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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SF (5)
환송대 [La Jetée / The Jetty] (1962)

2017/09/05 - [Deeper Into Movie/리뷰] - 태양 없이 [Sans Soleil / Sunless] (1982)

마르케가 '병렬 편집'을 통해 사유했던 것은, 전쟁 이후인 현재에서 과거를 끌어들이는 방식이라고 본다. 여기엔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무언가 일어났다. 이 불연속적인 두 문장 사이의 간극을 채우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레네는 그것을 편집이라고 보았다. 상이한 두 요소를 하나의 영화로 조형하는 작업이 바로 편집인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이어붙인다고 해서 새로운 의미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상이한 것에서 어떤 유사성과 감정을 잡아내느냐이다. 레네는 그 사실을 로베르트 로셀리니의 [스트롬볼리](와 루키노 비스콘티의 [흔들리는 대지])과 아녜스 바르다의 [라 푸앵트 쿠르트로의 여행]을 보면서 배웠다.

로셀리니는 [이탈리아 여행]과 [스트롬볼리]를 통해 픽션을 연기하는 스타 잉그리드 버그만과, 다큐멘터리의 관점으로 담긴 이탈리아 시골을 영화 속에 배치하면서 영적인 구원과 낯섬이라는 감각을 이끌어냈다. 한편 바르다는 라 푸앵쿠르트를 여행하는 현대적인 성 규범을 받아들인 젊은 여행자 커플의 픽션적 시점과 가부장적인 삶을 사는 라앵쿠르트이라는 다큐멘터리적 시점을 병렬적으로 배치하면서 페미니즘적인 관점과 다큐멘터리적 관점을 결합하려고 했다. [밤과 안개]는 네오 리얼리즘과 [라 푸앵트 쿠르트로의 여행]의 성과를 발전시키는데 성공했고, 이는 레네와 마르케에게 큰 유산이 되었다.

앙드레 바쟁은 크리스 마르케가 '밤과 안개' 이후 1958년 내놓은 데뷔작 '시베리아에서 온 편지'라는 기행문 다큐멘터리를 분석하면서 '영화에 의해 다큐멘트된' 에세이며,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독특함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병렬 편집'이라는 개념으로 구체화했다. 바쟁이 지적한 병렬 편집은, '밤과 안개'가 크리스 마르케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보여준다. 알랭 레네가 밤과 안개를 편집하면서 도입한 두 개의 시공간의 병렬적 배치는 특정 공간에 속한 개인이 다른 시공간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 설명하는 예라고도 할 수 있다. 알랭 레네가 [밤과 안개]와 [석상 역시 죽는다]에서 도입했던 병렬 편집의 가능성을 픽션의 영역에서 실험했다면, 크리스 마르케는 다큐멘터리의 영역에서 발전시켰다고도 볼 수 있다.

'시베리아에서 온 편지' 이후 크리스 마르케를 주목받게 만든 단편은 바로 [환송대 La Jetee]라는 단편 영화였다. 크리스 마르케가 만든 첫 픽션 영상물인 이 영화는 그러나, 활동사진Motion picture가 아니다. 크리스 마르케는 '포토 로망'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마치 사진 슬라이드처럼 영화를 만들었다. 파리에서 핵폭탄이 터지고, 그동안 알고 있던 문명이 멸망한다. 지하로 숨어든 사람들은 한 남자를 찾아낸다. 이 남자는 핵폭탄이 터지는 순간, 공항 환송대에서 보았던 한 여자의 이미지에 집착한다. 시간 여행하는 약을 먹게 된 남자는 이미지의 근원을 찾아 시간 여행을 하게 된다.

[환송대]가 흥미로운 이유는, 기억 이미지의 근원을 찾기 위한 여정 전체가 멈춰진 사진으로 이뤄진다는 점이다. 중간에 등장하는 한 순간을 제외하고, 영화는 정지된 사진을 영화적 샷 구조처럼 배치한다. 이 정지된 이미지 속에서 끊임없이 기억을 찾으려고 한다. 이때 크리스 마르케는 말한다: "일상적인 것은 일상적인 순간에서는 아무것도 추억되지 않는다. 나중에 그 순간의 상흔들을 보여줄 때 비로소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그가 보았던 얼굴은 전쟁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평화의 모습이었다. (중략) 다가올 광기를 버텨내기 위해 부드러운 순간을 만들어낸 것일까?" 라카프라식으로 말하자면 환송대의 남자는 현재를 지배하고 있는 멸망의 풍경으로 대표되는 1차 기억을 극복하기 위해 1차 기억 직전에 있던 여인의 얼굴이라는 파생된 1차 기억을 만들었던 것이다. 약을 먹고 시간 여행을 하는 것은, 그 1차 기억을 쫓아가 2차 기억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이다.

남자가 시간 여행을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남자는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른다. 남자의 과거에서 여자는 한 순간의 강렬한 이미지만으로 남은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이미지만으로는 기억은 온전히 보존할수 없다. 그렇기에 남자는 과거로 돌아가 여자를 만나면서 구체적인 기억을 만들어야 한다. 일례로 여자는 남자를 보고 유령이라고 말하는데, 반대로 보자면 여자야말로 유령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남자가 사는 파괴된 현재에서 여자는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자는 절멸의 순간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그렇기에 남자는 자신이 살아가는 현재에서 여자를 찾지 않는다. 대신 약과 시간 여행이라는 과학적/SF 장르적 수단을 통해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1차 기억의 순간으로 돌아가 자기 방식으로 2차 기억으로 재구성하려고 한다. 이 2차 기억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는, 여자로 대표되는 절멸의 순간에서 살아남지 못한 자들을 기억하려는 남자의 절박한 시도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시도는 분절적인 순간들로 표출된다. 홀린듯한 만남에서 여자의 이미지는 조각난 채로 남자의 체내로 흡수된 뒤, 재구성된다.

마르케는 이 디테일이 확장되가는 과정을 다큐멘터리 사진의 방향성과 겹친다. 남자가 여자를 만나는 과정에 담긴 파리의 풍경은 ([아름다운 5월]이 그랬듯이) 1960년대 프랑스 파리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영화가 발표되고 시간이 많이 지난 시점에서 보자면, [환송대]는 1960년대 프랑스 파리를 기록한 횡단면이다. 1960년대가 지나가버린 미래에 살고 있는 관객은 그 시절과 함께 호흡할 수 없지만, 크리스 마르케가 35mm 필름 위에 남긴 사진을 통해 어땠을지는 상상할 수 있다. 중간에 등장하는 박물관 시퀀스는 즉물적으로 남아있던 트라우마의 기억을 스스로의 선택과 만남으로 2차 기억으로 재구성하려는 남자, 나아가 영화의 의도를 은유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 사진들은 SF 픽션 장르인 디스토피아라는 틀로써 재구성되고 있다. [환송대]는 1960년대 파리라는 공간을 두 가지 관점으로 보길 관객들에게 요청한다. 하나는 이전에 있었던 전쟁을 서서히 잊으며 평온한 일상을 누리는 현실의 파리, 또 하나는 이미 일어난 가상의 전쟁으로 파괴된 미래의 파리. 이 단편을 보면서 어딘가 2차 세계 대전 시절 파리를 연상했다면, 정확히 본 것이다. 마르케는 SF 장르를 인용하면서 과거의 한 순간이 미래의 한 순간이 될수도 있었다고, 혹은 그 역으로 전쟁으로 파괴된 2차 세계 대전 시절 파리에 대한 기록이 될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다. 1차 기억을 2차 기억으로 재구성하기 위한 시도는, 과거의 순간을 반복하지 않고 나아가고자 하는 시도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과 관계는 희미해지고, 아름다움과 파괴에 대한 시적 우울함은 1960년대 파리와 도래할지도 모르는 파국의 미래를 상상케 한다. 이런 이중화 작업은 후술할 [태양 없이]의 중심이 되는 영상과 음향의 재조립, 기계적 장치를 통한 기억의 재구성에 큰 단초가 되고 있다.

여기서 질문이 하나 더 생긴다. 결국엔 끊어질수 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 남자는 왜 여자에게 다가가려고 하는가? 서사에서는 생존의 수단이라고 설명한다. 남자를 조종하는 의사와 과학자들은 생존을 하기 위해 과거를 기억시키려고 한다. 하지만 남자에겐 의사와 과학자의 의도를 뛰어넘는 좀 더 본능적인 이유가 있다. 그것은 생의 에너지에 대한 갈망이다. 연출에서 마르케는 좀 더 흥미로운 이유를 배치해둔다. 남자를 지배하고 있는 기억 이미지의 주인공인 여자는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흐르는' 자다. 침대에 누워서 미소지으며 카메라/남자를 바라보는 여인의 모습은, 사진이 아니라 영상으로 이뤄져 있다.

스틸 샷으로만 이뤄진 영화의 구조를 생각해보면, 남자가 왜 여자의 얼굴을 떠올리려고 하는지 알 수 있다. 그것은 움직임Motion이 가지고 있는 행복함으로 다가고자 하는 본능적인 발버둥이다. 파괴된 세상에서 이전에 남아있던 움직임을 포착하려는 집착은, 남자가 여자로 대표되는 과거의 행복함에 어떤 죄책감이 있다는걸 보여준다. 이 집착은 영상의 움직임에 대한 영화광적인 매혹을 담고 있기도 하다. 실제로 마르케는 어린 시절 보았던 마르크 드 가스틴의 'La Mervilleuse vie de Jeanne d'arc'라는 무성 영화에 출연한 시몬 쥬느비에브라는 배우에 매혹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마르케의 사진집 [북녘 사람들]에서도 조선 여인의 얼굴을 담은 사진에 대한 묘사가 있었던 걸 보면, 마르케는 여성의 얼굴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에서,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근원적인 에너지를 찾았던 걸로 보인다.

하지만 마르케는 생에 대한 로맨티시즘적 감상과 낙관주의에 머무르지 않는다. 오히려 움직임을 담은 생에 대한 발버둥이 좌절되는 것으로 영화를 마무리짓는다. 로버트 하인리히의 '당신 모두 좀비'를 연상케하는 [환송대]의 순환 고리는 우로보로스적 비극이다. 영화는 시간을 탈출하는 방법은 없었으며 '자신을 사로잡는 순간'이 오히려 죽음의 순간이였다는걸 밝히면서 끝난다. 여인의 움직임이 비극과 파괴의 또다른 1차 기억에 종속되어 있다는 걸 알았을때 남자는 자신의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마르케가 생각하는 역사의 비극이란, 결과에 속한 사람이 자신을 만들어낸 원인과 과정을 바꾸지 못하는데서 시작된다. 시간 여행은 실패로 돌아가고, 남자는 끝내 미래의 여행자들에 속하지 못한다. 그저 자신이 속한 현재의 지도자들이 보낸 암살자를 통해 과거의 순간에서 죽음을 맞게 된다.

라카프라는 1차 기억과 2차 기억이 순수한 형태로만 이뤄질수 없고 트라우마를 떠올리려는 시도는 2차적일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환송대]는 1차 기억을 2차 기억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자신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고자 하는 사람으 이야기다. 과거에 대한 기억을 만드려는 2차적인 시도를 파괴된 현재가 방해하면서 무위로 돌아간다는 결말은, 현재에 대한 마르케의 인식이 아도르노적 부정성으로 이뤄져 있다는걸 알 수 있다. 당시 프랑스는 식민지에 대한 제국주의적 탄압이었던 알제리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상태였고, 2차 세계 대전에 대한 객관적 재평가는 드골 정부의 강력한 우파 정권의 힘 앞에서 뒤로 물러난 상태였다. 드골은 표면적으로는 레지스탕스를 우대하고 나치 부역자들을 처단했지만, 중요한 자리엔 나치 부역자들을 받아들였다. 나아가 알제리 같은 식민지들을 탄압하고 착취하는 것으로 구체제를 존속시키려고 했다.

[환송대] 직후 만든 [아름다운 5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나레이션은 "감옥이 있는 한 세상은 행복할 수 없다." 였다. 시간의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끝나는 [환송대]의 순환적 비극은 아도르노가 부정성 미학에서 주장했던, "고통의 언어를 통해서 화해되지 않는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라는 슬로건과 맞닿아있다. 알제리 전쟁과 과거 인식을 방해하는 내부의 파시즘이라는 당시 프랑스의 부정성은 단 한 순간의 행복에 다가가려고 하는 남자를 암살하는 남자의 시대로 표출되고, 또다른 비극의 순환 고리를 만든다. 마르케는 SF 장르의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으로 현재를 파괴된 순간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이 어떻게 1차 기억과 2차 기억을 재정립하는 시도를 방해하는지 [환송대]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크리스 마르케의 [환송대]는 시간 여행이라는 장르적 틀과 움직임에 대한 인식으로 기억을 재인식하려는 시도와 좌절을 그렸으며, [태양 없이]는 기계적 조작을 통한 추상화와 비디오 게임적 구성을, 다양한 공간과 시간에 남아있는 시간의 현기증을 포착하려고 했다. 마르케의 시도들은 병렬 편집이라는 개념에서 출발해 1차 기억을 재구성하려는 2차 기억의 방법론에 대한 고찰이기도 하며, 소비에트 몽타주 이론가들의 찬란한 자유연상적 성과를 이어가려는 시도기도 하다. 그리고 이 사유 과정에서 크리스 마르케는 이미지를 추상화하면서 동시에 역사/사회적 의미를 잃지 않는 정교한 방법론에 관심을 보였던 것 같다. 실제로 1995년 마르케는 역사 게임을 만드는 게임 디자이너의 나레이션으로 이끌어가는 [레벨 파이브]라는 작품으로 사유를 확장시킨다. 또한 말년의 크리스 마르케는 유튜브와 비디오 영상에 관심을 기울여 짧은 클립들을 올리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 그 점에서 크리스 마르케는 라카프라가 주장했던 "기억과 역사는 상호보완적인 관계며, 이 관계망 전체를 성찰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방식에 관심을 기울였던 영화 감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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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 지구 [Na srebrnym globie / On the Silver Globe] (1988)

한 영화에 대해 리뷰를 쓰면서, 제작 당시 상황은 영화 속 샷과 시퀀스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유추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긴 하다. 현장에서 누가 싸웠다던가, 이 장면은 어떤 과정으로 찍었고 어떤 난항을 겪었는지 같은 정보는 샷과 시퀀스의 의중을 파악할 단서와 더불어 논리의 근거를 더해준다. 하지만 대부분의 영화에서 제작 당시 상황은 앞으로 펼쳐질 서사에 관여하지 않는다. 현실을 허구의 영역으로 끌어오는 순간 영화는 메타픽션의 미로가 되버린다. 그럼에도 제작 당시 상황을 영화로 끌고 왔다면 그래야만 했던 사정과 고백이 담겨 있다고 봐야 한다. 가장 유명한 예로는 오손 웰즈가 있다. [위대한 앰버슨가]를 기점으로 만들어진 웰즈의 영화들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무자비한 편집 가위와 관객들의 무관심 속에서 투쟁해야 했던 웰즈의 입장이 반영되어 있다.

안제이 줄랍스키의 [은빛 지구]도 이 부류에 속한다. 영화가 시작하고 얼마 안되서 줄랍스키는 말한다. 이 영화는 완성되지 못한 영화고, 지금에서야 이런 형태로 내놓을 수 밖에 없다고. 이 변명이 펼쳐지는 쇼트들은 1988년의 폴란드다. 사실 이 영화는 1970년대 중반에 찍었다. 프랑스에서 만든 [중요한 것은 사랑이야]로 폴란드 영화계에서 다시 기회를 잡은 줄랍스키는 할아버지 예지 줄랍스키의 SF 소설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기로 했다. 하지만 공산 독재 정권 치하에서 [은빛 지구]는 만들 수 없는 영화였다. (다른 폴란드 영화인 리샤르드 부가이스키의 [신문] 역시 80년대 초에 촬영했다가 90년대 들어서야 공개할 수 있었다.) 영화 촬영은 중단되었고, 줄랍스키는 폴란드를 떠나 근 10년 이상을 해외에서 활동해야 했다. 1988년의 폴란드를 담은 인서트 샷들은 기어이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지나가버린 시간에 대한 외계인 안제 줄랍스키의 한탄이다. 줄랍스키는 말한다: 1/5이 날아간 영화를 완성된 영화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럼에도 완성해야 하는 걸까?

그래서 [은빛 지구]는 어떤 영화냐고 묻는다면, 행성 개척 대서사시라고 부를만한 SF 영화다. 일련의 우주인들이 지구를 떠나 외계 행성에 내린다. 하지만 고된 여정 끝에 우주인 일부가 사망하고, 남은 사람들은 토착민들이 사는 해변가에 정착한다. 그들의 2세는 무서운 속도로 자라지만 지구의 문명을 전혀 알지 못하고 토착민들과 함꼐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 원초적인 삶을 살아간다. 세월이 흘러 남은 우주인들은 전부 죽고, 그들의 신호를 받아 우주인 마렉이 착륙한다. 정착민들은 그를 신화에 등장하는 구원자로 떠받든다. 마렉은 그 말을 믿지 않지만, 운명은 마렉을 구원자의 길로 이끈다. 

하지만 [은빛 지구]를 보고 난 뒤 서사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대사는 절반 이상이 미친 전도사의 방언이나 다름없고, 인과 관계는 숭숭 빠져있다. [은빛 지구]의 서사는 강렬한 상징과 인물들의 폭력적인 행동으로 이끌려가지만, 정작 그 행동들이 어떤 의미인지 설명하지 않는다. 그나마 설명해줄것 같은 부분들은 날아가버렸다. 사실 대사나 장면 설계들을 보면, 이 영화에서 어떤 정합성을 기대하면 안된다는걸 알게 될것이다. [은빛 지구]는 표면상 SF를 표방하고 있지만, 장르를 다루는 태도는 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처럼 상징으로써 기능할 뿐이다. 관객들이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은, 지구가 배경이었다면 불가능한 (하지만 역설적으로 지구 한 구석에서 촬영한) 비주얼과 설정 뿐이다. 애시당초 걸작이 될 수 없었던 무모한 영화였지만, 검열로 더욱 기괴해져버렸다.

의외로 주제를 파악하는건 어렵진 않다. [은빛 지구]는 노골적인 예수 이야기다. 줄랍스키는 딱히 숨기지도 않았다. 마렉을 향한 구원자 운운이라던가 마지막에 등장하는 십자가 상징에서 예수를 떠올리기 어렵지 않다. 일종의 제의적인 형태로 이뤄지는 영화라고도 할 수 있겠다. 다만 이 제의를 다루는 줄랍스키의 태도는 반종교적이다. [은빛 지구]의 세계는 주류 종교가 내세우는 성인의 헌신과 신성의 아름다움보다는 주류 종교가 들추고 싶지 않았던 샤머니즘과 원시적인 폭력으로 가득차 있다. 꼬챙이에 사람을 앉혀놓는 장면, 기괴한 원시 부족, 방언을 내뱉는 무녀의 존재, 악마를 상징하는 기괴한 생물... 요컨데 줄랍스키는 종교적 믿음이나 논리 자체를 매우 폭력적인 무언가로 보고 있다.

원작이 되는 예르지 줄랍스키의 [은빛 지구]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예스러운 세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다는걸 고려해보면, 영화 [은빛 지구]의 그로테스크함은 안제이 줄랍스키만의 폭력적인 상상력에서 뻗어나온 괴물이라 할 수 있겠다. 군무와도 같은 부족의 춤, 대체 어떻게 발견하고 만든건지 궁금한 풍광과 의상 및 세트 디자인, 오버액팅을 불사하는 인물들의 열정적인 연기는 [은빛 지구]의 그로스테크 미학을 보여주고 있다. 1980년대 초 만들었던 [퍼제션]의 간음하는 촉수괴물에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수도 있을 것이다. 이 반대편에서 줄랍스키는 순수한 사랑을 꺼낸다. 하지만 줄랍스키의 사랑은 순수하되 무지와 두려움에 맞서듯이 미쳐있다. 이처럼 줄랍스키는 세상이 극단으로 이뤄져 있다고 본다. 그 극단에서 인물은 중간을 택할 수 없다. 사악해지거나 순수함에 미쳐버리거나를 선택해야 한다.

[은빛 지구]는 줄랍스키의 극단과 광기가 어디서 왔는지 확인할 수 있는 영화 중 하나기도 하다. 줄랍스키는 폴란드 독재 정권에 분노와 좌절감을 느끼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망명 폴란드 감독들의 영화들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의 [문라이팅]이 대표적일 것이다.)이 그렇듯이, [은빛 지구]에도 폴란드 지식인의 분노와 체념의 정서가 녹아 있다. 먼저 영화에서 지구를 떠난 것은 지도자나 노동자도 아닌 지식인이다. 이 우주인들에게서는 어떤 탈출이나 도피 욕망이 느껴진다. 이 우주인들은 사랑을 이룰수 없는 지구를 떠나 지구와 동떨어진 행성에서 사랑을 찾고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우주인의 후손들은 지구를 잊어버린채 광기의 어둠 속에서 허우적댄다. 

이들을 구원할 수 있는 자는 그들의 기원을 알고 있는 또다른 지식인 마렉이다. 마렉은 그들을 이끌고 바다 너머의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하지만, 이 시도 역시 실패한다. 줄랍스키는 실패로 점철된 신화에서 구원은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서만 이뤄질수 밖에 없는것인가라고 묻는다. 하지만 그 물음에 줄랍스키는 답하지 못한다. 줄랍스키가 결말로 생각한 마렉의 동료가 죽는 장면은 오로지 나레이션 음성으로만 진술될 뿐이다. 질문에 대한 대답을 담았어야 할 영상의 부재는, [은빛 지구]에 아로새겨진 폴란드 역사의 비극을 상기케 한다. 

이제 메타 영화적인 부분을 살펴보자. 일단 [은빛 지구]는 카메라의 시선을 다루는 영화다. 영화 속 인물들은 자신을 찍고 있는 카메라를 분명히 인지하고 있고, 종종 카메라를 전달하거나 소유권에 대해 얘기한다. 초중반부 줄랍스키는 카메라를 든 캐릭터의 성격을 카메라의 움직임에다 반영하려고 한다. 당연하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카메라는 문명의 관찰자에서 원시 부족의 본능으로 변모해간다. 디지털 카메라 시대 이전의 영화임에도, 무모할 정도로 막나가는 카메라 스턴트에 캐릭터의 개성을 부여하려는 시도는 경탄스럽다. 

여기다 줄랍스키는 자의식 똘똘 뭉치는 점프 컷을 활용하거나 의미없는 쇼트를 끼어넣는 것으로 카메라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곤 하는데, 이런 관점들은 영화의 신화적인 분위기와 충돌하면서도 묘한 영역을 남기곤 한다. 하지만 중반부 마렉이 등장하면서부터 이런 관점은 흐지부지 사라지고 오직 줄랍스키의 자의식만 남아있다는 점은 아쉽다. [은빛 지구]의 카메라 움직임은 대담하고 고심을 담긴 했지만 온전한 결과물가 되기엔 부족하다.

그 다음엔 영화 외적인 상황과 잘려나간 서사에 대한 고백이다. 이 고백은 폴란드 변사 나레이션의 전통을 빌려 전개된다. 폴란드를 포함한 동유럽권에서는 외국 영화를 상영하는 동안 남자 해설자가 모든 대사를 읽는 전통이 있었다. 줄랍스키가 맡은 나레이션은 그런 점에서 복합적인 의미를 띄고 있다. 일단 이 나레이션은 조국을 떠나 프랑스라는 타국에서 영화 감독으로 활동해야 했던 줄랍스키 자신의 정체성이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동안 타자로써 살아야했던 그는 고국 영화의 전통을 상기하면서, 자신이 폴란드인이라는걸 적극적으로 인식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 나레이션 전통이 외국 영화에만 한정되어 있다는 점은, 폴란드에서 버림받은 [은빛 지구]의 운명과 묘하게 연계되는 구석이 있다. 필름이 사라진 자리에 스틸 사진을 넣어서 만들수 있었음에도 줄랍스키는 1988년의 폴란드를 담은 영상을 기어이 쓴다. 이 선택은 어딘가 고집스럽고, 처연한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안제이 줄랍스키는 [은빛 지구]가 끝내 '폴란드 영화가 될 수 없었던 영화'라 생각하고 있다. 결국엔 날아간 필름 1/5는 돌아올 수 없으며, 다시 찍더라도 기존 분량과 어색함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줄랍스키는 그 깨달음을 1988년 폴란드라는 상황을 개입시키면서 드러낸다. 마치 제3자마냥 사라진 영화의 서사를 얘기하는 줄랍스키의 목소리가 쓸쓸하게 들린다면, 이 영화가 맞이해야 할 운명을 예감해서 아니였을까 싶다. 줄랍스키는 영화를 마무리짓고 쇼윈도 유리에 비친 자신을 보면서 "나는 안드레이 줄랍스키다."라고 선언한다. 마치 새로운 삶을 시작할 사람처럼. 물론 새로운 삶은 순탄치 않았고, 줄랍스키는 2015년 타계했다.

[은빛 지구]가 정상적인 제작 과정을 거쳐 공개되었더라도, 걸작이 되진 않았을것이다. 남아있는 필름엔 줄랍스키 개인의 자의식과 감정이 통제없이 넘쳐나고, 거대 서사를 다루는 영화들이 빠지는 단순화의 함정들도 보인다. 마지막 '나는 안드레이 줄랍스키다.'라는 다짐도 왠지 느끼하게 들리다면, 객관적 성찰과 자아도취의 경계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은빛 지구] 역시 다른 줄랍스키 영화들이 그랬듯이  천생 컬트 영화로 낙인찍혔을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은빛 지구]는 제1세계 컬트 영화들과 달리, 그런걸 허용할 수 없는 국가에서 태어났고 창작자는 처참하게 남겨진 필름을 수습해야 했다. 완성도와 무관하게 [은빛 지구]가 이상하게 슬프게 다가온다면, 어쩔수 없이 폴란드사의 부조리와 싸웠지만 끝내 패배한 개인이 보이기 때문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 패배는 폴란드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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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나잇 스페셜 [Midnight Special]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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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04 - [Deeper Into Movie/리뷰] - 머드 [Mud] (2012)

제프 니콜스의 SF라는 얘기를 들었을때, [미드나잇 스페셜]이 어떤 영화가 될지 조금 상상이 안 가긴 했다. 2007년 [샷건 스토리즈]에서 출발한 제프 니콜스는 기본적으로 지역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다. 그의 영화는 카와세 나오미나 스와 노부히로, 아오야마 신지처럼 어떤 지역을 떠나면 성립하지 않는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니콜스는 테렌스 맬릭이나 리처드 링클레이터 같은 희귀한 사례를 제외하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미국 중남부 서민-화이트 트래시들의 삶에 애정을 느끼고 거기서 출발한다. (심지어 아칸소는 맬릭이나 링클레이터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영역이다.) 아칸소 백인 하층민들을 소재로 삼았던 [샷건 스토리즈]와 [머드]. 오하이오와 버지니아라는 남부라는 문화적 친연성을 지닌 곳에서 영화를 만든 [테이크 쉘터]와 리뷰 예정인 [러빙]... 그가 지금까지 만들어왔던 영화는 영화 언어에 미처 포섭되지 않았던 문화와 역사가 담겨 있다.  그 점에서 제프 니콜스는 동시대 감독 중에서도 미국에서만 성립 가능한, 가장 미국적인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다. 그런 감독이 장르의 세계에 들어선다니 기대와 걱정이 앞설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드나잇 스페셜]은 생각보다 멀리가지 않았지만 상당히 넓어진 영화다. [미드나잇 스페셜]의 배경인 루이지애나 주는 전작들과 그렇게 떨어져 있지 않다. 하지만 이야기나 연출 면에서 니콜스는 장 르누아르부터 시작해 테렌스 맬릭으로 이어지는 유구한 자연주의 영화의 전통과 스티븐 스필버그와 존 카펜터 같은 장르 영화의 거장들을 만나게 하고 있다. 즉 지역 영화가 가지고 있는 디테일을 품고 탈지역적인 장르 요소들을 도입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그의 전작을 보지 못했거나 평범한 관객들이라면 [미드나잇 스페셜]에서 장르로 대표되는 탈지역적 요소를 먼저 발견하고 심심하게 여길 가능성이 높다. [미드나잇 스페셜]이 다루고 있는 장르적인 요소들은 너무나 구닥다리기 때문이다. 아니 시대가 언제인데 [E.T.]나 [스타맨]에 기독교 구세주 SF 설화를 도입하나? 비주얼은 왜 이렇게 안 멋져? 모름지기 SF 영화란 삐까번쩍 해야지! 이런 반응도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는 지극히 논리적인 선택이다. 상술했듯이 니콜스는 아직은 완전히 다른 공간으로 떠날 생각이 없이, 자신의 땅에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다. 즉 장르를 생각하고 지역을 생각하는게 아니라 지역에서 장르를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미드나잇 스페셜]은 지역이 품고 있는 문화를 장르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으로 장르 영화를 만든다. 그리고 그 지역은 바이블 벨트와 늪지대, 황량한 모텔과 주유소, 신흥종교단체로 가득차 있다. [미드나잇 스페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장르 영화보다는 지역 영화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니콜스는 장르를 사랑하면서도 자신이 지역 영화를 만든다는걸 명백히 인식하고 있다. 

그 결과 [미드나잇 스페셜]은 심심한 장르 설정과 익숙한 추격전 플롯에서 불구하고 단단하게 뿌리박은 영화 언어 속에서 생경할 정도로 낯섬과 아름다움을 전해준다. 그것은 대부분의 장르 영화들이 가볍게 여겼던 '공간'의 특성 (이는 지역적인 특성이기도 하며 시네마스코프 화면비와 같은 영화적 특성이기도 하다.) 이 강하게 대두되어서 생기는 부분도 있으며 (이 부분은 분명 존 카펜터에게 배운 것이다.), 한국에서는 생소한 미국 남부 고딕의 전통이 새로운 활력을 얻었기에 생기는 부분이 있다.

사실 이런 "공상과학"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비주얼 설계라는걸 생각해보면, [미드나잇 스페셜]이 보여주는 비현실적인 비주얼은 어떤걸 접하고 생각했기에 저런 리듬의 저런 비주얼이 가능한지 묻고 싶을 정도다. 어떤 부분은 바이블 벨트에서 자란 지식인이라는 이점에서 비롯되는 부분도 있다. 영화 마지막에 등장하는 특정 종족의 묘사는 분명 성경에서 비롯된 천사의 이미지를 연상케 한다. 하지만 어떤 장면은 단순히 문화적 이점이라고 넘길 수 없는 부분도 있다. 주유소 시퀀스에서 알튼이 기적을 부리는 장면이 그렇다. 느긋하면서도 갑자기 비현실적인 상황이 관객 앞에 툭 떨어지는 이 시퀀스는 경이롭다.

이런 태도는 영화 속 샷과 몽타주를 구성하는 방식하고도 연관된다.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들이 그렇듯이 제프 니콜스는 서사에 따라 차곡차곡 누적되는 샷과 몽타주의 구조를 믿는 고전적인 부류의 영화 감독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뉴욕 감독'이였던 제임스 그레이랑 달리 니콜스는 미국 남부 영화인이기에 가능한 느긋한 리듬이 있다.  도입부는 니콜스만의 느긋한 리듬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시드니 루멧의 [허공에의 질주]가 그랬듯이 우리는 로이와 알튼 일행이 누구이며 무엇 때문에 도망가는지를 알려면 기다려야 한다.

이는 속도를 중시하는 장르 영화로써는 그렇게 효율적인 방법은 아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미덕이 있다. 니콜스는 자신만의 샷과 몽타쥬 방식으로 천천히 쌓아올리면서 인물들의 불안과 상실, 기쁨과 긴장 같은 감정들은 신중하게 끌어낸다. 그렇기에 니콜스가 선택한 샷엔 신기할 정도로 헤아릴수 없는 인간을 위시한 피사체에 대한 강력한 믿음이 가득하다. 마이클 섀넌을 비롯한 연기진들의 연기는 그런 확고한 믿음으로 세워진 샷에서 시작한다.

그 점에서 그는 F.W.무르나우의 [선라이즈]와 장 르누아르에서 발원한 자연주의/휴머니즘 영화의 충실한 후예기도 하다. 우직한듯 보여도 [미드나잇 스페셜]의 인물 관계나 묘사는 어떤 위악이나 아이러니가 담겨있지 않다. 알튼, 로이와 사라의 가족 관계라던가 어딘가 어벙해 보이는 연구원 폴 세비어, 회의주의자 루카스 모두 단단한 존재들이다. 제프 니콜스의 영화가 가지고 있는 강점 중 하나가 바로 위악이나 비극으로 빠질 수 있는 캐릭터에게 단단한 뿌리를 부여한다는 점이다. 

[미드나잇 스페셜]은 아마도 니콜스의 바이블 벨트적인 성향을 가감없이 고백하는 영화기도 할 것이다. 상술하기도 했지만 기적을 일으키는 알튼과 알튼이 속한 특정 종족은 성경에 등장하는 천사와 사도, 신을 떠올리게 한다. 그 점에서 무신론자에게 [미드나잇 스페셜]은 거슬릴 수도 있다. 하지만 [테이크 쉘터]에서 니콜스는 지식인으로써 현실을 근심하면서도 미국 남부인 특유의 독실하게 뿌리박힌 어떤 '믿음'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고자 했다는걸 잊으면 안된다. 

누설 때문에 적을 수 없지만 [미드나잇 스페셜]은 구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던지는 영화기도 하다. 인간 관계에서 이뤄지는 믿음과 사랑에서 출발해 '믿으면 지옥 같은 이 세상에서 구원받아 천당간다' 식의 구약식 죄의식과 맹목적인 믿음을 부정하고 이 지구가 그렇게 나쁜 공간이 아니라는 믿음으로 새로운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이 점에서 [미드나잇 스페셜]은 '백인의 의무식 구원주의'에 빠진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와 다르다. 제프 니콜스의 지역 영화적 특색은 여기서 다시 한번 발휘한다. 이 땅을 떠나지 않더라도 행복해질수 있다고, 그건 당신들도 마찬가지라고. 니콜스는 그렇게 믿고 있다. 그리고 그 믿음은 루카스 같은 회의주의자/무신론자인 글쓴이마저도 긍지를 가지게 할 정도로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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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라리스 [Солярис / Solaris] (1972)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는 물에 흔들리는 풀들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이 인상적인 이미지야말로 [솔라리스]의 모든 것을 집약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 영화가 곧 수면에 분명하게 비치지만 다가갈수 없는 이미지에 현혹되는 과정을 다룰것이라는 암시를 담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곧이어 등장하는 주인공 크리스의 얼굴은 초췌해 보인다. 크리스는 곧 연못을 지나쳐 집에 가려다가 잠시 연못에 들러 손을 씻으며 곧 수면에 잔잔한 파장이 퍼진다. '집으로 향하던 도중' 수면에 분명하게 있는 이미지에 접촉하지 못하고 그저 적시기만하는 이 장면에서 [솔라리스]가 집과 물이라는 두 이미지가 섞이고 밀어내는 과정을 주 갈등 소재로 다룰 것이라는 걸 보여주고 있다.

도입부로 다시 돌아가보자. 크리스가 연못을 지나쳐 집으로 돌아갈때 타르코프스키는 불쑥 말을 등장시킨다. 영화 흐름상 이 말의 등장은 어떤 개연성을 가지고 등장하는게 아니다. 정말 뜬금없을 정도로 불쑥 등장하는 이 말은 당혹감과 동시에 뭔가 모를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 타르코프스키는 이 경외심에 대한 힌트를 솔라리스의 이현상과 크리스의 캐릭터를 설명한 다음 장면에 집어넣는다. 여자와 아이가 말을 보러가던 도중 아이는 '저 안에서 날 쳐다보고 있는게 뭐냐'고 하면서 두려워한다. 여자는 이에 아이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을 보며 순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아이와 여자는 마굿간에서 완전히 다가가지 않고 '조금' 떨어진채 그 말을 보고 있다.

이 장면은 분명 구체적인 복선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 후로도 저 말이 실은 솔라리스의 근원이였다 같은 전개는 나오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전개와 상관없이 등장하는 이 말이야말로 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 (참고로 렘의 [솔라리스]가 아니다.)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것인가에 대한 복선이라 할 수 있을것이다. 말이 인간과 종이 다른 동물이라는 사실을 주지해보면, 여자와 아이가 말을 보러 가는 과정 자체가 솔라리스로 가는 크리스를 은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크리스가 앞으로 만날 미지의 존재 솔라리스는 분명 두려울지 몰라도 위험한 존재는 아니며 일종의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다. 하지만 그 과정은 진정한 소통이 아닌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응시'와 '관찰'로 끝날 것이다. 이런 태도는 렘의 [솔라리스]에서도 비롯된 거긴 하지만 논리적인 대화나 설명이 아닌 (물론 영화도 렘이 제공한 정보를 읊긴 하지만 타르코프스키의 카메라는 그렇게까지 그 정보엔 흥미있어 보이진 않는다.) 시적인 이미지와 상징에 치중한다는 점에서 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는 소설과 다른 독자적인 노선을 정립한다.

그렇기에 크리스가 솔라리스 우주 정거장에 도착한 순간부터 [솔라리스]는 호러 영화가 될 수 밖에 없다. 기억을 복사해 방문객을 보내는 솔라리스라는 존재는 말과 달리 인간의 지성 너머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얼핏 스쳐지나가는 미지의 존재, 으스스한 우주 정거장.... 알랭 레네의 [지난해 마리앵바드]처럼 솔라리스의 우주 정거장에 등장하는 존재들은 몽유병 환자처럼 흐느적거리며 기억을 모사하는 유령들이다. 심지어 인간들조차도 그 몽유병 속에 푹 잠겨 있다. 이런 몽유병 속을 해메다 자살해버린 기바리안이 물리학자라는 사실이 재미있는데 물리라는 분명한 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으로써는 도무지 이해할수 없는 타자의 영역이기에 미쳐버렸다는 추론을 해볼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타르코프스키가 묘사하는 솔라리스의 "방문객"은 SF의 논리보다는 호러 영화의 논리에 가깝다. 물론 렘의 원작에서 탄탄하게 세워진 솔라리스의 현상에 대한 설명 때문에 여전히 SF의 영역에 몸을 담그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영화가 묘사하는 '타자로써 유령'의 정점은 크리스의 죽은 아내 하리다. 하리가 등장하면서 이제 솔라리스라는 존재가 가져오는 경외와 두려움은 단순한 지식이 아닌 분명한 육체적인 존재감을 지닌 대상으로 물화된다. 당연히 크리스는 하리를 두려워 내친다. 솔라리스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해오던 일을 한 것이지만, 크리스의 입장에서 하리는 죽음과 상실이 가져다주는 고통과 슬픔를 환기시키는 존재이기에 당연한 반응이라 할 수 있다. 심지어 크리스는 하리가 등장한 이후로 한동안 심하게 앓는다. [솔라리스]가 가져오는 몽유병적인 트랜스에 크리스도 서서히 잠식해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솔라리스가 물의 이미지로 뒤덮여 있다는 것도 영화 초반에 등장했던 연못과 수면의 이미지와 연관해서 볼 수 있을 것이다. 타르코프스키는 물이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죽음과 재생의 이미지를 가져와 영화의 감성을 푹 잠기게 한다. 이런 축축히 젖어들어가는 감성은 하리 역시 그런데 크리스가 하리를 받아들인 이후 영화의 슬픔은 하리 그 자체로 전이되어간다. 처음엔 단순하게 크리스의 기억에 있는 하리의 기억과 감정을 흉내내는 것에 불과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하리, 아니 하리를 흉내내고 있는 솔라리스의 정신은 괴리감에 빠진다. 자신이 정말로 느끼는 것이 하리의 감정인지, 아니면 그 기억에 있는 순간을 흉내내는 것인지. 반대로 크리스는 그런 흉내조차도 받아들이고 심지어 후반부에는 모종의 이유로 죽어가고 있는 하리를 살리기 위해 노력한다. 크리스와 하리의 이런 위치 변화는 기억을 지식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어떤 감정으로 받아들이는 괴리를 담고 있다. 영화는 그런 철학적인 사유와 문제들를 장황할 정도로 느린 템포의 화면에 담아낸다.

결국 영화는 그 대답을 유보한다. 영화의 절정 부분에서 하리는 갑작스럽게 사라지고 솔라리스는 인간의 뇌 엑스레이를 통해 인간의 정신 구조를 알아차리면서 더 이상 방문객을 보내지 않게 된다. 표면적으로는 봉합된 셈이다. 하지만 이 봉합은 완벽한 해결이 아니라 그저 일시적인 유보로, 그동안 솔라리스가 남긴 감정의 진폭은 여전히 남아 있다. 지구로 돌아와서도 슬픔과 유약한 늪에 빠져 있던 크리스는 여전히 환영을 본다. 지구로 돌아가기 직전 크리스는 어머니의 환영을 보는데, 여기서 크리스는 자신의 손을 어머니가 씻어주는 경험을 한다. 그리고 다음에 이어지는 결말은 아버지에게 돌아가는 장면인데, 타르코프스키는 이 장면을 매우 이상하게 처리한다. 마치 솔라리스 속에 그 집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 두 가지 가족에 대한 이미지는 [솔라리스]가 어떤 대상에 집착하고 있으며 동시에 인간의 무의식 속에 깊이 자로잡힌 두 개의 이미지를 제시하고 있다. 어머니와 아버지. 존재하지 않는 어머니-여성이 서사와 무관한 순간에 정화의 이미지로 등장한다면 현실에 존재하는 아버지는 반사와 고립의 이미지로 제시된다. 영화의 주인공이 남성이여서 그런것일까? 어머니는 현재 시간에 존재하지 않고 다른 필름으로 물화된 세계에 존재하지만 아버지는 현재 시간에 분명한 이미지로 등장하면서도 갇힌것처럼 묘사된다. 이 두 이미지의 대립은 생명의 역사에서 두 성이 어떻게 무의식을 지배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합일점은 보이지 않고 남성 주체는 그 속에서 우울하게 헤맬 뿐이다. 그 점에서 [솔라리스]는 하드한 SF의 세계로 풀어내는 사고의 세계가 아닌 타르코프스키의 특유의 모성을 향한 멜랑콜리로 뒤덮이게 된다. 이미 없고 돌아갈수도 없지만 영원히 갈구하는 대상을 향한 오싹한 연가라고 할까. 물론 이 연가의 기반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이나 [신곡]과 같은 서양 고전들도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렘의 비전이 강하게 남아있기에 [솔라리스]는 냉철한 논리 위에 세워진 시에 가까워진다. 그 논리가 영화 내에서 강하게 와닿지 않다는 점에서 타협의 흔적이 있지만 분명한 자기 논리를 가지고 흘러가는데는 충분한 근거를 제공해준다. 분명 타르코프스키는 SF라는 장르의 논리성에 대해선 관심을 가지고 있진 않지만 적어도 그 장르를 아예 해칠 정도로 멍청한 사람은 아니였기에 이런 분위기가 만들어 진걸지도 모른다. 물론 렘의 원작 자체가 냉정하긴 해도 그의 작품치고 로맨틱하다는 점도 인정해야 되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결벽증적으로 당대 SF 유행인 번쩍거리는 묘사를 따르지 않고 낡은 고건물을 연상케하는 비주얼을 만들어낸 미술팀의 공로도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솔라리스]는 그 점에서 훌륭한 논리를 지닌 SF라고 하기엔 갸웃거리긴 해도 인상적인 SF 영화라는데는 이견이 없을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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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드롬 [Videodrome]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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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어렸을때, TV에서 영화를 소개시켜주는 프로그램를 열심히 본 적이 있었다. 그 때 소개해 준 영화 중 가장 충격적이였던게 무엇이였냐 물으면, [비디오드롬]을 들 수 있다. 뭣도 모르는 초등학교 꼬마 남자애에게 살아 숨쉬는 비디오나 얼굴에 TV를 갖다대는 장면은 쇼킹했다. 그 후 영화에 눈 뜨면서 이 영화와 감독 데이빗 크로넨버그는 일종의 금기 및 신비로운 존재로 남겨져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 감상한 바로는 그런 금기와 신비로움이 절대로 허투로 나온 게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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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주인공 맥스는 평범하지만 자신만만한 인물이다. 그는 자극을 팔아 장사를 하고 그것에 대해 자기합리화한다. 그 합리화에는 나름대로 자기 논리가 서있는데, 그가 운영하는 유선 방송은 자극적인 포르노와 다양한 프로그램을 시청자들에게 선보이고 있으며 이로 인해 자극을 원하는 사람들이 그의 방송에 열광하고 있기 때문이다. 맥스는 시청자들을 보며 그들이 자기 손아귀에 있다고 생각하며, 자신은 그들을 관찰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비디오드롬에 집착한 이유는 장사가 될 줄 알아서이며, 그 잔인함에 호기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비디오드롬을 접하면서 그는 자극에 빠져들어가고 결국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며 그의 신체와 정신은 기괴하게 변형되기 시작한다. 이와 동시에 그의 자신감도 끔찍하게 파괴되기 시작한다. 그의 자신만만함은 결국 착각이였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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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스의 변형은 일종의 제의 같다. 처음엔 환각을 보는 등, 정신적인 부분에서 시작되지만 점점 배가 비디오 데크처럼 갈라지고, 총과 손이 결합된다. 자극이 강해질 수록 그의 변형은 가속화 된다. 그리고 그 결말은 파멸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비디오드롬과 관련된 인물은 맥스와 비슷하게 파멸을 맞이한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인류보완계획처럼 인류를 새로운 종으로 진화시키고자 하는 할란과 베리는 결국 맥스에게 죽임을 당하고, 순수하게 중독되었던 브라이언과 닉키 역시 비디오드롬 속에서 죽는다. 결국 미디어에 중독된 인간의 결말은 파멸뿐이다. 맥스의 진화 역시 파멸을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 [크래쉬]의 등장 인물들이 자동차 충돌에 매달리지만 진정한 소통 없는 상태에서 어정쩡한 결말을 맞듯이, 새로운 자극과 신체는 인간을 궁극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한다.

나는 이 영화가 무척 잔인할 것이라 생각했다. 막상 보니 잔인하긴 하지만, 그럭저럭 소화 가능했다. 25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이 흘러서 일까? 하지만 이 영화의 잔인함은 무언가 달랐다. 불쾌하면서도 음산한 기운을 가지고 있었다. 애니매트로닉스 기술로 찍힌 H.R.기거 풍의 특수 효과들은 뚜렷한 부피와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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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점에서 주제의 실마리를 찾아 볼 수 있는데, 이 영화의 불쾌함과 잔인함에는 어떤 의미가 깃들어 있다. 생체병기처럼 뒤틀린 비디오 테이프와 권총, 신체 절단 및 변형, SM와 페티쉬의 향취가 느껴지는 섹스 신... 하나같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절대로 허투로 삽입되거나 낭비되지 않는다.

그들이 비디오드롬에 중독된 이유도 바로 이런 의미와 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극적인 내용에 면역되었다고 자부하는 맥스가 비디오드롬에 중독된 이유는 무엇인가? 단지 그가 보던 이전의 영상물보다 화끈해서? 절대 아니다. 비디오드롬은 자기 논리 체계와 주장이 있다. 그 논리와 주장은 사람들을 설득시키기에 충분할 정도다.

한가지 재미있는 점을 찾아보자면 논리 체계와 주장은 이상하게 종교의 그것와 많이 닮아있다. 중독된 사람들이 비디오드롬에 대해 찬양하고(ex.닉키) 그 논리에 따라 행동하는 것도 신도들과 닮아있다. 특히 맥스가 환상 속 계시를 듣고 사람을 살해하는 장면에서는 노골적이다. 즉 비디오드롬은 새 시대의 종교인 것이다. 기존의 종교와 다른 점이라면 이 종교에서 벗어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고, 구원 따윈 없다는 것이다. 결국 공포 영화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 이 영화의 본질은 새로운 종교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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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크로넨버그는 극단을 탐하지만, 그의 시선을 반대로 차분하고 정교하다. 비교적 초창기 작품인 이 작품은 종종 야심이 통제를 벗어나는 부분도 있지만(종종 2% 넘친 듯한 설명 컷) B급 호러의 잔혹함과 서스펜스를 주제 의식과 뒤틀린 미학을 연결시킨 그의 상상력과 야심은 충분히 대가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그의 카메라는 전혀 허세나 과장이 없이 간결하지만, 사람들을 골똘히 생각하게 하는 힘이 있다. (반대로 이야기 하자면, 그의 영화를 글로 풀어내기란 의외로 힘들다.)

[비디오드롬]은 상당히 불쾌하면서도 강렬한 힘을 가진 영화이다. 그 동안 강도가 쎈 영화가 나타나면서 잔혹함은 많이 사라졌지만, 크로넨버그의 의도는 잔혹함의 강도가 아닌 주제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별로 문제되지 않는다. 이 영화의 주제는 거의 앞으로 다가올 묵시룩처럼 보이는데, 영화가 보여준 세상은 그때보다 지금이 더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PS1. 영화의 명장면이라면 악역이라 할 수 있는 베리가 뒤에서 죽어가고 있는 동안 맥스가 "Long Live With New Flesh!"라고 참석자들에게 신경질적으로 단말마를 외치고 마이크를 집어던지고 퇴장하는 장면일 것이다. 그 날 선 듯한 연기와 장면 편집(마이크 컷이 유달리 인상 깊었다.)이 훌륭했다.
PS2. 부모님하고 같이 봤는데, 아버지는 안 좋아하셨다.
PS3. 여담인데 크라이테리언 컬렉션(*DVD 제작 회사)의 센스는 절륜에 도달해 콸콸 넘칠 지경이다. 아 그 비짜 테이프의 센스를 DVD 커버로 그대로 재현하다니! 전집으로 질려줄만한 물건임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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