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er Into Movie/리뷰

단 한번뿐인 삶 [You Only Live Once] (1937)

giantroot 2020. 10. 6. 19:28

(누설이 있습니다.)

나치의 탄압으로 미국으로 넘어간 프리츠 랑은, 자신의 독일 시절 영화에 대해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던 걸로 알려져 있다. 〈M〉이나 〈메트로폴리스〉로 랑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사실이 의외로 다가올 것이다. 이런 시큰둥함을 단순히 독일 시절에 대한 환멸로 정리하기엔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도 든다. 왜냐하면 프리츠 랑은 미국으로 넘어가서 자신의 영화 작법을 완전히 바꾼 케이스에 속하기 때문이다. 우선 랑은 〈문플리트〉 같은 예외를 제외하면, 〈메트로폴리스〉나 〈피곤한 죽음〉, 〈스파이더〉 같은 판타지나 모험 활극 같은 건 만들지 않았다. 랑이 할리우드에서 시작하기 위해 끌고온 자신의 유산은 〈M〉이나 〈마부제 박사의 유언〉 같은 범죄 영화에 가까웠다.

하지만 미국 시절 랑의 영화를 보는 사람이 그 유산을 찾아내기 쉽지 않을 것이다. 미국 시절 랑은 필름 느와르로 대표되는 할리우드에서도 공장 생산품 취급받던 장르에서 활동했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독일 시절과 달리 미국 시절 랑은 〈분노〉나 〈사형 집행인 또한 죽는다!〉 같은 예외를 제외하면 직접 각본을 쓰지 않았다. 미국 시절 랑은 미국인 프로듀서와 시나리오 작가가 제시한 제작 방식과 틀, 대사를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자신의 색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할리우드에서 살아남았다. 미국에서도 자신만의 영화를 만들었던 장 르누아르하고는 정 반대인 셈인데, 완전 작가보다는 고용 감독으로서 역할에 충실했다고 할 수 있다. 반 나치 영화를 제외하면 미국 시절 랑의 영화는 대체로 짧고 간결하다. 을 만들었던 랑이 〈빅 히트〉에서 왜 이렇게 허술하나냐는 평은 그 점에서 미묘한 함정에 빠진 셈이다.

그렇기에 미국 시절 랑 영화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해진 형태를 요구하는 할리우드 시스템과 주어진 각본 사이에서 랑이 어떻게 교란을 하는지 파악해야 한다. 미국 시절 랑이 주로 만들었던 영화는 범죄자나 탐정이 주인공인 영화가 많았다. 일종의 경계선상에 있는 주인공을 내세웠다고 할 수 있을건데, 흥미로운 점은 이런 주인공들이 랑의 미국 데뷔작 제목처럼 '분노'하고 있다는 점이다. 독일 시절 랑과 미국 시절 랑을 가르는 차이점을 꼽으라면, 인물의 광적인 에너지와 분위기가 린치를 비롯한 극단적인 행동이나 폭력으로 분출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심지어 잠시 고용되었다가 잘린 〈문타이드〉라는 영화에서도, 주인공은 언제든지 살인을 저지를 수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착하게 살려고 하는 위태로운 인물이었다. 랑이 독일에서 배운 표현주의는 팽팽한 도덕적/윤리적 긴장 속에서 그림자와 빛 사이에 갇힌 인물을 잡아낸다. 이런 에너지와 분위기, 시청각적인 표현은 할리우드 체계 아래 정해진 장르나 서사를 이상하고 위태롭게 만든다.

〈단 한번뿐인 삶〉은 랑의 미국 시절 영화 중, 〈분노〉와 함께 당시 랑이 '소수자'로써 차별받고 쫓겨나야했던 현실을 깊게 반영하고 있는 영화다. 제대로 살려고 하는 전과자가 오해와 힘든 삶으로 연인과 함께 나락으로 떨어져 도주한다는 내용부터 그렇다. 분명 보니와 클라이드라던가, 거기서 영감을 받은 소설 〈우리를 닮은 도둑〉을 영향을 받은 영화지만, 〈단 한번뿐인 삶〉에서 랑은 이들의 파멸적인 자유로움에 별로 관심이 없다. 반대로 그들은 왜 도주를 선택했는가?에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사법 체계가 문제를 해결해줄 거라는 기대가 없다. 〈단 한번뿐인 삶〉은 〈분노〉보다도 사법 체계에 대한 불신이 강하게 드러나는데, 최소한 〈분노〉에서는 정당한 절차에 따라 이뤄졌던 오해의 해소가 되려 더 큰 비극으로 몰고 가기 때문이다. 에서 공권력에 정당한 권력 행사를 호소하던 랑은, 〈분노〉와 〈단 한번뿐인 삶〉을 거치면서 냉소하거나 총을 쏘기까지 이른다.

때문에 〈단 한번뿐인 삶〉은 소수자 문제를 다루는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영화는 이런 소수자 문제를 절망에서 잉태한 파멸적인 행보와 자멸이라는 운명론적인 (또는 지극히 독일 낭만주의적인) 관점으로 이끌고 간다. 에디가 보이는 울분에 가득찬 자멸은, 어차피 이 상황을 극복할 가능성이 없다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실제로도 영화는 차디찬 냉소로 선입견과 편견에 가득찬 사람들을 보여준다. 이런 개선할 수 없다는 인식을 전제로, 랑은 그 전제가 어떻게 사람의 심리를 왜곡해가는지 추적해간다. 이 영화에서 빛과 그림자를 활용하는 장면이, '왜곡'된 심리나 상황에 집중해 있다는 점은 당연하다. 그 유명한 감옥에서 사형일을 기다리는 에디를, 창살의 그림자와 실내 조명으로 보여주는 풀 샷이 대표적이다. 이 샷에서 인위적으로 그림자를 강조하는 인공 조명은, 에디를 가로막는 창살의 그림자를 강조하면서 빛이 가지고 있는 '희망'이라는 보편적인 상징 이미지를 뒤집어버린다. 〈단 한번뿐인 삶〉의 표현주의는 짙은 운명론/낭만주의적 관점을 영화 언어로 재현하고 있는 도구인 셈이다.

에디를 연기한 '이상적인 미국인' 얼굴을 한 헨리 폰다의 울분에 가득찬 연기는 인상적이지만, 영화의 운명론/낭만주의적 관점은 에디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실비아 시드니가 맡은 조앤은 어떤 지점에서 에디보다도 강렬한 왜곡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영화가 제시한 설정을 보면 조앤은 도저히 에디의 운명을 따라갈 이유가 없는 캐릭터다. 번듯한 직장도 있으며 범죄를 저지르지도 않은 평범한 시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앤은 에디를 사랑하고, 무고함을 믿기에 예정된 에디의 파멸적인 도주극에 동참한다. 조앤이 보여주는 강렬하고 어두운 로맨티시즘은, 랑이 무의식중에 〈피곤한 죽음〉 같은 독일 시절 영화에서 보였던 운명에 거스르고자 하는 강렬한 사랑과도 맞닿아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랑이 미국 영화에 필름 누아르에 유산을 남겼다면, 독일 표현주의의 강렬한 시각적 도구와 왜곡되고 비틀린 (때론 로맨틱한) 심리 간의 결합이라는 공식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단 한번뿐인 인생〉은 라울 월시의 〈하이 시에라〉, (〈우리를 닮은 도둑들〉을 영화화한) 니콜라스 레이의 〈그들은 밤에 산다〉, 테렌스 맬릭의 〈황무지〉, 스티븐 스필버그의 〈슈가랜드 특급〉, 〈라이프 이즈 스트레인지 2〉 같은 (지극히 미국적인) "억압적인 체제에 반항하지만 숙명적인 비극에 이끌리는" 범죄자나 소수자의 도주극 영화의 중요한 시발점이다.

또한 종교적인 관점 (그 중에서도 가톨릭적인)도 찾아볼 수 있다. 랑이 유대인 출신이지만 실상은 가톨릭 집안 출신이라는걸 유념할 필요가 있다. 에디가 초반부에 겪는 고통은 가톨릭의 원죄와 속죄 개념을 악의적으로 비틀었다고도 볼 수 있다. 원죄의 속죄와 참회를 했음에도 원죄를 들먹이며 불신하는, 가톨릭 교리와 세속적인 세상 간의 괴리라 할 수 있다. 에디의 선함을 믿고, 억울함을 풀어주려고 노력하는 돌란 신부는 그 점에서 흥미롭다. 돌란 신부는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왜곡'되지 않은 존재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돌란 신부는 감옥에서 에디가 벌이던 인질극 도중 실수로 총을 맞고 사망한다. '왜곡되지 않은 자의 죽음'이라는 비극은 가랑과 앨프리드 히치콕 간의 차이기도 하다. 히치콕은 랑처럼 가톨릭 신도였고, UFA 스튜디오에 일하면서 랑을 비롯한 독일 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았지만 실제 사건을 영화화한 〈오인〉 같은 예외를 제외하면, 긴장과 매혹에 관심이 많았다. 기본적으로 히치콕 영화에 등장하는 오인과 도피는 억울함과 불신이 있긴 하지만, 성적인 모험을 예견케하는 미묘한 흥분이 있다. 하지만 미국으로 피난 온 랑은 결코 흥분하지 않는다. 랑에게 오인은 성적 모험이 아닌, 다가올 숙명적인 파국의 시작점이다. 인물은 여기서 다른 선택지를 고를 수 없고, 자기를 불살라 저항하거나 체념해야 한다.

영화의 결말은, 미국이라는 사회에 대한 랑의 관점을 보여준다. 당연하겠지만 에디와 조앤은 끝내 도주하지 못한채 멕시코 국경에서 죽는다. 이때 이상한 숏과 몽타주가 결말에 등장한다. 죽어가던 에디는 "자유의 문이 활짝 열려 있네!"라는 환청을 듣는다. 그러나 이때 랑이 보여주는 샷은 덤불과 숲이다. 명확한 이미지 없이 공허하게 흘러가는 목소리와 꽉 막혀있는 이미지로 구성된 이 몽타주는, 영화의 주제의식을 압축하는 연출이라 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 '자유'라는 단어가 어떻게 반복해서 쓰였는지 생각하면, 이 공허한 몽타쥬 연출은 상당히 비극적으로 다가온다. 결국 에디는 '단 한 번뿐인 인생'에서 '단 한번도' 자유를 얻지 못했다. 랑은 미국이 자유의 나라라는걸 믿지 않는다. 보니와 클라이드 신화를 보고 다루면서, 랑은 모든 법칙에서 자유로운 영혼보다 독일에서 지독하게 겪고 떠나야 했던 대중의 선입견과 불신, 잔혹한 린치를 다시 발견한다. 그리고 그것이 국가를 초월한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이라고 받아들인다. 랑이 전후 〈이유없는 의심〉을 마무리짓고 더 이상 미국에서 영화를 찍지 않았던 이유도 할리우드 시스템에 끝내 적응하지 못했던 현실과 더불어 (랑은 할리우드에서 단 한번도 A급 프로덕션에 올라가지 못했다.) , 매카시즘의 미국과 나치 독일 간의 차이를 발견하지 못했기에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