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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아사코 [寝ても覚めても / Asako I & II] (2018)


하마구치 류스케의 [아사코]는 도시 전경을 담은 마스터 쇼트에서 시작한다. 이 도시 마스터 쇼트는 초반부가 끝난 이후에도, 장소를 바꿔가면서 제시되는데 마치 이 영화의 이야기가 어디서 진행하고 있는지 기억해달라는 것처럼 보인다. 중학생들의 불꽃놀이가 터지고 아사코는 미술관에 사진 전시를 보러 간다. 여기서 아사코가 멈춰서 보고 있는 사진은 두 명의 쌍둥이를 찍은 사진이다. 마치 같지만 다른 쌍둥이처럼, 같은 얼굴이지만 다른 정체성을 지닌 남자를 사랑하게 되는 걸 예언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사코는 미술관에서 바쿠를 만나지만, 둘의 관계는 자기소개가 아닌 우연을 가장한 숨바꼭질 끝에 느닷없는 키스로 시작한다. 그리고 알고 봤더니 그들은 서로의 친구랑 아는 사이라는 '운명' 같은 기연이 이어진다. 아사코와 바쿠랑 친한 오카자키가 말했듯이 "말이 안 되는" 상황인 셈이다. 순정 만화에서도 작위적이라고 말할 정도로 너무나도 완벽하게 짜인 구도다. 아사코의 친구인 하루요 역시 절대 사귀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도 이해가 될 정도다. 그 말을 증명하듯이 이 말도 안 되는 사랑은 얼마 안 있어 바쿠가 사라지면서 끝나고 만다.

주목해야 할 점은 아사코와 바쿠의 연애가 러닝타임 120분 중 20분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에 끝난다는 점이다. [아사코]는 타이틀이 뜬 후, 도쿄로 배경을 옮겨간다. 그리고 후반부까지 대부분의 이야기가 도쿄에서 진행된다. 이때 하마구치가 관심을 갖는 것은 반복과 차이다. 아사코는 도쿄에서 같은 얼굴, 다른 이름을 가진 남자 료헤이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아사코는 료헤이를 보고 몇 번이나 되물어보고 당혹해한다. 아사코는 료헤이를 피하려고 하지만, 사진가 고쵸 시게요의 전시가 도쿄에서 다시 열렸을 때 아사코와 료헤이는 감정적으로 얽히게 된다. 이때 다시 등장한 고쵸 시게오의 사진은 트래킹 쇼트가 아닌, 고정된 쇼트로 제시된다.

두 번의 고쵸 시게오 전 시퀀스는 [아사코]를 이해하는 단서다. 하마구치는 처음 20분 동안 바쿠와 아사코의 연애를 통해 영화의 진행 방식을 세운 뒤, 료헤이가 다시 등장했을 때 진행 방식이 어떻게 달라져 있는지 관객이 인지하길 원한다. 이 변화는 인물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변화기도 하고, 아사코 자신 SELF가 같지만 다른 두 타자 OTHERS를 어떤 식으로 바라보느냐를 다루고 있기도 하다. 실제로 초반부 아사코는 료헤이를 볼 때 유리에 비친 모습으로 인지하거나 시선을 던진다. 초반부 반사된 이미지로 아사코 앞에 등장하는 료헤이야말로 도쿄에서 아사코와 료헤이의 연애 (2) 가 오사카의 아사코와 바쿠의 연애 (1)에서 벗어날 수 없는 반사 이미지나 다름없다는 불길한 현기증이기도 하다. 이를 증명하듯이 료헤이와 아사코가 첫 입맞춤을 할 때 하마구치는 갑자기 점프 컷으로 입맞춤을 두 번 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이후 이어지는 아사코와 료헤이의 연애는 유혹이 아닌 불안과 공포에 기반한 밀고 당기기로 진행된다. 바쿠와 달리 료헤이가 아사코에 빠진 이유는 명확하게 그려진다. 마야를 두둔하면서, 아사코는 이전의 소극적인 모습과 달리 적극적으로 마야를 두둔하는 모습에서 아사코에 올곧고 망설이지 않는 구석이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료헤이는 자신이 바쿠랑 닮았다는 사실을 모르기에 그런 올곧고 망설이지 않는 아사코가 가지고 있는 두려움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 때문에 연애가 진행될까 싶으면 갑자기 뒤로 물러나는 상황이 지속된다.

이 상황에 대해 료헤이는 직설적으로 말한다. "원점으로 돌아간 것 같다"고. 계속 원점으로 돌아가는 상황을 반전시키는 것은 동일본 대지진이다. 아사코랑 만나기 위해 마야의 [들오리] 연극을 보러 온 료헤이는 동일본 대지진을 겪는다. 그리고 직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밤이 될 때까지 걸어간다. 밤이 되자 료헤이는 다리에서 아사코를 만나고 둘은 처음으로 포옹을 한다. 이때 동선을 살펴보면 료헤이가 기다리고 있던 아사코에 돌아온 모양새이기도 한데, 이는 '반복'에서 비롯된 '귀환'이라는 행위하고도 연결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아사코]의 대지진은 하마구치의 전작보다 연애 서사에서 갑자기 부로 끼어드는 인상이 강한 편이긴 하다. 애당초 원작이 된 소설은 동일본 대지진 이전에 발매된 소설이었고, 역사의 흐름이 언급되긴 하지만 상투적인 설정 위에서 주관적인 시점에서 비틀어진 연애라는 주제에 집중하는 소설이었다. 어떤 지점에서 [아사코]의 지진은 연애가 잘 진행되지 않을 때 등장해 흔들 다리 효과로 연인들을 이어주게 하는 소도구에 머문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 끼어드는 대지진이 과연 소도구에만 머무는 것일까? 그 의문을 대답하듯이 2의 2번째 장이 시작된다. 아사코와 료헤이는 본격적으로 사귀고 있으며, 고양이 진땅을 키운다. 한편 이들은 어느새 결혼해 아이를 가진 마야와 쿠시하시 부부하고도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상황 설명이 끝난 뒤, 아사코와 료헤이가 센다이로 가서 자원봉사 활동을 한다. 분명히 외삽적인 장면임에도, 이 흐름에는 꽤 당황스러운 구석이 있다. 새로운 공간 축이 갑자기 추가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아사코] 내 장소 관계도를 다시 그려야 할 것이다. 오사카-도쿄-센다이로 말이다. 이런 장소의 추가는 당연하겠지만, 동일본 대지진이라는 사건에 따른 추가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영화에서 등장하지 않지만, 센다이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바쿠의 고향 홋카이도가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하마구치는 센다이를 바다와 해산물의 공간으로 그린다는 점이다. 아사코와 료헤이는 센다이 주민들과 어울리면서 생선과 해산물을 팔고 먹는다. 그런데 하마구치는 료헤이와 아사코가 센다이에서 주민들과 해산물을 먹을 때, 아사코의 1인칭 시점으로 료헤이가 해산물을 먹는 쇼트를 찍었다. 다음 쇼트에서 아사코가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있는 걸 보면 이 쇼트는 사적인 기록으로 보존될 순간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왜 료헤이가 해산물을 먹는 장면을 녹화할 때 아사코의 눈으로 봐야 했는가? 이 시퀀스에서는 그 답을 찾기 어렵다. 그렇다면 다른 시퀀스에서 찾아야 하는데, 답은 엉뚱하게도 봉사활동 시퀀스가 아닌 아사코가 오사카로 돌아가기 전 환송 모임 시퀀스에서 등장한다. 여기서 아사코는 센다이 자원봉사 활동을 하는 것에 대해 '틀린 일을 하고 싶지 않아서'라고 말한다. 후쿠시마 방사능으로 오염된 물 근처에서 자라야만 하는 해산물을 먹는 료헤이의 모습을 목격하고 보존하고자 하는 아사코의 모습은, 커피포트를 돌려주면서 '술 만드는 회사에서 일하는지라 물의 귀중함을 알고 있다'라고 말하는 료헤이의 속내와 공명하면서 대지진 이후 새로운 윤리가 만들어져 작동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환송 모임 시퀀스는 동시에 아사코가 잊고 있었던 바쿠가 본격적으로 돌아오는 시퀀스이기도 하다. 그 점에서 환송 모임 시퀀스는, 연애 영화로써 선택을 다루는 [아사코]와 대지진 이후의 일본인의 삶을 다루는 [아사코]가 만나는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실제로 첫 번째 봉사활동 장면 이후 하마구치가 준비한 사건은 다름 아닌, 오사카 시절의 귀환이다. 사랑니 치료를 위해 외출한 료헤이와 아사코 앞에 아사코의 친구 하루요가 다시 나타난다. 하루요는 아사코에 바쿠가 돌아왔음을 알린다.

이 소식을 들은 아사코는 어떤 행동을 취하는가? 아사코는 단호하게 사실을 주변인들에게 밝힌다. 마야와 하루요랑 같이 텔레비전 보던 아사코는 바쿠의 광고를 보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광고는 신용카드 관계다. 관계에 신용이라는 개념이 전혀 없는 바쿠에는 어울리지 않는 광고다) 적당히 무마하려는 하루요의 말을 대신해 사실을 고백한다. 아사코의 이런 모습은 초반부 료헤이의 연애에서 보였던 모습에서 확실히 진화했다는걸 알 수 있다. 직후 료헤이에게 사실을 얘기하는 부분 역시 '틀린 일을 하고 싶지 않아서'라는 관점에서 이뤄진 행동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아사코의 이런 선택은 료헤이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면서 쉽게 해소되는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아사코의 고백과 료헤이의 평정심이 평화롭게 성립하기 위해서는 한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바쿠가 그들 앞에 다시 나타나지 않는 점이다. 하지만 [아사코]는 바쿠를 기어이 그들 앞에 귀환하게 만들면서 선택의 문제를 난제로 만든다. 촬영지에서 차를 타고 떠나는 바쿠에 손을 흔든 직후, 이삿짐을 싸던 아사코는 진땅을 안고 손을 흔든다. 그런데 이때 갑작스럽게 아무것도 없는 반응/리버스 쇼트가 등장한다. 아사코는 대체 누구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는가? 이에 대한 답은 갑작스럽게 등장한 바쿠를 통해 제시된다.

아사코는 여기서 자신이 취한 이별 방식이 어설펐다는 걸 깨닫게 된다. 다시 환송 모임 시퀀스로 돌아와서, 갑자기 나타난 바쿠는 이렇게 말한다. "역시 기다리고 있었잖아." 바쿠의 이 말은 공포 영화의 귀신이 복수하기 위해 희생자에게 저주를 내리는 대사와 동일하다. 어떤 지점에서 바쿠는 매우 전지적으로 행동하는 이해할 수 없는 캐릭터다. 히가시데 마사히로가 지적했듯이 바쿠는 대체 환송 모임 장소를 어떻게 알고 왔단 말인가? 이 전지성을 지닌 옛 연인 앞에서 아사코는 다시 선택해야 한다.

관객은 논리적으로는 답을 알고 있다. 아사코가 유예된 이별을 마무리 짓기 위해서는 바쿠하고 어떤 식으로 대면해야 한다는 것을. 하지만 연애물이라는 장르에서 보자면 아사코의 선택은 암묵적인 금기를 깨트리고 있다. 왜냐하면 연애물에서는 여성이 잘 이어가는 관계 도중 옛 남자 친구를 선택하는 것은, 현 남자 친구에 대한 용서할 수 없는 배신으로 취급되는 경향이 있다. 특히 비 처녀 논란 같은 지점에서 드러나는 여성의 정조와 헌신을 강요하는 일본 (나아가 동아시아)라는 문화권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여기서 대지진 직전 등장한 입센과 체호프의 연극들을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두 작품을 간략히 살펴보자면 체호프의 [세 자매]는 현실과 이상적인 꿈에 대한 괴리로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지지만, 현실을 깨닫고 이별하는 여성이 등장했고, 반대로 입센의 [들오리]는 평온한 관계가 실은 거짓으로 덮여있다는 걸 알고 비극에 치닫지만, 다시 새로이 시작하는 부부의 얘기를 다루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을 언급할 때 [아사코]는 감정 이입하지 말라고 주문하거나 ([세 자매]), 연극이 지진으로 중단되어버린다. ([들오리]). [아사코]는 왜 이런 문학적 모티브들에 대해 감정적으로 이입하지 말라고 말하거나 중단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아사코]에서 아사코가 처한 상황이 두 작품의 유사성과 연계성은 있되, 독자적인 상황으로써 객관적으로 관찰해달라는 걸 하마구치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아사코는 바쿠를 따라가지 않고 떠내 보낸다. 여기서 다시 아사코가 왜 최종적으로 바쿠가 아니라 료헤이를 선택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이다. 첫째로는 연애물에서 볼 수 있는 가치 판단과 기준이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쿠는 처음부터 끝까지 멋대로 행동하고, 아사코의 기분을 이해하는 언동을 보이지 않는다. 한마디로 같이 살기엔 부적합한 인물이다. 드라이브 시퀀스의 차이가 대표적일 것인데 좀 더 자두라고 말하는 료헤이랑 달리 바쿠는 자기 얘기만 할 뿐이다.

[아사코]가 흥미로운 점은 이런 연애 영화로써 감정 이입과 선택의 문제를 끊임없이 동일본 대지진이라는 사건이 외삽의 한계를 무릅쓰고 얽혀 들어간다는 점이다. 센다이에서 연애의 종지부가 난다는 점도 그렇고, 아사코와 바쿠의 연애는 바다에서 끝난다. 바쿠는 바다를 보지 않았다. 정확히는 거대한 방파제를 보고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데 바쿠를 떠나보낸 뒤, 아사코는 무엇을 하는가? 방파제를 올라가 바다를 본다. 아사코는 끊임없이 자신의 눈을 통해 확인하고 기억하고자 한다. 속내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캐릭터는 아니지만, 아사코가 방파제에 올라가 바다를 바라보는 시퀀스가 아름답게 느껴진다면 이 부분에 있다. 연애 관계에서 자신의 주체를 잡으려는 의지와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방사선 누출이라는 비극을 인정하고 나아가려는 일본인의 다짐이 겹쳐지기 때문이다.

다시 남겨진 료헤이에게 돌아가 보자. 바쿠의 손을 잡고 떠나가는 아사코를 찍는 트래킹 쇼트는 그 점에서 1부의 아사코와 친구들을 놔두고 떠나는 카메라의 트래킹 아웃 쇼트와 닮아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 트래킹 쇼트의 피사체가 달라져 있다는 점이다. 1부에서 트래킹 아웃 쇼트는 아사코와 친구들을 남기고 떠난다면 2부에서 미묘하게 구도가 달라진 트래킹 아웃 쇼트는 료헤이와 친구들을 남기고 떠난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가 아사코의 1인칭을 포기하자 바쿠에 대한 료헤이의 공포가 구체적으로 변했다는 점이다. 심지어 아사코와 바쿠가 떠나자 료헤이의 반응 쇼트는 예감한 표정으로 침묵과 분노의 표정을 짓고 있다.

료헤이의 예감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먼저 성적 매력의 부족함이 있다. 료헤이와 바쿠 중에서 가장 이상적인 매력을 지닌 남자는 바쿠다. 아사코랑 재회한 후, 예전에 괜찮다고 말한 건 거짓말이라고 털어놓기까지 한다. 바쿠는 그 점에서 료헤이의 거울 쌍이 만들어낸 억압된 악몽이다. 이런 연애 라이벌로서 두려움과 더불어 대지진 문제와 엮어서 본다면, 대지진 이후 '모든 게 정상적이었던 대지진 이전 일본의 귀환'에 대한 일본 남성성의 공포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독해의 여지는 료헤이는 왜 아사코의 선택에 분노하는가? 에 대한 답을 제공하기도 한다. 료헤이의 관점에서 아사코는 '대지진 이전 우월한 전 남자 친구를 선택하고 대지진 이후 열등한 자신을 버린 여자'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결말 부분은 료헤이에게 생긴 트라우마를 아사코가 어떻게 설득하는가에 대한 과정이기도 하다.

비록 연애 영화로써 서사 장치가 동일본 대지진이 긴밀하게 연결되었냐는 문제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아사코]의 강점은 관계의 허울성과 추한 감정을 인정하며 시간을 껴안고 살아간다는 행위에 긍정함에 있다. 하마구치는 함께 한 시간이 위태한 위장이라고 해도, 의미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하마구치는 아사코와 오랫동안 알고 지내왔던 오사카 인물들에게 시간의 흔적과 더불어 긍정성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원작과 달리 하루요가 아사코랑 절교하지 않게 된 점이 대표적일 것이다. 에이코가 들려주는 연애사의 비화는 원작에서도 있던 부분이라 넘어가도, 왜 하루요는 아사코의 선택을 일부 긍정했을까?

여기서 오사카로 대표되는 칸사이 지방이 이미 고베 대지진을 겪었던 지역이라는 걸 떠올려야 할 필요가 있다. 각색된 하루요의 긍정은 어떤 점에서는 에이코의 비화와 상응하는 구석이 있다. 이 변화는 이미 대지진을 겪은 오사카에서 현 일본의 난제에 대한 지혜를 구하려는 시도이며, 하마구치가 동일본 대지진이라는 사건 이후에 [아사코]의 원작으로 영화를 만들면서 느꼈던 의무감의 일종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물론 동일본 대지진은 고베 대지진과 달리 방사능 오염 같은 더 큰 난제가 있으며, 트래킹 쇼트로 절박한 추격전을 벌인 후에도 아사코와 료헤이의 관계는 여전히 깨진 채로 남아있다. 그런데도 아사코는 진흙 강을 아름답다고 말한다. [아사코]는 불가항력으로 더러워졌더라도 아름다움을 찾아낼 수 있는 용기가 동일본 대지진 이후 삶에서 필요하다고 말하는 영화다. [아사코]를 통해 하마구치 류스케라는 감독을 지지하고 싶다면, 그 자세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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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dfinger - I Can't Take It

요새는 파워 팝 불운의 밴드로 꼽히는 배드핑거를 듣고 있습니다. 1970년대식으로 Cheesy한 느낌이 있긴 한데, 그래도 이 시절 파워 팝을 싫어하기는 어렵죠. 빅 스타가 다소 내향적인 느낌이라면, '파워'라는 수식어가 잘 어울리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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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2

결국 새해를 맞이했건만 글 하나도 안 쓰고 노는 중입니다. 늦긴 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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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악마가 [Le diable probablement / The Devil Probably] (1977)

로베르 브레송의 [아마도 악마가]는 처음부터 결말을 정해놓고 영화를 시작한다. 샤를은 친구의 손을 통해 자살한다. 아니면 살해당한다던가. 브레송은 샤를의 죽음이 가질수 있는 감정이입의 가능성을 건조한 기사와 글자 이미지로 막아버린다. 그런데 왜 샤를은 죽음을 선택해야 했을까? 브레송은 이를 위해 샤를과 그 친구들이 어떻게 사는지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명백히 브레송보다 어린 그들은 모든 것을 혐오하지만 새로운 대답을 찾지 못한다. 이를 대변하듯이 영화 도입부의 대사는 힘을 제대로 주지 못해 걷지 못하는 것에 대한 얘기다. 그 말처럼 샤를과 친구들은 영화 내내 어느쪽이든 힘을 주지 못하고 걷는다. 이 불균형하고 무기력한 상황이야말로 [아마도 악마가]가 탐구하려는 정신적 상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브레송은 샤를과 그 친구들이 어떤 관계를 맺는지 보여주면서, 사회의 축을 이루는 거대 담론을 하나씩 부정해간다. 영화의 대사들은 다른 브레송 영화들보다 더욱 심화된, 담론과 철학에 대한 토론으로 이뤄져 있지만, 대부분의 대화는 헤매거나 부정하길 반복한다. 도입부 이후 첫 시퀀스가 정치 혁명 토론장이라는건 의미심장하다. 당연하겠지만 샤를과 친구들은 파괴의 권리를 주창하는 정치 혁명이 현실을 바꿀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은 경멸은, 아무리 옳은 의도로 파괴를 행한다고 해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가능한 것이다. 정치 혁명의 장에서 빠져나온 그들은 환경 운동에 관심을 기울이는데, 이때 브레송은 슬라이드 쇼와 영상으로 잔혹한 동물 학살과 죽어가는 지구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이미지를 보는 브레송의 카메라는 아무런 연민이 없다. 이 이미지들은 인류를 비판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인류 그 자체에 대한 애정을 잃어버렸다는 신호에 가깝다. 이런 신호를 잘 보여주는 시퀀스가 피크닉 시퀀스다. 이 시퀀스에 등장하는 소음과 농약, 군중의 아우성의 몽타주와 프레임 밖으로 잘려나간 얼굴과 파편화된 신체들은 공포스럽다.

당연히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의 고통스러운 구도의 길을 걷는 신부 같은 캐릭터는 여기에 없다. 브레송은 1968년 [온순한 여인]부터 믿음과 희생양을 무대에 올리려고 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렇게 인간이 고통받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집중한다. [아마도 악마가]는 그 중 가장 적극적으로 바닥을 찍은 영화일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파멸에 이르렀던 마지막 영화인 [돈]과 달리 [아마도 악마가]는 적극적으로 인간의 조건을 부정하고 자신을 파괴하는 사람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하듯이 브레송은 인간 관계의 두 축을 사랑과 경제로 설정한다. 이 두 축이 얽히는 순간, 인간관계는 냉담해지고 사랑은 거래 관계로 변해버린다. 이미 [온순한 여인]이나 [호수의 랑슬로]에서도 탐구한 지점이기도 하지만, 브레송은 후기로 갈수록 사랑의 진정성을 믿지 않는다. 그런걸 믿기엔 사랑은 철저한 거래 또는 현실에서 이룰수 없는 무언가로 변했기 때문이다. 사랑의 구원을 믿었던 [소매치기]와 비교하면 더더욱 잘 알 수 있다. 샤를과 친구들이 지리멸렬하게 관계를 이합집산하고 경제적 관계에 따라 애인을 바꾸고, 끝내 자신이 상대방에게 짐이 되지 않을까 내심 불안해한다. 

대신 그들이 집착하는 것은 허무다. 독약이나 손바닥 위에 올려진 총알, 물로 넘쳐나는 욕조는 그들의 감수성 근처에 죽음이 어른거린다는걸 알 수 있다. [아마도 악마가]가 브레송의 이전작에 비해 더욱 절망적이라면, 패배 없는 패배자에 대한 영화기 때문이다. [온순한 여인]과 [호수의 랑슬로]의 주인공들은 자신이 어떤 윤리적 전투에서 패배하고 길을 잃었다는걸 조금이나마 인지하고 있었다. [아마도 악마가]의 샤를과 그 친구들은 무엇에 패배했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그저 그들은 승자가 될 수 없다는 걸 알 뿐이다. 브레송은 이런 패배 없는 패배자들이 느끼는 허무의 공기를 모델이 가지고 있는 즉물적 이미지를 포착하는 시네마토그래프 작법에 기반해, 이미지와 음향의 삭막한 리듬으로 치환한다. 악마에 대한 토론 시퀀스 도중 삽입된 버스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숏의 몽타주가 대표적이다. 이 장면은 마치 사람들이 주장하는 어두운 세상과 그것을 조종하는 악마의 계략이 아무런 의미없는 기계적인 운동처럼 보이게 만든다. 후기 브레송 영화들은 음향과 이미지 간의 관계에 민감해지는 모습을 보이는데, [아마도 악마가]는 의미없는 기계적 운동 이미지와 음향으로 절망을 형상화한 영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샤를의 자살 또는 타살은 이런 경멸과 무의미, 기계적인 운동이 지나가고 난 뒤 등장한다. 영화가 본격적으로 바닥을 향하는 부분은 바로 샤를의 상담 시퀀스다. 지금까지 이어왔던 거대 담론에 대한 부정을 다시 정리한 뒤, 샤를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영원한 삶을 믿을 뿐이에요. 자살한다 해도 심판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 것을 이해하지 못한 게 이유가 될 수는 없죠." 이 대사가 나온 이후부터 [아마도 악마가]는 도스토예프스키적 지옥으로 달려가기 시작한다. 샤를의 친구들은 상담이 끝나고 샤를이 변할것이라 기대하지만 브레송이 보여주는 이미지는 떨궈진 공중 전화기 숏이다. 버려진 소통의 이미지 이후, 샤를의 친구들은 결말까지 등장하지 않는다. 마침내 샤를은 친구들을 배제해버린 것이다. 샤를은 성당에 가서 잠을 청하는데, 브레송은 여기서 다시 한번 샤를을 내쫓는 성당 사람들을 보여주면서, 종교가 끝내 젊은이들을 이해하지 못했음을 명백히 한다. 샤를은 자신을 살해할 친구를 만나 그와 함께 다니는데, 브레송은 경제적인 이득과 허무의 극단으로 관계를 맺은 이들만 남은 밤의 파리를 보여주면서 그들이 어디에도 속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샤를은 묘지에서 죽는다. 심지어 유언도 제대로 남기지 못한 채 뒤통수에 총을 맞은 채. 다시 질문하자. 그는 자살한 것일까? 아니면 타살당한 것일까? 브레송은 이 대답의 애매함이야말로 동시대의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악마가]는 엔딩 크레딧이 없고 마지막 장면이 끝나자마자 영화도 끝난다. 환해진 스크린 또는 검게 남은 화면은 그 점에서 브레송의 암울한 심경을 보여주는 도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가 발표된 해가 1977년이라는걸 생각해보자. 크리스 마르케가 [붉은 대기]를 통해 한탄했듯이 1968년 혁명은 프랑스에서 실패로 돌아갔고, 프랑스는 급격하게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과 조르주 퐁피두 같은 보수주의로 기울어지게 된다. 루이스 부뉴엘은 이런 반동에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을 내놔 격렬히 조롱했다. 한편 브레송은 68 혁명의 패배자들이 흩어져가는 과정을 그린 [몽상가의 나흘밤]과 선과 악이 패배하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리에 죽은 말과 자유로운 새만 남았던 신화적 우화인 [호수의 랑슬로]로 대답했다. 영화를 만들수록 브레송은 프랑스의 반동적인 기운과 바뀌지 않는 현실에 절망감을 느끼고 영화에 대한 믿음을 잃어갔다. 그리고 1977년, 펑크 세대가 도래했다. 섹스 피스톨즈의 허무주의가 시대적 정신으로 받아들이던 시절. [아마도 악마가]는 1968년 혁명이 10주년을 맞이하는 순간, 새로이 등장한 경멸과 허무의 세대에게 바치는 영화다. 실제로 펑크 록 씬의 중요한 인물인 리처드 헬은 [아마도 악마가]를 자신이 좋아하는 브레송 영화로 꼽은 적이 있다. 펑크 세대가 불경한 문화로 경멸받던 그 해, [아마도 악마가]는 자살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한동안 개봉이 금지되었지만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나 리처드 헬 같은 민감한 이들은 이 어두컴컴한 절망을 파악한 모습을 파악하고 지지를 보냈다. 이 영화를 싫어할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 어두컴컴한 종막이 깊은 관찰과 사유를 통해 드러났다는건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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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vo - Uncontrollable Urge


예예예에예ㅔㅖㅔㅖㅖㅖ예예에! 예!!!!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다만 블로그에 글을 쓸 여유가 없네요.

시간이야 쪼개면 나긴 하는데, 정신적으로 긴 글 쓸 여유가 없습니다. 쩝. 약간 이 노래 같은 심정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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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2

바빠 죽는다.... 블로그 글 쓸 시간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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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드 셀] 애니메이션 예고편

요새 얼리 액세스로 하고 있는 로그라이크 메트로베니아 게임인데, 생각보다 재미있더라고요. 물론 난이도가 어려워서 매번 죽고 멘붕하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실력이 늘면서 할만해지더라고요. 곧 정식 발매라고 하니 관심있는 분들은 구매하셔도 괜찮을듯.

문제는 너무 더워서 제 방 컴퓨터로 하지 못하고 형 노트북이나 스트리밍으로 플레이하고 있습니다. 그냥 아이패드 스트리밍하고 Mfi 지원하는 컨트롤러를 살까 고민중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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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3

더워!

+에어컨 없이는 살지 못하는 몸이 되어버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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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송대 [La Jetée / The Jetty] (1962)

2017/09/05 - [Deeper Into Movie/리뷰] - 태양 없이 [Sans Soleil / Sunless] (1982)

마르케가 '병렬 편집'을 통해 사유했던 것은, 전쟁 이후인 현재에서 과거를 끌어들이는 방식이라고 본다. 여기엔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무언가 일어났다. 이 불연속적인 두 문장 사이의 간극을 채우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레네는 그것을 편집이라고 보았다. 상이한 두 요소를 하나의 영화로 조형하는 작업이 바로 편집인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이어붙인다고 해서 새로운 의미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상이한 것에서 어떤 유사성과 감정을 잡아내느냐이다. 레네는 그 사실을 로베르트 로셀리니의 [스트롬볼리](와 루키노 비스콘티의 [흔들리는 대지])과 아녜스 바르다의 [라 푸앵트 쿠르트로의 여행]을 보면서 배웠다.

로셀리니는 [이탈리아 여행]과 [스트롬볼리]를 통해 픽션을 연기하는 스타 잉그리드 버그만과, 다큐멘터리의 관점으로 담긴 이탈리아 시골을 영화 속에 배치하면서 영적인 구원과 낯섬이라는 감각을 이끌어냈다. 한편 바르다는 라 푸앵쿠르트를 여행하는 현대적인 성 규범을 받아들인 젊은 여행자 커플의 픽션적 시점과 가부장적인 삶을 사는 라앵쿠르트이라는 다큐멘터리적 시점을 병렬적으로 배치하면서 페미니즘적인 관점과 다큐멘터리적 관점을 결합하려고 했다. [밤과 안개]는 네오 리얼리즘과 [라 푸앵트 쿠르트로의 여행]의 성과를 발전시키는데 성공했고, 이는 레네와 마르케에게 큰 유산이 되었다.

앙드레 바쟁은 크리스 마르케가 '밤과 안개' 이후 1958년 내놓은 데뷔작 '시베리아에서 온 편지'라는 기행문 다큐멘터리를 분석하면서 '영화에 의해 다큐멘트된' 에세이며,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독특함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병렬 편집'이라는 개념으로 구체화했다. 바쟁이 지적한 병렬 편집은, '밤과 안개'가 크리스 마르케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보여준다. 알랭 레네가 밤과 안개를 편집하면서 도입한 두 개의 시공간의 병렬적 배치는 특정 공간에 속한 개인이 다른 시공간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 설명하는 예라고도 할 수 있다. 알랭 레네가 [밤과 안개]와 [석상 역시 죽는다]에서 도입했던 병렬 편집의 가능성을 픽션의 영역에서 실험했다면, 크리스 마르케는 다큐멘터리의 영역에서 발전시켰다고도 볼 수 있다.

'시베리아에서 온 편지' 이후 크리스 마르케를 주목받게 만든 단편은 바로 [환송대 La Jetee]라는 단편 영화였다. 크리스 마르케가 만든 첫 픽션 영상물인 이 영화는 그러나, 활동사진Motion picture가 아니다. 크리스 마르케는 '포토 로망'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마치 사진 슬라이드처럼 영화를 만들었다. 파리에서 핵폭탄이 터지고, 그동안 알고 있던 문명이 멸망한다. 지하로 숨어든 사람들은 한 남자를 찾아낸다. 이 남자는 핵폭탄이 터지는 순간, 공항 환송대에서 보았던 한 여자의 이미지에 집착한다. 시간 여행하는 약을 먹게 된 남자는 이미지의 근원을 찾아 시간 여행을 하게 된다.

[환송대]가 흥미로운 이유는, 기억 이미지의 근원을 찾기 위한 여정 전체가 멈춰진 사진으로 이뤄진다는 점이다. 중간에 등장하는 한 순간을 제외하고, 영화는 정지된 사진을 영화적 샷 구조처럼 배치한다. 이 정지된 이미지 속에서 끊임없이 기억을 찾으려고 한다. 이때 크리스 마르케는 말한다: "일상적인 것은 일상적인 순간에서는 아무것도 추억되지 않는다. 나중에 그 순간의 상흔들을 보여줄 때 비로소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그가 보았던 얼굴은 전쟁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평화의 모습이었다. (중략) 다가올 광기를 버텨내기 위해 부드러운 순간을 만들어낸 것일까?" 라카프라식으로 말하자면 환송대의 남자는 현재를 지배하고 있는 멸망의 풍경으로 대표되는 1차 기억을 극복하기 위해 1차 기억 직전에 있던 여인의 얼굴이라는 파생된 1차 기억을 만들었던 것이다. 약을 먹고 시간 여행을 하는 것은, 그 1차 기억을 쫓아가 2차 기억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이다.

남자가 시간 여행을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남자는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른다. 남자의 과거에서 여자는 한 순간의 강렬한 이미지만으로 남은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이미지만으로는 기억은 온전히 보존할수 없다. 그렇기에 남자는 과거로 돌아가 여자를 만나면서 구체적인 기억을 만들어야 한다. 일례로 여자는 남자를 보고 유령이라고 말하는데, 반대로 보자면 여자야말로 유령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남자가 사는 파괴된 현재에서 여자는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자는 절멸의 순간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그렇기에 남자는 자신이 살아가는 현재에서 여자를 찾지 않는다. 대신 약과 시간 여행이라는 과학적/SF 장르적 수단을 통해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1차 기억의 순간으로 돌아가 자기 방식으로 2차 기억으로 재구성하려고 한다. 이 2차 기억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는, 여자로 대표되는 절멸의 순간에서 살아남지 못한 자들을 기억하려는 남자의 절박한 시도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시도는 분절적인 순간들로 표출된다. 홀린듯한 만남에서 여자의 이미지는 조각난 채로 남자의 체내로 흡수된 뒤, 재구성된다.

마르케는 이 디테일이 확장되가는 과정을 다큐멘터리 사진의 방향성과 겹친다. 남자가 여자를 만나는 과정에 담긴 파리의 풍경은 ([아름다운 5월]이 그랬듯이) 1960년대 프랑스 파리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영화가 발표되고 시간이 많이 지난 시점에서 보자면, [환송대]는 1960년대 프랑스 파리를 기록한 횡단면이다. 1960년대가 지나가버린 미래에 살고 있는 관객은 그 시절과 함께 호흡할 수 없지만, 크리스 마르케가 35mm 필름 위에 남긴 사진을 통해 어땠을지는 상상할 수 있다. 중간에 등장하는 박물관 시퀀스는 즉물적으로 남아있던 트라우마의 기억을 스스로의 선택과 만남으로 2차 기억으로 재구성하려는 남자, 나아가 영화의 의도를 은유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 사진들은 SF 픽션 장르인 디스토피아라는 틀로써 재구성되고 있다. [환송대]는 1960년대 파리라는 공간을 두 가지 관점으로 보길 관객들에게 요청한다. 하나는 이전에 있었던 전쟁을 서서히 잊으며 평온한 일상을 누리는 현실의 파리, 또 하나는 이미 일어난 가상의 전쟁으로 파괴된 미래의 파리. 이 단편을 보면서 어딘가 2차 세계 대전 시절 파리를 연상했다면, 정확히 본 것이다. 마르케는 SF 장르를 인용하면서 과거의 한 순간이 미래의 한 순간이 될수도 있었다고, 혹은 그 역으로 전쟁으로 파괴된 2차 세계 대전 시절 파리에 대한 기록이 될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다. 1차 기억을 2차 기억으로 재구성하기 위한 시도는, 과거의 순간을 반복하지 않고 나아가고자 하는 시도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과 관계는 희미해지고, 아름다움과 파괴에 대한 시적 우울함은 1960년대 파리와 도래할지도 모르는 파국의 미래를 상상케 한다. 이런 이중화 작업은 후술할 [태양 없이]의 중심이 되는 영상과 음향의 재조립, 기계적 장치를 통한 기억의 재구성에 큰 단초가 되고 있다.

여기서 질문이 하나 더 생긴다. 결국엔 끊어질수 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 남자는 왜 여자에게 다가가려고 하는가? 서사에서는 생존의 수단이라고 설명한다. 남자를 조종하는 의사와 과학자들은 생존을 하기 위해 과거를 기억시키려고 한다. 하지만 남자에겐 의사와 과학자의 의도를 뛰어넘는 좀 더 본능적인 이유가 있다. 그것은 생의 에너지에 대한 갈망이다. 연출에서 마르케는 좀 더 흥미로운 이유를 배치해둔다. 남자를 지배하고 있는 기억 이미지의 주인공인 여자는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흐르는' 자다. 침대에 누워서 미소지으며 카메라/남자를 바라보는 여인의 모습은, 사진이 아니라 영상으로 이뤄져 있다.

스틸 샷으로만 이뤄진 영화의 구조를 생각해보면, 남자가 왜 여자의 얼굴을 떠올리려고 하는지 알 수 있다. 그것은 움직임Motion이 가지고 있는 행복함으로 다가고자 하는 본능적인 발버둥이다. 파괴된 세상에서 이전에 남아있던 움직임을 포착하려는 집착은, 남자가 여자로 대표되는 과거의 행복함에 어떤 죄책감이 있다는걸 보여준다. 이 집착은 영상의 움직임에 대한 영화광적인 매혹을 담고 있기도 하다. 실제로 마르케는 어린 시절 보았던 마르크 드 가스틴의 'La Mervilleuse vie de Jeanne d'arc'라는 무성 영화에 출연한 시몬 쥬느비에브라는 배우에 매혹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마르케의 사진집 [북녘 사람들]에서도 조선 여인의 얼굴을 담은 사진에 대한 묘사가 있었던 걸 보면, 마르케는 여성의 얼굴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에서,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근원적인 에너지를 찾았던 걸로 보인다.

하지만 마르케는 생에 대한 로맨티시즘적 감상과 낙관주의에 머무르지 않는다. 오히려 움직임을 담은 생에 대한 발버둥이 좌절되는 것으로 영화를 마무리짓는다. 로버트 하인리히의 '당신 모두 좀비'를 연상케하는 [환송대]의 순환 고리는 우로보로스적 비극이다. 영화는 시간을 탈출하는 방법은 없었으며 '자신을 사로잡는 순간'이 오히려 죽음의 순간이였다는걸 밝히면서 끝난다. 여인의 움직임이 비극과 파괴의 또다른 1차 기억에 종속되어 있다는 걸 알았을때 남자는 자신의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마르케가 생각하는 역사의 비극이란, 결과에 속한 사람이 자신을 만들어낸 원인과 과정을 바꾸지 못하는데서 시작된다. 시간 여행은 실패로 돌아가고, 남자는 끝내 미래의 여행자들에 속하지 못한다. 그저 자신이 속한 현재의 지도자들이 보낸 암살자를 통해 과거의 순간에서 죽음을 맞게 된다.

라카프라는 1차 기억과 2차 기억이 순수한 형태로만 이뤄질수 없고 트라우마를 떠올리려는 시도는 2차적일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환송대]는 1차 기억을 2차 기억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자신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고자 하는 사람으 이야기다. 과거에 대한 기억을 만드려는 2차적인 시도를 파괴된 현재가 방해하면서 무위로 돌아간다는 결말은, 현재에 대한 마르케의 인식이 아도르노적 부정성으로 이뤄져 있다는걸 알 수 있다. 당시 프랑스는 식민지에 대한 제국주의적 탄압이었던 알제리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상태였고, 2차 세계 대전에 대한 객관적 재평가는 드골 정부의 강력한 우파 정권의 힘 앞에서 뒤로 물러난 상태였다. 드골은 표면적으로는 레지스탕스를 우대하고 나치 부역자들을 처단했지만, 중요한 자리엔 나치 부역자들을 받아들였다. 나아가 알제리 같은 식민지들을 탄압하고 착취하는 것으로 구체제를 존속시키려고 했다.

[환송대] 직후 만든 [아름다운 5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나레이션은 "감옥이 있는 한 세상은 행복할 수 없다." 였다. 시간의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끝나는 [환송대]의 순환적 비극은 아도르노가 부정성 미학에서 주장했던, "고통의 언어를 통해서 화해되지 않는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라는 슬로건과 맞닿아있다. 알제리 전쟁과 과거 인식을 방해하는 내부의 파시즘이라는 당시 프랑스의 부정성은 단 한 순간의 행복에 다가가려고 하는 남자를 암살하는 남자의 시대로 표출되고, 또다른 비극의 순환 고리를 만든다. 마르케는 SF 장르의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으로 현재를 파괴된 순간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이 어떻게 1차 기억과 2차 기억을 재정립하는 시도를 방해하는지 [환송대]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크리스 마르케의 [환송대]는 시간 여행이라는 장르적 틀과 움직임에 대한 인식으로 기억을 재인식하려는 시도와 좌절을 그렸으며, [태양 없이]는 기계적 조작을 통한 추상화와 비디오 게임적 구성을, 다양한 공간과 시간에 남아있는 시간의 현기증을 포착하려고 했다. 마르케의 시도들은 병렬 편집이라는 개념에서 출발해 1차 기억을 재구성하려는 2차 기억의 방법론에 대한 고찰이기도 하며, 소비에트 몽타주 이론가들의 찬란한 자유연상적 성과를 이어가려는 시도기도 하다. 그리고 이 사유 과정에서 크리스 마르케는 이미지를 추상화하면서 동시에 역사/사회적 의미를 잃지 않는 정교한 방법론에 관심을 보였던 것 같다. 실제로 1995년 마르케는 역사 게임을 만드는 게임 디자이너의 나레이션으로 이끌어가는 [레벨 파이브]라는 작품으로 사유를 확장시킨다. 또한 말년의 크리스 마르케는 유튜브와 비디오 영상에 관심을 기울여 짧은 클립들을 올리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 그 점에서 크리스 마르케는 라카프라가 주장했던 "기억과 역사는 상호보완적인 관계며, 이 관계망 전체를 성찰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방식에 관심을 기울였던 영화 감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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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etano Veloso - If You Hold A Stone

5월말에 사서 잘 들었던 앨범... 일본에서 카에타누 벨루조 앨범들이 새 마스터를 써서 SHM-CD로 재발매된지라 (염가 재발매 포함) 좀 구해기 쉬워졌더라고요. 아직 2집 (화이트 앨범)이나 갈 코스타랑 같이 작업한 데뷔작, 문제작 Araca Azul은 구하지 못했지만, 기회가 되면 구할 생각이긴 합니다.

앨범에 대해 적자면, 1집의 쾌활함이 많이 줄어들고 좀 다운된 느낌이긴 합니다. 당연한게 이 앨범 녹음 당시 벨루조는 망명 생활 중이었으니깐요. Maria Bethania랑 이 곡 정도가 예외적으로 특유의 밝음이 남아있긴 한데... 그래도 어딘가 애잔함을 안겨주는게 영국의 추적추적거리는 날씨가 트로피칼리아의 들썩이는 감수성에 녹아든 것 같은 독특함이 있습니다. Transa랑 Araca Azul을 들어보면 이 앨범의 방향성이 어떻게 됬는지 알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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