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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그레이의 [리틀 오데사]와 [투 러버스]에 나타나고 있는 민족적 특정성과 '멜로적 감수성'에 대해

2013/08/08 - [Deeper Into Movie/리뷰] - 리틀 오데사 [Little Odessa] (1994)

2014/02/23 - [Deeper Into Movie/리뷰] - 투 러버스 [Two Lovers] (2008)




이 글은 제임스 그레이 영화 중 [리틀 오데사]와 [투 러버스]에 나타나고 있는 멜로적 감수성이 정확히 어디에서 유래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민족적 특정성과 연관이 되는지를 분석할 예정이다. 분석의 틀로는 프레데릭 제임스의 [정치적 무의식]와 폴 윌레만의 국가 개념을 사용할 것이다. 


먼저 제임스 그레이에 대한 간단한 약력을 적어야 이 글을 이해하는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제임스 그레이는 미국 뉴욕 브루클린 브라이튼 비치 출신으로, 러시아계 유대인이다. 정확히는 증조할아버지가 우크라이나 오스트로폴 출신이며 제임스 그레이의 집안은 예술하고는 거리가 먼 전형적인 유대인 중산층 이였다. (이는 후술한 제임스 그레이의 회고하고 연관된다.) 제임스 그레이가 태어나 유년 시절 대부분을 보낸 뉴욕 브루클린 브라이튼 비치는 러시아계 미국인/유대인이 가장 많이 사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의 영화 대부분은 이 브라이튼 비치를 중심으로 찍혀지고 있으며 주요 무대 배경이 된다. 그렇기에 제임스 그레이 영화는 미국 영화감독들 중에서도 ‘로컬’과 ‘민족’이라는 특성이 상당히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 감독으로 손꼽힌다.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는, 여러모로 두 가지 프레임으로 흥미로운 분석대상이라 할 수 있다. 제임스 그레이가 감독한 영화는 미국 내 러시아 유태계 이민자라는 민족 정체성과 비서사적으로 쌓여온 디아스포라의 역사가 어떻게 문화 형성체를 만들고 있으며 그것이 개인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있다. 제임스 그레이는 그 문화 형성체와 민족 정체성이 이끄는 운명과 그 곳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개인 간의 긴장이 ‘멜로’라는 감수성으로 맺혀 장르 서사를 변이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작법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이런 문화 형성체와 민족 정체성이 일견 상품화된 문화제국주의를 세계에 팔고 있는 미국 영화의 일반적 흐름하고는 차별화되는 구석이 있다.


이 글이 그의 영화 중 [리틀 오데사]  (혹은 [팀 로스의 비열한 거리])와 [투 러버스]를 분석 대상으로 선택한 이유는 그의 커리어에서 중요한 변곡점으로 꼽히는 영화들이기 때문이다. 데뷔작인 [리틀 오데사]가 범죄 장르와 가족 드라마로써 제임스 그레이의 맹아를 보여주는 작품이라면, [투 러버스]는 범죄 장르에서 벗어나 ‘가족 드라마’와 ‘멜로적 감수성’을 도드라지게 보여준 최초의 제임스 그레이 영화로 평가받고 있다. 이 때문에 [이미그랜트]까지 발표된 2014년 시점에서 그의 세계를 알기 위해서라면 두 영화를 먼저 접근해야 하기에 선택했다.


먼저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의 특징이라면 그가 구사하는 서사 구조는 매우 기본적이고 간단하며 장르 원형에 가깝다는 것이다. 데뷔작인 [리틀 오데사]부터 살펴보자. [리틀 오데사]의 갈등과 드라마는 폭력적인 가부장인 아버지에게 반발하지만 동시에 폭력에 물든 아들과 그를 지켜보는 아직 ‘비성인 남성’인 소년, 그리고 ‘모성’으로의 회귀라는 유구한 가족 드라마와 차디차고 비정한 범죄 장르의 서사들에서 빌려 왔다. 이 영화는 가족에게서 탈출하고자 고향을 떠났던 킬러가 암살 의뢰를 실천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루고 있다. 제임스 그레이는 킬러인 주인공 조슈아가 뉴욕 브라이튼 비치를 떠난 이유를, 어머니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만나는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반대로 조슈아는 ‘여성’인 어머니 일리나와 옛 연인 알라, ‘비-남성’인 동생 루벤 에게는 애정을 표한다. 


그렇지만 이 모성에 대한 조슈아의 욕망은 결국 비극으로 끝난다. 어머니는 병으로 끝내 죽고, 알라와 루벤은 조슈아와 갱단의 총격 속에서 사망한다. 그렇게 홀로 남겨진 조슈아는, 혼자 남겨진 채 더 이상 이룰 수 없는 모성에 대한 환상을 꿈꾸며 영화는 막을 내리게 된다. 느와르와 가족 드라마의 요소를 빌려 온 [리틀 오데사]에서 그레이는 가부장의 폭력을 혐오하면서도 폭력을 휘두르는 아들과 그를 지켜보는 연약한 동생의 변화를 통해 폭력의 유전과 그를 통해 숙명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에 새로운 전기가 된 [투 러버스]도 기실 살펴보면 로맨스 영화의 기본적인 구조를 빌려오고 있다. 그레이는 두 여자를 사이에 두고 고뇌하는 남자라는 평이한 소재를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야]를 빌려 몽상적이고 우울한 사랑 이야기를 전개한다. 먼저 주인공인 레너드는 유전적인 문제 때문에 약혼자에게 파혼당하고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여기에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는 아버지하고 동업자인 사업가의 딸인 산드라가 레너드에게 접근한다. 이렇게 산드라와 레너드가 서로에게 관심을 갖는 순간, 레너드는 이웃집에 사는 여성인 미셸을 만나게 되고 순식간에 푹 빠지게 된다. 산드라와 미셸은 여러모로 대조적인 존재로 가정적이고 편안한, 산드라와 달리 미셸은 불안정하고 난잡한 삶을 이어가고 있으며 이미 애인이 있는 상태다. 그런데도 레너드는 미셸을 향한 사랑을 쉽사리 포기하지 못한다. [투 러버스]는 두 개의 사랑을 통해 갈등하는 인물을 통해 ‘안정’과 ‘모험’이라는 두 갈림길에서 ‘선택’의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다.



리틀 오데사 [Little Odessa] (1994)


그런데 제임스 그레이는 이런 일견 간단하고 장르 원형적인 서사들을 진행시키면서 동시에 미국에 정착한 러시아계 유대인들의 문화를 상징하는 코드들과 장면들을 집어넣는다. [리틀 오데사]에 등장하는 조슈아와 루벤의 외할머니의 80번째 생신과 어머니 일리나의 장례식, 영화 내내 흘러나오는 단성 성가들, ‘러시아’를 연상시키게 하는 인물들의 복장이 그렇고 [투 러버스]의 산드라 남동생의 유대인 성인식과 두 가족들 간의 친목을 도모하는 식사 자리, 마지막 엔딩의 유대인들이 모여 벌이는 신년회 등이 그렇다. 이 장면들과 세밀한 설정들은 주인공들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나 긴장감하고는 관계없는, 어찌 보면 지극히 ‘민속학’적인 장면들이다.


 그레이는 영화 내에 그런 코드들과 장면을 집어넣으면서 동시에 자신이 창조한 캐릭터들에 민족이라는 코드를 분명하게 상기시키며 장르 서사에 침윤시키고 작동시킨다. 이런 상기가 유대인 커뮤니티에서 자신의 위치와 연계 되어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리틀 오데사]에서 조슈아가 브라이튼 비치로 돌아와 해야 하는 일은 타 민족인 이란 출신의 사업가를 손봐주는 일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조슈아가 알고 있던 러시아계 유대인 갱들이 동원된다. 이 와중에 조슈아를 부끄럽게 여기는 조슈아의 아버지 아르카디는 신세를 지고 있는 러시아 갱인 보리스에게 조슈아를 없는 아들이라 칭하면서 보리스와의 관계를 유지시켜 자신의 위치를 보장받고자 한다.

그가 사랑했던 범죄 장르 영화의 틀에서 벗어난 [투 러버스]에 이르면 유대인 커뮤니티의 그림자와 그와 대조되는 타자의 커뮤니티는 더욱더 은밀하고 공고하게 자리매김한다. [리틀 오데사]처럼 [투 러버스]의 유대 커뮤니티는 가족이라는 존재와 맞물려 돌아간다. 레너드가 비유대계 약혼녀와 파혼한 이유가 ‘유전적인 결함’라는 점과 산드라가 가족이 담겨 있기에 뮤지컬인 [사운드 오브 뮤직]을 좋아한다고 하는 대사에서 유대 커뮤니티와 가족이 밀접한 연관관계가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또 레너드는 아버지의 세탁소 사업을 도우면서 살아가고 있으며 산드라와의 사랑이 유대인 아버지들이 진행하는 사업적인 관계하고 얽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이런 산드라와 레너드의 관계는 미국에 이민 온 레너드의 가족사진 앞에서 시작해 산드라의 남동생이 한 명의 유대인 성인으로써 인정받는 의식의 자리에서 커뮤니티 내에서 선언된다. 이 모든 유대 커뮤니티의 안온한 약속들이 따뜻한 실내에서 진행된다는 것도 주지해야 할 부분이다. 


 반대로 레너드를 유혹하는 비유대계인 미셸의 삶은 가족하고 거리가 먼 존재들로 이뤄져 있다. 미셸은 아버지와 싸우면서 등장하고 그녀의 삶은 클럽과 마약, 춤, 오페라로 상징된다. 또 미셸이 유부남 로날드 (물론 그는 비유대계 백인이다.)과 불륜을 저지르고 있으며, 중반부에 그의 아이를 임신했다가 유산한다는 점 역시 그녀가 유대 커뮤니티의 가족적인 삶하고 거리가 멀다는 걸 방증해준다. 또한 따뜻한 방에서 서로의 시선을 마주치며 이뤄졌던 산드라와 달리, 미셸을 향한 레너드의 사랑은 창밖으로 훔쳐보기와 사진 찍기라는 관음증적인 시선으로 시작해 실외 옥상의 차갑고 우울한 공기와 빛에서 섹스와 고백, 포옹이 이뤄진다. 그나마 간신히 미셸의 실내로 들어온 레너드는 미셸을 사랑하는 사이인 로날드를 숨어서 지켜봐야 하고, 로날드가 떠난 뒤에도 미셸에게 키스조차 하지 못하고 얼굴을 쓸어내리는 것으로만 만족하고 돌아선다.


이처럼 제임스 그레이는 그런 민족 커뮤니티에 대한 묘사와 세팅들이 ‘장르 서사’ 자체를 진행시키는데 그렇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것을 감행한다. 그런데 그런 감행이 궁극적으로는 장르 서사에 깊게 침윤되어 인물들의 감정과 행동을 좌지우지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게 중요하다. 이 감행이야말로 궁극적으로 제임스 그레이 영화가 흥미로워지는 지점이다. 인물들은 궁극적으로 민족 커뮤니티에 소속되길 원하거나 아니면 탈주하길 욕망하며, 그런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욕망들이 얽히면서 궁극적으로는 장르 서사를 작동시키는 장치가 된다. (후술하겠지만 이 욕망은 유태 문화의 민족주의하고 거리가 멀다. 차라리 커뮤니티를 향한 지극히 개인의 욕망으로 봐야 할 것이다.) 제임스 그레이가 이렇게 집어넣는 러시아계 유대인들의 축제 장면들과 그것의 서사적인 위치는 폴 윌레만이 주창했던 민족적 특정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민족적 특정성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폴 윌레만은 민족적 특정성과 민족주의 담론을 이야기하면서 ‘흑인 영국 필름’에 대한 예시를 들었다. 흑인 영국 필름은 분명 영국적이지만 민족주의인 것은 아니다, 라는 윌레만의 지적은 흑인 영국 필름이 영국 흑인들의 있는 그대로의 삶을 다루고 있지만 그게 다문화주의에 근거한 민족주의의 경우에는 그 영화에서 흑인 문화를 재발견하고 재배치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윌레만은 그런 재발견과 재해석을 비판하며 그것과 다른 대안적인 방법론을 찾고자 한다.


재미있는 것은 제임스 그레이 영화에 나오는 러시아계 유대인들의 민족적 특정성이, 캐릭터를 설명하진 않고 그것이 서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진 않지만, 그것이 분명하게 존재하며 배경으로만 머물지 않다는 것이다. 즉슨 유태 문화가 어떤 서사의 방아쇠가 되진 않지만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에서 서사의 방아쇠는 유대 문화라는 로컬리티를 지워내도 전개가 가능한 것들이다.), 그것이 존재하지 않다곤 부정할 수 없다, 다문화주의에 근거한 민족주의의 시선과 달리 제임스 그레이의 유대인 캐릭터들은 이미 자신이 유대인임을 분명하게 밝히는 ‘민족주의’와 거리가 먼 ‘미국적’인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민족적인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민족적으로 유대인임을 자긍심을 가지고 드러내고 있진 않지만, 유대 민족의 삶이 자연스럽게 미국적인 삶에 침윤되어 있다.


 예를 들자면 위에서 언급한 [리틀 오데사]에서 나오는 디제시스 바깥에서 분명하게 존재하며 흐르는 유대교 단성 성가 음악과 아버지 아르카디의 어머니 생신을 기념해 벌어지는 러시아계 유대인들의 축제가 그렇다. 전자의 경우, 결말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죽고 조슈아가 멍하게 앉아 있는 장면에서 단성 성가는 디제시스 바깥에서 존재하며 ‘중력’을 구성한다. 이 중력은 서사 속에 있는 조슈아를 끌어당기며 안착시키려고 한다. 이런 단성 성가의 케이스처럼 영화가 유대 문화에 침윤되어 있으며 조슈아를 끊임없이 끌어당기려고 하고 조슈아는 거부하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인다. 증오하는 아버지를 밀어내려고 하면서도 동시에 여성과 비성인 남성으로 대표되는 약자에 대한 애정이 중력을 구성한다. 그리고 그 중력은 후자의 러시아계 유대인들의 축제 장면 같은 장면들에서 비서사적으로 드러나면서 그것이 ‘디아스포라의 역사’하고 연계되어 있다는 걸 분명하게 한다. 하지만 조슈아는 그 커뮤니티에 머물 수 없다. 왜냐하면 결말에 이르러선 그 커뮤니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박살났기 때문이다.


투 러버스 [Two Lovers] (2008)


이 중력은 프레드릭 제임슨의 [정치적 무의식]에서 언급한 역사론 하고 언급해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제임슨은 “역사는 텍스트가 아니다. 왜냐하면 역사는 근본적으로 비서사적이고 비재현적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덧붙여야 할 것은 역사는 텍스트의 형식을 통하지 않고서는 접근할 수 없다는 점이다.”라고 말했다. 제임슨은 그렇게 텍스트 화된 역사가 하나의 상처로써 작동한다고 보고 있으며, 그것이 ‘욕망을 거부하고 집단적 실천뿐만 아니라 개인적 실천에도 거침없는 한계들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렇기에 제임스 그레이의 주인공들을 끌어당기는 중력은 비서사적이고 비재현적인 역사에서 잉태된 존재이며 그것은 영화 내의 구체적인 텍스트나 서사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서사와 텍스트 주변에 분명하게 존재하며 서사 속에 있는 인물을 끌어당겨 개인적인 실천에 한계를 부여하고 개인을 커뮤니티에 안착시키게 하려고 한다.


 이 와중에 제임스 그레이의 주인공들은 그 중력 앞에서 ‘어찌할 수 없음’의 상태에 빠져들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멜로의 감수성이 드러나고 있다. 즉 비서사적으로 구축된 ‘민족적인 정체성’이 서사 속으로 침윤해 커뮤니티 내의 안착을 유도하는 중력을 형성하고 궁극적으로는 캐릭터를 젖어 들어가게 해 캐릭터를 무겁게 한다. 그렇게 축축해진 캐릭터는 침묵과 슬픔이라는 감정 속에 사로잡히게 되고, 이것은 곧 멜로의 감수성으로 귀결된다. 요약하자면 제임스 그레이의 멜로는 침윤 혹은 젖어 들어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비서사적인 역사가 만들어내는 멜로적 감수성은 프레드릭 제임슨의 지적과 달리 정치적 한계로 연결되지 않는다. 창작자로써 그레이는 유대 커뮤니티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것을 ‘사랑’한다. [리틀 오데사]에서 조슈아가 폭압적인 가부장 아래에 있는 혈연적으로 연결된, 비-성인, 비-남성 유대인들(동생 루벤, 어머니 일리나, 옛 연인 알라)에게 애정을 느낀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유대 커뮤니티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욕망도 숨기지 않는다. 조슈아는 처음 의뢰를 받고 고향과 거기에 있는 유대 커뮤니티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 난색을 표하며, 그 수장인 아버지와 불화한다.


 이런 두 감정은 제임스 그레이의 개인사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하다. 실제로 제임스 그레이는 인터뷰 할 때마다 자신의 가족사를 자주 언급하는 편인데 이런 유대 커뮤니티에 대한 양면적인 감정과 관련해 흥미로운 인터뷰가 있다. 실은 그레이의 가족들은 처음 그가 영화감독이 되는 걸 반대했다고 한다. 그의 가족들은 "우리는 부자가 아니다. 연줄도 없다. 할리우드 출신도 아니다. 넌 절대 감독이 되지 못할 거다."라고 말하면서 말렸다고 한다. 그레이는 이렇게 밝히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물론 그는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다. 하지만 그는 틀렸다. 나는 감독이 됐다. 모든 가족의 내부에는 무시무시한 감정적 지원과 감정적 파괴라는 양면이 숨어 있다.”라고 정리한다. 이 발언은 그레이 영화를 휘감고 있는 민족과 가족, 그리고 멜로적 감수성 간의 관계를 접근하는 중요한 단초가 된다. 결국 유대인 커뮤니티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혈연 가족의 양면적인 모습에서 그레이는 애정과 동시에 그런 양면성이 만들어내는 중력에 얽매여 있음에 슬픔과 동시에 떠나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그리고 이런 두 개의 모순된 감정은 그의 영화 내에서 단죄되거나 충돌하지 않는다. 그저 그렇게 머물러 있으며 그레이의 인물들을 침윤시키고 멜로의 감수성에 젖게 할 뿐이다.


 이 멜로의 감수성은 [투 러버스]에 이르면 완연해진다. [투 러버스]에 이르면 주인공이 소속된 유대 커뮤니티는 [리틀 오데사]와 달리 파괴되지 않는다. 레너드는 아버지를 증오하지도, 총격전으로 가족을 잃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영화 마지막에 주인공인 레너드를 옭아매어 잡아 담기는 중력은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며 레너드는 그 속에서 양가적인 감정을 느끼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레너드는 ‘사랑하고 싶은’ 사람인 비유대계 여성 미셸과 함께 떠날 준비를 하지만 자신을 걱정하는 어머니에겐 매몰차게 대하지 못한다. 그렇게 정리하고 미셸을 찾지만 정작 미셸은 ‘사랑을 주는’ 비유대계 남성을 선택해 레너드에게 작별을 고한다. 


그렇게 실연당하고 해변에 고통스럽게 머물러 있던 레너드는 미셸에게 주려고 했던 반지를 주워 새해를 맞이하며 유대인 커뮤니티의 편안함 속에 있는 산드라에게 선물해준다. 그렇게 중력에 안착하려는 순간, 산드라를 껴안고 있는 레너드의 눈빛은 흔들린다. 이 흔들리는 눈빛에서 관객들은 두 개의 모순되고 상반된 개념과 감정들인. 떠남과 안착, 슬픔과 기쁨. 변화와 안정이 충돌하지 않고 공존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미셸과 함께 떠나려고 해도 자신을 걱정하는 어머니를 매정하게 버리지 못하는 레너드의 모습과, 자신을 안아줄 수 있는 산드라 품 안에서 행복해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안고 싶어 했던 미셸을 잊지 못하는 레너드가 동시에 등장하는 이 마지막 장면이야말로 제임스 그레이의 축축한 멜로적 감수성의 총화이며 동시에 그 감수성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이 결말은 영화 중반부에서 슬쩍 흘러나왔던 지하철을 타고 가며 사랑을 나누는 타 인종 간의 커플을 (유대인 커뮤니티 바깥에 있는) 타자와의 사랑에 대한 동경과 욕망이 담긴 시선으로 바라보는 레너드하고 연결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처럼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는 기존의 다문화주의에 근거한 민족주의로 해석될 수 없는 영역에서 멜로적 감수성을 띈 중력을 통해 비서사적으로 축적되어온 민족 커뮤니티와 그 커뮤니티하고 갈등하는 캐릭터를 이야기하고자 하며, 이는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져 왔던 미국 바깥의 ‘내셔널 영화’와 대척되는 ‘미국 영화’라는 일반적인 공식에서 벗어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렇기에 제임스 그레이 영화에 드러나는 비서사적인 역사성과 유대인 커뮤니티의 민족적 특정성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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