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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외침 [The Shout] (1978)




외침 (0000)

The Sh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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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예르지 스콜리모브스키
출연
수잔나 요크, 앨런 베이츠, 존 허트, 피터 벤슨, 로버트 스티븐스
정보
공포 | 영국 | 94 분 | 0000-00-00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의 [외침]은 로버트 그레이브스의 동명 단편 호러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원작 소설가의 분신이 분명한 화자 로버트 그레이브즈가 정신병원에 수감된 크로슬리를 만난다. 크로슬리는 자신이 만났던 안소니와 레이첼이라는 부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가 만난 안소니와 레이첼은 평온한-하지만 내실을 보면 불임과 불륜이라는 균열을 가지고 있는-문명인 부부이며 크로슬리는 사람을 정신적으로 지배하는 '외침'의 주술을 가르치는 어보리진들 사이에서 살다 온 백인이다.


이런 사전 정보를 듣고 영화를 보게 된 관객이라면 스크린에 등장한 (안소니 역의) 존 허트의 섬세하고 예민한 이미지와 (크로슬리 역의) 알란 베이츠의 위협적이고 남성적인 이미지를 접하는 순간 영화가 어떤 방식으로 흘러갈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게 흘러간다. 한 부부와 남자의 삼각관계가 만들어내는 성적 긴장감과 서스펜스를 소재로 삼았던 로만 폴란스키의 [물속의 칼] 각본을 쓴 스콜리모프스키가 군침을 흘리다가 영화화할 내용인 것이다. 쿠로사와 키요시의 [큐어]가 그랬듯이 [외침]은 일상의 붕괴와 거기서 파생되는 금기 파괴를 느긋하지만 치밀하게 묘사해 찝찝하고 오묘한 공포를 만들어내고 있다. (말이 나와서 적어보자면 [큐어] 초반에 등장하는 마미야가 해변가에 사는 부부를 방문해 남편에게 살인을 교사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오마쥬 아닌가 의심해본다.)


원작을 읽진 않아서 자세한 비교는 불가능하지만 구글로 원작 내용을 찾아본 결과 그렇께까지 크게 바꾸지 않은듯 하다. 하지만 현대 음악을 하는 주인공 안소니는 스콜리모프스키와 각본가 마이클 오스틴의 아이디어라는게 확실하다. 원작은 현대 음악-정확히는 구체 음악Music concrete-이 등장하기 이전인 1928년에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작은 설정의 추가는 곧 흥미로운 장면을 만들어낸다. 크로슬리가 사라지자 안소니는 크로슬리가 등장할때 쓰였던 '외재 음악'을 장례식에서 연주하고, 자신의 녹음실에서 그의 외침을 흉내내 녹음한다. 주지하다시피 현대 음악이라는 설정이 감독과 각본가의 아이디어라는 걸 생각해본다면 영화 [외침]과 소설 [외침] 사이의 차이가 무엇인지 감이 잡히기 시작한다. 소설에선 단순히 안소니를 굴종시키고 레이첼을 매료시키는 극적 장치로 쓰였던 '외침'이 스콜리모프스키와 오스틴 손에서 한 인물의 존재와 정체성를 드러내는 도구로 재탄생한 것이다. [딥 엔드]에서 음악의 변주로 감정과 공간을 묘사하던 스콜리모프스키답다고 할까. 


스콜리모프스키는 이런 도구를 이용해 소설과 다른 흥미롭고 독자적인 미적 일관성과 대칭관계를 만들고 있다. 그 대칭관계를 이루고 있는 존재는 물론 '소리를 내는 존재'인 안소니와 크로슬리다. 먼저 안소니가 음악을 만드는 장면을 보자. 여기서 녹음되는 소리들은 안소니가 인공적으로 낸 소리들의 총합으로, 정교하게 디자인되어 있지만 자신이 낸 것은 아니다. 안소니는 그것을 자신의 '음악'이라 부른다. 하지만 크로슬리가 처음으로 '자신의' 외침을 내 주변을 초토화시키는 장면은 어떤가? 스콜리모프스키 자신이 소리를 내고 영국 프로그레시브 록밴드 제네시스 멤버들이 전자적으로 증폭시킨 이 소리는 안소니의 소리하고 잽이 안 될 정도로 귀기에 차 있다. (직접 들어보는게 가장 좋을 것이다.) 


이 차이는 문명인의 소리와 원시인의 소리의 차이를 극명하게 대조해 보여줌과 동시에 원시 예술의 주술성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주지하다시피 원시적 형태의 예술은 미적인 자기 표현 이상의 주술적인 의미를 띄고 있다. 멀리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한국 무당들의 의식을 생각해보라. 문명은 그런 주술적인 의미를 예술에서 내쫓았지만 여전히 그 전통은 문명의 테두리 밖에서 끈질기게 살아남고 있다. 크로슬리는 그런 문명의 예술이 잊고 있던 주술적인 감각을 자기 몸에 체화한 사람이며 그것은 '외침'으로 드러난다. 그는 전지전능한 예술적 영감을 지닌 야생의 폭군 사제이자, 문명이 흉측하다고 내던진 야생적인 본능(살육과 번식)을 통해 자연의 원초적인 언어를 되살리려는 예술가인것이다. 얼핏 삽입된 흑백으로 찍힌 여성의 누드 사진이 크로슬리와 레이첼의 섹스 신에서 다시 재현되는 장면도 이런 관점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안소니가 그에게 종속되는 것도 단순한 주술에 걸렸다! 이상의 미적인 압도감도 담겨 있다. 크로슬리가 나타나기 이전부터 그는 자연과 그것이 만드는 카오스에 매료된 사람이다. 안소니 집이 마을에서 떨어진 해변가에 있다던가, 그가 정형화된 음악 장르인 클래식이나 재즈/팝 대신 비정형성을 추구하는 현대 음악을 한다는 사실이 그렇다. 크로슬리의 외침에 매혹되어 흉내내는 "예술가" 안소니의 모습은 자연과 그 속에 살아가는 문명 밖 "샤먼" 예술가가 만들어내는 카오스가 만드는 미적 감각에 매혹되어 자신의 예술에 적용시키려고 하는 "문명인" 예술가의 모습라고 볼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 매혹엔 공포도 담겨 있다. 자신의 남성성(크로슬리가 사라지자 레이첼에게 성적인 행위를 하려는 장면엔 남성성과 권위 회복의 의도가 담겨있다.)과 예술적 영감을 향한 위협이 만드는 공포 말이다. 


[외침]은 완벽한 영화는 아니다. 스콜리모프스키 영화가 적은 인물들과 작은 장소로 중심으로 돌아가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외침]은 당시 영국 영화가 겪었던 고질적인 예산 부족에 고난을 겪었던게 눈에 보인다. 좀 과격하게 말하자면 트와일라잇 존 같다는 느낌도 있다. 하지만 소리라는 요소에 대한 집착과 탐구, 그리고 오묘하게 찝찝한 영국식 심리 호러는 분명 매혹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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