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er Into Movie/리뷰

로건 [Logan] (2017)

giantroot 2017. 3. 12. 23:31

이정표가 될 가지를 들고 그 발밑에 떨어뜨리자. 맞은편 언덕에 있는 아이가 헤매지 않도록. 
작은 둥지를 만드는 이 날개로, 태어나는 아이들을 연결하기 위해 살아가자.

-이시카와 치아키, 'Little Bird'
(강력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로건]의 첫 샷은 차 안에 누워있는 로건의 얼굴을 하강하면서 보여준다. 이 샷은 밀폐 공간에 클로즈업으로 이뤄져 있기에 로건이 무언가에 짓눌듯한 인상을 준다. 가히 질식할듯한 이 미장센을 흔들어깨우는 건 외화면에서 깡패들이 때려부수는 소리다. 제임스 맨골드는 영화가 시작하기도 전에 이 때려부수는 소리를 암전 크레딧에 올리면서, 공포스럽고 긴장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그 공포스러운 분위기로 나오는 피곤에 쩔어있는 로건의 등장 샷은 두 다리 클로즈업으로 이뤄진다. 하지만 여기엔 활기참이 없다. 밀폐공간에서 겨우 밖으로 나왔지만 로건은 [용서받지 못한 자]의 윌 머니처럼 비틀거린다. 그리고 뒤이어 살짝 과잉되었지만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폭력이 이어진다. 제임스 맨골드는 이 도입부를 통해 [로건]의 영화적 공기와 그가 겪을 여정을 설명해낸다. 

많은 사람들이 [로건]의 도입부를 보고 당황했을 것이다. 이건 [엑스맨]이나 슈퍼히어로 영화의 도입부가 아니다. 차라리 1970년대 도회적이고 삭막하게 돌아버린 미국 액션 영화의 도입부에 가깝다. 이 시작에서 맨골드의 관심사는 일반적인 슈퍼히어로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데 있지 않다는걸 알려준다. 심지어 그는 전작에서 분명 이어져야 할 시간대나 사건의 인과관계마저 모호하게 처리한다. 살아남은 자는 동료들이나 악당, 멋진 사건이나 끔찍한 비극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맨골드는 이 영화가 다른 세계관과 이어진다고 얘기했지만 차라리 완전히 평행세계라는 휴 잭맨의 발언이 더 솔직하게 이 영화의 관점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것이다. [로건]은 울버린 코믹스에서 끔찍하고 비참한 에피소드 (원작이 된 [올드맨 로건], [웨폰 X], [울버린의 죽음], [레드 라이트 핸드])에 담겨있는 비관주의와 그 속에서 피어나오는 희망을 영화사 전통을 연결시키려는 영화다. 그리고 거기에 방해되는 장애물은 가차없이 치워버린다. 그래도 의문이 있다면 "대체 이 꼴이 나도록 전지전능한 진 그레이는 뭐하고 있나?"라는걸 생각해보자.

[로건]이 출발점으로 삼은 곳은 놀랍게도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코스모폴리스]가 다뤘던 종말로 향하는 리무진이다. 다만 [코스모폴리스]의 에릭과 달리 로건은 뒷좌석에 앉아 폼을 취하지 않는다. 뒷좌석에서는 [코스모폴리스]처럼 이어지는 향락으로 부패한 자본주의와 국가주의의 이미지가 넘실거린다. 맨골드는 버림받은 영웅의 왜소한 샷과 자본주의의 비대한 향략을 한 공간에 압축하는 것으로 질식할것만 같은 부패의 순간을 담아낸다. 하지만 [로건]은 [코스모폴리스]보다 더 끔찍하다. 어떻게든 리무진 안에 침투하려는 바깥 사람들의 발악을 보여준 [코스모폴리스]와 달리, [로건]의 리무진 바깥은 아무도 안쪽을 공격하지 않는다. 달리 말해 [코스모폴리스] 결말에서 열어젖힌 끝날것 같지 않은 자본주의 지옥의 이미지가 [로건]의 세계를 잡아먹어버렸다. 

맨골드가 이 영역에서 들여오는 것은 서부극이다. 먼지로 가득한 리무진이 찰스 교수가 사는 은신처로 들어오는걸 롱 샷으로 보여주는 순간, 우리는 [로건]이 [매드 맥스]와 맨골드 자신의 [3:10 투 유마]를 거쳐 서부극의 세계로 들어설거라는 징조를 받는다. 맨골드는 뒤이어 아예 작심하고 온갖 서부극적인 도상을 차용한다. 멀리서 지나가는 기차, 옥수수밭, 농장, 서부 복장.... 그 중에서는 그 유명한 [셰인]도 있다. 이런 맨골드가 인용하는 서부극적 도상과 연계된, 인상적인 샷이 하나 있다. 도주중이던 로건 일행은 무인 트럭에 휘말려 꼼짝도 못한채 말을 농부 먼슨 가족을 만난다. 먼슨 가족을 도와주는 과정을 그리는 동안 맨골드는 아무렇지 않게 말들이 휘적거리며 고속도로를 방해하는 모습을 집어넣는다. 문명을 잠시나마 방해하며 자유로워지는 말의 이미지에서 맨골드는 숨기지 않고 서부극 장르에 대한 강한 애정과 로맨티시즘을 표출한다. 서부를 향한 맨골드의 로맨티시즘은 자본주의 지옥에 저항하는 도구다.

과격하긴 해도 맨골드의 비전은 상당히 정확하다.  울버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이 캐릭터는 19세기 서부 개척 끝물에 '캐나다'에서 태어나 현대와 미래까지 살아남은 캐릭터였다. 서부 시대의 마지막 생존자라 할 수 있는 존재다. 속내를 들여다보면 서부극의 징조는 더 명확해진다. 로건에게 양부로써 자신과 공동체의 관계를 추구하고 지키고자 하는 보안관의 정신이 아로새겨져 있다. 오랫동안 상처주고 받으며 살아온 그는 찰스 자비에 교수를 만나 구원받은 뒤, 찰스의 뒤를 따라 양부의 길을 걷는다. 상처 따윈 아무렇지 않게 회복하며 살아왔지만, 상처의 깊이를 알기에 아이들의 침묵과 고통에 동참하고 지켜주려는 양부. 존 포드의 [황야의 결투]에서 와이어트 어프가 초반부에 동생 무덤 앞에서 했던 대사를 그대로 가져와도 될 정도다. 

하지만 역사를 헤쳐나오기 위해 체득해버린 폭력성은 그런 그의 양부로써 사랑과 긴장관계를 이루면서 복잡한 깊이를 가지게 되었다. 무수한 전쟁과 살육의 현장에서 의미없는 죽음에 익숙해져버린 지친 남자. 여기다 코믹스 울버린은 심지어 몰랐다지만 자기 양아들마저 죽여버리고, 친아들의 오해로 가득찬 경멸어린 저주과 독기를 품고 살아가고 있는 캐릭터였다. 여기서 그의 어둠이 서부 무법자 특유의 야만적 폭력성이 히어로 만화에 접목되어 나온 거라는걸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그 점에서 맨골드의 서부극에 대한 애정은 울버린에 대한 애정이기도 하다. 그는 울버린이 어디서 왔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울버린은 1970년대에 나왔던, 좀 더 과격하고 극도의 콘트라스트를 이루며 신화의 종말에서 멜랑콜리를 끌어내는 서부극 영화의 아들이다. 여기에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회고적 서부극과 페킨파의 마초적 애도의 서부극이 따라나서는건 당연하다.

맨골드의 전작이기도 한 [더 울버린]은 그런 서부극적 도상이 PG-13적 수위에 수용되어 일본 찬바라물과 결합된 독특하지만 일정한 선이 있는 영화였다. 하지만 [로건]은 다르다. 차라리 이 영화는 국경수비대와 카르텔 서부극의 살벌함을 얘기해야 할 것 같다. 여기다 마이클 만 특유의 프로페셔널들이 또렷한 콘트라스트 아래서 벌이는 건조하고 서늘한 긴장감도 녹아있다. 심지어 맨골드는 4K 카메라를 마치 마이클 만이 디지털 카메라를 쓸때 썼던 특유의 빠른 프레임으로 그려내기도 하다. 어느 쪽이든 맨골드는 고전 서부극의 품위있는 도상을 1970년대 이후 장르 영화가 끌어왔던 건조한 콘크리트를 연상케하는 어법과 만나게 하고 있다.

그 만남 사이엔 ‘죽음’이 있다. [로건]이 왜 [엑스맨] 영화를 대부분 치워버리고 [코스모폴리스]를 끌어왔는지에 대한 답도 여기서 나온다. 맨골드와 각본가가 바라보는 미국은 정말 끔찍하고 살맛 안 나는 곳이다. 그 속에서 삶과 죽음은 무의미한 것으로 그려진다. 캐나다로 대표되는 목적지까지 거쳐야 하는 미국은 멕시코를 착취하며, ‘우리는 가난하지만 바보는 아니다’라는 절규하며 평범하게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다음날 시체로 발견된다. 숭고하지만 무의미한 죽음을 맞이한 시체는 자본주의의 재료로 사용된다. 종말이 일상을 대체한 풍경. 여기엔 무의미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간신히 힘을 모아 바깥으로 향하는 아이들이 있다. 맨골드가 그려내는 미국은 몬테 헬먼의 실존주의 서부극의 무기력함이 묻어나온다.

이 세상에서 아이들에게 품을 내어줄 양부 히어로들은 무력하다. 찰스로 대표되는 리버럴 지식인은 옛날의 총기를 잃고 양자 로건과 칼리번의 도움에도 죽음을 기다리고 있으며, 그 지식인들에게 감화받았던 로건과 칼리번은 찰스의 믿음이 실패한것 아닌지, 자신들 역시 초라한 소멸을 맞이할지 회의하고 번민한다. 이 과정이 너무 아프고 괴롭게 그려지기에, [로건]은 다른 히어로 영화들이 못했던 영역에 들어선다. 맨골드가 근심하고 잇는 영역은 아오야마 신지가 기타큐슈 삼부작에서 근심하던 영역과 비슷하다. 그들은 다만 맨골드는 아오야마가 두려워했던 친부 친자의 실패와-원작 로건이 그런 실패가 그려지는 캐릭터임에도-어머니의 불가해함을 꺼내지 않는다. 아오야마와 달리 과거와 혈연에 대한 불신이 없기 때문일까. 아니면 지나치게 많아진다고 생각해서일까.

대신 맨골드는 양부들 자신의 어둠에 집중한다. [로건]의 여정은 심리 서부극 그 자체다. 영화는 로건을 이뤄왔던 죄악과 분노, 고통과 사랑을 모조리 끄집어내 안소니 만이 [서부의 사나이]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리스 비극처럼 확장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확장은 로건뿐만이 아니라 칼리번이라던가 찰스에게도 적용된다. 범죄를 저지르며 자신을 용서해준 동료를 팔아치웠다는 절망감에 자폭하는 칼리번이라던가 공동체 붕괴의 원흉이였음에도 살아남아 죄책감에 빠져드는 찰스 역시 심리 서부극의 그림자에서 어른거린다. 당신을 죽인게 내가 아니라는 로건의 애절한 고백에도 불구하고 맨골드는 X-24를 휴 잭맨의 1인 2역으로 맡기면서 결국 그 역시 자신의 일부였다고 못을 박는다. 여기엔 분명한 죄악이 있으며, 등장인물들은 거기서 자유롭지 못하다.

[로건]은 그 그림자 속에서 이뤄지는 회의와 번민, 죽음을 육체의 이미지로 표출한다. 로건의 사라진 힐링 팩터는 심각하게 베어진 살점들과 엉망이 된 다리로 나타난다. 초반부 몸에 박힌 총알을 스스로 뽑아내며 멍하게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로건의 샷에서 우리는 마음이 찢어질 수 밖에 없다. 로건/울버린은 누구보다도 하드 바디가 자신의 정체성이던 캐릭터였다. 그 캐릭터에게 하드 바디 이미지가 사라지는 순간 거기엔 자크 오디아르가 선호했던 피로와 우울에 젖은 남성 영웅이 드러난다. (아마도 [디판]과 [러스트 앤 본]이 이번 로건에게서 제일 가까울 것이다.)  아들의 도움이 필요한 찰스의 무기력한 육체는 그 점에서 더 비참하다. 칼리번은 뱀파이어처럼 햇빛 아래에서 피부가 불타고 괴로워한다. 심지어 이런 쇠잔함과 거리가 먼 로라 역시 자신의 분노를 온 몸에 담아 표현한다. 이들의 반대에 있는 캐릭터인 도널드 피어슨이 기계 육체를 과시하는 점은 그 점에서 흥미롭다.

[로건]의 액션이 에너지와 피와 눈물이 흘러넘치는 것도 이상한건 아니다. 과격한 수위로 묘사된 이 영화의 액션은 멜로드라마적 먹먹함과 피곤함이 인물들을 적시고 있다. 로건이나 로라, 그리고 후반에 등장하는 뮤턴트 아이들의 액션은 그야말로 살고 싶다는 처절한 악에 받쳐 육체를 잘게 조각낸다. 이 영화의 액션은 그 몰아붙이는 듯한 카타르시스에도, 너무나도 육중하고 슬프다. 그리고 그 슬픔은 삶의 버거움에 죽음조차도 제대로 애도할 수 없다는 흐느낌이 담겨 있다. 무서울 정도로 팽팽한 영화적 공기를 내세운 영화를 엄청난 예산을 들여 만들수 있었다는게 신기할 정도다.

하지만 [로건]은 살벌하고 팽팽하게 건조된 공기에서 놀랍게도 모든 것이 빛나는 아름다움을 끌어내는 영화다. 시작은 다시 가족이다. 맨골드 본인은 귀엽지만 현실의 아픔과 무게를 무시하지 않은 가족 드라마 [페이퍼 문]이나 [미스 리틀 선샤인]을 예로 들었고 그 영향을 무시할 수 없겠지만, 오히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가족의 정경은 차라리 수평적인 공동체에 가깝다.  육체적 능력과 물질적 능력을 소진했지만 어떻게든 아이들을 보호하고 ‘아름다운 곳’으로 데려가려는 양아버지들의 쓸쓸한 모습과 더불어 황폐하고 버려지고 공간, 말없지만 아직 생명력이 있는 소녀를 죽어가는 몸을 이끌며 쫓아가는 ‘오해받는 무법자’의 이미지는 [유레카]를 (나아가 존 포드의 [수색자]) 떠올리게 하고, 특수한 능력을 지닌 아이를 데리고 도주하면서 수평적인 신뢰와 믿음으로 구성된 미국적 가족상을 구축하는 과정은 [미드나잇 스페셜]이나 [퍼펙트 월드]를 언급해야 할 것이다. 어느 쪽이든 절박하고 단단하게 ‘이 땅’에 매여있으려는 시도들로 가득하다. 언급한 영화들이 서부극의 영향이 강한 작품이라 생각해보면, [로건]의 수평적인 공동체는 서부극의 일부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그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조차도 [로건]에서는 버겁게 그려진다. 양아들의 양부는 죄를 양아들의 그림자에게 고백하고 초라하고 비통한 죽음을 맞이해야 하며, 로라를 내보낸 양모 가브리엘라와 친절을 베푼 먼슨 가족은 모조리 죽어나간다. 엑스맨으로 대표되던 가족과 공동체에 대한 강한 믿음이 사라진 세계에서 무엇을 할것인가? 아이인 로라는 답을 원하지만 로건은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대답을 얻을 공동체가 어떻게 사라졌는지 알기 때문이다. 그나마 남아있던 두 사람 역시 죽어버렸고 공동체에 대한 대답은 픽션인 만화책과 자신으로만 가능하다. 로건이 그렇게 열심히 엑스맨 만화책을 부정했던 이유는 거기 있다. 불로불사가 가져오는 피로함과 유일한 증인으로써 죄책감, 자학심이 ‘이 땅’에 매여있고자 하는 시도에 회의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어차피 사라질 것이라면, 조용히 있다가 사라지는게 낫지 않을까 ?

여기서 접촉의 문제가 개입된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를 "접촉의 금지, 그리고 떨어져 있을 것에 대한 요청, 그것은 이야기를 시동케 하는 능동적인 기호”라고 설명한 바 있다. 이 말을 [로건]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엑스맨] 세계관에서 로건이 처음 만난 뮤턴트가 접촉 금지를 요청하는 소녀 로그 (마리)라는 점을 생각해보자. 맨골드는 [엑스맨 1]의 초반부 구도를 다시 뒤집어 만들고 있다. 이 영화에서 로건은 계속 다른 인물들에게 ‘떨어져 있으려고’ 한다. (유사) 부녀 지간을 다루면서도 로라와 로건 사이엔 신기할 정도로 거리감이 느껴진다. 그것은 로라가 로건에게 종속적인 위치가 아니기도 하고, 맹렬한 위험함을 지녔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들은 혈육이지만 혈육이 아닌 서로의 거울쌍이다.

그렇기에 로건은 직접적으로 접촉 금지를 요청하지 않지만 어떤 거리감을 두고 로라를 대한다.  이제 접촉을 요청하는 사람은 사내가 아니라 소녀이며 사내는 소녀의 접촉을 밀어내려고 한다. 이 거리감과 접촉 거부 때문에 이 영화는 비슷한 내용의 액션 영화하고 다른 감흥을 안겨준다. 그것이 매정하기 보다는 슬프게 다가온다면, 로건의 비극과 피로함, 그럼에도 숨길수 없는 사랑을 맨골드는 이해하고 있고 관객도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 거리를 두면서도 절박하기에 조금씩 서로에게 다가간다. 후반에 등장하는 로라의 무릎에 평온하게 잠든 로건의 샷과 악몽에 대한 로건과 로라의 대화가 그렇다. 맨골드는 늙고 지친 미국 무법자 윌리엄 머니를 닮아있는 휴 잭맨의 얼굴과 슬픈 무표정을 지닌 스페인 소녀 아역들의 매력을 간직한 다프네 킨의 얼굴, 꺼져가는 총명함을 어떻게든 잡아보려고 하는 영국 신사 패트릭 스튜어트의 얼굴에서 많은 질료들을 빌려온다. 그리고 그들이 한 프레임에 있는 순간들은 매우 훌륭하다.

[로건]의 먼슨 가족의 죽음은 로건이 왜 접촉을 거부하는지를 설명하는 에피소드다. 그들은 접촉의 평안함을 안겨주었지만 정작 그들은 소수자이자 약자며 매우 허약한 존재다. 맨골드는 로건 일행이 오지 않았더라도 구조적으로 이 가족은 파국으로 향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 절대적인 파국에서 히어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먼슨 가의 가장이 총부리를 대는 순간, 로건은 다시 상처받는다. 로건은 자신의 존재가 저 평범함에 스며들수 없다는걸 안다. 그렇기에 그는 떠돌아다녔다. 오히려 로건이 자주 접촉하는 대상은 찰스 자비에다. 유머가 섞이긴 했지만 찰스와 로건의 화장실 시퀀스는 둘의 접촉이 어떤 의미인지 잘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 찰스가 엑스맨이라는 공동체를 파괴했다는걸 알았음에도, 그는 찰스를 돌본다. X-24이 학살한 자리에서 로건이 로라를 찾아가지 않고 찰스를 먼저 찾아가는 과정은 매정하지만 지극히 논리적이다. 왜냐하면 찰스는 엑스맨의 이상인 '양가족' 그 자체이며, 진정한 첫번째 '양부'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찰스가 죽은 이후로, 로건 역시 죽어간다.

[로건]이 놀랍고 슬픈 이유는 파국을 내재한 접촉과 무법자가 그걸 두려워해 접촉을 거부함에도 공동체 내 일상과 사랑을 존중하고 그려내는 신중한 흐름의 샷과 대화로 로건과 로라, 찰스의 영혼에 접촉하는 과정을 잡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로건이 가족을 연기하는 장면의 샷과 리버스 샷을 보라. 우리는 그게 유머를 담은 연기라는걸 알면서도 눈물을 흘릴수 밖에 없다. 거짓이지만 가짜는 아니기 때문이다. 불행에 가려졌지만, [로건]에서 로건이 지난 시리즈동안 느껴왔던 공동체의 사랑은 절대로 거짓이 아니라고 말한다. 접촉은 필연적으로 파국을 낳지만, 그 접촉이 남긴 위대함은 심지어 파국이 지나간 이후에도 명징하다. 찰스의 회한에 찬 넋두리는 그 양가성을 보여준다.  이처럼 [로건]은 무의미와 접촉 거부 속에서도 공동체와 관계로써 ‘완벽한 순간’을 계속 찾으려고 한다. 그리고 영화는 그것을 '메타픽션'으로 그려낸다. 로건은 픽션은 현실에서 성립될 수 없다고 줄곳 주장하지만 정작 그 역시 썬시커라는 이뤄질 수 없는 공동체 공간에 집착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공간'이 아닌, '사람'이 가족을 이룬다는걸 알고 마침내 그걸 지켜내는데 성공한다. 그 과정은 너무나도 힘겹고 간신히 이뤄진다. 이뤄질수 없다는걸 알면서 부정하면서도 그 ‘완벽한 순간’을 찾으려고 하는 이 시도들은 울버린 자신의 캐릭터성과 들어맞는다.

[로건]은 무의미 속에서도 '관계로써 완벽한 순간'을 찾고자 하는 인물들의 애처로운 갈망과 헛발질이 너무나도 아름다운 애도와 치유의 여정을 결합한다. 줄곳 표류하고 있던 캐릭터가 무의미와 소멸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한 뒤 정착과 안식을 맞이한다는 점에서 이번작의 로건은 [해안가로의 여행]의 유스케를 닮아있다. [해안가로의 여행]에서 기요시는 유령은 여행을 하며 정착하면 사라진다, 라고 설명한 바 있다. 이 대사는 어딘가 서부의 무법자를 닮지 않았는가. 로건은 계속 여행을 하고, 정착을 하는 것에 두려움을 표했다. 맨골드 역시 영화 속 로건이 망자의 리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듯 하다. 즉 처음부터 로건은 상징적으로 죽어있다. 상술한 영화의 시작이 깨어남이라는 걸 주지해보자. 리무진 운전 시퀀스의 생기없음부터 시작해 후반부로 갈수록 로건의 영화적 여정은 기면증적인 컷과 장소 점핑, 생략과 암전, 깨어남과 같은 비약으로 이어진다.

재미있는 점은 [해안가로의 여행]과 달리 [로건]은 '해안가로의 여행'을 떠나려다가 '호숫가로의 여행'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맨골드가 바다로 향하지 않고 모래와 흙, 가파른 경사길을 종국의 물가에서 떼어놓으려고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먼저 로건 일행이 원하는 요트 썬시커를 보자. 엑스맨은 재건될 수 없고 상술했듯이 남아있는 뮤턴트들 역시 왜소하고 초라한 죽음만이 기다릴 뿐이다. 아마 로건이 예정한 죽음은 찰스와 칼리번이 소멸한 뒤, 애도해줄 사람 없이 조용하고 쓸쓸하게 과다한 물 이미지에 스며드는 것였을 것이다. 썬시커는 그 점에서 평온한 죽음이지만, 애도하는 이 없는 쓸쓸한 소멸 그 자체다. 하지만 그가 꿈꾼 소멸의 여정은 로라의 등장으로 사라지고 반대로 그는 사막과 들판, 도시를 거쳐 캐나다 국경의 산맥으로 향한다.  

맨골드가 호숫가로 여정을 선택한 이유는 땅에 뿌리박고 살았던 공동체의 소멸을 지켜본 뒤 애도를 완수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모래와 흙, 가파른 경사길은 그 점에서 [엑스맨] 시리즈에서 엑스맨들이 거쳐야만 했던 지난하고 고된 여정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거기서 마지막으로 남은 엑스맨 멤버들은 아이들을 조금씩 더 아름다운 곳으로 데려가면서 소멸한다. 첫 징후는 "호수도 있는 곳"에 묻힌 찰스다. 찰스의 죽음은 곧 닥쳐올 로건 자신의 죽음을 예견게 한다. 여기서 로건과 로라는 호수가 있던 자비에 학교로 대표되던 이상주의의 끝을 애도한다. 그리고 로건이 묻히는 공간 역시 호숫가 근처 숲이다.

그렇기에 덤덤하게 이뤄지는 로건의 죽음은 너무나도 아름답게 빛난다. 그들이 도달한 곳은 지극히 평범한 숲이다. 하지만 여기서 이뤄지는 접촉의 숭고한 아름다움이 프레임 속 모든 존재를 빛나게 한다. 여기서 필연적으로 다시 [해안가로의 여행]의 마지막을 떠올릴 수 밖에 없다. 접촉의 거부에서 시작한 여정이 마무리되는 순간, 분명한 접촉이 새겨지기 때문이다. 미즈키와 유스케가 그랬듯이 로건과 로라는 여정을 통해 서로에게 동화되었고 끝내 접촉으로 충만한 사랑을 나눠가지게 된다. 그 순간 로건은 저주받았다고 믿었던 기나긴 시간 속에도 이런 접촉이 있었으며, 상실의 고통과 애도 역시 하나의 접촉이였음을 깨닫는다. 다만 어떻게 설명해야지 몰랐을 뿐. 무의식적으로 사랑을 나눠주면서도 자신은 접촉할 수 없는 존재라 자학했던 영웅에게 정말로 다정하고 따뜻한 결말 아닌가. 찰스-로건-로라로 이어지는 연속된 애도의 완수가 역설적으로 엑스맨과 사랑으로 이뤄진 이상적 공동체를 영원하게 만든 셈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아이들에겐 ‘분노’가 부족하다고 비웃는 악당들의 가치관을 정면으로 부순다.
 
[로건]은 마지막에 본성은 이길수 없고 총소리가 없어지기 위해서는 영웅은 사라져야 한다는 [셰인]의 추도사를 인용한다. 하지만 맨골드는 픽션과 풍경들, 공동체의 아름다움, 접촉의 숭고함을 통해 영웅에 대한 애도를 완수해 빛나게 만든다. 로건의 애도가 찰스를 영원하게 만들었듯이, 로라의 애도는 로건을 영원하게 만든 셈이다. 그리고 0의 순간에서 바다가 아닌 육지로 향하는 미즈키가 그랬듯이 로라 역시 애도를 완수하고 다시 시작하기 위해 프레임 밖으로 사라진다. 그 사라짐은 절대로 무의미하지 않다. 그렇기에 우리는 로건과 찰스, 칼리번, 가브리엘라의 본성이 부당한 세상에서도 순진하게도 따뜻한 집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행복을 꿈꿨던 작고 조용한 사람들에 가까웠노라고 확언할 수 있다.

당신은 그 이름에게서 무수한 사람들의 이름을 붙일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확언은 매우 벅차오르는 눈물을 동반한다. 로라가 만든 X가 역설적으로 O이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엔 이 영화 역시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후발 히어로 영화들에 종속되겠지만 (울버린은 최고 인기 캐릭터고, 휴 잭맨이 없더라도 어떻게든 이어갈 것이다. 게다가 아직 로라에게도 할 얘기가 남아있다.) 제임스 맨골드는 몹시도 감동적인 인본주의 서부극 영화를 극우 포퓰리즘 시대의 세상에 가져왔고, 길이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