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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디트로이트의 여름, 미성년의 에로스와 타나토스: [아메리칸 슬립오버] (2010), [팔로우] (2014)에 드러나는 데이비드 로버트 미첼의 영화 세계

[아메리칸 슬립오버] (2010)

2015/08/06 - [Deeper Into Movie/리뷰] - 팔로우 [It Follows] (2014)

2014년 공개된 데이비드 로버트 미첼의 [팔로우]는 칸 영화제 화제작 중 하나였다. 심지어 4년 후 발표된 미첼의 신작 [언더 더 실버 레이크]는 곧바로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공개될 정도였으니, 얼마나 주목받았을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에 대한 평들을 읽어보면 공포 영화라는 장르를 새롭게 만들었다는 평들이 대다수다. 재미있는 점은, 데이비드 로버트 미첼이라는 감독의 커리어에서 보면 [팔로우]는 전작과 다른 이질적인 영화라는 점이다. 미첼의 데뷔작인 2010년작 [아메리칸 슬립오버]는 코미디 드라마에 가까웠던 영화다. 하지만 [아메리칸 슬립오버]를 보면 의외로 이 영화가 [팔로우]랑 공통분모가 많다는걸 알 수 있다. [보이후드]나 [버니] 같은 텍사스 배경 영화를 만들면서, 텍사스 문화를 반영했던 리처드 링클레이터가 그랬듯이 데이비드 로버트 미첼이 디트로이트에서 만든 두 영화 [아메리칸 슬립오버]와 [팔로우]는 디트로이트와 미시간을 떠나면 그 개성을 대부분 잃어버리는 영화다. 엉겁결에 공포 영화를 만들어 유명해진 [판타즘]의 감독 돈 코스카렐리가 그랬듯이 미첼은 미국식 지역 영화에 자신의 뿌리를 두는 감독이라 할 수 있다. 미첼은 이런 지역적 특성과 문학적 관심사를 통해 10대 섹스 코미디와 호러라는 장르를 새로운 방식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이번 장평은 그 점에서 데이비드 로버트 미첼이 어떻게 지역 영화와 장르 영화 간의 교란을 일으키고, 주제 의식을 만들어내는지 살펴볼 예정이다.

  1. 폐허에 맴도는 종잡을 수 없는 시간: 지역의 특수성과 팝 문화, 초현실주의의 결합

먼저 데이비드 로버트 미첼의 개인사를 짚어 보자. 미첼은 1974년생 디트로이트 출신으로, 같은 디트로이트 출신인 작가 제프리 유제니디스의 [처녀들, 자살하다]가 배경으로 삼던 시절 디트로이트에서 태어났다. [처녀들, 자살하다]가 흥미로운 점은, 이 소설이 드러내는 감성이 명백히 [아메리칸 슬립오버]나 [팔로우]와 연계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동네 소년들과 성적으로 어울리며 부모와 불화하다가 자살하는 [처녀들, 자살하다]의 자매들은 [팔로우]에서 섹스를 한 뒤 아버지로 위장한 괴물을 상대해야 하는 제이하고 공명하는 부분이 있다. 한편 미첼이 한창 성장기를 보내던 1980년대 말엔 마이클 무어가 디트로이트 근처 플린트라는 도시에서 제너럴 모터스의 구조조정을 다룬 다큐멘터리 [로저와 나]를 공개했다. [로저와 나]는 미첼 영화에 등장하는 폐허들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보여주고 있는 영화다. 미시간주의 몰락이 자동차 공장을 대거 폐쇄한 1980년대부터 본격화되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미첼이 [로저와 나] 이후 디트로이트 지역 영화를 만들려는 감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로저와 나] 이후 디트로이트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박내선이 잡지 국토에 발표한 글 [영화 자본주의: 러브스토리_산업이 빠져나간 도시의 민낯 디트로이트와 플린트]는 1990년대 이후 디트로이트와 미시간이 어떤 문제를 안고 있는지 보여주는 글이다. 박내선은 디트로이트가 '핼러윈의 무대가 될 법한 거미줄과 잡목으로 넘쳐나는 폐허 같은 집에'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밝히면서, 디트로이트의 부동산은 임대료는 낮지만, 치안 문제가 심각해 입주가 어렵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디트로이트에 참여한 프로젝트에서 만난 빈곤한 청년 세대에 대한 얘기도 있는데, 교육을 받으면서 생계를 위해 교육비를 받아야 하는 학생들과 교육비에 집착하는 부모들이나 24세에 할머니가 돼버린 여성 같은 사연들을 소개하면서 자동차 산업에 기반한 도시가 몰락하는 과정에 생긴 어두움을 서술하고 있다. [아메리칸 슬립오버]와 [팔로우]는 그 점에서 각각 틴에이지 섹스 코미디와 호러 영화라는 10대가 주로 소비하는 장르 영화를 동시대 디트로이트의 시공간에서 재해석하려는 영화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좋았던 시절의 디트로이트 교외가 가지고 있던 데카당스 함을, 동시대 디트로이트의 쇠락함에 접목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이 접목을 위해 미첼이 선택한 도구는 폐허와 시간적 맥락의 묘사다. 먼저 폐허라는 요소를 살펴보자. 당연하겠지만 미첼은 디트로이트에 실제로 있는 폐허를 물색한 뒤, 배우들을 데려다 놓고 찍었다. 하지만 이 폐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시사적이기보다는 에로스와 타나토스 간의 긴장으로 가득 차 있다. 비교적 아트하우스 취향의 코미디 영화에 가까운 첫 영화 [아메리칸 슬립오버]는 그 긴장이 대놓고 드러내진 않았다. 간단히 말해 [아메리칸 슬립오버]는 죽는 사람이 없다. 롭과 마커스가 폐허가 된 건물로 들어가 짝짓기하는 연인들을 바라보며 지나가는 시퀀스가 대표적일 것이다. 이 시퀀스에서 롭과 마커스가 보이는 태도는 에로스에 동참하지 못하고 맴도는 유보하는 태도에 가깝다. 그나마 롭은 줄곧 그려왔던 금발 소녀를 만나지만, 실망한 채로 돌아서야 한다. 이런 어색함은 매기가 키스를 거절하는 장면이라던가, 스콧이 쌍둥이 자매를 두고 망설이는 장면, 클로디아가 자넬과 싸우고 남친에게 찾아가 고백하는 장면에서도 잘 드러난다. [아메리칸 슬립오버]를 만들 당시엔 미첼은 타나토스의 두려움보다는 에로스의 복잡함 앞에서 소심해지는 미성년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메리칸 슬립오버]의 폐허는 일탈의 공간이지만, 동시에 그 일탈에 쉽게 끼어들지 못하는 10대들의 수줍은 심리를 드러내는 곳이기도 하다. 비전문 배우를 기용하고, 지역 축제를 그대로 담아내는 세미 다큐멘터리 적인 성향과 10대 섹스 코미디와 현실 간의 적은 차이 역시 이런 소심한 감수성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아메리칸 슬립오버]에 등장하는 사건들은 [팔로우]와 달리, 지극히 일상적인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장르 영화에 들어선 [팔로우]는 이런 어색함과 거리감이 공포로 바뀌었다. 섹스를 통해 저주의 전염이 일어나고, '그것'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시퀀스가 대표적일 것이다. 이런 폐허의 공포성은 다른 공포 영화들에서 자주 다뤄진 방식이니 특별할 것까지는 없다. [팔로우]에서 흥미로운 점은, 마을에 널린 폐허를 보여주거나 관망하는 시점 쇼트이 자주 등장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미첼은 [팔로우]에서 폐허와 일상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걸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다. 종종 등장하는 폐허가 된 디트로이트를 가로지르는 몽타주 시퀀스가 대표적이다. 이런 드라이빙 몽타주 시퀀스들은 서사와 무관한 방식으로 이동 시퀀스로 제시된다. 이런 몽타주 시퀀스는 과연 어떤 효과를 불러일으키고 있는가? 자신에게 저주를 넘긴 휴가 머물던 폐허가 된 집을 제이 일행이 찾아가는 시퀀스가 이 질문에 대해 어느 정도 답을 제공해주고 있다. 분명 휴가 공포에 떨면서 지냈을 폐가에서 제이와 친구들이 발견하는 것은, 포르노 잡지와 만화 그림과 신문으로 막아둔 창문, 그것의 등장을 경고하도록 만들어진 깡통 종들이다. 미첼이 생각하는 폐허와 폐가는 복고적 대중문화와 에로스의 잔해가 타나토스의 위협과 함께 뒹구는 곳이다. 그리고 이는 낮은 임대료와 불안한 치안으로 생겨난, 현실 디트로이트에 버려진 공간에 교묘히 스며들고 있다. 디트로이트 소년소녀들은 이런 공간에서 에로스적 일탈을 경험하지만, 이 공간들이 안겨주는 불길함과 위협을 감수해야 한다.

그다음으로는 시간적 맥락의 삭제가 있다. 이런 시간적 맥락의 삭제는 [아메리칸 슬립오버]보다 [팔로우]에서 더군다나 강하게 등장하는 편이다. [아메리칸 슬립오버]에서는 다소 복고적이고 키치하기까지 한 극 중 영화를 통해 인물의 심리를 묘사하는 정도였다. 심지어 한 캐릭터는 구체적으로 여름 방학이 끝나간다고 언급한다. 실제 지역 축제에 끼어든 주인공들로 서사를 마무리 짓는 세미 다큐멘터리다운 묘사 역시 [아메리칸 슬립오버]가 인공적 세팅을 배제하고 동시대적으로 영화를 찍었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팔로우]로 넘어오면 적극적으로 구체적인 시간적 맥락을 삭제하고 레트로풍 소도구와 고전 영화 인용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서사 내 시간대 묘사를 보자. 제이가 수업 듣는 묘사로 보면, 작중 시간대가 아직 학기 중이라는 것은 알 수 있지만, 종종 제이와 친구들은 수업이 없는 것처럼 사건에 몰두하거나 호수로 휴가를 가기도 한다. 소도구나 세트 같은 부분을 보면 구체적인 시간적 맥락의 삭제는 더욱 강해진다. 제이와 그 친구들이 종종 보는 공포 영화들이 대표적이다. 이 영화들은 컬러가 아닌 흑백으로 된 옛날 영화다. 여기까지는 미첼 자신의 (또는 캐릭터들) 영화 광적 취향이라고 넘어간다고 하더라도, 그런 영화를 보여주는 텔레비전이 브라운관이라는 점은 확실히 이상하다. 이런 시대착오적인 소도구들은 과연 주인공들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어진다. 소도구의 선정뿐만이 아니라 색감이나 조명에서도 표현주의적인 어둠과 색감을 끌어들이면서 공간을 모호하게 만드는 데 주력하고 있다. 미첼은 [팔로우]를 만들면서, 새로운 연출 방법을 동원하고 있는데 [늑대소년] 이전 조성희 감독이 그랬던 것처럼 옛날 문화의 도상과 미감을 차용하는 방식으로 현실적인 공간을 초현실적인 불안함으로 바꾸는 방식을 차용하고 있다.

주지해야 할 점은, 이 두 영화에서는 사회경제적인 문제가 표면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첼의 영화 속 등장 인물들은, 당장의 삶을 걱정해야 하는 극빈층 노동자들이 아니다. [아메리칸 슬립오버]나 [팔로우]의 1~20대 캐릭터들에겐 생계 문제가 보이지 않는다. 등장하더라도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공업하고는 상관이 없다. [팔로우]에서 아이스크림 가게에 일하는 제이의 동생 정도가 미첼 영화에 등장하는 경제 활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대학에 다니거나 진학하려는 묘사를 볼 때, 부자까지는 아니더라도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팔로우]에서 저주를 전파한 휴는 제대로 학교에 다니는 학생도 아니었고, 이름을 비롯한 신분도 가짜에다 살기 위해 도주하고 있는 비현실적인 캐릭터다. 이런 존재는 지극히 장르적인 설정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지점에서 [아메리칸 슬립오버]나 [팔로우]는 현실적인 어려움에서 동떨어진 끝나지 않을 휴가 상태에 있는 미성년처럼 보인다. 이를 통해 데이비드 로버트 미첼은 션 베이커의 [플로리다 프로젝트]나 켈리 레이처드의 [웬디와 루시] 같은 밑바닥 사실주의나 상술한 [로저와 나] 같은 다큐멘터리하고는 선을 긋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비슷한 방식으로 인종적인 문제 역시 크게 다뤄지지 않고, [아메리칸 슬립오버]에 등장하는 엠마 정도만이 디트로이트의 인종적 구성에 대한 암시를 남기고 있을 뿐이다. 그 점에서는 미첼의 접근 방식은 짐 자무시의 [오직 사랑하는 자들만이 살아남는다]가 영생하는 흡혈귀를 통해 디트로이트에 접근하는 방식과 닮아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인데, [오직 사랑하는 자들만이 살아남는다]랑 달리 인물들이 전적으로 비현실에 속하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부분들을 종합해서 보면 명확해진 부분이 있다. 미첼 영화에 등장하는 디트로이트의 레트로는 '좋았던 시절의 디트로이트'를 주지하게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묘사들은 미첼 자신의 197-80년대에 회고적인 취향에 기반해 있지만, 미첼은 이 회고적인 취향이 디트로이트의 폐허에 배치되는 순간 어떤 의미를 갖는지 잘 알고 있다. 정확히는 197-80년대 미국 대중문화나 삶의 잔해가 미첼이 만들어낸 폐허와 일상에 그대로 머물러 있고, 의도적으로 이를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배경을 설명해주거나 익숙하게 다룰 어른은 삭제되어 있다. [아메리칸 슬립오버]에서도 어른은 자고 있거나 뒤에서 아무런 말 없이 카트를 밀고 있었다. [팔로우]에서는 한술 더 떠 존재가 아예 사라지고, 위협적인 '그것'의 가면으로 등장한다. 사실 [팔로우]의 '그것'은 어른의 모습만 고집하는 괴물은 아니다. 종종 '그것'은 친구들의 모습이나,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변해 다가온다. 하지만 '그것'을 상대해야 하는 건 '그것'을 볼 수 있는 제이와 제이를 믿어주는 친구와 동생뿐이다. 어른이 부재하지만, 어른들이 남긴 시간적 맥락에 둘러싸인 채 정체불명의 죽음과 싸워야 한다. 이는 도입부 애니가 차를 타고 멀리 도망가 아버지에게 사죄의 메시지를 남기는 부분에서 알 수 있다. 여기서도 관객은 애니의 아버지가 어떤 얘기를 하는지 들을 수 없다. 이 장면을 보면 알겠지만, 미첼은 어른들이 10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팔로우]는 그 점에서 [아메리칸 슬립오버]보다도 10대들의 연대라는 개념을 발전시킨 영화라고 볼 수 있다.

  1. 어른의 섹스에 어색한 미성년의 불안과 공포

어른이 부재한 모호한 시공간의 악몽은 곧 성적인 문제와 결부된다. 미첼이 내세우는 소년 캐릭터들은 이런 문제에 수줍거나 내성적인 모습을 보인다. [아메리칸 슬립오버]에서 성적인 상황으로 등장함에도 무관심하게 대하는 여성 캐릭터들과 반대로 쩔쩔매는 소년 캐릭터부터 시작해, [팔로우]에서는 아예 여성의 시점 쇼트에서 이런 수줍은 소년들의 성적 관심을 인식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성적 판타지의 음탕함을 어느 정도 중화시키기까지 한다. 미첼이 만들어낸 소년들은 그 점에서 페미니즘과 여성의 욕망 담론에 대해 비교적 보편화한 동시대를 살아가는 '초식남'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 소년들은 성적 욕망이나 관심은 있되, 그 욕망의 적극적 담지자나 주도권을 지니지 못한다고도 할 수 있다. 소녀들 역시 수줍음을 유지하고 있지만, 적극적인 담지자이자 주도권을 쥐려는 모습을 보이는 부분도 흥미롭다. 후술하겠지만 이 수줍고 초식남 성향까지 보이는 한 소년들이 활동하는 공간이 강한 남성성과 마초성을 내세우는 공업도시인 디트로이트라는 점도 미첼의 영화를 흥미롭게 만들고 있다. 상술한 레트로 문화와 결부시켜보면, 미첼이 묘사하는 소년 캐릭터들은 영미권 오타쿠인 긱이나 너드에 가깝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소녀들은 적극적으로 소년을 유혹하거나 ([아메리칸 슬립오버]의 클로디아와 자넬, 매기) 거부하고 ([아메리칸 슬립오버]의 줄리), 소년들처럼 수줍음을 유지하더라도 성 경험과 접근을 그리 금기시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팔로우]의 제이) [아메리칸 슬립오버]나 [팔로우]가 장르 영화임에도 장르 영화스럽지 않다면, 이런 어색함과 불안함이라는 감정이 인물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아메리칸 슬립오버]를 보자. 이 영화에서 성적 접촉은, 기대와 다른 어색하고 설익은 침묵이다. 우연히 첫눈에 반한 금발 소녀를 찾아다니는 롭은 영화의 어정쩡하고 실망으로 점철된 정서를 잘 드러내는 캐릭터일 것이다. 롭은 이곳저곳 친구들의 집을 기웃거리면서 금발 소녀를 찾으려고 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심지어 미첼은 롭 앞에 바로 지나가는 금발 소녀를 집어넣으면서 롭을 희롱하기까지 한다. 탐색 도중에 슬립오버하는 친구의 누나 줄리를 만난다. 하지만 목욕을 한다는 성적 판타지적인 상황임에도 줄리는 롭에 대해 관심을 보이기는 커녕 접근을 거부하고 돌려보내기까지 한다. 후반부에서야 롭은 원하던 소녀를 만나지만 예상과 다른 모습과 남자 친구가 있는 모습에 몇 마디 말을 섞고 돌아 나올 뿐이다. 롭의 서사는 명백히 이웃집 소녀라는 미국식 성적 판타지에 기반해 있지만, 미첼은 군상극 형태의 다중 플롯을 차용하면서 판타지를 충족하기 보다는 불만족하게 하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다소 배배꼬인 클로디아와 자넬 의 삼각관계와 씁쓸한 종말이나 스콧과 쌍둥이 자매 간의 관계 역시 관계의 방향성이 도무지 통제되지 않거나 무언가를 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이다. 이는 난잡한 성적 일탈 끝에 진정한 사랑을 찾는다는 틴에이지 섹스 코미디라는 장르 전형성에서 탈주하는 방식이기도 하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욕망을 모두 충족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미성년의 낙담을 보여주는 장치기도 한다. 매기가 말했듯이 [아메리칸 슬립오버]는 일탈에 대한 약속이 깨지고 동심을 잃어버린 자리에 서성거리는 청춘을 보여주는 영화다. 영화의 마지막 마을 축제 행진에 나타난 아이들의 표정을 교차하는 편집은 그런 서성거림의 감수성이 공통된 무언가라는걸 보여주고 있다.

[팔로우]로 넘어오면 미첼은 [아메리칸 슬립오버]보다 더욱 직접적으로 타나토스와 에로스 간의 관계를 다룬다. '그것'은 분명 성병의 상징이며, '그것'에게 살해당하는 시퀀스나 클라이맥스는 성적 불편함으로 가득하다. 미첼 역시 인터뷰에서 '그것'이 자신의 어린 시절 악몽에 기반했다고 밝히면서 자신의 두 영화가 사적인 세계에 기반하고 있다는걸 인정했다. 당연하겠지만 [아메리칸 슬립오버]에서 보였던 미국식 성적 판타지 역시 건재하다. 초반부 제이의 일상을 보여줄 때 '이웃집 소녀'를 훔쳐보는 10대 소년의 모습은 미국식 성적 판타지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며, 이후 이어지는 영화관에서 데이트와 외딴 장소에서 카섹스 장면은 미국 10대들이 주인공인 영화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장면이다. [팔로우]의 악몽은 이런 미국식으로 친숙한 성적 접촉의 현장이 갑자기 비현실적인 죽음으로 반전되면서 발생한다. 흥미로운 것은, 미첼은 섹스 행위 자체는 그렇게까지 금기시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제이의 첫 섹스는 일상적인 호기심과 두려움에 기반해 그려질 뿐, 윤리적으로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다 제이가 일시적으로나마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정절을 지키는 게 아니라 다른 남자랑 섹스해야 한다. 섹스의 금지가 아니라 과잉된 섹스로 처벌이 이뤄지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미첼은 미국 공포 영화에서 자주 나타나는 '성적으로 문란한 청소년을 처벌하는 윤리적 대리자로서 괴물'이라는 접근은 배제한다.

이런 접근을 잘 보여주는 캐릭터가 그렉일것이다. 그렉은 또래 여자들에게 인기 있는 소년으로 그려지지만 제이를 돕기 위해 섹스를 한 이후 얼마 안 가 '그것'에게 죽는다. 가장 껄렁해 보였던 그렉의 죽음은 의문과 해석 지점을 남긴다. 생각해볼 만한 지점은 작중에서 등장하는 그렉이 이성과 잘 어울리고 인기 있는 모습이, 실은 성적인 문란함하고는 관계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어떤 지점에서 그렉의 표면적인 문란한 캐릭터 성은, 진짜로 숫기 없이 제이만 짝사랑하는 폴의 막연한 거리감과 열등감이 친구에게 투영된 것 아닌가 싶을 정도다. 이 영화에서는 적극적인 섹스가 생존의 방법이라는 걸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그 점에서 그렉 역시 제이와 별반 다를 바 없이, 섹스를 도구로 활용할 줄 모르는 미성년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사회적 맥락이 있다. 디트로이트 같은 공업 도시의 청년 문화는 유달리 거칠고 남성적인 경향이 있었다는 점이다. 젠더 문제에서도 노동자 계급 소년들은 그들 부모 세대의 보수적인 젠더/약자 개념을 받아들여 여성이나 약자에 대해 포식자적인 태도를 취했다. 멀리 가지 않아도 박내선의 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실제 디트로이트 10대들은 실직한 부모가 내세우는 경제적 압박과 범죄에 빠져들고 있다. 하지만 미첼의 영화는 그런 포식자적인 태도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렉과 여자아이들의 관계는 과시적이라기 보다는 로맨틱하게 인기있는 모습으로 그려지며, 제이와의 섹스 역시 고통에 동참한다는것으로 보인다. 그렉의 죽음은 그 점에서 공업 도시의 남성 문화를 체화하지 못한 소년의 죽음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데 미첼 영화의 모호한 시공간은 어른의 흔적만 남은 공간에서 어른 없이 에로스와 타나토스를 다루는 법을 배워야 하는 (동시에 초자아-어른의 처벌을 두려워하는) 디트로이트 소년소녀들의 불안한 심리의 투사라 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미성년의 불안함과 죽음에, 근친상간이라는 함의가 배어있다는 점이다. 그렉의 죽음에 등장하는 그렉의 엄마 모습을 한 '그것'과 영화 후반부에 수영장에 등장하는 제이의 아버지로 둔갑해 다가오는 '그것'이 대표적일 것이다. 이 두 장면은 가장 무방비로 노출되는 장소 (집, 수영장)에서 근친 강간 후 살해당할 수 있다는 불안함이 배어있다. 그 점에서 [팔로우]의 그것이 내리는 섹스에 대한 처벌은, 문란함과 반대로 타인과의 섹스를 통해 가족과 분리됨을 처벌하는 것 아닐까? 하지만 그렇다고 타인과의 섹스가 편하게 그려지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제이-그렉이나 제이-폴 같은 친구끼리 하는 섹스를 제외하면 [팔로우]의 섹스는 불쾌한 공포감이 배어있다. 제이가 배 위의 남자들에게 성적으로 접근하는 장면과 폴이 제이랑 섹스한 후, 매춘부를 찾아가는 장면이 그렇다. 이 두 장면은 생존을 위한 섹스지만, 생존과 직결된 번식 개념은 철저히 제거되어 있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이어질 섹스 장면 역시 의도적으로 생략되면서, 쾌락 개념 역시 사라졌다. 사실상 [팔로우]는 임신 없는 섹스라는 개념이 전제되어야 가능한 영화다. 한편 도구로써 섹스에 대한 젠더의 격차도 찾아볼 수 있을 것인데, 상대적으로 섹스 권력에서 약자일 수 밖에 없는 여성인 제이가 남자들에게 접근하는 장면이 내키지 않음과 1대 다의 착취적인 섹스를 암시케 하는 불편함이 보인다면, 폴이 매춘부를 찾아가는 장면은 낯섦과 섹스의 도구화에 대한 두려움은 남아있되 방향성이 다르다. 제이가 착취당함을 두려워한다면, 폴은 로맨틱한 섹스의 휘발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근친 강간에서 벗어나려면 섹스를 도구화해야 한다는 현실이 두려운 것일까? [팔로우]의 결말은 어떻게든 어른에 예속되는 근친 강간의 공포에서 살아남아 이어졌다는 안도와 그럼에도 영원히 함께할 수 밖에 없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양면적으로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1. 결론

데이비드 로버트 미첼은 지역의 특징적인 요소들을 외삽성을 감수하더라도, 장르 영화에 집어넣으면서 어른이 부재한 팝 문화로 넘쳐나는 현실을 헤쳐나가야 하는 미성년의 심리적 미로를 구축하는 감독이라 할 수 있다. [아메리칸 슬립오버]에서는 성적 접근에 대한 두려움과 서툼을 세미 다큐멘터리적 접근으로 부각하면서 10대 섹스 코미디 장르의 자극성을 탈피하고 성장에 관해 얘기한다면, [팔로우]는 디트로이트라는 공간을 모호한 시공간과 폐허 성을 강조한 뒤, 섹슈얼리티 문제에 대한 접근 방식을 뒤집어 생각하는 방법으로 양식화된 미국 10대 공포 영화의 성 관념을 바꾸고 있다. 데이비드 로버트 미첼의 강점은 일견 힙하게만 보일 수 있는 대중문화 인용과 미적 감각을, 지역적 사실주의와 미장센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간단하면서도, 중요한 접근을 통해 초현실적이면서도 절박한 감성을 차분하게 녹여내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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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은 어떻게 형상화되는가?: [딥 엔드], [외침], [문라이팅]을 통해 본 예지 스콜리모프스키의 결핍과 히스테리
 
 
예지 스콜리모프스키는 로만 폴란스키의 동료로 시작했지만, 폴란드 영화사에서도 잊힌 감독에 가깝다. 그가 만든 영화 중 가장 대중적으로 성공한 영화는 1982년에 공개한 [문라이팅]이었으며, 대부분의 영화는 제대로 개봉하지 못했거나 아직도 먼지에 슬어있다. 심지어 1980년대 말부터 2000년대 말까지 영화를 만들지 않고 그림에 전념하던 시기도 있을 정도다. 차라리 그를 설명하자면 [어벤져스]의 러시아 악당이나 [이스턴 프라미스]의 늙고 고루한 주인공의 러시아계 할아버지를 드는 게 더 빠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예지 스콜리모프스키는 권투 선수와 재즈 음악가를 했다는 특이한 이력과 동시에, 개성 강한 폴란드 영화감독들 중에서도 불안과 결핍, 히스테리의 문제에 천착해온 감독이라 할 수 있다. 스콜리모프스키는 1960년대 말 폴란드를 떠난 뒤 영국, 독일, 프랑스를 전전하면서 국외자로서 영화를 만들어야 했다. 예지 스콜리모프스키의 영화는 어떤 지점에서는 망명자로서 불안과 히스테리를 안고, 그것을 어떻게 영화로 표현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본 장평은 스콜리모프스키가 197-80년대 영국 시절 만든 영화 세 편 [딥 엔드], [외침], [문라이팅]을 가지고 어떻게 스콜리모프스키의 불안을 형상화하는지 있는지 다뤄볼 생각이다.
 
  1. 불안의 요소
예지 스콜리모프스키의 영화를 보면 주인공 캐릭터에게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걸 알 수 있다. 바로 불안이다. 이 불안은 짜증스러움과 공격적인 태도, 기행, 또는 자존감 부족으로 드러나고 있다. 스콜리모프스키의 영화가 흥미로운 부분은, 영화가 진행될수록 주인공 뿐만이 아니라 다른 인물들에게도 불안이 강력하게 드러나며, 이 불안이 만들어내는 에너지로 영화를 이끌고 간다는 점이다. 스콜리모프스키는 이를 구현하기 위해 시나리오 단계부터 캐릭터에게 불안과 스트레스를 주는 상황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에피소드 형식으로 풀어내고 있다. 스콜리모프스키는 이를 하나로 묶는 틀로써 불안이라는 감정을 내세우며, 이 불안이 도무지 나아갈 수 없을때까지 계속 부풀리다가 갑자기 멈춰세우고 결론을 내리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든다. 그 결과 스콜리모프스키의 영화에서 인물들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며, 그 결핍 끝에 정신 착란적인 상황과 초현실적인 이미지를 경험하게 된다. 이런 짜증과 경험에 설득력을 배우의 연기에서 끌어내고 있는데, 감독의 배우 경력하고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본 단락에서는 영국 시절 스콜리모프스키가 만든 세 편의 영화가 서사에서 어떻게 불안을 형상화하는지 살펴볼 생각이다.    
 
예지 스콜리모프스키가 단순한 서사를 선호하는 감독임에도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이유라면 무엇일까? 그 이유로는 스콜리모프스키가 돌발성과 의외성을 통해 장르의 규칙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어떻게 진척될지를 쉽사리 파악하기 힘든 영화를 만든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스콜리모프스키가 종종 장르 영화의 특성에 끌려들어 가는 것처럼 보여도, 장르적인 전형성에 대한 만족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이유 역시, 이 불안이 방향성을 모호하게 만들며, 나아가 초현실적인 무드로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연기 역시 대사보다는 배우의 제스처에서 만들어내는 에너지에 집중하고 있다. 특히 [문라이팅] 같은 경우, 대사를 되도록 배제하고 제레미 아이언스의 행동에 집중하는 무성 영화적인 시도에 가까운 대사 활용을 보여주고 있다.
 
        1-1. [딥 엔드]: 스윙잉 런던의 섹스 코미디가, 섹스 희비극이 되기까지 
 
[딥 엔드]를 살펴보자. 이 영화는 1960년대 말 목욕탕 직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10대 마이크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 마이크는 부모님 때문에 목욕탕에 취직하고, 거기서 같이 일하는 또래 여자인 수잔을 짝사랑하게 된다. 수잔도 마이크를 싫어하진 않는다. 여기까지는 1960년대 서구권에서 우후죽순 등장한 성 혁명의 자유를 누리려는 섹스 코미디와 크게 다를 게 없는 전제다. 수잔 역 역시 당시 스윙잉 런던을 대표했던 모델이자 배우 제인 애셔를 기용하고 있다. 장르의 법칙에서 예상되는 [딥 엔드]의 서사적 귀결은 마이크가 짝사랑하는 수잔과 사랑을 이룬다, 일 것이다. 그리고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여러 코믹한 수난을 거칠 것이다. 실제로 틴에이지 섹스 코미디에서는 성적 수난은 코믹한 성장 과정의 일환을 그려진다.
 
하지만 스콜리모프스키가 마이크라는 인물을 끌고 가는 방식은 전제가 약속하는 안정된 전개를 무시하는 방식으로 이뤄져 있다. 사실 마이크와 수잔이 일하는 목욕탕은, 손님에게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다. 수잔은 이런 상황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다. 심지어 수잔은 마이크에게 성적 매력이 있으니 손님들에게 적극적으로 활용해보라고 충고를 한다. 하지만 마이크는 자신이 마주하게 된 상황을 어색하고 불편하게 생각하며 끊임없이 어긋난다. 영화의 초반부는 마이크가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그린다. 마이크는 성적으로 노련한 성인 여성들에 주눅이 들거나, 수잔의 남자들이나 경찰 같은 성인 남성에게 수난을 당한다. 마이크의 불안한 위치는 임신이 가능한 남자 포스터를 뒤집어쓴 장면이라던가, 직장에 등장한 부모님에게 의존적인 모습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마이크는 부모에게 의존적이며 미숙한 소년 성으로 여성들에게 호감을 얻지만, 그 호감은 일정선 이상 발전하지 않으며 본인 역시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성적인 상황을 통제하지 못한다.
 
반대로 수잔 같은 경우엔 남자들과 원조교제에 익숙해져 있고,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실제로 수잔은 마이크의 추궁에도 '나는 유부남과 섹스하는 훨씬 나쁜 여자다. 그럼 내가 어떤 여자야 하냐'고 반문하기까지 한다. 심지어 스콜리모프스키는 부모님이 사망했다는 설정을 통해 수잔이 마이크랑 달리, 미성년적 가치관에서 졸업했다는걸 명백히 밝히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수잔은 자신의 육체만을 탐하는 남자들을 경멸한다. 약혼자 크리스에게 너도 날 덮치지 않냐며 쏘아붙이면서 '결혼하면 영원히 나를 가질 수 있다'며 말하는 수잔의 대사는 섹스의 현실을 알아버렸고 결혼의 낭만성도 믿지 않는 캐릭터라는 걸 잘 보여주고 있다. 수잔은 명백히 성 혁명이나 페미니즘 이후에 가능한 여성상이다. 하지만 수잔은 자신이 처한 성인을 상대로 한 성적 매력의 거래와 착취라는 상황을 좋아하지 않는다. 수잔과 관계를 맺는 크리스나 수영 강사가 '결혼'과 관련 있다는걸 (크리스는 수잔의 약혼남, 수영 강사는 유부남이다) 생각해보면 가부장의 위선적이고 일탈적인 성적 해방의 덫에 걸려들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구도 때문에 [딥 엔드]의 연애 노선은 배배 꼬여있다. 수잔은 마이크에게 호감을 표하지만, 마이크가 가지고 있는 가부장에서 벗어난 듯한 순수함 때문이지 이성적인 매력 때문에 끌리지 않는다. 반대로 마이크는 현실성 없는 플라토닉한 사랑만으로 성적인 관계로 발전하려고 애쓴다. 그렇기에 수잔과 마이크의 관계는 영화가 끝나기 직전까지 직장 동료 이상에서 발전하질 못한다. 이 방향성의 어긋남은 끊임없이 불안과 히스테리로 누적되고 극단적으로 변한다. 마이크가 지하철에 타서 누드 핀업을 수잔에게 들이대며 '너는 그런 여자가 아니잖아'라고 히스테리를 부리다가 결국 수잔에게 제지당하는 장면은, 마이크의 성 관념이 유아적인 혼돈에 빠져있다는 걸 보여준다. 스콜리모프스키는 이 유아적 혼돈을 바라보는 승객의 숏을 통해, 마이크의 히스테리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보여준다. 수영장으로 돌아와 빠트린 누드 핀업이 여성으로 변하는 시퀀스를 마이크의 기대가 마침내 망상에 이르렀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결말을 장식하는 눈 속에서 반지 보석 찾기 시퀀스는 스콜리모프스키의 불안과 히스테리를 파국을 통해 농축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이 시퀀스는 수잔의 사소한 실수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스콜리모프스키는 이 사소한 실수를 논리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거창하게 확장하는 방식을 취한다. 수잔과 마이크는 보석을 찾기 위해 눈을 퍼다가 물 빠진 수영장에서 녹여서 찾기로 결정하는 것이다. 영화의 결말은 이 눈을 녹이는 수영장을 떠나지 않으며, 마이크와 수잔의 섹스 역시 반지를 찾은 이후 이뤄진다. 이 과정 도중에 수잔 역시 반지를 찾지 못할까 초조해하며, 심지어 자신과 관계가 있던 유부남 수영 강사에게 필요 이상의 짜증과 저주를 퍼붓는 모습을 보인다. 반지를 찾을 수 없다는 불안함과 초조함이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겼던 서비스적 관계를 거부하기에 이른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하지만 반대로 마이크는 보석을 미끼로 수잔에게 섹스를 거래하는 모습을 보인다. 어찌 보면 이 거래가 파국의 방아쇠를 당겼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거래가 이뤄진 후 수잔과 마이크는 수잔이 지금까지 해왔던 원조교제적인 관계나 다름없어지기 때문이다. 후술하겠지만 마이크와 수잔의 섹스 장면을 묘사할 때 등장하는 현란한 앵글과 편집은, 섹스의 친밀함보다는 기교로 심적인 거리감을 강조하고 있다. 섹스 후 등장하는 마이크의 발악이 수잔을 향한 크리스라던가, 수영 강사의 반응과 다를 게 없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스콜리모프스키는 여기다 갑작스러운 결말을 내면서, 이런 답답함을 박제해버린다. 이 [딥 엔드]가 성적으로 문란한 여성을 남성이 처벌한다는 상당히 반 페미니즘적인 읽힐 수 있을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음에도, 그런 위험에 빠지지 않았다면 수잔과 마이크라는 두 인물의 양면성을 표현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에드워드 양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처럼 反-성장물이라 볼 수 있다면, 성장하려고 애쓰다가 성인 남성이 당연시하는 자기중심적이고 여성 혐오적인 행동 방식에 물들어 여성을 우발적으로 살해해버린 소년의 파국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1-2. [외침]: 음향의 주체가 드러내는 문명과 야만의 대립
 
시골 데본에서 진행되는 [외침]은 스콜리모프스키 특유의 불안이 공포/괴담 장르에서 어떻게 전개될 수 있을지, 를 보여주는 영화다. 그리고 다른 두 편보다 이야기 구조에 대한 실험과 더불어, 음향과 이미지의 결합이라는 점에서 심리적인 불안을 구체화하고 있다. 앤서니와 레이철은 이상적인 부부라는 껍데기 아래에 각각 간통과 불임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다. 이들의 부부 관계는 호주 원주민들에게 외침을 배운 찰스 크로슬리가 끼어들면서 해체된다. [외침]이 흥미로운 점은, [딥 엔드]에서 볼 수 있었던 히스테리 연기나 자잘한 사건식 구성은 줄어들었지만 대신 설명을 축소하고 서사를 추상화하는 방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외침]의 초반부를 보면, 앤서니와 레이철 부부가 이미 등장하고 있음에도 처음 볼 때 그 사실을 알아차리기 힘들다. 왜냐하면, 액자 밖 이야기는 크리켓 점수 기록 때문에 정신병동에 온 그레이브스의 시점을 따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앤서니 부부와 크로슬리가 등장하는 숏은 처음 보는 관객 입장에서는 어떤 맥락에서 등장하는지 알 수 없다. 화자를 의도적으로 혼란스럽게 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인데, 실제로 액자 속 얘기 역시 명백히 크로슬리가 화자임에도 앤서니와 레이철의 시점을 따라가고 있다. 그리고 영화 후반부에 이르면, 이야기의 주체는 다시 크로슬리로 바뀌면서 끝나면서 혼란을 가중하고 있다.
 
또한 스콜리모프스키와 각본가 마이클 오스틴은 설명을 의도적으로 생략하고 갑작스러운 전개 방식을 취하고 있다. 크로슬리가 사라졌다가 재등장하는 장면이라던가 앤서니가 몰래 사귀고 있는 여자의 남편이 갑자기 저주로 고통받는 회상 시퀀스, 크로슬리의 영혼을 보관한 돌을 어떤 복선 없이 앤서니가 찾아내는 부분이 그렇다. 그리고 액자 속 서사가 끝났을때 스콜리모프스키는 앤서니나 레이철이 어떤 상태인지 설명하지 않고, 영화 도입부에 등장한 레이철이 크로슬리의 시체를 확인하는 장면을 다시 반복한다. 이 반복을 통해 스콜리모프스키는 이 이야기를 과연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지를 질문한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제대로 된 답은 없이, 불길한 감정을 남긴 채 마무리된다. 다만 이런 식의 전개가 스콜리모프스키의 개성을 드러내기보다는 호러나 괴담 장르의 전형성과 비틂에 기대고 있다는 점에서는 [외침]은 스콜리모프스키의 정수를 확인하기엔 다소 아쉽다는 인상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액자 안에서 진행되는 [외침]의 서사는 사실 장르를 일탈하는 내용은 아니다. 성을 기반으로 한 부르주아 해체극과 문명과 야만이라는 갈등 자체는 이미 다른 영화에서도 많이 쓰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주술이라는 개념도 1970년대 오스트레일리아 뉴웨이브 영화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원작 소설에서 영화로 각색하면서 스콜리모프스키는 소리라는 개념을 부각하며, 소리를 '만드는' 과정을 이미지로 담는데 집착하는 데다 장르에도 반영하면서 긴장감을 만들고 있다. 원작과 달리, [외침]에서 앤서니의 직업은 교회 오르간 연주자이자, 현대 음악가다. 그는 교회 신자들을 위해 오르간을 연주하면서도, 현대적인 스튜디오에서 예술 작업을 이어간다. 앤서니의 직업과 활동은 그 점에서 서구 문명에 사는 지식인의 믿음 체계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크로슬리는 이런 믿음 체계를 교란하는 자로 등장한다. 앤서니를 만난 크로슬리가 갑자기 종교와 영혼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토론을 하는 것도 이런 연장선에 있다. 전근대성의 파괴성을 지닌 크로슬리에겐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고발하고 영적 각성을 촉구하는 교회 목사의 말들은 공허하기 그지없기 때문이다.
 
[외침]의 서사에서 주목할 만 부분이라면, 크로슬리가 갑자기 사라졌다가 다시 등장하는 지점이다. 이때 앤서니의 반응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앤서니는 크로슬리가 사라지는 걸 고대했지만, 정작 사라졌을 때 반응은 안심하면서도 어딘가 찜찜하다는 심리를 드러낸다. 이후 이들의 삶은 크로슬리가 등장하기 이전처럼 진행된다. 다소 모호하게 처리된 부분이 있다면, 앤서니와 간통 상대의 관계일 것인데 스콜리모프스키는 갑작스럽게 교회를 나가는 간통 상대의 숏과 자전거가 걸려 넘어진 숏을 집어넣으면서, 이들의 간통이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라는 걸 암시한다. 하지만 집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레이철과 앤서니는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신경질적으로 변해있다. 심지어 앤서니는 크로슬리의 외침을 흉내 내는 모습을 보인다. 이때 다시 크로슬리가 등장하는데, 부부의 반응은 크로슬리에게 홀려있는 상태다. 스콜리모프스키는 관계를 처음으로 돌리는 척하면서, 이들의 관계에 크로슬리라는 야만적 타자한테 얼마나 잠식돼버렸는지 보여준다. 하지만 레이철과 달리 앤서니는 얼마 안 있어 크로슬리의 홀림에서 벗어나 버리는데, 야만의 세계에서 수컷들은 결국 경쟁할 수밖에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여성에게 주술을 걸어 소유물로 전락시키고 나아가 수컷들 간의 적대심을 불러일으키는 도구가 된다는 점에서, [외침]의 전개는 분명 여성 혐오적인 지점이 있다. 다만 영화의 결말은 이런 구도를 이상하게 틀고 있기도 하다. 상술했듯이 수컷들은 죽거나 병원에 입원해 등장하지 않고 레이철 혼자서 크로슬리의 시체를 확인하는 것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여기다 앤서니와 레이철의 관계 역시 보기보다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었다는 점이라던가, 레이철이 크로슬리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꼈다는 지점을 생각해보면 관계를 단순한 주종 관계라 볼 수 없는 부분도 있다. 되려 결말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레이철이 남성들에게 해방되었다는 인상마저 준다. 물론 이런 해방이 매우 단편적으로 그려진다는 점에서, [외침]이 여성 혐오에서 벗어났다고 보긴 힘들다. 다만 [딥 엔드]의 갑작스러운 살해라던가 [문라이팅]의 의처증과 거기서 비롯된 망상에 대한 객관적인 관찰처럼 스콜리모프스키의 영화에서는 남성성에 대한 거리 두기가 이뤄지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인상을 준다.
 
        1-3. 문라이팅: 귀환의 불확실성에 홀로 갇혀버린 폴란드 남자
 
[문라이팅]은 영국 하위층에 속한 불법 체류자의 비루함이라는 정치적 상황을 불만족과 히스테리로 연계하는 영화다. 영국인을 주인공으로 삼고 심리에 집중했던 두 영화랑 달리, [문라이팅]은 영국 내 폴란드인이라는 민족적인 텍스트와 1980년대 자유 폴란드 노조 사태라는 정치적인 텍스트를 직접적으로 끌어들인다. [문라이팅]의 불만족은 귀환의 불확실성에서 비롯된다. 영화는 입국 심사장에서 시작하는데 [딥 엔드]의 도입부 면접 시퀀스와 닮아있는 구석이 있다. 먼저 장소 설정은 마치 영국이라는 사회가 이 폴란드 남자들을 허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검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딥 엔드]가 그렇듯이 [문라이팅]의 주인공들 역시 이 심사 과정이 어색하고 불안하다. 마스터 숏 없이 끊임없이 머리를 다듬는 직원의 클로즈업으로 시작하는 점이라던가, 번쩍거리는 형광등이 만들어내는 불안한 조명, 말없이 보기만 하는 얼굴 숏들을 이런 불안함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스콜리모프스키가 망명한 폴란드인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이 불안함을 스콜리모프스키의 불안감하고도 연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의 폴란드인인 노박과 볼스키, 바나샥, 쿠데이는 이중 착취 구조에 빠져 있다. [문라이팅]의 시작은 영국의 값싼 급여가 폴란드의 비싼 급여가 될 수 있다고 꾀어 1달 동안 저임금으로 일하게 만드는 것에서 비롯된다. 스콜리모프스키는 이 설정을 통해 폴란드의 공산주의 체제와 영국의 자본주의 체제의 격차와 그 격차에서 이득을 챙기려는 자들을 보여준다. 도입부 티나 터너 공연을 회상하는 장면은 사실상 공산주의 체제와 자본주의 체제가 별반 다를 게 없어졌다는 감독의 선언이기도 하다. 하지만 폴란드가 자유 노조 문제로 상황이 불안해지자, 이 착취의 허위성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 착취 구조를 알고 있고 유일하게 영어를 할 줄 아는 폴란드인인 주인공 노박은 부하들과 달리 권력을 쥘 수 있게 되지만 대신 온갖 수난을 당하게 된다.
 
노박을 불안하게 상황들은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번째로는 어떻게든 사실을 숨기고 생존하기 위해 애쓰는 노박과 사실을 모르는 세 노동자들의 관계가 파탄난다. 거짓말과 무급으로 착취하는 노박과 모르고 당하는 세 노동자의 관계는 그 점에서 공산당의 착취에 반대하며 정당한 노조 구성을 요구하는 폴란드 자유 노조 사태의 거울쌍 같은 존재다. 결말의 사실을 알고 분노한 노동자들은 자유 노조 사태에 대한 씁쓸한 풍자라 할 수 있다. 두 번째로는 적은 돈으로 영국에서 작업해야 하는 바람에 재정난이 발생해,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 그 결과 빠르게 귀국해 편안하게 살려는 계획이 망가져 버린다. 세 번째로는 아내 안나가 사장과 간통을 저지르고 있다는 의심이다. 이 의심은 폴란드로 돌아가야 해결되지만, 노박은 돌아갈 수 없다. 왜냐하면 레흐 바웬사와 자유 노조 운동 때문에 귀국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노박의 권력은 중요하지만 하찮기 그지없는데, 상황을 조감할 수 없는 중간관리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영국인들의 외국인 혐오증이다. 서브플롯으로 등장하는 폴란드인들에게 공사 소음을 욕하며 폴란드로 돌아가라고 외치는 영국인들이 대표적이다. 폴란드와 영국이 꽤 오랜 시간 동안 우호적인 외교 관계였지만, 영국의 외국인 혐오증과 더불어 2차 세계 대전의 자유 폴란드군 문제처럼 두 나라에서 버림받은 어둠이 있다는 걸 생각해보면 이 서브플롯은 매우 뼈아픈 정치적 문제를 찌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세 문제가 오가면서 노박은 상당한 박탈감과 불안감에 시달리게 된다. [문라이팅]은 [딥 엔드]의 런던 도회의 에피소드 위주의 전개로 돌아가면서도 대사와 언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불법 체류자의 박탈감과 불안감을 파고든다. [문라이팅]은 대사가 많은 영화다. 하지만 정작 대사의 대부분은 외화면에서 펼쳐지는 노박의 영어 내레이션에 기대고 있다. 반대로 영화 속 노박의 대사들은 자막 없는 폴란드어나, 최소한의 문장으로 이뤄진 영어뿐이다. 그렇기에 [문라이팅]은 노박의 심리 묘사는 넘쳐나는데, 화면 속 실제 소통은 부족한 불균형을 이루고 있다. 게다가 볼스키, 바나샥, 쿠데이는 폴란드어 밖에 할 줄 모르는 데다 고국의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심리를 읽을 수 없다. 한마디로 타자로 그려진다. 때문에 [문라이팅]은 1인 퍼포먼스 극에 가까운 영화로 변모한다. 스콜리모프스키는 영화 대부분을 노박이 물건을 훔치거나, 어떻게 돈을 아낄 수 있을지 전전긍긍하거나, 동료들을 속이는 방법을 궁리하는 에피소드로 채운다. 자잘한 사건의 연속으로 영화를 이끌어간다는 점에서는 [딥 엔드]의 구조로 회귀했다고 할 수 있지만, 초라함은 더욱 강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초라함은 영화의 엔딩에서 쓸쓸하게 드러난다.

        1-4. 학대당하는 자전거, 결말의 모호함

재미있는 점은 이 세 편의 영화에서 자전거가 중요하게 등장한다는 점이다. 자전거는, 자동차랑 달리 미성년도 소유할 수 있는 탈 것이다. 탈 것 중에서도 가장 왜소한 모양새라는 점도 주목할만하다. 왜냐하면 세 편의 영화에서 자전거는 남성 주체의 왜소함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스콜리모프스키의 영화에서 자전거를 타는 남성은 차를 타지 못하거나, 타더라도 조수석에 앉아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타고 다니던 자전거 역시 훼손되거나 처박히거나, 아니면 도둑맞기까지 한다. [딥 엔드]에서 마이크가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장면으로 영화를 시작한다.  이 도입부 이후 [딥 엔드]는 마이크의 자전거를 험하게 다룬다. 그중 가장 노골적인 상징은 자동차 바퀴 아래에 낀 마이크의 자전거다. 자전거가 사라진 마이크는 얼마 안 있어 소호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전철을 타는데, 여기서도 소동을 불러일으키는 등 불안감은 해소되질 못한다. 마이크는 소심하게 자동차 타이어를 펑크내는 것으로 복수를 하지만, 끝내 자동차를 타지 못한 채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이런 대우는 마치 미성년으로써 마이크의 불안한 위치를 반영하는 것처럼 보인다.
 
반대로 [외침]에서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건 성인 남성인 앤서니다. 그렇지만 앤서니는 한 번도 자동차를 운전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대신 간통 대상과 함께 자전거를 타거나 레이철이 운전하는 자동차 조수석에 앉아 있다. 반대로 크로슬리는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모습을 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크로슬리와 앤서니의 만남 역시 앤서니의 자전거 바퀴의 바람을 빼면서 이뤄진다는 점이다. 앤서니는 크로슬리 앞에서 바람 빠진 바퀴에 펌프질하는데, 이 행위는 뒤에 등장하는 앤서니랑 간통 상대가 자전거랑 타는 시퀀스랑 붙어 분명한 성적인 암시를 남긴다. [외침]에서 자전거는 성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지만, 미성년의 불안보다는, 크로슬리로 대표되는 야만 앞에 불안한 문명인의 위치를 은유하는 쪽으로 다뤄진다. 한편 [문라이팅]에서 자전거는 성적인 의미보다는 정치 사회적인 의미에 가깝다. 노박은 불법 체류자이기 때문에 자동차를 얻지 못한다. 대신 자전거에 기댈 수 밖에 없는데, 기껏 얻은 자전거는 도둑맞고, 새로 자전거를 훔쳐야 하는 상황까지 이른다. 전반적으로 스콜리모프스키 영화에서 자전거의 대접은 그리 좋다고 할 수 없는데, 주로 인물의 불안을 가중하는 방식으로 쓰이고 있다.
 
영화의 결말 역시 중요한 단서다. 스콜리모프스키는 파국 이후 혼란스러움에서 영화를 끝내는 경향이 있다. [딥 엔드] 같은 경우, 수잔이랑 섹스를 한다는 최종적인 목표에 도달하는 순간, 갑작스럽게 싸늘한 비극을 동반한 초현실적인 결말에 도달한다. 스콜리모프스키는 이 결말을 위해 영화를 만들었다고 설명한 적이 있는데, 이 인터뷰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딥 엔드]는 예정된 운명으로 달려가는 희비극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외침]은 호러 장르가 가지고 있는 모호함을 이용해, 의도적으로 설명을 무시하면서 그 불안을 촉발한다. [외침]의 결말에서 대체 앤서니는 어떻게 된 것인지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숏은 크로슬리 시체를 확인하러 온 레이철에서 끝나기 때문에 합당한 설명이 없고 모호한 상태 그대로 남게 된다. 한편 [문라이팅]는 어떻게 영국에서 살아남아 폴란드로 돌아가는 데 성공하지만, 비행기를 타기 전 진상을 밝힌 노박이 동료들에게 두들겨 맞는 것으로 끝난다. 안나가 정말로 간통하고 있었는지, 노박과 일당들이 제대로 보상받을 수 있을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인물들이 갈망하는 목표나 정황에 대한 합당한 설명을 주지 않은 채 끝나는 결론을 선호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1. 불안의 형상화
        2-1.촬영과 편집의 파편화, 초현실적 투사
 
그렇다면 스콜리모프스키는 어떤 식으로 불안을 영화 언어로 형상화하고 있는가? 먼저 스콜리모프스키의 영화에서는 촬영과 편집이 파편화된 방식으로 이뤄지며, 궁극적으로는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창출하고 있다는 걸 지적해야 할 듯하다. [딥 엔드]를 살펴보자. 이 영화에서 인상적인 몽타주는 도입부에 등장하는 떨어지는 빨간 액체에서 좀 아웃되어 자전거라는 걸 밝히는 숏과 결말 부근에 등장하는 마이크와 수잔의 섹스 장면이다. 전자를 통해 스콜리모프스키는 이 [딥 엔드]라는 영화가 도착할 결말이, 해피 엔딩이 아닌 배드 엔딩에 가깝다는 걸 액체의 질감과 기괴함을 통해 감각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한편 후자 같은 경우 스콜리모프스키는 눈 같은 신체 부위만을 담은 극단적인 클로즈업과 짧은 숏, 부감 숏을 빠르게 교차하면서 섹스의 쾌락과 행위를 시각화한다. 하지만 이 몽타주에서 에로스 행위는 매우 짧게 제시되기 때문에 감각을 파편화하는 쪽에 가깝다. 이 장면 이후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를 생각해보면 이 파편화가 에로스를 싸늘하게 분해하는 쪽에 가깝다.
 
[외침]은 스콜리모프스키 영화 중에서도 촬영과 몽타주의 파편화가 심한 영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극단적인 줌 사용도 그렇지만, 영화는 음향을 증폭하거나 몽타주를 추상적으로 연결하는 방식으로 감각 기관의 불연속성과 압도됨을 표현하고 있다.  [외침]에서 주목할 장면은 레이철과 크로슬리의 섹스 시퀀스일 것이다. 이 장면은 앤서니가 권력을 상실하고, 크로슬리의 지배가 본격화된다는 점에서 서사의 변곡점이라 할만하다. 이 섹스 시퀀스가 [딥 엔드]가 그렇듯이 파편화된 숏의 연결로 이뤄져 있다는 점도 주목할만하다. 그런데 스콜리모프스키는 이 섹스 시퀀스에서 갑자기 앤서니의 스튜디오에 걸려있던 나체 여자 사진을 옷을 다 벗은 레이철이 흉내 내는듯한 흑백 숏을 집어넣는다. 레이철은 어째서 스튜디오에 걸린 사진의 자세를 흉내 냈을까? 우선 이 시퀀스의 주체가 누군지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답은 간단하다. 스콜리모프스키는 이 시퀀스를 앤서니가 달리는 숏이랑 교차 편집하고 있다. 즉 레이철과 크로슬리의 섹스 시퀀스는 앤서니의 상상이다. 요컨대 레이철이 자세를 흉내 낸 것은, 앤서니가 늘 머무는 스튜디오의 풍경이 앤서니의 악몽과 뒤섞였기 때문에 등장한 것이다. 그 점에서 레이철과 크로슬리의 섹스 시퀀스는 스콜리모프스키의 초현실주의적 경향이 호러 장르의 불안과 어떻게 결합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문라이팅]은 파편화된 몽타주는 자제하되, 지속해서 등장하는 텔레비전 숏과 더불어 줌과 클로즈업을 통해 노박의 생존을 위한 범죄과 초조함을 물화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문라이팅]의 초현실주의가 잘 드러나는 장면은 크리스마스 파티를 벌이고 난 뒤, 잠자리에 든 노박이 안나의 환영을 보는 시퀀스일 것이다. 이 장면이 흥미로운 이유는 텔레비전 브라운관이라는 스크린을 통해 안나의 환영이 실체화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문라이팅]에서 텔레비전은 고국 폴란드의 상황을 보여주는 Showing 역할이기도 하지만, 노박의 불안을 투사 Projection 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딥 엔드]와 [외침]에도 그랬듯이, 스콜리모프스키의 초현실주의는 주인공의 무의식이 투영된 이미지의 실체화를 보여주는 경향이 있는데 정작 그 실체화는 주인공의 불안과 결핍을 해소해주지 못한다. 노박이 아내의 환영을 보자마자 브라운관을 깨버리는 장면은, 스콜리모프스키가 스트레스나 망상을 이미지로 '형상화'하는 데 관심이 많다는걸 보여주고 있다.
 
        2-2. 고립과 소외, 컨텍스트로써 음향
 
한편 음향이라는 부분에서도 주목할 점이 많다. 재즈 연주자였다는 이력답게 스콜리모프스키의 영화적 특징 중 하나라면, 망명자로서 망명한 국가의 영화적 조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영화를 만든다는 점이다. 때문인지 몰라도 스콜리모프스키는 음향을 통해 불안과 고립을 강조함과 동시에 문화적 컨텍스트에 관심을 보이는 모습을 보인다. 우선 [딥 엔드] 같은 경우에는 당시 유명했던 록이나 팝 음악가가 참여하고 있다. 영국 포크 가수 캣 스티븐스의 'But I Might Die Tonight'하고 독일 록 밴드 캔의 'Mother Sky'가 대표적이다. 'But I Might Die Tonight' 같은 경우 애상적인 멜로디와 외침으로 강렬한 초현실주의적 분위기에 영향을 미친다면, 'Mother Sky' 같은 경우에는 신경질적이고 반복적인 기타 독주, 의미 없는 가사를 읊조리다 외치는 보컬을 통해 마이크가 밤거리를 방황하는 시퀀스에 긴장감을 부여하고 있다. 그런데 두 가수의 국적을 촬영 장소랑 연계하면 흥미로운 해설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딥 엔드]는 실외 장면을 포함한 절반은 영국에서 찍었지만, 실내 장면을 포함한 다른 절반은 영국이 아닌 서독일 스튜디오에서 촬영했다. 스콜리모프스키는 두 삽입곡을 통해 이 영화가 두 개의 국가에서 촬영했다는 걸 주지해주길 요청하는 것처럼 보인다. [딥 엔드]의 삽입곡은 어떤 지점에서는 당시 영국과 서독일의 문화을 반영하면서, 감정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킨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삽입곡이 등장하지 않는 [외침]이나 [문라이팅]를 살펴보자. [외침] 같은 경우엔 프로그레시브 록이라는 복잡한 구성의 록 음악을 추구했던 밴드 제네시스의 멤버를 기용해 음악을 맡기고 있다. 사운드트랙 자체는 호러 영화의 전형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지만, 음향을 문명과 야만의 대비와 연계하는 방식에서 주목할 부분이 있다. 영화는 앤서니가 스튜디오에서 소리를 채집하고 만드는 장면을 공들여 보여준다. 여기서 앤서니의 채집과 합성 행위가 앤서니의 육체하고 분리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할 듯 하다. 병에 사로잡힌 벌레가 내는 음이라던가 연장 도구, 담배를 이용해 만든 음들은 앤서니의 성대를 거치지 않고 마이크로 녹음된 뒤, 신시사이저로 합성된다. 요컨대 앤서니의 작업과 생활은 파편화되어 있고, 기계를 통해 인위적인 합성 과정을 거쳐야 완성할 수 있다. 반대로 크로슬리의 '외침'을 보자. 이 외침을 보여줄때 스콜리모프스키는 크로슬리의 얼굴과 입을 극단적으로 클로즈업해서 이 외침이 크로슬리가 냈다는 걸 강조하고 있다. 앤서니의 합성된 소리가 기괴하지만, 파괴력이 없다면, 크로슬리의 육성은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 크로슬리의 육성을 통해 전해지는 외침은 이런 안정 되어 있는 문명인의 파편화와 합성 개념을 교란하고 있다. 앤서니의 작업에 대한 크로슬리의 조롱이라던가, 외침 장면 이후 크로슬리의 지배가 본격화된다는 점, 크로슬리가 사라진 뒤 앤서니가 외침을 흉내낸다는 점은 그 점에서 육성이 가지고 있는 원초성과 파편화된 문명의 허약함을 드러낸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문라이팅]는 전작들과 달리 사운드트랙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영화는 아니지만, 대신 침묵과 소음의 대비에 집중하고 있다. 우선 이 영화의 대사가 외화면에서는 지나치게 과다하지만 내화면에서는 지나치게 부족한 상황에 놓여있다는 점은 언급한 적이 있다. 스콜리모프스키가 대사 대신 내화면을 채워 넣는 음향은 공사 소음과 텔레비전 뉴스다. 먼저 공사 소음 같은 경우, 작업 특성상 전기톱과 드릴이 만들어내는 살벌한 음향들이 대부분이다. 이 음향은 영화 내내 등장하여 폴란드어 대사를 지우거나 짜증을 불러일으킨다. 이 소음의 살벌함은 영국인들의 외국인 혐오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노박과 다른 동료들과 소통이 단절된 상황을 은유하고 있다. 한편 [문라이팅]은 텔레비전이 상당히 중요하게 등장하는 영화인데, 노박과 동료들이 일하는 공간에서 보는 텔레비전은 전파가 제대로 잡히지 않거나, 노박의 음모로 보이질 않는다. 반대로 노박이 혼자 있을 때 들려오는 폴란드 자유 노조 사태를 전달하는 뉴스는 영어를 들을 수 있는 노박의 초조함을 가중한다. 노박은 텔레비전을 통한 소통을 가로막지만, 반대로 텔레비전이 전하는 현실에 위기의식과 소외감을 느낀다. [문라이팅]은 그 점에서 음향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고립'과 '소외'라는 상황과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데 주력하고 있다.
 
  1. 결론 
세 편의 영화로 살펴본 예지 스콜리모프스키의 영화 세계는 크게는 불안함을 일으키는 서사적 요소, 음향에 대한 민감함, 파편화된 숏과 편집, 초현실적인 이미지의 투사 및 형상화로 종합해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다 영화적 조류에 대한 민감함이라던가 세 편에 등장하는 자전거의 활용 역시 주목할만하다. 스콜리모프스키의 영화의 독특함은 불안함과 히스테리라는 비가시적인 심리 상태를 형상화하는데서 드러난다. 물론 이런 연출이 폴란드 시절에서 어떻게 발전하고 변해왔는지를 논증할 수 없다는 점은 아쉽다. 2011년 영국판 [딥 엔드] 블루레이 발매를 알리는 씨네21 기사에서도 "스콜리모프스키는 자기 영화를 접하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알고 있으며", "스콜리모프스키 영화의 DVD는 지금도 희귀한 편"라는 얘기를 했을 정도다. 8년이나 지난 지금 역시 스콜리모프스키의 영화는 한 두 편 정도 더 복원되었을 뿐, 제대로 된 회고전 역시 보기 힘든 상황이다. 이에 따라 한국은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예지 스콜리모프스키 영화에 대한 담론은 다른 폴란드 출신 감독들에 비해 그리 활발하지 않은 편이다. 다만 그나마 쉽게 볼 수 있는 스콜리프스키의 영화를 분석한 이 장평이 감독에 대한 이해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기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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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새해 인사

 

이번엔 어찌 새해 인사를 블로그에 올리게 되었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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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ie Nelson - Pretty Paper
원래 크리스마스 분위기 내려고 샀는데, 늦게 도착해서 연말 분위기가 되버림.... 여튼 윌리 넬슨은 컨트리 별로 안 좋아해도 들어볼 가치가 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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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10

정말 오래간만이네요.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다니...

저는 바쁘지만 건강합니다. 좋은 영화 리뷰를 쓰고 싶은데 시간이 영 나질 않아서 미뤄지고 있네요. 하지만 블로그는 잊고 있지 않습니다. 조만간 시간 되면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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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코 [寝ても覚めても / Asako I & II] (2018)


하마구치 류스케의 [아사코]는 도시 전경을 담은 마스터 쇼트에서 시작한다. 이 도시 마스터 쇼트는 초반부가 끝난 이후에도, 장소를 바꿔가면서 제시되는데 마치 이 영화의 이야기가 어디서 진행하고 있는지 기억해달라는 것처럼 보인다. 중학생들의 불꽃놀이가 터지고 아사코는 미술관에 사진 전시를 보러 간다. 여기서 아사코가 멈춰서 보고 있는 사진은 두 명의 쌍둥이를 찍은 사진이다. 마치 같지만 다른 쌍둥이처럼, 같은 얼굴이지만 다른 정체성을 지닌 남자를 사랑하게 되는 걸 예언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사코는 미술관에서 바쿠를 만나지만, 둘의 관계는 자기소개가 아닌 우연을 가장한 숨바꼭질 끝에 느닷없는 키스로 시작한다. 그리고 알고 봤더니 그들은 서로의 친구랑 아는 사이라는 '운명' 같은 기연이 이어진다. 아사코와 바쿠랑 친한 오카자키가 말했듯이 "말이 안 되는" 상황인 셈이다. 순정 만화에서도 작위적이라고 말할 정도로 너무나도 완벽하게 짜인 구도다. 아사코의 친구인 하루요 역시 절대 사귀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도 이해가 될 정도다. 그 말을 증명하듯이 이 말도 안 되는 사랑은 얼마 안 있어 바쿠가 사라지면서 끝나고 만다.

주목해야 할 점은 아사코와 바쿠의 연애가 러닝타임 120분 중 20분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에 끝난다는 점이다. [아사코]는 타이틀이 뜬 후, 도쿄로 배경을 옮겨간다. 그리고 후반부까지 대부분의 이야기가 도쿄에서 진행된다. 이때 하마구치가 관심을 갖는 것은 반복과 차이다. 아사코는 도쿄에서 같은 얼굴, 다른 이름을 가진 남자 료헤이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아사코는 료헤이를 보고 몇 번이나 되물어보고 당혹해한다. 아사코는 료헤이를 피하려고 하지만, 사진가 고쵸 시게요의 전시가 도쿄에서 다시 열렸을 때 아사코와 료헤이는 감정적으로 얽히게 된다. 이때 다시 등장한 고쵸 시게오의 사진은 트래킹 쇼트가 아닌, 고정된 쇼트로 제시된다.

두 번의 고쵸 시게오 전 시퀀스는 [아사코]를 이해하는 단서다. 하마구치는 처음 20분 동안 바쿠와 아사코의 연애를 통해 영화의 진행 방식을 세운 뒤, 료헤이가 다시 등장했을 때 진행 방식이 어떻게 달라져 있는지 관객이 인지하길 원한다. 이 변화는 인물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변화기도 하고, 아사코 자신 SELF가 같지만 다른 두 타자 OTHERS를 어떤 식으로 바라보느냐를 다루고 있기도 하다. 실제로 초반부 아사코는 료헤이를 볼 때 유리에 비친 모습으로 인지하거나 시선을 던진다. 초반부 반사된 이미지로 아사코 앞에 등장하는 료헤이야말로 도쿄에서 아사코와 료헤이의 연애 (2) 가 오사카의 아사코와 바쿠의 연애 (1)에서 벗어날 수 없는 반사 이미지나 다름없다는 불길한 현기증이기도 하다. 이를 증명하듯이 료헤이와 아사코가 첫 입맞춤을 할 때 하마구치는 갑자기 점프 컷으로 입맞춤을 두 번 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이후 이어지는 아사코와 료헤이의 연애는 유혹이 아닌 불안과 공포에 기반한 밀고 당기기로 진행된다. 바쿠와 달리 료헤이가 아사코에 빠진 이유는 명확하게 그려진다. 마야를 두둔하면서, 아사코는 이전의 소극적인 모습과 달리 적극적으로 마야를 두둔하는 모습에서 아사코에 올곧고 망설이지 않는 구석이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료헤이는 자신이 바쿠랑 닮았다는 사실을 모르기에 그런 올곧고 망설이지 않는 아사코가 가지고 있는 두려움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 때문에 연애가 진행될까 싶으면 갑자기 뒤로 물러나는 상황이 지속된다.

이 상황에 대해 료헤이는 직설적으로 말한다. "원점으로 돌아간 것 같다"고. 계속 원점으로 돌아가는 상황을 반전시키는 것은 동일본 대지진이다. 아사코랑 만나기 위해 마야의 [들오리] 연극을 보러 온 료헤이는 동일본 대지진을 겪는다. 그리고 직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밤이 될 때까지 걸어간다. 밤이 되자 료헤이는 다리에서 아사코를 만나고 둘은 처음으로 포옹을 한다. 이때 동선을 살펴보면 료헤이가 기다리고 있던 아사코에 돌아온 모양새이기도 한데, 이는 '반복'에서 비롯된 '귀환'이라는 행위하고도 연결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아사코]의 대지진은 하마구치의 전작보다 연애 서사에서 갑자기 부로 끼어드는 인상이 강한 편이긴 하다. 애당초 원작이 된 소설은 동일본 대지진 이전에 발매된 소설이었고, 역사의 흐름이 언급되긴 하지만 상투적인 설정 위에서 주관적인 시점에서 비틀어진 연애라는 주제에 집중하는 소설이었다. 어떤 지점에서 [아사코]의 지진은 연애가 잘 진행되지 않을 때 등장해 흔들 다리 효과로 연인들을 이어주게 하는 소도구에 머문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 끼어드는 대지진이 과연 소도구에만 머무는 것일까? 그 의문을 대답하듯이 2의 2번째 장이 시작된다. 아사코와 료헤이는 본격적으로 사귀고 있으며, 고양이 진땅을 키운다. 한편 이들은 어느새 결혼해 아이를 가진 마야와 쿠시하시 부부하고도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상황 설명이 끝난 뒤, 아사코와 료헤이가 센다이로 가서 자원봉사 활동을 한다. 분명히 외삽적인 장면임에도, 이 흐름에는 꽤 당황스러운 구석이 있다. 새로운 공간 축이 갑자기 추가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아사코] 내 장소 관계도를 다시 그려야 할 것이다. 오사카-도쿄-센다이로 말이다. 이런 장소의 추가는 당연하겠지만, 동일본 대지진이라는 사건에 따른 추가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영화에서 등장하지 않지만, 센다이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바쿠의 고향 홋카이도가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하마구치는 센다이를 바다와 해산물의 공간으로 그린다는 점이다. 아사코와 료헤이는 센다이 주민들과 어울리면서 생선과 해산물을 팔고 먹는다. 그런데 하마구치는 료헤이와 아사코가 센다이에서 주민들과 해산물을 먹을 때, 아사코의 1인칭 시점으로 료헤이가 해산물을 먹는 쇼트를 찍었다. 다음 쇼트에서 아사코가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있는 걸 보면 이 쇼트는 사적인 기록으로 보존될 순간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왜 료헤이가 해산물을 먹는 장면을 녹화할 때 아사코의 눈으로 봐야 했는가? 이 시퀀스에서는 그 답을 찾기 어렵다. 그렇다면 다른 시퀀스에서 찾아야 하는데, 답은 엉뚱하게도 봉사활동 시퀀스가 아닌 아사코가 오사카로 돌아가기 전 환송 모임 시퀀스에서 등장한다. 여기서 아사코는 센다이 자원봉사 활동을 하는 것에 대해 '틀린 일을 하고 싶지 않아서'라고 말한다. 후쿠시마 방사능으로 오염된 물 근처에서 자라야만 하는 해산물을 먹는 료헤이의 모습을 목격하고 보존하고자 하는 아사코의 모습은, 커피포트를 돌려주면서 '술 만드는 회사에서 일하는지라 물의 귀중함을 알고 있다'라고 말하는 료헤이의 속내와 공명하면서 대지진 이후 새로운 윤리가 만들어져 작동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환송 모임 시퀀스는 동시에 아사코가 잊고 있었던 바쿠가 본격적으로 돌아오는 시퀀스이기도 하다. 그 점에서 환송 모임 시퀀스는, 연애 영화로써 선택을 다루는 [아사코]와 대지진 이후의 일본인의 삶을 다루는 [아사코]가 만나는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실제로 첫 번째 봉사활동 장면 이후 하마구치가 준비한 사건은 다름 아닌, 오사카 시절의 귀환이다. 사랑니 치료를 위해 외출한 료헤이와 아사코 앞에 아사코의 친구 하루요가 다시 나타난다. 하루요는 아사코에 바쿠가 돌아왔음을 알린다.

이 소식을 들은 아사코는 어떤 행동을 취하는가? 아사코는 단호하게 사실을 주변인들에게 밝힌다. 마야와 하루요랑 같이 텔레비전 보던 아사코는 바쿠의 광고를 보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광고는 신용카드 관계다. 관계에 신용이라는 개념이 전혀 없는 바쿠에는 어울리지 않는 광고다) 적당히 무마하려는 하루요의 말을 대신해 사실을 고백한다. 아사코의 이런 모습은 초반부 료헤이의 연애에서 보였던 모습에서 확실히 진화했다는걸 알 수 있다. 직후 료헤이에게 사실을 얘기하는 부분 역시 '틀린 일을 하고 싶지 않아서'라는 관점에서 이뤄진 행동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아사코의 이런 선택은 료헤이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면서 쉽게 해소되는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아사코의 고백과 료헤이의 평정심이 평화롭게 성립하기 위해서는 한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바쿠가 그들 앞에 다시 나타나지 않는 점이다. 하지만 [아사코]는 바쿠를 기어이 그들 앞에 귀환하게 만들면서 선택의 문제를 난제로 만든다. 촬영지에서 차를 타고 떠나는 바쿠에 손을 흔든 직후, 이삿짐을 싸던 아사코는 진땅을 안고 손을 흔든다. 그런데 이때 갑작스럽게 아무것도 없는 반응/리버스 쇼트가 등장한다. 아사코는 대체 누구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는가? 이에 대한 답은 갑작스럽게 등장한 바쿠를 통해 제시된다.

아사코는 여기서 자신이 취한 이별 방식이 어설펐다는 걸 깨닫게 된다. 다시 환송 모임 시퀀스로 돌아와서, 갑자기 나타난 바쿠는 이렇게 말한다. "역시 기다리고 있었잖아." 바쿠의 이 말은 공포 영화의 귀신이 복수하기 위해 희생자에게 저주를 내리는 대사와 동일하다. 어떤 지점에서 바쿠는 매우 전지적으로 행동하는 이해할 수 없는 캐릭터다. 히가시데 마사히로가 지적했듯이 바쿠는 대체 환송 모임 장소를 어떻게 알고 왔단 말인가? 이 전지성을 지닌 옛 연인 앞에서 아사코는 다시 선택해야 한다.

관객은 논리적으로는 답을 알고 있다. 아사코가 유예된 이별을 마무리 짓기 위해서는 바쿠하고 어떤 식으로 대면해야 한다는 것을. 하지만 연애물이라는 장르에서 보자면 아사코의 선택은 암묵적인 금기를 깨트리고 있다. 왜냐하면 연애물에서는 여성이 잘 이어가는 관계 도중 옛 남자 친구를 선택하는 것은, 현 남자 친구에 대한 용서할 수 없는 배신으로 취급되는 경향이 있다. 특히 비 처녀 논란 같은 지점에서 드러나는 여성의 정조와 헌신을 강요하는 일본 (나아가 동아시아)라는 문화권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여기서 대지진 직전 등장한 입센과 체호프의 연극들을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두 작품을 간략히 살펴보자면 체호프의 [세 자매]는 현실과 이상적인 꿈에 대한 괴리로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지지만, 현실을 깨닫고 이별하는 여성이 등장했고, 반대로 입센의 [들오리]는 평온한 관계가 실은 거짓으로 덮여있다는 걸 알고 비극에 치닫지만, 다시 새로이 시작하는 부부의 얘기를 다루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을 언급할 때 [아사코]는 감정 이입하지 말라고 주문하거나 ([세 자매]), 연극이 지진으로 중단되어버린다. ([들오리]). [아사코]는 왜 이런 문학적 모티브들에 대해 감정적으로 이입하지 말라고 말하거나 중단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아사코]에서 아사코가 처한 상황이 두 작품의 유사성과 연계성은 있되, 독자적인 상황으로써 객관적으로 관찰해달라는 걸 하마구치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아사코는 바쿠를 따라가지 않고 떠내 보낸다. 여기서 다시 아사코가 왜 최종적으로 바쿠가 아니라 료헤이를 선택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이다. 첫째로는 연애물에서 볼 수 있는 가치 판단과 기준이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쿠는 처음부터 끝까지 멋대로 행동하고, 아사코의 기분을 이해하는 언동을 보이지 않는다. 한마디로 같이 살기엔 부적합한 인물이다. 드라이브 시퀀스의 차이가 대표적일 것인데 좀 더 자두라고 말하는 료헤이랑 달리 바쿠는 자기 얘기만 할 뿐이다.

[아사코]가 흥미로운 점은 이런 연애 영화로써 감정 이입과 선택의 문제를 끊임없이 동일본 대지진이라는 사건이 외삽의 한계를 무릅쓰고 얽혀 들어간다는 점이다. 센다이에서 연애의 종지부가 난다는 점도 그렇고, 아사코와 바쿠의 연애는 바다에서 끝난다. 바쿠는 바다를 보지 않았다. 정확히는 거대한 방파제를 보고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데 바쿠를 떠나보낸 뒤, 아사코는 무엇을 하는가? 방파제를 올라가 바다를 본다. 아사코는 끊임없이 자신의 눈을 통해 확인하고 기억하고자 한다. 속내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캐릭터는 아니지만, 아사코가 방파제에 올라가 바다를 바라보는 시퀀스가 아름답게 느껴진다면 이 부분에 있다. 연애 관계에서 자신의 주체를 잡으려는 의지와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방사선 누출이라는 비극을 인정하고 나아가려는 일본인의 다짐이 겹쳐지기 때문이다.

다시 남겨진 료헤이에게 돌아가 보자. 바쿠의 손을 잡고 떠나가는 아사코를 찍는 트래킹 쇼트는 그 점에서 1부의 아사코와 친구들을 놔두고 떠나는 카메라의 트래킹 아웃 쇼트와 닮아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 트래킹 쇼트의 피사체가 달라져 있다는 점이다. 1부에서 트래킹 아웃 쇼트는 아사코와 친구들을 남기고 떠난다면 2부에서 미묘하게 구도가 달라진 트래킹 아웃 쇼트는 료헤이와 친구들을 남기고 떠난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가 아사코의 1인칭을 포기하자 바쿠에 대한 료헤이의 공포가 구체적으로 변했다는 점이다. 심지어 아사코와 바쿠가 떠나자 료헤이의 반응 쇼트는 예감한 표정으로 침묵과 분노의 표정을 짓고 있다.

료헤이의 예감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먼저 성적 매력의 부족함이 있다. 료헤이와 바쿠 중에서 가장 이상적인 매력을 지닌 남자는 바쿠다. 아사코랑 재회한 후, 예전에 괜찮다고 말한 건 거짓말이라고 털어놓기까지 한다. 바쿠는 그 점에서 료헤이의 거울 쌍이 만들어낸 억압된 악몽이다. 이런 연애 라이벌로서 두려움과 더불어 대지진 문제와 엮어서 본다면, 대지진 이후 '모든 게 정상적이었던 대지진 이전 일본의 귀환'에 대한 일본 남성성의 공포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독해의 여지는 료헤이는 왜 아사코의 선택에 분노하는가? 에 대한 답을 제공하기도 한다. 료헤이의 관점에서 아사코는 '대지진 이전 우월한 전 남자 친구를 선택하고 대지진 이후 열등한 자신을 버린 여자'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결말 부분은 료헤이에게 생긴 트라우마를 아사코가 어떻게 설득하는가에 대한 과정이기도 하다.

비록 연애 영화로써 서사 장치가 동일본 대지진이 긴밀하게 연결되었냐는 문제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아사코]의 강점은 관계의 허울성과 추한 감정을 인정하며 시간을 껴안고 살아간다는 행위에 긍정함에 있다. 하마구치는 함께 한 시간이 위태한 위장이라고 해도, 의미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하마구치는 아사코와 오랫동안 알고 지내왔던 오사카 인물들에게 시간의 흔적과 더불어 긍정성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원작과 달리 하루요가 아사코랑 절교하지 않게 된 점이 대표적일 것이다. 에이코가 들려주는 연애사의 비화는 원작에서도 있던 부분이라 넘어가도, 왜 하루요는 아사코의 선택을 일부 긍정했을까?

여기서 오사카로 대표되는 칸사이 지방이 이미 고베 대지진을 겪었던 지역이라는 걸 떠올려야 할 필요가 있다. 각색된 하루요의 긍정은 어떤 점에서는 에이코의 비화와 상응하는 구석이 있다. 이 변화는 이미 대지진을 겪은 오사카에서 현 일본의 난제에 대한 지혜를 구하려는 시도이며, 하마구치가 동일본 대지진이라는 사건 이후에 [아사코]의 원작으로 영화를 만들면서 느꼈던 의무감의 일종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물론 동일본 대지진은 고베 대지진과 달리 방사능 오염 같은 더 큰 난제가 있으며, 트래킹 쇼트로 절박한 추격전을 벌인 후에도 아사코와 료헤이의 관계는 여전히 깨진 채로 남아있다. 그런데도 아사코는 진흙 강을 아름답다고 말한다. [아사코]는 불가항력으로 더러워졌더라도 아름다움을 찾아낼 수 있는 용기가 동일본 대지진 이후 삶에서 필요하다고 말하는 영화다. [아사코]를 통해 하마구치 류스케라는 감독을 지지하고 싶다면, 그 자세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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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dfinger - I Can't Take It

요새는 파워 팝 불운의 밴드로 꼽히는 배드핑거를 듣고 있습니다. 1970년대식으로 Cheesy한 느낌이 있긴 한데, 그래도 이 시절 파워 팝을 싫어하기는 어렵죠. 빅 스타가 다소 내향적인 느낌이라면, '파워'라는 수식어가 잘 어울리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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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2

결국 새해를 맞이했건만 글 하나도 안 쓰고 노는 중입니다. 늦긴 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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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악마가 [Le diable probablement / The Devil Probably] (1977)

로베르 브레송의 [아마도 악마가]는 처음부터 결말을 정해놓고 영화를 시작한다. 샤를은 친구의 손을 통해 자살한다. 아니면 살해당한다던가. 브레송은 샤를의 죽음이 가질수 있는 감정이입의 가능성을 건조한 기사와 글자 이미지로 막아버린다. 그런데 왜 샤를은 죽음을 선택해야 했을까? 브레송은 이를 위해 샤를과 그 친구들이 어떻게 사는지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명백히 브레송보다 어린 그들은 모든 것을 혐오하지만 새로운 대답을 찾지 못한다. 이를 대변하듯이 영화 도입부의 대사는 힘을 제대로 주지 못해 걷지 못하는 것에 대한 얘기다. 그 말처럼 샤를과 친구들은 영화 내내 어느쪽이든 힘을 주지 못하고 걷는다. 이 불균형하고 무기력한 상황이야말로 [아마도 악마가]가 탐구하려는 정신적 상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브레송은 샤를과 그 친구들이 어떤 관계를 맺는지 보여주면서, 사회의 축을 이루는 거대 담론을 하나씩 부정해간다. 영화의 대사들은 다른 브레송 영화들보다 더욱 심화된, 담론과 철학에 대한 토론으로 이뤄져 있지만, 대부분의 대화는 헤매거나 부정하길 반복한다. 도입부 이후 첫 시퀀스가 정치 혁명 토론장이라는건 의미심장하다. 당연하겠지만 샤를과 친구들은 파괴의 권리를 주창하는 정치 혁명이 현실을 바꿀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은 경멸은, 아무리 옳은 의도로 파괴를 행한다고 해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가능한 것이다. 정치 혁명의 장에서 빠져나온 그들은 환경 운동에 관심을 기울이는데, 이때 브레송은 슬라이드 쇼와 영상으로 잔혹한 동물 학살과 죽어가는 지구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이미지를 보는 브레송의 카메라는 아무런 연민이 없다. 이 이미지들은 인류를 비판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인류 그 자체에 대한 애정을 잃어버렸다는 신호에 가깝다. 이런 신호를 잘 보여주는 시퀀스가 피크닉 시퀀스다. 이 시퀀스에 등장하는 소음과 농약, 군중의 아우성의 몽타주와 프레임 밖으로 잘려나간 얼굴과 파편화된 신체들은 공포스럽다.

당연히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의 고통스러운 구도의 길을 걷는 신부 같은 캐릭터는 여기에 없다. 브레송은 1968년 [온순한 여인]부터 믿음과 희생양을 무대에 올리려고 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렇게 인간이 고통받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집중한다. [아마도 악마가]는 그 중 가장 적극적으로 바닥을 찍은 영화일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파멸에 이르렀던 마지막 영화인 [돈]과 달리 [아마도 악마가]는 적극적으로 인간의 조건을 부정하고 자신을 파괴하는 사람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하듯이 브레송은 인간 관계의 두 축을 사랑과 경제로 설정한다. 이 두 축이 얽히는 순간, 인간관계는 냉담해지고 사랑은 거래 관계로 변해버린다. 이미 [온순한 여인]이나 [호수의 랑슬로]에서도 탐구한 지점이기도 하지만, 브레송은 후기로 갈수록 사랑의 진정성을 믿지 않는다. 그런걸 믿기엔 사랑은 철저한 거래 또는 현실에서 이룰수 없는 무언가로 변했기 때문이다. 사랑의 구원을 믿었던 [소매치기]와 비교하면 더더욱 잘 알 수 있다. 샤를과 친구들이 지리멸렬하게 관계를 이합집산하고 경제적 관계에 따라 애인을 바꾸고, 끝내 자신이 상대방에게 짐이 되지 않을까 내심 불안해한다. 

대신 그들이 집착하는 것은 허무다. 독약이나 손바닥 위에 올려진 총알, 물로 넘쳐나는 욕조는 그들의 감수성 근처에 죽음이 어른거린다는걸 알 수 있다. [아마도 악마가]가 브레송의 이전작에 비해 더욱 절망적이라면, 패배 없는 패배자에 대한 영화기 때문이다. [온순한 여인]과 [호수의 랑슬로]의 주인공들은 자신이 어떤 윤리적 전투에서 패배하고 길을 잃었다는걸 조금이나마 인지하고 있었다. [아마도 악마가]의 샤를과 그 친구들은 무엇에 패배했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그저 그들은 승자가 될 수 없다는 걸 알 뿐이다. 브레송은 이런 패배 없는 패배자들이 느끼는 허무의 공기를 모델이 가지고 있는 즉물적 이미지를 포착하는 시네마토그래프 작법에 기반해, 이미지와 음향의 삭막한 리듬으로 치환한다. 악마에 대한 토론 시퀀스 도중 삽입된 버스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숏의 몽타주가 대표적이다. 이 장면은 마치 사람들이 주장하는 어두운 세상과 그것을 조종하는 악마의 계략이 아무런 의미없는 기계적인 운동처럼 보이게 만든다. 후기 브레송 영화들은 음향과 이미지 간의 관계에 민감해지는 모습을 보이는데, [아마도 악마가]는 의미없는 기계적 운동 이미지와 음향으로 절망을 형상화한 영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샤를의 자살 또는 타살은 이런 경멸과 무의미, 기계적인 운동이 지나가고 난 뒤 등장한다. 영화가 본격적으로 바닥을 향하는 부분은 바로 샤를의 상담 시퀀스다. 지금까지 이어왔던 거대 담론에 대한 부정을 다시 정리한 뒤, 샤를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영원한 삶을 믿을 뿐이에요. 자살한다 해도 심판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 것을 이해하지 못한 게 이유가 될 수는 없죠." 이 대사가 나온 이후부터 [아마도 악마가]는 도스토예프스키적 지옥으로 달려가기 시작한다. 샤를의 친구들은 상담이 끝나고 샤를이 변할것이라 기대하지만 브레송이 보여주는 이미지는 떨궈진 공중 전화기 숏이다. 버려진 소통의 이미지 이후, 샤를의 친구들은 결말까지 등장하지 않는다. 마침내 샤를은 친구들을 배제해버린 것이다. 샤를은 성당에 가서 잠을 청하는데, 브레송은 여기서 다시 한번 샤를을 내쫓는 성당 사람들을 보여주면서, 종교가 끝내 젊은이들을 이해하지 못했음을 명백히 한다. 샤를은 자신을 살해할 친구를 만나 그와 함께 다니는데, 브레송은 경제적인 이득과 허무의 극단으로 관계를 맺은 이들만 남은 밤의 파리를 보여주면서 그들이 어디에도 속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샤를은 묘지에서 죽는다. 심지어 유언도 제대로 남기지 못한 채 뒤통수에 총을 맞은 채. 다시 질문하자. 그는 자살한 것일까? 아니면 타살당한 것일까? 브레송은 이 대답의 애매함이야말로 동시대의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악마가]는 엔딩 크레딧이 없고 마지막 장면이 끝나자마자 영화도 끝난다. 환해진 스크린 또는 검게 남은 화면은 그 점에서 브레송의 암울한 심경을 보여주는 도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가 발표된 해가 1977년이라는걸 생각해보자. 크리스 마르케가 [붉은 대기]를 통해 한탄했듯이 1968년 혁명은 프랑스에서 실패로 돌아갔고, 프랑스는 급격하게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과 조르주 퐁피두 같은 보수주의로 기울어지게 된다. 루이스 부뉴엘은 이런 반동에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을 내놔 격렬히 조롱했다. 한편 브레송은 68 혁명의 패배자들이 흩어져가는 과정을 그린 [몽상가의 나흘밤]과 선과 악이 패배하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리에 죽은 말과 자유로운 새만 남았던 신화적 우화인 [호수의 랑슬로]로 대답했다. 영화를 만들수록 브레송은 프랑스의 반동적인 기운과 바뀌지 않는 현실에 절망감을 느끼고 영화에 대한 믿음을 잃어갔다. 그리고 1977년, 펑크 세대가 도래했다. 섹스 피스톨즈의 허무주의가 시대적 정신으로 받아들이던 시절. [아마도 악마가]는 1968년 혁명이 10주년을 맞이하는 순간, 새로이 등장한 경멸과 허무의 세대에게 바치는 영화다. 실제로 펑크 록 씬의 중요한 인물인 리처드 헬은 [아마도 악마가]를 자신이 좋아하는 브레송 영화로 꼽은 적이 있다. 펑크 세대가 불경한 문화로 경멸받던 그 해, [아마도 악마가]는 자살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한동안 개봉이 금지되었지만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나 리처드 헬 같은 민감한 이들은 이 어두컴컴한 절망을 파악한 모습을 파악하고 지지를 보냈다. 이 영화를 싫어할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 어두컴컴한 종막이 깊은 관찰과 사유를 통해 드러났다는건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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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vo - Uncontrollable Urge


예예예에예ㅔㅖㅔㅖㅖㅖ예예에! 예!!!!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다만 블로그에 글을 쓸 여유가 없네요.

시간이야 쪼개면 나긴 하는데, 정신적으로 긴 글 쓸 여유가 없습니다. 쩝. 약간 이 노래 같은 심정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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