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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2020/06 (3)
20200626

제법 오랫동안 블로그를 방치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가장 큰 이유가 영화글을 쓰는 것이 좀 지치는 경향이 있었거든요. 영화를 보고 있긴 해도, 영화글만 잡기엔 다른 일이 많기도 했고... 그래서 작년엔 아사코 말고는 개별 영화 글은 거의 손을 놓은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근황 같은건 트위터에도 쓸 수 있다보니 블로그는 자연히 방치되었네요.

와중에 코로나-19로 전세계가 뒤집혀지는 일도 있었고, 강제로 집에 갇혀 있는 날이 많다보니 영화글을 다시 써보려고 몸을 풀고 있습니다. 이러다가 또 일상 때문에 업데이트가 안 이뤄질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이 블로그에 오시는 분들을 (얼마 안 계시겠지만) 위해서라도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그나저나 이 블로그가 생긴지도 벌써 14주년이네요. 2016년에 10주년 얘기하던거 생각하면 시간이 참 빠르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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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끼 [Bait] (2019)

(결말에 대한 누설이 있습니다.)

마크 젠킨의 <미끼>는 기묘한 영화다. 우선 이 영화는 영국 영화이면서 지역 영화다. 마크 젠킨은 영국 서남단에 있는 지방 (이자 독자적인 문화권인) 콘월 출신으로, 데뷔 후 줄곧 콘월에서 영화를 만들고 있다. <미끼> 역시 콘월 바닷가 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다. <미끼>의 이야기는 간단히 말해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한 노동 계급과 중산층 계급의 대립을 다루고 있다. 블랙 코미디로도, 진지한 사회 고발물로도 흐를 수 있는 소재인데, 마크 젠킨이 선택한 방식은 후자에 가깝다. 작가로써 마크 젠킨은 우직하고 성실하게 콘월 해안가에 대한 세세한 묘사와 함께 키친 싱크 리얼리즘에 기반한 비극으로 그려낸다. 인물들 역시 진지하기 그지 없고, 세련된 문학적인 상징성이나 아이러니나 이죽거림은 보이지 않는다. <미끼>의 서사는 어렵지 않게 명료한 비극이다.

<미끼>의 비극은 외지인과 현지인, 영국의 노동 계급과 중산 계급을 가로지르는 경제적인 문제에 기반하고 있다. 영화의 주인공 어부 마틴은 배를 사고 싶어한다. 마틴의 형인 스티븐에겐 배가 있지만 그 배는 게스트하우스를 방문하는 관광객을 위해 운영하고 있다. 마틴은 그게 싫어서, 경제적인 자립을 하려고 하지만 쉽지 않다. 마틴이 살고 있는 콘월 항구 마을은 이미 외부인 관광객 없이는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없는 상태다. 한편 마틴 형제의 옛 집은 리라는 중산층 가족이 사들여 게스트하우스로 운영중인데, 마틴과 관계는 썩 좋지 않다. 사소하게 쌓여있던 불편한 관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여러 상황이 겹치면서 점점 사이가 벌어지고, 결국 비극으로 치닫게 된다.

바닷가 마을의 외부인과 내부인이라는 소재, 현지인들의 생활에 대한 세미 다큐멘터리적인 접근, 인물 숏과 자연 풍경을 이어붙이는 편집 기조에서 <미끼>는 아녜스 바르다의 <라 푸앵 쿠르트로의 여행>의 영향력을 받은 영화다. 마크 젠킨은 콘월이라는 지역에 대한 애정과 디테일에 대한 풍부한 관찰력, 콘월인과 대비되는 외부-영국인으로 대표되는 경제적인 존속 관계,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두 축을 오가며 젠트리피케이션이 만들어내는 격차와 불만족, 소외, 갈등을 그려낸다. 작중 해안가 마을은 아름답긴 하지만, 살기엔 지루한 곳이다. 마틴의 조카 닐이 일과를 끝내고 펍에 가서 노는 시퀀스를 보면 알 수 있다. 펍엔 닐 같은 젊은이를 비롯해 사람들로 꽉 차있지만, 닐은 이런 북적거림에 대해 어떤 흥분도 보이지 않는다. 외부인 손님에게 수입을 의존하고 있을 펍의 풍경은, 닐에겐 그저 반복되는 일상에 불과하다. 펍 시퀀스와 리 가족과 관광객들이 게스트하우스에서 여유롭게 '일상'을 즐기는 장면을 비교해보면, 노동 계급과 유산 계급의 관점차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무료함은 평화가 아니라 언제든지 끓어오를수 있는 팽팽한 긴장감에 가깝다. 이 긴장감은 경제 활동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외부인-유산 계급이 주도하는 서비스업에 기생해야 하는 노동 계급의 불만이 담겨 있다. 마틴의 삶을 보자. 마틴은 끊임없이 생선과 해산물을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팔지만, 만족스러운 수입을 얻지 못한다. 그렇다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냐면 그런 것도 아니다. 마틴의 유일한 희망은 배를 얻어 좀 더 본격적으로 어업을 하는 것이지만, 돈은 모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마틴을 자신의 일상을 버텨내는 쪽에 가깝다. 이런 감정은 마틴에게만 한정된 것도 아니다. 펍 주인의 딸 웬나가 시종일관 까칠한 태도를 일관하는 것도 주체가 되지 못한 채 고여있는 삶에 대한 짜증스러움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웬나는 심지어 어머니에게 노골적으로 관광객-유산 계급에 들러붙는 기성 세대를 비난하기까지 한다. 그 점에서 마크 젠킨의 시선은 비교적 평화롭게 두 세계가 '분리'되어 각자의 길을 갔던 바르다보다 폭력적이고 절망적이다. 영화에서 이뤄지는 화해와 소통의 시도가 모두 실패로 돌아가는 것도 이런 무거운 분위기에 일조한다.

여기까지만 했더라면 마크 젠킨은 켄 로치 같은 키친 싱크 사실주의의 적통을 잇는 영국 영화감독으로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미끼>의 이야기는 제목처럼 진짜 파고들어야 하는 요소에 대한 밑밥이다. <미끼>에서 파고들어야 할 핵심은 시청각적인 즉물성에 있다. 곧장 말해 <미끼>는 시대착오적인 영화다. 볼렉스 16mm 필름 카메라로 촬영한 <미끼>는 아리 알렉사나 레드 에픽으로 만들어진 디지털 영화 애호가들의 혀를 차게 만드는 영화다. 흑백 필름의 훼손은 영화가 끝날때까지 계속 나타나며, 후시녹음으로 덧붙인 음향은 아날로그 모노로 녹음을 했나 확인해야 할 정도로 뭉그러져 들린다. <미끼>는 디지털의 깔끔함을 거부하는 러다이트 영화다. 마치 게스트하우스의 세련됨과 반대되는 어부의 투박함처럼 말이다.

마크 젠킨은 이런 시청각적인 도구를 이용해 서사 영화의 기본 화술과 격렬한 몽타주를 조합한다. 소리가 있긴 하지만, <미끼>의 방법론은 무성 영화에 가깝다. 좀 더 정확히는 독일 표현주의와 소련 몽타주 영화에서 많은 영감을 얻고 있다. 일부 평자는 케네스 앵거 같은 미국 아방가르드 영화 감독들을 언급하기도 했는데, 확실히 <미끼>의 몽타주는 <스콜피온 라이징>이나 <불꽃놀이> 같은 앵거의 영화에서 자주 보였던 꿈결같으면서도 불온한 긴장감으로 넘실거리는 초현실주의적 몽타주에서 많은 영감을 받은 모습을 보인다. 파편화된 거친 이미지가 편집으로 끊임없이 덧대지면서 불꽃놀이처럼 시각을 교란하는 영화를 생각하면 좋겠다. 바닷가 배경과 고전적인 시청각적인 도구들에서 로버트 에거스의 <더 라이트하우스>를 연상할수도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미끼>는 <더 라이트하우스>보다 훨씬 투박하고 거칠다.

이런 영향 속에 마크 젠킨은 서사에 필요한 숏들을 배치한 후, 그 뒤로 서사의 감정이나 감각을 포착한 파편적인 숏을 붙이는 식으로 캐릭터가 느끼는 감각과 감정, 심지어 시공간까지 끊임없이 확장하고 늘린다. <미끼>가 선택한 연출이 상당히 튀긴 하지만, 쉽사리 바닥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서사 영화에게 요구되는 기본기를 갖추고 핵심을 찌르는 숏을 정교하게 붙여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마틴이 리 가족의 아들인 휴고가 가재를 몰래 훔쳤다는 사실을 알고, 술집에서 휴고에게 다가가는 시퀀스를 보자. 이 장면은 캐릭터에 대해 가지게 되는 선입견 (투박하게 생겨서 마구 폭력을 휘두를것 같은 어부)을 뒤엎는 반전과 유머를 파편을 이어붙이는 몽타주로 구성해 서스펜스와 집중력을 선보이고 있다. 이런 편집은 동시에 서사와 관계 없이 지극히 표현주의적으로 심상과, 감정적 긴장을 끌어내기도 한다. 휴고가 훔친 가재로 저녁을 먹는 팀과 산드라의 시퀀스가 대표적이다. 밥을 먹는다는 단순한 행위지만, 젠킨은 이 단순한 행위에 노동 계급의 노동을 착취한다는 죄책감과 탐욕, 먹는다는 행위의 본능적인 감각을 드러내 불편하면서도 관능적인 분위기를 만든다 이외에도 젠킨은 닐의 죽음을 일부러 초반에 예지몽처럼 배치한다던가, 인물의 시점에서 불가능한 숏을 집어넣는 방식으로 몽타주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이런 표현주의적인 접근은, 린 램지처럼 마크 젠킨을 키친 싱크 사실주의에서 멀리 도약하려는 부류의 영국 영화 감독군에 포함하고 있다.

<미끼>가 영화를 만드는 방식은, 모든 것을 '생성'하는 디지털 CG 시대의 영화 만들기를 전면적으로 저항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이미지는 컴퓨터로 생성한 것이 아니라 직접 찍은 것이며, 편집이라는 기초적인 도구로 관객의 지각을 교란하고 자극한다. 이런 방식은 영화 속 어업과 일치하는 구석이 있다. 짐작했겠지만 <미끼>는 어업의 과정을 세세하게 보여주면서 행위와 질감을 잡는데 주력하고 있다. 그리고 그 질감은 영화의 투박한 모양새하고 닮아있다. 이와 관련해 사소하지만 주목할 소도구가 있다. 바로 스마트폰이나 노트북 같은 디지털 기기다. 동시대가 배경임에도, <미끼>는 이런 디지털 기기가 의도적일 정도로 비중이 낮다. 정확히는 마틴이나 닐 같은 어부들을 묘사할때는 디지털 기기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게스트하우스에 있는 리 가족과 관광객들이 디지털 기기를 쓴다.

이 배제와 사용은 명백히 의도적이기에, 러다이트적인 모양새와 함께 보면 아날로그 문화와 디지털 문화에 대한 서브텍스트로 읽힐 여지가 있다. 이 서브텍스트의 관점에서 보면 <미끼>는 필름-아날로그 문화와 이 문화를 밀어내고 주류로 차지한 디지털 문화 간의 충돌로 읽힐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젠킨의 입장은 명백하게 아날로그 문화를 옹호하고 있다. 어업이 1차 산업에 인간 생활에 필요한 식량을 생산하는 직업이라는 걸 유념하면 확실해진다. 사람은 서비스업 없이도 살수는 있지만, 먹을 것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마크 젠킨은 필름이 가지고 있는, 유물론적이고 즉물적 표현과 편집이라는 기초적인 도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1차 산업인 어업과 동일시한다. 디지털 시대에도 아날로그 영화은 필요하며 사멸하면 안 된다고 역설한다.

영화 도입부에서 앞을 노려보며 뚜벅뚜벅 걷는 마틴의 숏은 그 점에서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첫번째는 마틴이 느끼는 현실에 대한 불만이다. 두번째는 마틴의 강건한 표정에서 뿜어져나오는 고독한 뚝심이다. 이 도입부가 영화의 마무리에 붙여도 이상하지 않다는 점도 주목할만 하다. 선원으로 키우려던 닐이 휴고와의 다툼 끝에 우발적인 사망하고, 이 사건을 계기로 마틴과 스티븐은 분노하면서도 화해를 한다. 이때 스티븐은 과거의 흔적이 사라진 게스트하우스를 둘러보면서 말한다 "이 놈들은 우리 가족에 관련된 물건을 전부 치워버렸어!". 이 대사의 과녁이 어떤 계급과 문화를 겨냥하고 있는지는 명백하다. 마지막 장면. 이제 스티븐의 배는 관광업을 포기하고 어업을 나선다. 마을 현실에 불만이 많았던 웬나가 닐의 자리를 대신한다. 그렇게 어업을 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이 결말은 양가적이다. 먼저 긍정적인 면을 보자. 웬나가 닐을 대신한다는 점은 젠더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마초적인 부계 가족이 해체된 자리에, 이전엔 성차별적 인식으로 끼어들수 없었던 어업 현장에 여성이 끼어든다는 점에서 변화와 약간의 희망을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 결말은 씁쓸히 사멸을 받아들이고 그럼에도 자신의 길을 가겠다는 고독함도 포함하고 있다. <미끼>는 그 점에서 자본을 뒤쫓아 과거의 문화를 투박하고 느리다는 이유로 지나치게 빨리 치워버리는 현 시대에 대한 총체적인 비극을 다루는 영화라 할 수 있다. 그 '과거의 문화'는 콘월이라는 변두리 지방 문화권과 어업에 대한 것이기도 하며, 필름 영화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이런 과거의 문화에 대한 애착과 소멸을 논하는 영화를 디지털 영화 매체인 DCP나 코로나-19 사태로 VOD으로 본다는 사실은 그 점에서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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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행로 [Love Streams] (1984)

존 카사베츠의 <사랑의 행로>은 카사베츠의 유작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주의할 점이 있다면 <사랑의 행로>가 진짜 유작은 아니라는 점이다. 카사베츠는 <사랑의 행로>를 만든 뒤 컬럼비아 픽처스에서 <빅 트러블>을 만들었다. 그러나 <빅 트러블>은 카사베츠가 평생 겪어야 했던 스튜디오 체제하고 충돌로 망가진 영화였다. 카사베츠 본인도 <빅 트러블>에 대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을 정도다. 그 지점에서 보면 <사랑의 행로>를 실질적인 유작이라 부르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다 내용 자체도 고단했던 카사베츠의 '행로'의 종지부로 어울린다. <사랑의 행로>에 이르면, 카사베츠는 분명한 빛을 혼란스러운 캐릭터에게 안겨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빛에 도달하기까지, 영화의 두 주인공들은 카사베츠의 인물들이 겪는 방황과 신경증, 삽질을 거쳐야 한다.

테드 앨런의 동명 희곡을 각색한 <사랑의 행로>는 희곡과 공통점이 적다고 알려져 있다. 희곡을 보거나 읽지 않았으니 자세한 비교는 불가능하지만, 일부는 카사베츠 특유의 소규모 가내수공업적 작업 스타일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싶은 부분이 있다. <사랑의 행로>를 만들면서 존 카사베츠는 공연 당시 배우 (존 보이트)를 기용하지 않고, 직접 주인공 로버트 하몬 역을 맡고 아내 지나 롤랜즈에게 상대역인 여동생 사라 하몬 역을 맡겼다. 그리고 <얼굴들>을 본 사람이라면 눈치챘겠지만, 배경 대부분을 차지하는 로버트의 집은 <얼굴들>에도 등장했던 실제 카사베츠 부부의 집이다. <얼굴들>을 보고 <사랑의 행로>를 본다면 데자뷰를 겪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두 영화의 후반부는 기절한 여성과 그를 깨우려는 남성의 액션으로 이뤄져 있어서 유사점이 두드러진다. 종종 영화에서 하몬 남매에게서 근친상간적인 성적 긴장감이 느껴지기도 하는데, 이 역시 실제 부부였으며 연기 파트너이기도 했던 카사베츠와 롤랜즈의 관계가 반영되어 있을 것이다.

공통점이 적다곤 하지만, 그래도 테드 앨런의 희곡이 '더티 리얼리즘'과 친연성이 있는 카사베츠의 개성과 충돌하는 부류는 아니었을꺼라는 추측은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주인공인 하몬 남매는 매우 카사베츠스럽게 엉망진창에 기벽적인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다만 상황의 시궁창스러움은 올라갔다. <사랑의 행로>는 카사베츠가 천착했던 가정의 붕괴가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영화다. 물론 <얼굴들>이나 <영향 아래의 여자>도 가족이 흔들리는 모습을 담았지만, <사랑의 행로>의 하몬 남매는 처음부터 정상 가족이라는 개념이 파괴된 채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들은 가족을 만들지 않고 욕망으로만 구성된 낙원에 만족하거나 (로버트), 가족에게 쫓겨난 상태다. (사라) 카사베츠는 2시간이 살짝 넘는 시간 동안 정상 가족을 가지지 못하거나 추방된 두 주인공이, 정상 가족에 집착하거나 복원에 실패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먼저 로버트는 갑자기 나타난 아들 앞에서 정상 가족의 '가부장'으로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 에로스의 공동체를 파괴한다. 하지만 결국 로버트는 호텔 방에 아들을 버려두고 자기 욕망에 충실하면서 '가부장'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이 실패는 다른 폭력적인 '가부장'과의 난투극으로 파국을 마무리 짓는다. 한편 <차이니즈 부키의 죽음>의 코스모가 그랬듯이 로버트는 흑인 어머니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데, 이 관심을 끝내 이뤄지지 못한다. 요컨대 로버트는 과잉된 에로스로 사랑을 대체하거나, 사랑하는 법을 흉내내다가 실패하는 캐릭터다. 반대로 사라는 한창 전에 끝나버린 정상 가족을 끊임없이 맴돈다. 사라가 처음 등장하는 장소는 이혼 법정이다. 이혼 법정에서 사라는 자신을 딸의 친권을 가지려고 하지만, 딸은 자신을 거부한다. 심사가 끝나고 사라는 변호사에게 말한다. '사랑은 끊임없이 흐르는 것이다'. 그러나 사라의 흐름은 이혼 소송으로 끊어졌다. 프랑스 여행에서 돌아와 힘겹게 짐을 끌며 나아가서 몸을 흔들어대는 사라의 모습은 술에 취해 애인의 집 앞에서 뒹구는 로버트랑 별반 다름없어 보인다. 다만 로버트랑 달리 사라는 과거 충만했던 사랑을 다시 한번 재현하고자 할 뿐이다. 그 점에서 사라는 <영향 아래의 여자>의 머틀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광기와 불안증상에 빠진 인물이다. 머틀은 고단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채 몸만 커버린 아이였지만, 사라는 실패한 과거의 잔해에 매달리는 어른이다. 초기 시절 얼굴들을 잡아대던 거친 카메라의 클로즈업은 줄어들었지만, 패닝과 줌인으로 격정적으로 변하는 인물의 표정을 포착하는 후기 카사베츠의 카메라도 이런 불안함을 잡아내고 있다.

<사랑의 행로>가 흥미로운 부분은, 이 두 남매가 만나기까지 상당한 시간을 들여서 둘의 시공간을 분리해서 진행한다는 점이다. 카사베츠는 이미 <별난 인연> 도입부에서 미니와 시모어 두 인물의 시공간을 독립적으로 놓고 진행한 적이 있다. <별난 인연>가 서로 다른 시공간에 살고 있는 독립적인 두 인물이 하나의 공간으로 모이면서, 히스테릭한 흐름을 만들었던 것처럼 <사랑의 행로> 역시 비슷하면서도 다른 두 흐름을 지닌 인물이 만나면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지 보여주고 있다. 영화의 후반부를 장식하는 사건이 폭풍우라는 건, 카사베츠가 <사랑의 행로>에서 관찰하고자 하는 감정의 상태를 드러내는 장치인 건 당연하다. 카사베츠의 다른 영화들을 본 사람이라면, 로버트와 사라가 영화 내내 어떤 행동을 할지 대충 감이 잡힐 것이다. 그들은 술을 마시고, 사랑을 채우기 위해 동물을 마구 사들이거나, 외출을 해 다른 이성과 동침을 하거나, 가족에게 매달린다. 다만 <사랑의 행로>는 이런 히스테리를 표출하기 위해 이전 존 카사베츠 영화보다 적극적으로 환상과 무대에서의 연기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있다. 간헐적으로 끼어드는 사라의 폭력성과 불편함을 드러내는 환상 시퀀스, <차이니즈 부키의 죽음>이나 <오프닝 나이트>를 연상시키는 후반부 뮤지컬 시퀀스가 대표적이다. 이 영화가 사실상 카사베츠가 자기 방식대로 만든 마지막 영화라는 걸 생각해보면, 미완으로 남은 발전 아니었을까하는 의문도 있다.

<사랑의 행로>의 후반부와 결말은 일종의 부활과 각성에 가깝다. 끊임없이 이혼한 남편과 딸에게 대화를 시도하던 사라는 갑자기 기절해서 깨어나지 않고, 로버트는 안절부절하면서 사라를 깨우려고 애쓴다. 이를 위해 로버트는 폭풍우 속으로 사라가 마구잡이로 사들인 동물들을 불러모으고 마침내 깨어난 사라는 이혼한 남편과 딸을 찾아가 다시 재결합을 시도해보겠다고 선언한다. 막무가내로 당장 떠날 준비를 하는 사라를 말리던 로버트는, 거실에 앉아있다가 앞에 앉아있던 개가 벌거벗은 남자로 교차되는 환상 숏을 보게 된다. 지금까지 환상 시퀀스의 주체가 사라였다는 걸 생각해보면 로버트의 시점으로 제시된 이 환상은 이례적이고 뜬금없다. 다만 이 개가 사라가 막무가내로 데려온 반려 동물이라는 점은 실마리가 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로버트가 본 개 (실체)와 벌거벗은 남자 (환상)은, 사라가 떠날 자리를 대신 채워질 무언가가 아니었을까? 적어도 이 환영 숏은 사라가 꾸는 환영 시퀀스와 달리 묘하게 포근한 익살이 담겨 있다.

카사베츠의 다른 영화가 그렇듯이 <사랑의 행로>는 사건의 결말를 보여주는게 아니라, 그 직전에서 멈춰서서 인물들의 표정을 보여주면서 끝난다. 이때 로버트는 폭풍우 속에서 떠날 준비를 하지 않는 사라를 더 이상 말리지 않고, 그저 집 창문으로 지켜볼 뿐이다. 떠나는 자와 남는 자로 구성된 결말 시퀀스의 인물 배치와 시선은 어딘가 짠한 구석이 있다.사라는 기나긴 앓음과 붕괴 끝에 재건의 가능성에 대해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로버트는 어설프고 실수를 저지르면서 사라를 챙겨주려고 노력했다. 이제 사라는 다가올 고난을 향해 당당히 나아가고, 로버트는 그걸 지켜본다. 당시 시한부 선고를 받고 투병중이었던 카사베츠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앞으로 자신 없이 거친 세상의 폭풍우 속에서 살아가야 할 아내 지나 롤랜즈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카사베츠가 생각하는 '사랑의 흐름'이란 거칠고 충동적이며 많은 충돌을 일으키지만 결국 얽히면서 위무 받을수 밖에 없는 강렬한 에너지다. <사랑의 행로>은 그 점에서 제멋대로에 엉망진창인 현실 속에서 사랑받고 싶어했던 카사베츠의 캐릭터들에게 주는 작별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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