾은 곳은 어느 한적한 시골 마을이다. 유스케와 함께 마을 일을 도우며 시간을 보내던 미즈키는 마을 아이에게 영계로 이어지는 폭포 이 이야기를 듣게 된다. 행방불명된 타카시와 남아있는 카오루의 사연이 등장한 이후, 미즈키는 다시 폭포로 갔다가 죽었던 자신의 아버지를 발견하게 된다.

미즈키의 아버지가 등장하는 이 장면은 여전히 영화 속 다른 유령들처럼 불현듯 등장하지만 이전 장면들과 달리 긴장감으로 차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 딸과 비슷하거나 어린 배우가 아버지를 연기하는 부조화도 그렇지만, 유스케를 원망하며 미즈키를 다그치는 미즈키의 아버지는 [절규]나 [회로]에 나왔던 유령처럼 무언가 서늘하고 냉정한 분위기를 풍긴다. 미즈키의 아버지는 그동안 미즈키가 만나왔던 유령들과 달리 유스케처럼 온전히 미즈키에게만 속한 유령이기에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미즈키의 아버지는, 어쩌면 인간인 네가 이 여행을 올 필요가 없었다고 현실을 재차 각인시켜준 존재일지도 모른다. 바람을 피우며 소중한 딸인 미즈키에게 상처를 주는 남편 따윈 잊어버리고 출발하라는 유혹이랄까.

하지만 미즈키는 기요시의 남자들과 달리, 그 유령을 달래는데 성공한다. 미즈키는 이미 여러 명의 귀신과 토모코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여행이 3년 동안 비어 있었던 어떤 순간을 채우고 떠나보내기 위한 과정이라는 걸 깨달았다. 미즈키의 아버지가 다른 유령들처럼 불현듯 사라지지 않고 다음 컷에서 흔적도 없이 소멸되고 언급되지 않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다음 시퀀스에서 우리는 미즈키가 맞이해야할 유스케와의 기나긴 이별 준비 시퀀스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서사하고도 큰 연관관계도 없는 시퀀스임에도 기요시는 풀 오케스트라를 동원한 감상적인 음악을 깔면서 유스케와 미즈키가 시골 마을에서 일상을 보내는 과정들을 몽타쥬로 연결해 보여준다. 직전에 등장하는 유스케가 빵 봉지를 잘 못 뜯는 신은, 유스케가 이 세상에 오래 머물 수 없다는 암시로 받아들일수 있다. 하지만 그 다음 신은 직전 신과 이후 신과도 전혀 연관이 없고 의미도 언뜻 파악하기 힘들다. 기요시는 놀이터에서 유스케가 멀리 어딘가를 보는 걸 미즈키가 그걸 바라보게 세팅을 한 뒤, 시계 반대 방향으로 달리 촬영을 한다. 음악이 고조되며 두 사람이 거의 일직선이 되었을 때, 기요시는 미즈키의 바스트 샷으로 넘어간다. 미즈키가 유스케를 바라보고 있는거 아닌가라고 생각했을때, 기요시는 달에 구름이 스쳐지나가는 장면을 집어넣는다. 하지만 우리는 이 신이 끝날 때, 앞 뒤 신과 연결되어있다는걸 알 수 있다. 이 장면에서 기요시는 인간인 미즈키와 유령인 유스케 간의 어떤 간극을 보여주면서, 이들의 여행이 끝나야만 하는 것임을 드러내게 한다.

그렇기에 후회를 안고 원념이 되어가는 타카시를 성불 시키고, 우주와 시간, 사랑에 대한 다소 장황하고 직설적인 고백이 이어진 뒤 미즈키와 유스케는 섹스를 하게 된다. 실종 직전 부부관계가 그렇게 원만했다고 할 수 없었음에도, 이 시퀀스에서 미즈키와 유스케는 마치 신혼여행에 온 부부처럼 몸을 섞는데, 우리는 여기서 이 여행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걸 증명하듯이 그들은 마지막 행선지인 유스케가 사라졌던 바다로 향한다.

그 바닷가는 솔직히 절경이라 할 수 없는 곳이다. 동아시아 (한국이라면 강원도) 어딘가에 내려서 해변가로 가는 버스 티켓 한 장 얻으면 금방 도착할 수 있는, 자질구레한 어업 도구들과 배들이 널려있는 그런 곳. 기요시는 그런 일상적인 풍경을 애써 지우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대신 한적한 풀밭에 배우들을 앉혀놓고 그들의 얼굴에 내려앉는 햇빛과 풀들을 묘사한다. 거기서 유스케는 덤덤히 아름다운 곳으로 가야만 한다고 말한다. 상기했듯이 [해안가로의 여행]은 영화에 대한 영화로도 볼 수 있다고 적은 바 있다. 

어찌보면 미즈키가 떠나지 말고 여기 계속 있어달라는 지극히 신파적인 고백은, 이야기와 서사가 끝난다는 사실에 대한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라 볼 수 있다. 이야기가 끝나고 무언가를 얻거나 잃은 캐릭터는 어디론가 떠나간다. (그 어딘가는 서사마다 다르다.) 우리는 그곳을 따라갈수 없다. 작가 혹은 절대자가 서술하지 않기 떄문이다. 그저 우리는 상상할 뿐이다. 그렇기에 이 결말은 스파이크 리의 [그녀]에서 사만다가 시어도어에게 더 넓고 알 수 없는 어딘가로 떠난다고 고백하며 떠나가는 결말과 닮아있다. 필연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상실에서 비롯된 멜로드라마적 물기라는 점을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그랬듯이 이 상실을 받아들이는 주체는 더이상 약하지 않다. 어떻게 사과할줄 몰랐다고 말하는 유스케의 말에 "원하는건 이뤘어."라고 대답하는 미즈키의 말이 그렇다. 무언가 원하고 있었기에, 불현듯 등장했다는걸 깨닫고 그것과의 여행에서 원하는걸 찾아냈기 때문이다. 유스케가 사라지는 장면은, 상술했던 마코나 타카시가 불현듯 사라지는 방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지만 우리는 거기서 충만한 감정을 발견한다. 여행을 하는 동안 미즈키는 유령들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방식을 이미 충분히 체득했기에, 그 사라짐을 아파하지 않는다. 그저 밝은 햇빛을 잠시 만끽할 뿐이다. 

스파이크 리는 비물질계로 떠나는 자들을 배웅한 물질계의 두 남녀가 밝아오는 도시의 하늘을 바라보는 것에서 영화를 마무리지었다. 기요시는 거기서 조금 더 보여준다. 미즈키는 남편이 돌아오길 고대하며 쓴 기원문을 태운다. 그때 카메라가 보여주는 성냥곽은 두 개의 시계가 그려져있다. 마치 두 개의 시간과 공간을 관통하며 움직여 온 미즈키와 유스케의 여행을 상징하듯이. 그리고 미즈키는 짐을 들고 프레임 오른켠 앞으로 전진해 사라진다. 

미즈키가 사라지는 방식은 유령이 사라지는 방식과 완전히 다르다. 미즈키는 프레임 안에서 불현듯 사라지지 않고, 프레임을 스스로의 의지로 벗어난다. 그것이 인간이 사라지는 방식이라고 기요시는 생각했던 것일까. 음악이 흐를때 우리가 볼 수 있는건 이별을 맞이하며 바라봤던 해안가다. 그 순간 이 해안가는 한 유령이 사라지고, 한 사람이 프레임 밖의 '더 아름다운 곳'을 찾아 떠나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증언자가 된다. 이때 카메라가 움직이는 방식은 너무나 우아하다. 마치 지금까지의 여행을 정리하는듯한 움직임이라고 할까. 거기서 기요시는 영화를 마무리 짓는다. 

[해안가로의 여행]에서 기요시 전작들에서 편린으로 등장했던 유미주의가 완연하게 꽃을 피운다. 이 영화가 감상적인 멜로드라마를 의심없이 그대로 가져온다고 꼬투리 잡을수 있을 것이다. 또한 나 역시도 이 영화를 [큐어]나 [회로], [절규]에 내세울 정도로 좋아한다고는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어느 누구보다도 행복했고, 삶과 영화를 좀 더 사랑하는 방식을 배울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유령이 어떤 시공간에 속하는지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궁극적으로 이별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영화 언어로 배치하는 과정에서 정서적인 힘이 나온다고 할까. 그런 부분에 설득당했기에 이 영화가 마지막에 남겨둔 해안가가 너무나도 아름다웠고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아름다운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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