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er Into Movie/리뷰

사마에게 [من أجل سما / For Sama] (2019)

giantroot 2020. 11. 21. 23:58

1990년대, CNN이 걸프 전쟁을 생중계하면서 세계인들이 전쟁을 감각하는 방식에 변화가 일어났다. 사실 영상으로 전쟁을 감각하는 방법은 이전부터 뉴스 릴 같은 방식이 있었지만 CNN은 종군 기자에게 생중계 방송 카메라를 들려줬고, 사람들은 현장에서 채집된 전쟁의 이미지를 안방에서 즉각 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CNN의 중계는 미국의 압도적인 화력을 보여주는데 치중한, '자극적이고 편향된 시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바야흐로 갱 오브 포가 예측했던 '게릴라전은 새로운 엔터테인먼트'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CNN 쇼크는 많은 창작자들이 진지하게 받아들었고, 그 중엔 ' 극장판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2'를 만든 오시이 마모루도 있었다. 오시이 마모루는 '비디오 이미지'를 추적하는 미스터리 플롯으로, 흑막이 바라보는 도쿄라는 허상을 '비디오 이미지'으로 드러내면서 전쟁이 엔터테인먼트적이고 비현실적인 영상으로 대체하는 '비디오 전쟁' 시대에서 어떻게 살아야할지 묻고 있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났다. CNN의 생중계 방송 카메라는 캠코더와 스마트폰이라는 이름으로 대다수 인류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고, 인터넷에 기반한 유튜브는 CNN의 채널을 익명의 대중이 만들어가는 방식으로 도래했다. 이제 많은 사람들은 사건이 일어나면 캠코더나 스마트폰을 들어서 찍는다. 이런 방식이 정착하기 시작했던 2011년, 아랍의 봄이 일어났다. 그 중에서도 가장 치열했던 곳이 시라아였는데 불행히도 시리아는 민주화 운동이 유혈 진압되면서 내전이 되고 말았다. 여기에 수니파와 시아파의 대립과, 미국과 러시아를 위시한 강대국들의 추악한 이권 다툼이 끼어들면서, 시리아는 망가지고 말았다. 아직도 시리아는 전쟁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여기서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시리아 민중이 들고 있던 스마트폰과 카메라는 그때 무엇을 찍고 있었습니까? 그 '비디오 이미지'는 시리아 전쟁에서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까?

 

『사마에게』는 그런 질문에 대답하듯이 만들어진 다큐멘터리다. 사실 『사마에게』는 만들어졌다기 보다는 기록했다나 채집했다에 가까운 다큐멘터리다. 이 다큐멘터리의 감독인 와드 알 카팁은 시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인 알레포에서 살던 마케팅 전공 대학생이었다. 와드 알 카팁이 처음 카메라로 든 건 2011년 아랍의 봄이 시리아에 불 당시, 혁명의 열기를 휴대 전화 카메라로 찍으면서였다. 이 영상을 보면서 와드는 딱히 큰 의미를 두고 찍은게 아니었다고 회고한다. 와드는 2016년 대한민국 국민 대다수가 그랬듯이, 사회의 변혁을 사적으로 기록해두기 위해 촬영했던 셈이다. 하지만 다큐멘터리를 위한 나레이션을 녹음하는 시점에서 와드는 이 영상에 의미를 부여할 수 밖에 없다. 2011년 이후 시리아는 민주화의 열망조차 실현할 수 없는 전쟁의 나라로 변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러시아의 등을 업고 민주파 시민들을 고문하거나 살해했고, 민주파는 반정부 세력으로 변했다. 와드가 머물던 알레포 동부는 2016년까지 민주파 반군의 본거지로 정부군과 치열한 내전을 벌였다.

 

『사마에게』는 처음부터 입장이 확고한 다큐멘터리다. 만약 시리아 내전에 대한 "중립적"인 다큐멘터리를 찾는다면 다른 다큐멘터리를 찾는게 좋을 것이다. 와드 알 카팁은 처음부터 알 아시드 정권을 적으로 삼고, 그들이 어떻게 민주화를 탄압하고 잔혹한 일을 저지르는지 고발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 고발은 거시적인 종군 저널리즘보다는, 미시적인 기록에서 비롯된다. 『사마에서』는 간단히 말해 비디오 일기다. 하지만 평화 속 비디오 일기랑 달리, 머리 위에 폭탄이 떨어지고 어제 일하던 사람이 죽어서 실려나가는 상황에서 쓴 비디오 일기다. 그 무시무시한 현재성과 동시성에 대해서는 굳이 길게 적지 않아도 체감될 것이다. 소니 핸디캠을 비롯해 다양한 기종을 넘나드는 와드의 카메라는 대다수가 임기응변이며, 미장센이나 몽타주, 일관성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 황급히 전원을 키고 녹화 버튼을 누른듯한 장면도 보인다. 와드 본인이 보이는 순간은 보통 다른 사람이 카메라를 잡고 있을때다. 이 영화의 카메라는 스마트폰과 디지털 카메라 시대를 살아가는 일반인의 촬영 방식을 반영하고 있다. 그 점에서 『사마에게』는 공동 감독인 에드워드 와츠가 있지만 온전히 와드 알 카팁의 영화기도 하다. 실제로 에드워드 와츠 역시 자신의 역할은 와드의 조력자이자, 후반 작업 담당 위주였다고 밝히기도 했다. 『사마에게』는 시네마 베리테나 다이렉트 시네마 같은 카메라를 들고 현장으로 뛰어드는 다큐멘터리 전통이 어떻게 유튜브와 디지털 카메라 시대에서 진화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사마에게』의 가장 큰 힘은,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무의미한 죽음과 폭력에 저항하는 방식에서 비롯된다. 인터뷰에서 와드는, 처음엔 주변 사람들은 자신이 촬영하는 이유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폭격으로 일행 중에 사망자가 발생하고 그 사람이 영상에 기록된 걸 보고, 분위기가 바뀌었다고 한다. 굳이 인터뷰를 언급하지 않아도, 와드는 영화 속에서 자신이 기록하는 이유를 직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폭격으로 아이를 잃은 어머니가 울부짖으면서 카메라를 보고 말한다. "이거 다 기록하고 있지? 기록하라고!" 『사마에게』는 그 말 그대로 모든 걸 기록하려고 애쓴다. 이 기록은 시리아 내전이라는 공적인 비극 뿐만이 아니라, 사적인 기록도 포함되어 있다. 안정된 미래와 애인을 두고 알레포에 남아서 의료 봉사를 하기로 한 (미래의) 남편 함자과 동료들, 그런 남편와 결혼해 아이를 가진 와드 본인, 아직 전쟁을 모르지만 무의식적으로 전쟁의 생채기를 남기면서 자라는 장녀 사마, 와드와 함께 공격받는 알레포를 살아가는 와드의 친구들... 이 기록들을 다시 보면서 와드는 자신의 사적 기록과 공적인 '시리아 내전' 간의 관계를 재정립하려고 한다. 그 정립은 시리아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와드 자신에 대한 인식이기도 하며, 최소한의 인도적인 조치를 포기할 수 없는 의사들의 윤리 의식에 대한 것이기도 하며, 알레포라는 도시에 대한 지리문화적 정립이기도 하다.

 

이런 재정립이 드러나는 장면이라면 드론을 이용해 파괴된 알레포를 상공에서 보여주는 장면일 것이다. 이 장면은 지금까지 이어져 온 사적인 기록과 다른 태도로 촬영하고 있기에 인상적이다. 와드는 드론에다 카메라를 매달아 뭘 보여주려고 했을까? 가장 이해하기 쉬운 답은, 전쟁과 폭력의 상흔에 대한 효과적인 제시일 것이다. 저널리즘에서도 부감으로 건물 붕괴을 비롯한 사고 현장을 보여주는 앵글이 흔하다는걸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방향으로도 생각해볼 수 있다. 와드는 도시에 폭격기 시점에서 자신을 비롯해 알레포 시민들이 어떻게 보일지 상상하고 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한다면, 폭격기 시점에서는 피해자가 보이지 않거나 그걸 무시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에놀라 게이 조종사는 히로시마에 폭탄을 떨구면서 『이 세상 한 구석에』나 『검은 비』가 보여준 현실을 상상하지 않는다. (혹은 않았다). 하지만 비슷하게 상공으로 올라간 와드의 드론 카메라는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누가 촬영하는지 인지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이 드론 카메라의 시점은, 알 아시드 정권과 러시아를 겨냥하고 있는 셈이다. 와드는 여기다 알레포라는 도시의 역사가 어떻게 파괴되었는지 알리고 싶어한다. 알레포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도시다. 오래된 도시를 방문한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오래된 도시는 대체로 과거의 흔적이 현재에도 복잡하게 남아있기 마련이다. 정성일 평론가는 이에 대해 "오래된 도시는 미로처럼 되어있다. 감독은 알레포를 보여주기 위해 그런 시점을 취했다."고 밝힌 바 있다. 와드는 그 역사를 사랑하면서, 애통해한다.

 

이 애통함이야말로, 후반부에 등장하는 『사마에게』의 핵심이자 논란이 될만한 장면을 이해하는 열쇠기도 하다. 와드와 남편 함자는 딸 사마와 함께 알레포를 잠시 빠져나와 친정으로 돌아가지만, 얼마 안 있어 사마와 함께 알레포로 돌아간다. 정상적인 사고라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와드와 함자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죽음의 땅으로 딸을 데려가고 있다. 심지어 부부의 동료는 그들의 귀환을 환영하기까지 한다. 그들은 왜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알레포로 귀환하는가? 와드 가족의 귀환은 어쩌면 한국이 잊고 있는 상흔을 떠올리게 한다. 바로 5.18 광주에서 도청에 남아 저항하기로 결정한 시민군이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죽을 줄 알고도 남아있기로 한 '양심'의 힘이라고 불렀다. 와드 가족이 알레포로 돌아가는 이유는, 평범한 소시민적인 상황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양심'의 힘에 따른 것일지도 모른다. 그 '양심'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키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며, 나고 자란 도시 알레포에 대한 사랑이기도 하며 "사마에게" 당연히 주어져야 할 미래에 대한 각오기도 하다. 와드 부부는 손가락질 받더라도 "사마에게"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 되기 위해 기어이 돌아간다. 『사마에게』는 그렇게 비디오 이미지로 추상화되고 엔터테인먼트화되어가는 전쟁을, 불의와 정치적 저항을 개인적인 '비디오 이미지'로 기록하는 방식으로 저항한다.

 

그렇기에 『사마에게』의 결말은 비통하기 그지 없다. 결국 와드 부부는 최후까지 싸웠음에도, 어쩔 수 없이 알레포를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와드는 그 슬픔을 흐느끼는 남편 함자와 사랑했지만 떠나야 하는 집을 찍는 걸로 표현한다. 이 숏은 여러모로 시리아 민중의 암울한 미래를 암시케 한다. 그들은 집을 잃은 난민 혹은 비국민이 되어 핍박을 받아야 한다. 어느정도 계급적으로 안정된 지식인인 와드 부부는 그나마 낫지만, 시리아 민중 대다수는 그럴 수 없다는게 자명하다. 와드 가족은 시리아를 떠나 영국에 정착했으며, 영화를 발표할때도 가명을 써야 했다. 한편 시리아 내전은 러시아의 폭압과 서구권의 침묵 속에 시리아는 알 아시드 정권의 승리로 기울져 있다. 『사마에게』는 러시아에서 상영되지 않았다. 『사마에게』는 그 점에서 절박하게 저항했음에도, 속편을 요구하는 미완의 영화기도 하다. 그 속편이 언제 나올지 알 수 없다는게 가장 비극적이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