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번째 창문
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도살자 [Le Boucher / The Butcher] (1970)

[도살자]의 시작은 평온한 마을 전경 쇼트 직후 사소한 실수를 배치한다. 행복한 결혼식을 위해 준비하던 일꾼들 중 한 사람이 실수로 음식을 엎지른다. 이윽고 바삐 일하는 주방에 들어가면서 샤브롤은 삼각형으로 세워진 케이크 위의 신랑 신부와 진짜 신랑 신부를 매치 컷으로 이어붙인다. 고기에 대한 수다가 이어진 뒤, 관객들은 고기를 준비한 포폴이라는 남자를 소개받는다. 그런데 이 남자 앞으로 오는 건 따로 준비된 식칼과 포크에 푹 찔린 고기다. 심지어 그 다음 샷에서 샤브롤은 잘려지는 고기의 질감이 보일 정도로 클로즈업한다. 사전 정보 없이 들어온 관객이더라도 이 장면에서 뭔가 기묘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그 샷에서 고기는 맛있다기 보다는 피가 뚝뚝 떨어질 것 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샤브롤은 아무렇지 않게 그 식칼과 고기를 치워두고 행복한 순간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이 장면들은 작지만 불길한 메아리처럼 남는다.

그래도 주인공 엘렌에게는 별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시골로 내려와 초등학교 교장으로 일하고 있는 엘렌 앞에 등장한 정육점 주인 포폴은 수줍고 친절한 남자다. 결혼에 관심없고, 군대 시절이 즐겁지 않다고 회상하지만 그래도 연애하기엔 무리없는 배려심을 지니고 있다. 결혼식 피로연에서 만난 둘은 이내 가까워진다. 서스펜스를 기대하는 사람이라면 [도살자]의 초반 전개는 심심하게 다가올지도 모른다. 샤브롤은 초중반를 트뤼포나 로메르의 영화에 등장해도 이상하지 않을법한 중산층 커플의 이야기로 끌어간다. 놀랍게도 그는 그들의 사랑을 이죽거리지 않는다. 엘렌이나 포폴은 많은걸 드러내지 않지만 감정 이입하기엔 무리 없는 캐릭터고, 샤브롤 역시 그들의 사랑를 그릴때 어떤 블랙 유머 따윈 집어넣지 않는다.

하지만 엘렌과 포폴의 수줍은 사랑이 진행되는 동안 [도살자]는 도입부에서 제시되었던 이물적인 샷을 스멀스멀 퍼트린다. 처음은 비가시적인 소문이다. 엘렌은 학생들에게서 우체부가 시체를 발견했다는 얘기를 듣는다. 엘렌은 무심하게 넘기려고 하지만, 동시에 피해자가 저번주까지 멀쩡하게 춤추던 여자라는 사실에 불안감을 느낀다. 대도시였다면 피해자는 익명의 존재로 남았겠지만 [도살자]의 배경은 얼굴 정도는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시골이다. 이 영화의 불안은 당연히 있어야 할 일상의 순간이 사라지거나 흐트러지면서 발생한다. 샤브롤은 그 불안을 점점 키워나가면서 미심쩍은 단서와 쇼트들을 엘렌 주변에 흩뿌린다. 

여기서 흥미로운 시퀀스가 등장한다. 포폴을 학교로 데려온 엘렌은 학생들에게 왈츠를 가르치는데, 이때 학생들과 포폴은 프랑스 귀족 전통 의상을 입고 있다. 그런데 샤브롤은 여기서 다시 이상한 쇼트를 집어넣는다. 포폴이 잠시 벽에 기대서 엘렌과 학생들을 보는 도중, 포폴의 시점에서 엘렌의 뒷머리를 줌 인하는 쇼트가 갑자기 끼어든다. 너무나 갑작스러워서 관객들은 재고를 할수 밖에 없다. 대체 샤브롤은 왜 엘렌의 뒷머리를 극단적으로 클로즈업 해서 담아냈을까? 만약 포폴이 엘렌에 대한 상념을 지울 수 없다는 걸 보여주려고 했다면 엘렌의 뒷 모습을 중간 크기의 쇼트에서 보여주는 것으로도 충분했을건데 말이다. 게다가 직후 이어지는 포폴의 반응 쇼트 역시 어딘가 불편해보인다.
 
대체 '무엇이' 포폴을 불편하게 했던 것일까? 어디까지나 추론이지만 이 쇼트에 담긴 엘렌의 붉은 뒷머리가 포폴이 다루던 생고기랑 비슷하게 보여서 아닐까, 라고 생각해본다.  물론 머리카락과 생고기는 완전히 다른 물체지만, 적어도 이 쇼트에서 붉은 뒷머리는 지나치게 확대된 나머지, 본 의미를 쉽게 알아차릴수 없을 정도다. 마치 조지아 오키프의 대상을 확대시켜 추상적으로 찍은 사진들처럼 말이다. 극단적으로 확대된 이미지는 본 의미를 잃고 생경하게 다가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추상화된 붉은 이미지는 고기의 색감을 떠올리기 충분하다. 샤브롤은 우아함을 중시했던 프랑스 귀족을 분장한 인물들 사이에 극단적으로 확대된 뒷머리 쇼트를 집어넣으면서 이물감을 발생시킨다.

[도살자]의 오프닝 크레딧은 동굴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샤브롤은 그 오프닝을 잊지 않았다듯이 영화 속에서 동굴을 등장시킨다. 체험학습을 위해 아이들을 데려간 엘렌은 이 동굴이 원시인이 살던 동굴이라 설명하고, 이에 아이들은 잠들어있던 원시인이 깨어난다면 분명 착할거라고,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그 직후 엘렌과 아이들은 시체를 발견한다. 살인 현장의 피가 하얀 샌드위치 위로 떨어지는 장면은 그 점에서 상징적이다. 문명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는 샌드위치의 깔끔한 하얀 이미지 위에 원시적인 피가 떨어지면서 얼룩지기 때문이다. 동굴과 식빵은 서로 화해할 수 없어보인다.

사실 살인 사건의 범인이 누구인지는 중후반부터 명백해진다. 바로 끊임없이 야만과 폭력의 자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포폴이 범인이었다. [도살자]가 흥미로운 점은 엘렌의 일상에 비일상적인 살인과 폭력이 끼어들면서도, 엘렌과 살인마 포폴의 연애담을 장르적으로 소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연히 관객은 이 사실을 눈치채는 순간 포폴이 엘렌을 죽일지 모른다고 긴장하게 된다. 서스펜스의 공식에서 남성 연쇄살인마와 여성의 관계는 필연적으로 연쇄살인마가 여성을 착취하면서 끝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샤브롤이 두 캐릭터를 존중하면서 신중하게 감정을 쌓아올렸기 때문에 [도살자]는 쉽게 착취적인 태도로 빠지지 않는다.

모든 진상이 밝혀지는 후반부는 그 점에서 [도살자]의 섬뜩하면서도 애절한 매력이 잘 드러나고 있다. 하늘거리는 커튼을 보여준 다음, 어둠 속 교실에 홀로 있는 엘렌 앞에 불쑥 나타나는 포폴의 샷은 히치콕에 대한 존경심이 잘 드러나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 순간 포폴은 부정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살인마다. 샤브롤은 포폴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 더욱더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진상이 밝혀지기 전에도 포폴과 엘렌의 로맨스는 일상이 끝난 오후에서 밤에 이뤄졌지만, 살인이 등장한 순간 샤브롤은 포폴과 엘렌의 로맨스는 빛 아래에서 이뤄질 수 없다고 선언하는 것 같다. 

하지만 포폴은 쉽게 단죄할 수 없는 인물이라는 것도 샤브롤은 명백히한다. 때문에 [도살자]의 멜로 드라마는 도피적인 면모가 강하다. 이런 도피적인 멜로 드라마는 자해한 뒤 죽어가는 포폴을 싣고 엘렌이 밤의 도로를 질주할때 극한에 달한다. 이 순간 관객은 포폴을 두려워하면서도 진심으로 동정하고 그가 엘렌과 함께 행복하길 바란다. 포폴은 깨어났지만 환대받지 못하는 착한 원시인이며, PTSD를 앓는 군인이다. 구체적인 정치 메시지를 담은 영화는 아니지만, 포폴의 캐릭터는 알제리 전쟁의 맥락과 연계될 수 있을 것이다. 병원에 들어갔을때 샤브롤은 병원 의사들이나 병원 풍경을 보여주지 않고 포폴과 엘렌의 샷-리버스 샷만을 고집하면서 둘만의 감정을 기어이 완성시킨다.

하지만 그 완성은 동시에 죽음을 의미한다. 결국 두 사람은 이 세상에서는 이뤄질 수 없는 관계였고, 엘렌의 마음을 간직한 채 포폴은 쓸쓸히 죽는다. 샤브롤은 이제 홀로 남은 엘렌의 모습을 보여준다. 엘렌을 보여주는 마지막 쇼트야말로 [도살자]의 무표정한 쓸쓸함을 집약하고 있다. 다시 찾아온 사랑이 비극으로 끝난 뒤, 엘렌은 골똘히 생각에 잠긴 모습이다. 이때 샤브롤은 엘렌 뒤에 물안개와 불이 켜진 차 전조등을 보여준다. 엘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남겨진 엘렌이 이어갈 삶은 어떻게 될 것인가? 샤브롤은 그저 물안개라는 흐릿한 상황 속에 등대처럼 켜진 전조등을 통해 엘렌과 포폴의 사랑을 집약한다. 파국으로 끝났지만 그래도 무의미하지 않았다듯이. [도살자]가 만약 샤브롤의 대표작으로 불릴 수 있다면 샤브롤의 무표정함이 상당히 절절하게 메아리치고 있는 영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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