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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데이비드 로버트 미첼 (2)
디트로이트의 여름, 미성년의 에로스와 타나토스: [아메리칸 슬립오버] (2010), [팔로우] (2014)에 드러나는 데이비드 로버트 미첼의 영화 세계

[아메리칸 슬립오버] (2010)

2015/08/06 - [Deeper Into Movie/리뷰] - 팔로우 [It Follows] (2014)

2014년 공개된 데이비드 로버트 미첼의 [팔로우]는 칸 영화제 화제작 중 하나였다. 심지어 4년 후 발표된 미첼의 신작 [언더 더 실버 레이크]는 곧바로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공개될 정도였으니, 얼마나 주목받았을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에 대한 평들을 읽어보면 공포 영화라는 장르를 새롭게 만들었다는 평들이 대다수다. 재미있는 점은, 데이비드 로버트 미첼이라는 감독의 커리어에서 보면 [팔로우]는 전작과 다른 이질적인 영화라는 점이다. 미첼의 데뷔작인 2010년작 [아메리칸 슬립오버]는 코미디 드라마에 가까웠던 영화다. 하지만 [아메리칸 슬립오버]를 보면 의외로 이 영화가 [팔로우]랑 공통분모가 많다는걸 알 수 있다. [보이후드]나 [버니] 같은 텍사스 배경 영화를 만들면서, 텍사스 문화를 반영했던 리처드 링클레이터가 그랬듯이 데이비드 로버트 미첼이 디트로이트에서 만든 두 영화 [아메리칸 슬립오버]와 [팔로우]는 디트로이트와 미시간을 떠나면 그 개성을 대부분 잃어버리는 영화다. 엉겁결에 공포 영화를 만들어 유명해진 [판타즘]의 감독 돈 코스카렐리가 그랬듯이 미첼은 미국식 지역 영화에 자신의 뿌리를 두는 감독이라 할 수 있다. 미첼은 이런 지역적 특성과 문학적 관심사를 통해 10대 섹스 코미디와 호러라는 장르를 새로운 방식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이번 장평은 그 점에서 데이비드 로버트 미첼이 어떻게 지역 영화와 장르 영화 간의 교란을 일으키고, 주제 의식을 만들어내는지 살펴볼 예정이다.

  1. 폐허에 맴도는 종잡을 수 없는 시간: 지역의 특수성과 팝 문화, 초현실주의의 결합

먼저 데이비드 로버트 미첼의 개인사를 짚어 보자. 미첼은 1974년생 디트로이트 출신으로, 같은 디트로이트 출신인 작가 제프리 유제니디스의 [처녀들, 자살하다]가 배경으로 삼던 시절 디트로이트에서 태어났다. [처녀들, 자살하다]가 흥미로운 점은, 이 소설이 드러내는 감성이 명백히 [아메리칸 슬립오버]나 [팔로우]와 연계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동네 소년들과 성적으로 어울리며 부모와 불화하다가 자살하는 [처녀들, 자살하다]의 자매들은 [팔로우]에서 섹스를 한 뒤 아버지로 위장한 괴물을 상대해야 하는 제이하고 공명하는 부분이 있다. 한편 미첼이 한창 성장기를 보내던 1980년대 말엔 마이클 무어가 디트로이트 근처 플린트라는 도시에서 제너럴 모터스의 구조조정을 다룬 다큐멘터리 [로저와 나]를 공개했다. [로저와 나]는 미첼 영화에 등장하는 폐허들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보여주고 있는 영화다. 미시간주의 몰락이 자동차 공장을 대거 폐쇄한 1980년대부터 본격화되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미첼이 [로저와 나] 이후 디트로이트 지역 영화를 만들려는 감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로저와 나] 이후 디트로이트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박내선이 잡지 국토에 발표한 글 [영화 자본주의: 러브스토리_산업이 빠져나간 도시의 민낯 디트로이트와 플린트]는 1990년대 이후 디트로이트와 미시간이 어떤 문제를 안고 있는지 보여주는 글이다. 박내선은 디트로이트가 '핼러윈의 무대가 될 법한 거미줄과 잡목으로 넘쳐나는 폐허 같은 집에'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밝히면서, 디트로이트의 부동산은 임대료는 낮지만, 치안 문제가 심각해 입주가 어렵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디트로이트에 참여한 프로젝트에서 만난 빈곤한 청년 세대에 대한 얘기도 있는데, 교육을 받으면서 생계를 위해 교육비를 받아야 하는 학생들과 교육비에 집착하는 부모들이나 24세에 할머니가 돼버린 여성 같은 사연들을 소개하면서 자동차 산업에 기반한 도시가 몰락하는 과정에 생긴 어두움을 서술하고 있다. [아메리칸 슬립오버]와 [팔로우]는 그 점에서 각각 틴에이지 섹스 코미디와 호러 영화라는 10대가 주로 소비하는 장르 영화를 동시대 디트로이트의 시공간에서 재해석하려는 영화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좋았던 시절의 디트로이트 교외가 가지고 있던 데카당스 함을, 동시대 디트로이트의 쇠락함에 접목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이 접목을 위해 미첼이 선택한 도구는 폐허와 시간적 맥락의 묘사다. 먼저 폐허라는 요소를 살펴보자. 당연하겠지만 미첼은 디트로이트에 실제로 있는 폐허를 물색한 뒤, 배우들을 데려다 놓고 찍었다. 하지만 이 폐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시사적이기보다는 에로스와 타나토스 간의 긴장으로 가득 차 있다. 비교적 아트하우스 취향의 코미디 영화에 가까운 첫 영화 [아메리칸 슬립오버]는 그 긴장이 대놓고 드러내진 않았다. 간단히 말해 [아메리칸 슬립오버]는 죽는 사람이 없다. 롭과 마커스가 폐허가 된 건물로 들어가 짝짓기하는 연인들을 바라보며 지나가는 시퀀스가 대표적일 것이다. 이 시퀀스에서 롭과 마커스가 보이는 태도는 에로스에 동참하지 못하고 맴도는 유보하는 태도에 가깝다. 그나마 롭은 줄곧 그려왔던 금발 소녀를 만나지만, 실망한 채로 돌아서야 한다. 이런 어색함은 매기가 키스를 거절하는 장면이라던가, 스콧이 쌍둥이 자매를 두고 망설이는 장면, 클로디아가 자넬과 싸우고 남친에게 찾아가 고백하는 장면에서도 잘 드러난다. [아메리칸 슬립오버]를 만들 당시엔 미첼은 타나토스의 두려움보다는 에로스의 복잡함 앞에서 소심해지는 미성년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메리칸 슬립오버]의 폐허는 일탈의 공간이지만, 동시에 그 일탈에 쉽게 끼어들지 못하는 10대들의 수줍은 심리를 드러내는 곳이기도 하다. 비전문 배우를 기용하고, 지역 축제를 그대로 담아내는 세미 다큐멘터리 적인 성향과 10대 섹스 코미디와 현실 간의 적은 차이 역시 이런 소심한 감수성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아메리칸 슬립오버]에 등장하는 사건들은 [팔로우]와 달리, 지극히 일상적인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장르 영화에 들어선 [팔로우]는 이런 어색함과 거리감이 공포로 바뀌었다. 섹스를 통해 저주의 전염이 일어나고, '그것'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시퀀스가 대표적일 것이다. 이런 폐허의 공포성은 다른 공포 영화들에서 자주 다뤄진 방식이니 특별할 것까지는 없다. [팔로우]에서 흥미로운 점은, 마을에 널린 폐허를 보여주거나 관망하는 시점 쇼트이 자주 등장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미첼은 [팔로우]에서 폐허와 일상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걸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다. 종종 등장하는 폐허가 된 디트로이트를 가로지르는 몽타주 시퀀스가 대표적이다. 이런 드라이빙 몽타주 시퀀스들은 서사와 무관한 방식으로 이동 시퀀스로 제시된다. 이런 몽타주 시퀀스는 과연 어떤 효과를 불러일으키고 있는가? 자신에게 저주를 넘긴 휴가 머물던 폐허가 된 집을 제이 일행이 찾아가는 시퀀스가 이 질문에 대해 어느 정도 답을 제공해주고 있다. 분명 휴가 공포에 떨면서 지냈을 폐가에서 제이와 친구들이 발견하는 것은, 포르노 잡지와 만화 그림과 신문으로 막아둔 창문, 그것의 등장을 경고하도록 만들어진 깡통 종들이다. 미첼이 생각하는 폐허와 폐가는 복고적 대중문화와 에로스의 잔해가 타나토스의 위협과 함께 뒹구는 곳이다. 그리고 이는 낮은 임대료와 불안한 치안으로 생겨난, 현실 디트로이트에 버려진 공간에 교묘히 스며들고 있다. 디트로이트 소년소녀들은 이런 공간에서 에로스적 일탈을 경험하지만, 이 공간들이 안겨주는 불길함과 위협을 감수해야 한다.

그다음으로는 시간적 맥락의 삭제가 있다. 이런 시간적 맥락의 삭제는 [아메리칸 슬립오버]보다 [팔로우]에서 더군다나 강하게 등장하는 편이다. [아메리칸 슬립오버]에서는 다소 복고적이고 키치하기까지 한 극 중 영화를 통해 인물의 심리를 묘사하는 정도였다. 심지어 한 캐릭터는 구체적으로 여름 방학이 끝나간다고 언급한다. 실제 지역 축제에 끼어든 주인공들로 서사를 마무리 짓는 세미 다큐멘터리다운 묘사 역시 [아메리칸 슬립오버]가 인공적 세팅을 배제하고 동시대적으로 영화를 찍었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팔로우]로 넘어오면 적극적으로 구체적인 시간적 맥락을 삭제하고 레트로풍 소도구와 고전 영화 인용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서사 내 시간대 묘사를 보자. 제이가 수업 듣는 묘사로 보면, 작중 시간대가 아직 학기 중이라는 것은 알 수 있지만, 종종 제이와 친구들은 수업이 없는 것처럼 사건에 몰두하거나 호수로 휴가를 가기도 한다. 소도구나 세트 같은 부분을 보면 구체적인 시간적 맥락의 삭제는 더욱 강해진다. 제이와 그 친구들이 종종 보는 공포 영화들이 대표적이다. 이 영화들은 컬러가 아닌 흑백으로 된 옛날 영화다. 여기까지는 미첼 자신의 (또는 캐릭터들) 영화 광적 취향이라고 넘어간다고 하더라도, 그런 영화를 보여주는 텔레비전이 브라운관이라는 점은 확실히 이상하다. 이런 시대착오적인 소도구들은 과연 주인공들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어진다. 소도구의 선정뿐만이 아니라 색감이나 조명에서도 표현주의적인 어둠과 색감을 끌어들이면서 공간을 모호하게 만드는 데 주력하고 있다. 미첼은 [팔로우]를 만들면서, 새로운 연출 방법을 동원하고 있는데 [늑대소년] 이전 조성희 감독이 그랬던 것처럼 옛날 문화의 도상과 미감을 차용하는 방식으로 현실적인 공간을 초현실적인 불안함으로 바꾸는 방식을 차용하고 있다.

주지해야 할 점은, 이 두 영화에서는 사회경제적인 문제가 표면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첼의 영화 속 등장 인물들은, 당장의 삶을 걱정해야 하는 극빈층 노동자들이 아니다. [아메리칸 슬립오버]나 [팔로우]의 1~20대 캐릭터들에겐 생계 문제가 보이지 않는다. 등장하더라도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공업하고는 상관이 없다. [팔로우]에서 아이스크림 가게에 일하는 제이의 동생 정도가 미첼 영화에 등장하는 경제 활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대학에 다니거나 진학하려는 묘사를 볼 때, 부자까지는 아니더라도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팔로우]에서 저주를 전파한 휴는 제대로 학교에 다니는 학생도 아니었고, 이름을 비롯한 신분도 가짜에다 살기 위해 도주하고 있는 비현실적인 캐릭터다. 이런 존재는 지극히 장르적인 설정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지점에서 [아메리칸 슬립오버]나 [팔로우]는 현실적인 어려움에서 동떨어진 끝나지 않을 휴가 상태에 있는 미성년처럼 보인다. 이를 통해 데이비드 로버트 미첼은 션 베이커의 [플로리다 프로젝트]나 켈리 레이처드의 [웬디와 루시] 같은 밑바닥 사실주의나 상술한 [로저와 나] 같은 다큐멘터리하고는 선을 긋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비슷한 방식으로 인종적인 문제 역시 크게 다뤄지지 않고, [아메리칸 슬립오버]에 등장하는 엠마 정도만이 디트로이트의 인종적 구성에 대한 암시를 남기고 있을 뿐이다. 그 점에서는 미첼의 접근 방식은 짐 자무시의 [오직 사랑하는 자들만이 살아남는다]가 영생하는 흡혈귀를 통해 디트로이트에 접근하는 방식과 닮아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인데, [오직 사랑하는 자들만이 살아남는다]랑 달리 인물들이 전적으로 비현실에 속하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부분들을 종합해서 보면 명확해진 부분이 있다. 미첼 영화에 등장하는 디트로이트의 레트로는 '좋았던 시절의 디트로이트'를 주지하게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묘사들은 미첼 자신의 197-80년대에 회고적인 취향에 기반해 있지만, 미첼은 이 회고적인 취향이 디트로이트의 폐허에 배치되는 순간 어떤 의미를 갖는지 잘 알고 있다. 정확히는 197-80년대 미국 대중문화나 삶의 잔해가 미첼이 만들어낸 폐허와 일상에 그대로 머물러 있고, 의도적으로 이를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배경을 설명해주거나 익숙하게 다룰 어른은 삭제되어 있다. [아메리칸 슬립오버]에서도 어른은 자고 있거나 뒤에서 아무런 말 없이 카트를 밀고 있었다. [팔로우]에서는 한술 더 떠 존재가 아예 사라지고, 위협적인 '그것'의 가면으로 등장한다. 사실 [팔로우]의 '그것'은 어른의 모습만 고집하는 괴물은 아니다. 종종 '그것'은 친구들의 모습이나,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변해 다가온다. 하지만 '그것'을 상대해야 하는 건 '그것'을 볼 수 있는 제이와 제이를 믿어주는 친구와 동생뿐이다. 어른이 부재하지만, 어른들이 남긴 시간적 맥락에 둘러싸인 채 정체불명의 죽음과 싸워야 한다. 이는 도입부 애니가 차를 타고 멀리 도망가 아버지에게 사죄의 메시지를 남기는 부분에서 알 수 있다. 여기서도 관객은 애니의 아버지가 어떤 얘기를 하는지 들을 수 없다. 이 장면을 보면 알겠지만, 미첼은 어른들이 10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팔로우]는 그 점에서 [아메리칸 슬립오버]보다도 10대들의 연대라는 개념을 발전시킨 영화라고 볼 수 있다.

  1. 어른의 섹스에 어색한 미성년의 불안과 공포

어른이 부재한 모호한 시공간의 악몽은 곧 성적인 문제와 결부된다. 미첼이 내세우는 소년 캐릭터들은 이런 문제에 수줍거나 내성적인 모습을 보인다. [아메리칸 슬립오버]에서 성적인 상황으로 등장함에도 무관심하게 대하는 여성 캐릭터들과 반대로 쩔쩔매는 소년 캐릭터부터 시작해, [팔로우]에서는 아예 여성의 시점 쇼트에서 이런 수줍은 소년들의 성적 관심을 인식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성적 판타지의 음탕함을 어느 정도 중화시키기까지 한다. 미첼이 만들어낸 소년들은 그 점에서 페미니즘과 여성의 욕망 담론에 대해 비교적 보편화한 동시대를 살아가는 '초식남'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 소년들은 성적 욕망이나 관심은 있되, 그 욕망의 적극적 담지자나 주도권을 지니지 못한다고도 할 수 있다. 소녀들 역시 수줍음을 유지하고 있지만, 적극적인 담지자이자 주도권을 쥐려는 모습을 보이는 부분도 흥미롭다. 후술하겠지만 이 수줍고 초식남 성향까지 보이는 한 소년들이 활동하는 공간이 강한 남성성과 마초성을 내세우는 공업도시인 디트로이트라는 점도 미첼의 영화를 흥미롭게 만들고 있다. 상술한 레트로 문화와 결부시켜보면, 미첼이 묘사하는 소년 캐릭터들은 영미권 오타쿠인 긱이나 너드에 가깝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소녀들은 적극적으로 소년을 유혹하거나 ([아메리칸 슬립오버]의 클로디아와 자넬, 매기) 거부하고 ([아메리칸 슬립오버]의 줄리), 소년들처럼 수줍음을 유지하더라도 성 경험과 접근을 그리 금기시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팔로우]의 제이) [아메리칸 슬립오버]나 [팔로우]가 장르 영화임에도 장르 영화스럽지 않다면, 이런 어색함과 불안함이라는 감정이 인물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아메리칸 슬립오버]를 보자. 이 영화에서 성적 접촉은, 기대와 다른 어색하고 설익은 침묵이다. 우연히 첫눈에 반한 금발 소녀를 찾아다니는 롭은 영화의 어정쩡하고 실망으로 점철된 정서를 잘 드러내는 캐릭터일 것이다. 롭은 이곳저곳 친구들의 집을 기웃거리면서 금발 소녀를 찾으려고 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심지어 미첼은 롭 앞에 바로 지나가는 금발 소녀를 집어넣으면서 롭을 희롱하기까지 한다. 탐색 도중에 슬립오버하는 친구의 누나 줄리를 만난다. 하지만 목욕을 한다는 성적 판타지적인 상황임에도 줄리는 롭에 대해 관심을 보이기는 커녕 접근을 거부하고 돌려보내기까지 한다. 후반부에서야 롭은 원하던 소녀를 만나지만 예상과 다른 모습과 남자 친구가 있는 모습에 몇 마디 말을 섞고 돌아 나올 뿐이다. 롭의 서사는 명백히 이웃집 소녀라는 미국식 성적 판타지에 기반해 있지만, 미첼은 군상극 형태의 다중 플롯을 차용하면서 판타지를 충족하기 보다는 불만족하게 하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다소 배배꼬인 클로디아와 자넬 의 삼각관계와 씁쓸한 종말이나 스콧과 쌍둥이 자매 간의 관계 역시 관계의 방향성이 도무지 통제되지 않거나 무언가를 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이다. 이는 난잡한 성적 일탈 끝에 진정한 사랑을 찾는다는 틴에이지 섹스 코미디라는 장르 전형성에서 탈주하는 방식이기도 하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욕망을 모두 충족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미성년의 낙담을 보여주는 장치기도 한다. 매기가 말했듯이 [아메리칸 슬립오버]는 일탈에 대한 약속이 깨지고 동심을 잃어버린 자리에 서성거리는 청춘을 보여주는 영화다. 영화의 마지막 마을 축제 행진에 나타난 아이들의 표정을 교차하는 편집은 그런 서성거림의 감수성이 공통된 무언가라는걸 보여주고 있다.

[팔로우]로 넘어오면 미첼은 [아메리칸 슬립오버]보다 더욱 직접적으로 타나토스와 에로스 간의 관계를 다룬다. '그것'은 분명 성병의 상징이며, '그것'에게 살해당하는 시퀀스나 클라이맥스는 성적 불편함으로 가득하다. 미첼 역시 인터뷰에서 '그것'이 자신의 어린 시절 악몽에 기반했다고 밝히면서 자신의 두 영화가 사적인 세계에 기반하고 있다는걸 인정했다. 당연하겠지만 [아메리칸 슬립오버]에서 보였던 미국식 성적 판타지 역시 건재하다. 초반부 제이의 일상을 보여줄 때 '이웃집 소녀'를 훔쳐보는 10대 소년의 모습은 미국식 성적 판타지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며, 이후 이어지는 영화관에서 데이트와 외딴 장소에서 카섹스 장면은 미국 10대들이 주인공인 영화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장면이다. [팔로우]의 악몽은 이런 미국식으로 친숙한 성적 접촉의 현장이 갑자기 비현실적인 죽음으로 반전되면서 발생한다. 흥미로운 것은, 미첼은 섹스 행위 자체는 그렇게까지 금기시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제이의 첫 섹스는 일상적인 호기심과 두려움에 기반해 그려질 뿐, 윤리적으로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다 제이가 일시적으로나마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정절을 지키는 게 아니라 다른 남자랑 섹스해야 한다. 섹스의 금지가 아니라 과잉된 섹스로 처벌이 이뤄지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미첼은 미국 공포 영화에서 자주 나타나는 '성적으로 문란한 청소년을 처벌하는 윤리적 대리자로서 괴물'이라는 접근은 배제한다.

이런 접근을 잘 보여주는 캐릭터가 그렉일것이다. 그렉은 또래 여자들에게 인기 있는 소년으로 그려지지만 제이를 돕기 위해 섹스를 한 이후 얼마 안 가 '그것'에게 죽는다. 가장 껄렁해 보였던 그렉의 죽음은 의문과 해석 지점을 남긴다. 생각해볼 만한 지점은 작중에서 등장하는 그렉이 이성과 잘 어울리고 인기 있는 모습이, 실은 성적인 문란함하고는 관계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어떤 지점에서 그렉의 표면적인 문란한 캐릭터 성은, 진짜로 숫기 없이 제이만 짝사랑하는 폴의 막연한 거리감과 열등감이 친구에게 투영된 것 아닌가 싶을 정도다. 이 영화에서는 적극적인 섹스가 생존의 방법이라는 걸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그 점에서 그렉 역시 제이와 별반 다를 바 없이, 섹스를 도구로 활용할 줄 모르는 미성년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사회적 맥락이 있다. 디트로이트 같은 공업 도시의 청년 문화는 유달리 거칠고 남성적인 경향이 있었다는 점이다. 젠더 문제에서도 노동자 계급 소년들은 그들 부모 세대의 보수적인 젠더/약자 개념을 받아들여 여성이나 약자에 대해 포식자적인 태도를 취했다. 멀리 가지 않아도 박내선의 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실제 디트로이트 10대들은 실직한 부모가 내세우는 경제적 압박과 범죄에 빠져들고 있다. 하지만 미첼의 영화는 그런 포식자적인 태도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렉과 여자아이들의 관계는 과시적이라기 보다는 로맨틱하게 인기있는 모습으로 그려지며, 제이와의 섹스 역시 고통에 동참한다는것으로 보인다. 그렉의 죽음은 그 점에서 공업 도시의 남성 문화를 체화하지 못한 소년의 죽음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데 미첼 영화의 모호한 시공간은 어른의 흔적만 남은 공간에서 어른 없이 에로스와 타나토스를 다루는 법을 배워야 하는 (동시에 초자아-어른의 처벌을 두려워하는) 디트로이트 소년소녀들의 불안한 심리의 투사라 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미성년의 불안함과 죽음에, 근친상간이라는 함의가 배어있다는 점이다. 그렉의 죽음에 등장하는 그렉의 엄마 모습을 한 '그것'과 영화 후반부에 수영장에 등장하는 제이의 아버지로 둔갑해 다가오는 '그것'이 대표적일 것이다. 이 두 장면은 가장 무방비로 노출되는 장소 (집, 수영장)에서 근친 강간 후 살해당할 수 있다는 불안함이 배어있다. 그 점에서 [팔로우]의 그것이 내리는 섹스에 대한 처벌은, 문란함과 반대로 타인과의 섹스를 통해 가족과 분리됨을 처벌하는 것 아닐까? 하지만 그렇다고 타인과의 섹스가 편하게 그려지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제이-그렉이나 제이-폴 같은 친구끼리 하는 섹스를 제외하면 [팔로우]의 섹스는 불쾌한 공포감이 배어있다. 제이가 배 위의 남자들에게 성적으로 접근하는 장면과 폴이 제이랑 섹스한 후, 매춘부를 찾아가는 장면이 그렇다. 이 두 장면은 생존을 위한 섹스지만, 생존과 직결된 번식 개념은 철저히 제거되어 있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이어질 섹스 장면 역시 의도적으로 생략되면서, 쾌락 개념 역시 사라졌다. 사실상 [팔로우]는 임신 없는 섹스라는 개념이 전제되어야 가능한 영화다. 한편 도구로써 섹스에 대한 젠더의 격차도 찾아볼 수 있을 것인데, 상대적으로 섹스 권력에서 약자일 수 밖에 없는 여성인 제이가 남자들에게 접근하는 장면이 내키지 않음과 1대 다의 착취적인 섹스를 암시케 하는 불편함이 보인다면, 폴이 매춘부를 찾아가는 장면은 낯섦과 섹스의 도구화에 대한 두려움은 남아있되 방향성이 다르다. 제이가 착취당함을 두려워한다면, 폴은 로맨틱한 섹스의 휘발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근친 강간에서 벗어나려면 섹스를 도구화해야 한다는 현실이 두려운 것일까? [팔로우]의 결말은 어떻게든 어른에 예속되는 근친 강간의 공포에서 살아남아 이어졌다는 안도와 그럼에도 영원히 함께할 수 밖에 없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양면적으로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1. 결론

데이비드 로버트 미첼은 지역의 특징적인 요소들을 외삽성을 감수하더라도, 장르 영화에 집어넣으면서 어른이 부재한 팝 문화로 넘쳐나는 현실을 헤쳐나가야 하는 미성년의 심리적 미로를 구축하는 감독이라 할 수 있다. [아메리칸 슬립오버]에서는 성적 접근에 대한 두려움과 서툼을 세미 다큐멘터리적 접근으로 부각하면서 10대 섹스 코미디 장르의 자극성을 탈피하고 성장에 관해 얘기한다면, [팔로우]는 디트로이트라는 공간을 모호한 시공간과 폐허 성을 강조한 뒤, 섹슈얼리티 문제에 대한 접근 방식을 뒤집어 생각하는 방법으로 양식화된 미국 10대 공포 영화의 성 관념을 바꾸고 있다. 데이비드 로버트 미첼의 강점은 일견 힙하게만 보일 수 있는 대중문화 인용과 미적 감각을, 지역적 사실주의와 미장센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간단하면서도, 중요한 접근을 통해 초현실적이면서도 절박한 감성을 차분하게 녹여내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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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Follows 
6.5
감독
데이빗 로버트 미첼
출연
마이카 먼로, 린다 보스톤, 케어 길크리스트, 올리비아 루카르디, 제이크 웨어리
정보
공포 | 미국 | 100 분 | 2015-04-02

데이비드 로버트 미첼의 [팔로우]의 도입부는 그야말로 효율적이다. 우선 미첼은 디트로이트라는 분명한 공간을 설정해놓고 롱테이크로 애니라는 희생자의 동선을 집요하게 반복한다. 이를 통해 카메라가 따라다니고 있는 인물의 심리가 안정되지 못하고 무한한 반복을 통해 이 영화의 운동 이미지가 일종의 순환 구조를 이룰것이라는걸 명백하게 한다. (이 점에서 [팔로우]의 도입부는 철창 안에 갇혀 바이크 쇼를 벌이는 장면으로 열였던 데릭 시엔프렌의 [플레이스 비욘드 더 파인즈]랑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볼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순환 이미지 다음에 짧고 앞으로 나올 존재가 얼마나 무서운지 설명해주는 강렬한 충격을 집어넣으면서 [팔로우]는 리듬을 매우 효율적이고 강렬하게 정리한다.

[팔로우] 본편에 들어서면 미첼은 더욱더 신중하게 리듬을 확장해내간다. 영화는 제이의 산문적인 삶을 그려내면서 미국 북동부 디트로이트의  청춘의 풍경을 2.35:1 와이드스크린으로 그러낸다. 미첼은 작은 예산 속에서도 이 와이드스크린을 비우고 채우는데 매우 능수능란하다. 드 팔마식 360도 팬으로 '그것'을 각인시키는 방법이라던가 특히 마지막 클라이맥스가 이뤄지는 수영장의 음울함은 어떻게 찍었는지 신기할 정도다. [팔로우]에서 그려지는 디트로이트는 아무도 살지 않는 집과 힘없는 청춘들이 돌아다니는 공간인데, 이 점에서 [팔로우]는 많은 평자들이 지적했듯이 미켈란젤로 안토오니오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있는 영화다. 안토니오니의 [붉은 사막]이 그랬듯이, [팔로우]의 살풍경한 공간들은 개인적인 영역마저 잡아먹을 정도로 압도적이며 동시에 쓸쓸한 시정을 안겨주고 있다.

하지만 [팔로우]는 공포 영화이기에 그 침착한 리듬을 끝까지 끌고가지 않는다. 제이의 산문적인 삶이 초반부에 나왔던 비현실적인 세계랑 접목되는 순간, [팔로우]는 그 침착한 리듬을 예리하고 냉정하게 풀어낸다. 충격 요법을 사용하는 방법도 그렇고, 무엇보다 [팔로우]는 많은 사람들이 상찬했듯이 괴물과 공포에 대한 상상력이 뛰어나다. (분명 예산 때문에 머리 쥐어매면서 고민했을) '그것'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방법-미첼은 '그것'을 매우 물리적이면서도 기이한 분위기를 가진 존재로 그린다.-도 좋지만 (실은 몇몇 장면들은 예산이 좀 더 있었다면 더 괜찮게 나왔을건데... 싶은 장면도 없는게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단순히 팝콘 소비용 괴물이라기엔 관객들의 근원적인 공포를 자극하고 있다. 좋은 코스믹 호러의 괴물들이 그렇듯이 [팔로우]의 '그것'은 이야기가 끝나고 난 뒤에도 계속 불쾌한 뒷맛을 남기는 쪽인데, 미첼은 '그것'에게서 인간적인 감정이나 설명을 제거하고 단순명쾌한 구조와 법칙을 보여줘 '그것'의 타자성을 강조한 뒤, 그 구조와 법칙을 가지고 캐릭터들을 몰아붙인다. 이 때문에 '그것'의 존재감은 '그것'이 나오지 않을때조차 나타날것 같은 불안감을 일으킨다. [팔로우]의 '그것'은 그 점에서 구로사와 기요시의 [회로]에 나오는 유령들의 절망감과 공유하고 있다.

미첼의 전작 [아메리칸 슬립오버]가 디트로이트 10대 청춘들의 삶과 사랑을 다뤘다는 정보를 새겨볼때 미첼 감독의 관심사는 미국 10대들인듯 하다. 그에 걸맞게 [팔로우]는 철저히 10대들의 세계에 맞춰서 전개된다. 하지만 일상적이고 소소한 영역에 머물고 있던 [아메리칸 슬립오버]랑 달리 [팔로우]의 세계는 위협과 공포, 절망감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미첼이 10대 캐릭터 묘사하는 부분들은 상당히 신중하게 이뤄지고 있다. 특히 장르적으로 과장되는 속성을 가진 그렉과 야라 같은 캐릭터를 묘사할때도 미첼은 자신이 전작에서 했던 방법을 따른다. 즉 장르에 캐릭터를 끼워맞추는게 아니라, 캐릭터를 존중하면서 장르를 구성하는 것이다. [팔로우]는 그 점에서 캐릭터를 존중해주는 요새 보기 드문 호러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헐리우드식 글래머함이 배제된, 인디 영화 타입의 캐스팅도 이런 질감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것'이 매우 섹스랑 연관있는 존재라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호러 영화와 섹스는 지루할정도로 흔하게 연결되긴 하지만, 미첼이 선택한 방식은 기존 영화가 선택한 방법들과는 다르다. 10대들의 섹스를 통해 퍼지는 질병과 우울한 파국을 다룬 찰스 번즈의 만화 [블랙 홀]를 떠올리게 하지만 (미첼 본인은 딱히 의식하진 않았지만 읽어보긴 했다고 했다.), [팔로우]는 [블랙 홀]이나 데이빗 크로넨버그식 끈적한 육체 변형과도 거리를 둔다. [팔로우]의 섹스는 차라리 건조하고 우울하다. 제이가 남자랑 섹스를 하고 난 뒤 읇조리는 덤덤한 독백이라던가, 경악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그것'이 취하는 행태나 살해방법, 중후반부에 이어지는 제이의 공포에 동참하기 위해 남자애들이 섹스에 참여하는 장면들에서 이 영화의 섹스는 쾌락보다는 알 수 없고 두렵고 무섭지만 소통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수단으로 그려진다. 

흥미로운 점은 이 영화에서 어른들은 배경 수준이라는 것이다. 이런 묘사가 미첼이 개연성을 까먹은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있어서 그렇게 된거라는건 '그것'이 그렉의 어머니랑 제이의 아버지 모습으로 나타났을때 명백하게 드러난다. 10대들이 섹스를 하면 나타나는 괴물이 가장 극적인 순간에 어른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는 점에서 [팔로우]는 어른 세계와 10대들에 대한 관계에 대해 건드리고 있다고 볼 수 있을것이다. 그렇게 보면 [팔로우]의 결말이 안겨주는 절망과 멜랑콜리로 채워진 미묘한 감흥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미첼은 제이나 폴이랑 섹스한 어른 희생자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의도적으로 배제해 그 관계를 명백히 한다.

그 점에서 [팔로우]는 제프리 유제니디스의 [처녀들 자살하다]의 영향력이 강한 영화기도 하다. 죽음과 쇠락의 기운이 넘실거리는 와중에 어른들의 세계에 속하지도 못한채 서로에 대한 성적 호기심과 섹스가 금기이자 유일하게 소통할 수단으로 자리잡은 소년소녀들의 우울한 드라마라는 점에서 말이다. (공교롭게도 두 작품 모두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 주변 교외가 배경이다.)

[팔로우]는 구식 호러 영화에 대한 존경과 제프리 유제니디스와 표토르 도스토예프스키, 스티븐 킹, 모파상의 영감을 받아 만들어낸 독특한 호러 영화다. 영화내내 똑똑하고 침착하다는 점이 취향차를 가르긴 하겠지만 이 영화가 꼼꼼히 만들어낸 음울한 멜랑콜리만으로도, [팔로우]는 끊임없이 양산되고 있는 무뇌한 틴에이지 호러 영화에 일침을 가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영화의 깜짝 히트도, 그런 일침이 평자들 뿐만 아니라 관객들에게 신선하게 다가왔다는 뜻 아닐까?

P.S. 게임 [페즈]의 사운드트랙을 맡은 디제스터피스의 음악도 매력적이다. 197-80년대 일렉트로닉 사운드 리바이벌이나 그 당시 미국 호러 영화 사운드트랙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반드시 구해 들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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