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번째 창문
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드라마 (31)
미끼 [Bait] (2019)

(결말에 대한 누설이 있습니다.)

마크 젠킨의 <미끼>는 기묘한 영화다. 우선 이 영화는 영국 영화이면서 지역 영화다. 마크 젠킨은 영국 서남단에 있는 지방 (이자 독자적인 문화권인) 콘월 출신으로, 데뷔 후 줄곧 콘월에서 영화를 만들고 있다. <미끼> 역시 콘월 바닷가 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다. <미끼>의 이야기는 간단히 말해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한 노동 계급과 중산층 계급의 대립을 다루고 있다. 블랙 코미디로도, 진지한 사회 고발물로도 흐를 수 있는 소재인데, 마크 젠킨이 선택한 방식은 후자에 가깝다. 작가로써 마크 젠킨은 우직하고 성실하게 콘월 해안가에 대한 세세한 묘사와 함께 키친 싱크 리얼리즘에 기반한 비극으로 그려낸다. 인물들 역시 진지하기 그지 없고, 세련된 문학적인 상징성이나 아이러니나 이죽거림은 보이지 않는다. <미끼>의 서사는 어렵지 않게 명료한 비극이다.

<미끼>의 비극은 외지인과 현지인, 영국의 노동 계급과 중산 계급을 가로지르는 경제적인 문제에 기반하고 있다. 영화의 주인공 어부 마틴은 배를 사고 싶어한다. 마틴의 형인 스티븐에겐 배가 있지만 그 배는 게스트하우스를 방문하는 관광객을 위해 운영하고 있다. 마틴은 그게 싫어서, 경제적인 자립을 하려고 하지만 쉽지 않다. 마틴이 살고 있는 콘월 항구 마을은 이미 외부인 관광객 없이는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없는 상태다. 한편 마틴 형제의 옛 집은 리라는 중산층 가족이 사들여 게스트하우스로 운영중인데, 마틴과 관계는 썩 좋지 않다. 사소하게 쌓여있던 불편한 관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여러 상황이 겹치면서 점점 사이가 벌어지고, 결국 비극으로 치닫게 된다.

바닷가 마을의 외부인과 내부인이라는 소재, 현지인들의 생활에 대한 세미 다큐멘터리적인 접근, 인물 숏과 자연 풍경을 이어붙이는 편집 기조에서 <미끼>는 아녜스 바르다의 <라 푸앵 쿠르트로의 여행>의 영향력을 받은 영화다. 마크 젠킨은 콘월이라는 지역에 대한 애정과 디테일에 대한 풍부한 관찰력, 콘월인과 대비되는 외부-영국인으로 대표되는 경제적인 존속 관계,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두 축을 오가며 젠트리피케이션이 만들어내는 격차와 불만족, 소외, 갈등을 그려낸다. 작중 해안가 마을은 아름답긴 하지만, 살기엔 지루한 곳이다. 마틴의 조카 닐이 일과를 끝내고 펍에 가서 노는 시퀀스를 보면 알 수 있다. 펍엔 닐 같은 젊은이를 비롯해 사람들로 꽉 차있지만, 닐은 이런 북적거림에 대해 어떤 흥분도 보이지 않는다. 외부인 손님에게 수입을 의존하고 있을 펍의 풍경은, 닐에겐 그저 반복되는 일상에 불과하다. 펍 시퀀스와 리 가족과 관광객들이 게스트하우스에서 여유롭게 '일상'을 즐기는 장면을 비교해보면, 노동 계급과 유산 계급의 관점차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무료함은 평화가 아니라 언제든지 끓어오를수 있는 팽팽한 긴장감에 가깝다. 이 긴장감은 경제 활동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외부인-유산 계급이 주도하는 서비스업에 기생해야 하는 노동 계급의 불만이 담겨 있다. 마틴의 삶을 보자. 마틴은 끊임없이 생선과 해산물을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팔지만, 만족스러운 수입을 얻지 못한다. 그렇다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냐면 그런 것도 아니다. 마틴의 유일한 희망은 배를 얻어 좀 더 본격적으로 어업을 하는 것이지만, 돈은 모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마틴을 자신의 일상을 버텨내는 쪽에 가깝다. 이런 감정은 마틴에게만 한정된 것도 아니다. 펍 주인의 딸 웬나가 시종일관 까칠한 태도를 일관하는 것도 주체가 되지 못한 채 고여있는 삶에 대한 짜증스러움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웬나는 심지어 어머니에게 노골적으로 관광객-유산 계급에 들러붙는 기성 세대를 비난하기까지 한다. 그 점에서 마크 젠킨의 시선은 비교적 평화롭게 두 세계가 '분리'되어 각자의 길을 갔던 바르다보다 폭력적이고 절망적이다. 영화에서 이뤄지는 화해와 소통의 시도가 모두 실패로 돌아가는 것도 이런 무거운 분위기에 일조한다.

여기까지만 했더라면 마크 젠킨은 켄 로치 같은 키친 싱크 사실주의의 적통을 잇는 영국 영화감독으로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미끼>의 이야기는 제목처럼 진짜 파고들어야 하는 요소에 대한 밑밥이다. <미끼>에서 파고들어야 할 핵심은 시청각적인 즉물성에 있다. 곧장 말해 <미끼>는 시대착오적인 영화다. 볼렉스 16mm 필름 카메라로 촬영한 <미끼>는 아리 알렉사나 레드 에픽으로 만들어진 디지털 영화 애호가들의 혀를 차게 만드는 영화다. 흑백 필름의 훼손은 영화가 끝날때까지 계속 나타나며, 후시녹음으로 덧붙인 음향은 아날로그 모노로 녹음을 했나 확인해야 할 정도로 뭉그러져 들린다. <미끼>는 디지털의 깔끔함을 거부하는 러다이트 영화다. 마치 게스트하우스의 세련됨과 반대되는 어부의 투박함처럼 말이다.

마크 젠킨은 이런 시청각적인 도구를 이용해 서사 영화의 기본 화술과 격렬한 몽타주를 조합한다. 소리가 있긴 하지만, <미끼>의 방법론은 무성 영화에 가깝다. 좀 더 정확히는 독일 표현주의와 소련 몽타주 영화에서 많은 영감을 얻고 있다. 일부 평자는 케네스 앵거 같은 미국 아방가르드 영화 감독들을 언급하기도 했는데, 확실히 <미끼>의 몽타주는 <스콜피온 라이징>이나 <불꽃놀이> 같은 앵거의 영화에서 자주 보였던 꿈결같으면서도 불온한 긴장감으로 넘실거리는 초현실주의적 몽타주에서 많은 영감을 받은 모습을 보인다. 파편화된 거친 이미지가 편집으로 끊임없이 덧대지면서 불꽃놀이처럼 시각을 교란하는 영화를 생각하면 좋겠다. 바닷가 배경과 고전적인 시청각적인 도구들에서 로버트 에거스의 <더 라이트하우스>를 연상할수도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미끼>는 <더 라이트하우스>보다 훨씬 투박하고 거칠다.

이런 영향 속에 마크 젠킨은 서사에 필요한 숏들을 배치한 후, 그 뒤로 서사의 감정이나 감각을 포착한 파편적인 숏을 붙이는 식으로 캐릭터가 느끼는 감각과 감정, 심지어 시공간까지 끊임없이 확장하고 늘린다. <미끼>가 선택한 연출이 상당히 튀긴 하지만, 쉽사리 바닥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서사 영화에게 요구되는 기본기를 갖추고 핵심을 찌르는 숏을 정교하게 붙여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마틴이 리 가족의 아들인 휴고가 가재를 몰래 훔쳤다는 사실을 알고, 술집에서 휴고에게 다가가는 시퀀스를 보자. 이 장면은 캐릭터에 대해 가지게 되는 선입견 (투박하게 생겨서 마구 폭력을 휘두를것 같은 어부)을 뒤엎는 반전과 유머를 파편을 이어붙이는 몽타주로 구성해 서스펜스와 집중력을 선보이고 있다. 이런 편집은 동시에 서사와 관계 없이 지극히 표현주의적으로 심상과, 감정적 긴장을 끌어내기도 한다. 휴고가 훔친 가재로 저녁을 먹는 팀과 산드라의 시퀀스가 대표적이다. 밥을 먹는다는 단순한 행위지만, 젠킨은 이 단순한 행위에 노동 계급의 노동을 착취한다는 죄책감과 탐욕, 먹는다는 행위의 본능적인 감각을 드러내 불편하면서도 관능적인 분위기를 만든다 이외에도 젠킨은 닐의 죽음을 일부러 초반에 예지몽처럼 배치한다던가, 인물의 시점에서 불가능한 숏을 집어넣는 방식으로 몽타주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이런 표현주의적인 접근은, 린 램지처럼 마크 젠킨을 키친 싱크 사실주의에서 멀리 도약하려는 부류의 영국 영화 감독군에 포함하고 있다.

<미끼>가 영화를 만드는 방식은, 모든 것을 '생성'하는 디지털 CG 시대의 영화 만들기를 전면적으로 저항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이미지는 컴퓨터로 생성한 것이 아니라 직접 찍은 것이며, 편집이라는 기초적인 도구로 관객의 지각을 교란하고 자극한다. 이런 방식은 영화 속 어업과 일치하는 구석이 있다. 짐작했겠지만 <미끼>는 어업의 과정을 세세하게 보여주면서 행위와 질감을 잡는데 주력하고 있다. 그리고 그 질감은 영화의 투박한 모양새하고 닮아있다. 이와 관련해 사소하지만 주목할 소도구가 있다. 바로 스마트폰이나 노트북 같은 디지털 기기다. 동시대가 배경임에도, <미끼>는 이런 디지털 기기가 의도적일 정도로 비중이 낮다. 정확히는 마틴이나 닐 같은 어부들을 묘사할때는 디지털 기기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게스트하우스에 있는 리 가족과 관광객들이 디지털 기기를 쓴다.

이 배제와 사용은 명백히 의도적이기에, 러다이트적인 모양새와 함께 보면 아날로그 문화와 디지털 문화에 대한 서브텍스트로 읽힐 여지가 있다. 이 서브텍스트의 관점에서 보면 <미끼>는 필름-아날로그 문화와 이 문화를 밀어내고 주류로 차지한 디지털 문화 간의 충돌로 읽힐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젠킨의 입장은 명백하게 아날로그 문화를 옹호하고 있다. 어업이 1차 산업에 인간 생활에 필요한 식량을 생산하는 직업이라는 걸 유념하면 확실해진다. 사람은 서비스업 없이도 살수는 있지만, 먹을 것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마크 젠킨은 필름이 가지고 있는, 유물론적이고 즉물적 표현과 편집이라는 기초적인 도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1차 산업인 어업과 동일시한다. 디지털 시대에도 아날로그 영화은 필요하며 사멸하면 안 된다고 역설한다.

영화 도입부에서 앞을 노려보며 뚜벅뚜벅 걷는 마틴의 숏은 그 점에서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첫번째는 마틴이 느끼는 현실에 대한 불만이다. 두번째는 마틴의 강건한 표정에서 뿜어져나오는 고독한 뚝심이다. 이 도입부가 영화의 마무리에 붙여도 이상하지 않다는 점도 주목할만 하다. 선원으로 키우려던 닐이 휴고와의 다툼 끝에 우발적인 사망하고, 이 사건을 계기로 마틴과 스티븐은 분노하면서도 화해를 한다. 이때 스티븐은 과거의 흔적이 사라진 게스트하우스를 둘러보면서 말한다 "이 놈들은 우리 가족에 관련된 물건을 전부 치워버렸어!". 이 대사의 과녁이 어떤 계급과 문화를 겨냥하고 있는지는 명백하다. 마지막 장면. 이제 스티븐의 배는 관광업을 포기하고 어업을 나선다. 마을 현실에 불만이 많았던 웬나가 닐의 자리를 대신한다. 그렇게 어업을 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이 결말은 양가적이다. 먼저 긍정적인 면을 보자. 웬나가 닐을 대신한다는 점은 젠더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마초적인 부계 가족이 해체된 자리에, 이전엔 성차별적 인식으로 끼어들수 없었던 어업 현장에 여성이 끼어든다는 점에서 변화와 약간의 희망을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 결말은 씁쓸히 사멸을 받아들이고 그럼에도 자신의 길을 가겠다는 고독함도 포함하고 있다. <미끼>는 그 점에서 자본을 뒤쫓아 과거의 문화를 투박하고 느리다는 이유로 지나치게 빨리 치워버리는 현 시대에 대한 총체적인 비극을 다루는 영화라 할 수 있다. 그 '과거의 문화'는 콘월이라는 변두리 지방 문화권과 어업에 대한 것이기도 하며, 필름 영화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이런 과거의 문화에 대한 애착과 소멸을 논하는 영화를 디지털 영화 매체인 DCP나 코로나-19 사태로 VOD으로 본다는 사실은 그 점에서 아이러니하다.

  Comments,   0  Trackbacks
댓글 쓰기
사랑의 행로 [Love Streams] (1984)

존 카사베츠의 <사랑의 행로>은 카사베츠의 유작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주의할 점이 있다면 <사랑의 행로>가 진짜 유작은 아니라는 점이다. 카사베츠는 <사랑의 행로>를 만든 뒤 컬럼비아 픽처스에서 <빅 트러블>을 만들었다. 그러나 <빅 트러블>은 카사베츠가 평생 겪어야 했던 스튜디오 체제하고 충돌로 망가진 영화였다. 카사베츠 본인도 <빅 트러블>에 대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을 정도다. 그 지점에서 보면 <사랑의 행로>를 실질적인 유작이라 부르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다 내용 자체도 고단했던 카사베츠의 '행로'의 종지부로 어울린다. <사랑의 행로>에 이르면, 카사베츠는 분명한 빛을 혼란스러운 캐릭터에게 안겨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빛에 도달하기까지, 영화의 두 주인공들은 카사베츠의 인물들이 겪는 방황과 신경증, 삽질을 거쳐야 한다.

테드 앨런의 동명 희곡을 각색한 <사랑의 행로>는 희곡과 공통점이 적다고 알려져 있다. 희곡을 보거나 읽지 않았으니 자세한 비교는 불가능하지만, 일부는 카사베츠 특유의 소규모 가내수공업적 작업 스타일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싶은 부분이 있다. <사랑의 행로>를 만들면서 존 카사베츠는 공연 당시 배우 (존 보이트)를 기용하지 않고, 직접 주인공 로버트 하몬 역을 맡고 아내 지나 롤랜즈에게 상대역인 여동생 사라 하몬 역을 맡겼다. 그리고 <얼굴들>을 본 사람이라면 눈치챘겠지만, 배경 대부분을 차지하는 로버트의 집은 <얼굴들>에도 등장했던 실제 카사베츠 부부의 집이다. <얼굴들>을 보고 <사랑의 행로>를 본다면 데자뷰를 겪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두 영화의 후반부는 기절한 여성과 그를 깨우려는 남성의 액션으로 이뤄져 있어서 유사점이 두드러진다. 종종 영화에서 하몬 남매에게서 근친상간적인 성적 긴장감이 느껴지기도 하는데, 이 역시 실제 부부였으며 연기 파트너이기도 했던 카사베츠와 롤랜즈의 관계가 반영되어 있을 것이다.

공통점이 적다곤 하지만, 그래도 테드 앨런의 희곡이 '더티 리얼리즘'과 친연성이 있는 카사베츠의 개성과 충돌하는 부류는 아니었을꺼라는 추측은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주인공인 하몬 남매는 매우 카사베츠스럽게 엉망진창에 기벽적인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다만 상황의 시궁창스러움은 올라갔다. <사랑의 행로>는 카사베츠가 천착했던 가정의 붕괴가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영화다. 물론 <얼굴들>이나 <영향 아래의 여자>도 가족이 흔들리는 모습을 담았지만, <사랑의 행로>의 하몬 남매는 처음부터 정상 가족이라는 개념이 파괴된 채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들은 가족을 만들지 않고 욕망으로만 구성된 낙원에 만족하거나 (로버트), 가족에게 쫓겨난 상태다. (사라) 카사베츠는 2시간이 살짝 넘는 시간 동안 정상 가족을 가지지 못하거나 추방된 두 주인공이, 정상 가족에 집착하거나 복원에 실패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먼저 로버트는 갑자기 나타난 아들 앞에서 정상 가족의 '가부장'으로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 에로스의 공동체를 파괴한다. 하지만 결국 로버트는 호텔 방에 아들을 버려두고 자기 욕망에 충실하면서 '가부장'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이 실패는 다른 폭력적인 '가부장'과의 난투극으로 파국을 마무리 짓는다. 한편 <차이니즈 부키의 죽음>의 코스모가 그랬듯이 로버트는 흑인 어머니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데, 이 관심을 끝내 이뤄지지 못한다. 요컨대 로버트는 과잉된 에로스로 사랑을 대체하거나, 사랑하는 법을 흉내내다가 실패하는 캐릭터다. 반대로 사라는 한창 전에 끝나버린 정상 가족을 끊임없이 맴돈다. 사라가 처음 등장하는 장소는 이혼 법정이다. 이혼 법정에서 사라는 자신을 딸의 친권을 가지려고 하지만, 딸은 자신을 거부한다. 심사가 끝나고 사라는 변호사에게 말한다. '사랑은 끊임없이 흐르는 것이다'. 그러나 사라의 흐름은 이혼 소송으로 끊어졌다. 프랑스 여행에서 돌아와 힘겹게 짐을 끌며 나아가서 몸을 흔들어대는 사라의 모습은 술에 취해 애인의 집 앞에서 뒹구는 로버트랑 별반 다름없어 보인다. 다만 로버트랑 달리 사라는 과거 충만했던 사랑을 다시 한번 재현하고자 할 뿐이다. 그 점에서 사라는 <영향 아래의 여자>의 머틀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광기와 불안증상에 빠진 인물이다. 머틀은 고단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채 몸만 커버린 아이였지만, 사라는 실패한 과거의 잔해에 매달리는 어른이다. 초기 시절 얼굴들을 잡아대던 거친 카메라의 클로즈업은 줄어들었지만, 패닝과 줌인으로 격정적으로 변하는 인물의 표정을 포착하는 후기 카사베츠의 카메라도 이런 불안함을 잡아내고 있다.

<사랑의 행로>가 흥미로운 부분은, 이 두 남매가 만나기까지 상당한 시간을 들여서 둘의 시공간을 분리해서 진행한다는 점이다. 카사베츠는 이미 <별난 인연> 도입부에서 미니와 시모어 두 인물의 시공간을 독립적으로 놓고 진행한 적이 있다. <별난 인연>가 서로 다른 시공간에 살고 있는 독립적인 두 인물이 하나의 공간으로 모이면서, 히스테릭한 흐름을 만들었던 것처럼 <사랑의 행로> 역시 비슷하면서도 다른 두 흐름을 지닌 인물이 만나면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지 보여주고 있다. 영화의 후반부를 장식하는 사건이 폭풍우라는 건, 카사베츠가 <사랑의 행로>에서 관찰하고자 하는 감정의 상태를 드러내는 장치인 건 당연하다. 카사베츠의 다른 영화들을 본 사람이라면, 로버트와 사라가 영화 내내 어떤 행동을 할지 대충 감이 잡힐 것이다. 그들은 술을 마시고, 사랑을 채우기 위해 동물을 마구 사들이거나, 외출을 해 다른 이성과 동침을 하거나, 가족에게 매달린다. 다만 <사랑의 행로>는 이런 히스테리를 표출하기 위해 이전 존 카사베츠 영화보다 적극적으로 환상과 무대에서의 연기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있다. 간헐적으로 끼어드는 사라의 폭력성과 불편함을 드러내는 환상 시퀀스, <차이니즈 부키의 죽음>이나 <오프닝 나이트>를 연상시키는 후반부 뮤지컬 시퀀스가 대표적이다. 이 영화가 사실상 카사베츠가 자기 방식대로 만든 마지막 영화라는 걸 생각해보면, 미완으로 남은 발전 아니었을까하는 의문도 있다.

<사랑의 행로>의 후반부와 결말은 일종의 부활과 각성에 가깝다. 끊임없이 이혼한 남편과 딸에게 대화를 시도하던 사라는 갑자기 기절해서 깨어나지 않고, 로버트는 안절부절하면서 사라를 깨우려고 애쓴다. 이를 위해 로버트는 폭풍우 속으로 사라가 마구잡이로 사들인 동물들을 불러모으고 마침내 깨어난 사라는 이혼한 남편과 딸을 찾아가 다시 재결합을 시도해보겠다고 선언한다. 막무가내로 당장 떠날 준비를 하는 사라를 말리던 로버트는, 거실에 앉아있다가 앞에 앉아있던 개가 벌거벗은 남자로 교차되는 환상 숏을 보게 된다. 지금까지 환상 시퀀스의 주체가 사라였다는 걸 생각해보면 로버트의 시점으로 제시된 이 환상은 이례적이고 뜬금없다. 다만 이 개가 사라가 막무가내로 데려온 반려 동물이라는 점은 실마리가 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로버트가 본 개 (실체)와 벌거벗은 남자 (환상)은, 사라가 떠날 자리를 대신 채워질 무언가가 아니었을까? 적어도 이 환영 숏은 사라가 꾸는 환영 시퀀스와 달리 묘하게 포근한 익살이 담겨 있다.

카사베츠의 다른 영화가 그렇듯이 <사랑의 행로>는 사건의 결말를 보여주는게 아니라, 그 직전에서 멈춰서서 인물들의 표정을 보여주면서 끝난다. 이때 로버트는 폭풍우 속에서 떠날 준비를 하지 않는 사라를 더 이상 말리지 않고, 그저 집 창문으로 지켜볼 뿐이다. 떠나는 자와 남는 자로 구성된 결말 시퀀스의 인물 배치와 시선은 어딘가 짠한 구석이 있다.사라는 기나긴 앓음과 붕괴 끝에 재건의 가능성에 대해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로버트는 어설프고 실수를 저지르면서 사라를 챙겨주려고 노력했다. 이제 사라는 다가올 고난을 향해 당당히 나아가고, 로버트는 그걸 지켜본다. 당시 시한부 선고를 받고 투병중이었던 카사베츠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앞으로 자신 없이 거친 세상의 폭풍우 속에서 살아가야 할 아내 지나 롤랜즈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카사베츠가 생각하는 '사랑의 흐름'이란 거칠고 충동적이며 많은 충돌을 일으키지만 결국 얽히면서 위무 받을수 밖에 없는 강렬한 에너지다. <사랑의 행로>은 그 점에서 제멋대로에 엉망진창인 현실 속에서 사랑받고 싶어했던 카사베츠의 캐릭터들에게 주는 작별 선물이다.

  Comments,   0  Trackbacks
댓글 쓰기
아사코 [寝ても覚めても / Asako I & II] (2018)


하마구치 류스케의 [아사코]는 도시 전경을 담은 마스터 쇼트에서 시작한다. 이 도시 마스터 쇼트는 초반부가 끝난 이후에도, 장소를 바꿔가면서 제시되는데 마치 이 영화의 이야기가 어디서 진행하고 있는지 기억해달라는 것처럼 보인다. 중학생들의 불꽃놀이가 터지고 아사코는 미술관에 사진 전시를 보러 간다. 여기서 아사코가 멈춰서 보고 있는 사진은 두 명의 쌍둥이를 찍은 사진이다. 마치 같지만 다른 쌍둥이처럼, 같은 얼굴이지만 다른 정체성을 지닌 남자를 사랑하게 되는 걸 예언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사코는 미술관에서 바쿠를 만나지만, 둘의 관계는 자기소개가 아닌 우연을 가장한 숨바꼭질 끝에 느닷없는 키스로 시작한다. 그리고 알고 봤더니 그들은 서로의 친구랑 아는 사이라는 '운명' 같은 기연이 이어진다. 아사코와 바쿠랑 친한 오카자키가 말했듯이 "말이 안 되는" 상황인 셈이다. 순정 만화에서도 작위적이라고 말할 정도로 너무나도 완벽하게 짜인 구도다. 아사코의 친구인 하루요 역시 절대 사귀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도 이해가 될 정도다. 그 말을 증명하듯이 이 말도 안 되는 사랑은 얼마 안 있어 바쿠가 사라지면서 끝나고 만다.

주목해야 할 점은 아사코와 바쿠의 연애가 러닝타임 120분 중 20분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에 끝난다는 점이다. [아사코]는 타이틀이 뜬 후, 도쿄로 배경을 옮겨간다. 그리고 후반부까지 대부분의 이야기가 도쿄에서 진행된다. 이때 하마구치가 관심을 갖는 것은 반복과 차이다. 아사코는 도쿄에서 같은 얼굴, 다른 이름을 가진 남자 료헤이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아사코는 료헤이를 보고 몇 번이나 되물어보고 당혹해한다. 아사코는 료헤이를 피하려고 하지만, 사진가 고쵸 시게요의 전시가 도쿄에서 다시 열렸을 때 아사코와 료헤이는 감정적으로 얽히게 된다. 이때 다시 등장한 고쵸 시게오의 사진은 트래킹 쇼트가 아닌, 고정된 쇼트로 제시된다.

두 번의 고쵸 시게오 전 시퀀스는 [아사코]를 이해하는 단서다. 하마구치는 처음 20분 동안 바쿠와 아사코의 연애를 통해 영화의 진행 방식을 세운 뒤, 료헤이가 다시 등장했을 때 진행 방식이 어떻게 달라져 있는지 관객이 인지하길 원한다. 이 변화는 인물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변화기도 하고, 아사코 자신 SELF가 같지만 다른 두 타자 OTHERS를 어떤 식으로 바라보느냐를 다루고 있기도 하다. 실제로 초반부 아사코는 료헤이를 볼 때 유리에 비친 모습으로 인지하거나 시선을 던진다. 초반부 반사된 이미지로 아사코 앞에 등장하는 료헤이야말로 도쿄에서 아사코와 료헤이의 연애 (2) 가 오사카의 아사코와 바쿠의 연애 (1)에서 벗어날 수 없는 반사 이미지나 다름없다는 불길한 현기증이기도 하다. 이를 증명하듯이 료헤이와 아사코가 첫 입맞춤을 할 때 하마구치는 갑자기 점프 컷으로 입맞춤을 두 번 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이후 이어지는 아사코와 료헤이의 연애는 유혹이 아닌 불안과 공포에 기반한 밀고 당기기로 진행된다. 바쿠와 달리 료헤이가 아사코에 빠진 이유는 명확하게 그려진다. 마야를 두둔하면서, 아사코는 이전의 소극적인 모습과 달리 적극적으로 마야를 두둔하는 모습에서 아사코에 올곧고 망설이지 않는 구석이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료헤이는 자신이 바쿠랑 닮았다는 사실을 모르기에 그런 올곧고 망설이지 않는 아사코가 가지고 있는 두려움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 때문에 연애가 진행될까 싶으면 갑자기 뒤로 물러나는 상황이 지속된다.

이 상황에 대해 료헤이는 직설적으로 말한다. "원점으로 돌아간 것 같다"고. 계속 원점으로 돌아가는 상황을 반전시키는 것은 동일본 대지진이다. 아사코랑 만나기 위해 마야의 [들오리] 연극을 보러 온 료헤이는 동일본 대지진을 겪는다. 그리고 직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밤이 될 때까지 걸어간다. 밤이 되자 료헤이는 다리에서 아사코를 만나고 둘은 처음으로 포옹을 한다. 이때 동선을 살펴보면 료헤이가 기다리고 있던 아사코에 돌아온 모양새이기도 한데, 이는 '반복'에서 비롯된 '귀환'이라는 행위하고도 연결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아사코]의 대지진은 하마구치의 전작보다 연애 서사에서 갑자기 부로 끼어드는 인상이 강한 편이긴 하다. 애당초 원작이 된 소설은 동일본 대지진 이전에 발매된 소설이었고, 역사의 흐름이 언급되긴 하지만 상투적인 설정 위에서 주관적인 시점에서 비틀어진 연애라는 주제에 집중하는 소설이었다. 어떤 지점에서 [아사코]의 지진은 연애가 잘 진행되지 않을 때 등장해 흔들 다리 효과로 연인들을 이어주게 하는 소도구에 머문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 끼어드는 대지진이 과연 소도구에만 머무는 것일까? 그 의문을 대답하듯이 2의 2번째 장이 시작된다. 아사코와 료헤이는 본격적으로 사귀고 있으며, 고양이 진땅을 키운다. 한편 이들은 어느새 결혼해 아이를 가진 마야와 쿠시하시 부부하고도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상황 설명이 끝난 뒤, 아사코와 료헤이가 센다이로 가서 자원봉사 활동을 한다. 분명히 외삽적인 장면임에도, 이 흐름에는 꽤 당황스러운 구석이 있다. 새로운 공간 축이 갑자기 추가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아사코] 내 장소 관계도를 다시 그려야 할 것이다. 오사카-도쿄-센다이로 말이다. 이런 장소의 추가는 당연하겠지만, 동일본 대지진이라는 사건에 따른 추가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영화에서 등장하지 않지만, 센다이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바쿠의 고향 홋카이도가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하마구치는 센다이를 바다와 해산물의 공간으로 그린다는 점이다. 아사코와 료헤이는 센다이 주민들과 어울리면서 생선과 해산물을 팔고 먹는다. 그런데 하마구치는 료헤이와 아사코가 센다이에서 주민들과 해산물을 먹을 때, 아사코의 1인칭 시점으로 료헤이가 해산물을 먹는 쇼트를 찍었다. 다음 쇼트에서 아사코가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있는 걸 보면 이 쇼트는 사적인 기록으로 보존될 순간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왜 료헤이가 해산물을 먹는 장면을 녹화할 때 아사코의 눈으로 봐야 했는가? 이 시퀀스에서는 그 답을 찾기 어렵다. 그렇다면 다른 시퀀스에서 찾아야 하는데, 답은 엉뚱하게도 봉사활동 시퀀스가 아닌 아사코가 오사카로 돌아가기 전 환송 모임 시퀀스에서 등장한다. 여기서 아사코는 센다이 자원봉사 활동을 하는 것에 대해 '틀린 일을 하고 싶지 않아서'라고 말한다. 후쿠시마 방사능으로 오염된 물 근처에서 자라야만 하는 해산물을 먹는 료헤이의 모습을 목격하고 보존하고자 하는 아사코의 모습은, 커피포트를 돌려주면서 '술 만드는 회사에서 일하는지라 물의 귀중함을 알고 있다'라고 말하는 료헤이의 속내와 공명하면서 대지진 이후 새로운 윤리가 만들어져 작동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환송 모임 시퀀스는 동시에 아사코가 잊고 있었던 바쿠가 본격적으로 돌아오는 시퀀스이기도 하다. 그 점에서 환송 모임 시퀀스는, 연애 영화로써 선택을 다루는 [아사코]와 대지진 이후의 일본인의 삶을 다루는 [아사코]가 만나는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실제로 첫 번째 봉사활동 장면 이후 하마구치가 준비한 사건은 다름 아닌, 오사카 시절의 귀환이다. 사랑니 치료를 위해 외출한 료헤이와 아사코 앞에 아사코의 친구 하루요가 다시 나타난다. 하루요는 아사코에 바쿠가 돌아왔음을 알린다.

이 소식을 들은 아사코는 어떤 행동을 취하는가? 아사코는 단호하게 사실을 주변인들에게 밝힌다. 마야와 하루요랑 같이 텔레비전 보던 아사코는 바쿠의 광고를 보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광고는 신용카드 관계다. 관계에 신용이라는 개념이 전혀 없는 바쿠에는 어울리지 않는 광고다) 적당히 무마하려는 하루요의 말을 대신해 사실을 고백한다. 아사코의 이런 모습은 초반부 료헤이의 연애에서 보였던 모습에서 확실히 진화했다는걸 알 수 있다. 직후 료헤이에게 사실을 얘기하는 부분 역시 '틀린 일을 하고 싶지 않아서'라는 관점에서 이뤄진 행동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아사코의 이런 선택은 료헤이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면서 쉽게 해소되는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아사코의 고백과 료헤이의 평정심이 평화롭게 성립하기 위해서는 한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바쿠가 그들 앞에 다시 나타나지 않는 점이다. 하지만 [아사코]는 바쿠를 기어이 그들 앞에 귀환하게 만들면서 선택의 문제를 난제로 만든다. 촬영지에서 차를 타고 떠나는 바쿠에 손을 흔든 직후, 이삿짐을 싸던 아사코는 진땅을 안고 손을 흔든다. 그런데 이때 갑작스럽게 아무것도 없는 반응/리버스 쇼트가 등장한다. 아사코는 대체 누구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는가? 이에 대한 답은 갑작스럽게 등장한 바쿠를 통해 제시된다.

아사코는 여기서 자신이 취한 이별 방식이 어설펐다는 걸 깨닫게 된다. 다시 환송 모임 시퀀스로 돌아와서, 갑자기 나타난 바쿠는 이렇게 말한다. "역시 기다리고 있었잖아." 바쿠의 이 말은 공포 영화의 귀신이 복수하기 위해 희생자에게 저주를 내리는 대사와 동일하다. 어떤 지점에서 바쿠는 매우 전지적으로 행동하는 이해할 수 없는 캐릭터다. 히가시데 마사히로가 지적했듯이 바쿠는 대체 환송 모임 장소를 어떻게 알고 왔단 말인가? 이 전지성을 지닌 옛 연인 앞에서 아사코는 다시 선택해야 한다.

관객은 논리적으로는 답을 알고 있다. 아사코가 유예된 이별을 마무리 짓기 위해서는 바쿠하고 어떤 식으로 대면해야 한다는 것을. 하지만 연애물이라는 장르에서 보자면 아사코의 선택은 암묵적인 금기를 깨트리고 있다. 왜냐하면 연애물에서는 여성이 잘 이어가는 관계 도중 옛 남자 친구를 선택하는 것은, 현 남자 친구에 대한 용서할 수 없는 배신으로 취급되는 경향이 있다. 특히 비 처녀 논란 같은 지점에서 드러나는 여성의 정조와 헌신을 강요하는 일본 (나아가 동아시아)라는 문화권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여기서 대지진 직전 등장한 입센과 체호프의 연극들을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두 작품을 간략히 살펴보자면 체호프의 [세 자매]는 현실과 이상적인 꿈에 대한 괴리로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지지만, 현실을 깨닫고 이별하는 여성이 등장했고, 반대로 입센의 [들오리]는 평온한 관계가 실은 거짓으로 덮여있다는 걸 알고 비극에 치닫지만, 다시 새로이 시작하는 부부의 얘기를 다루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을 언급할 때 [아사코]는 감정 이입하지 말라고 주문하거나 ([세 자매]), 연극이 지진으로 중단되어버린다. ([들오리]). [아사코]는 왜 이런 문학적 모티브들에 대해 감정적으로 이입하지 말라고 말하거나 중단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아사코]에서 아사코가 처한 상황이 두 작품의 유사성과 연계성은 있되, 독자적인 상황으로써 객관적으로 관찰해달라는 걸 하마구치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아사코는 바쿠를 따라가지 않고 떠내 보낸다. 여기서 다시 아사코가 왜 최종적으로 바쿠가 아니라 료헤이를 선택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이다. 첫째로는 연애물에서 볼 수 있는 가치 판단과 기준이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쿠는 처음부터 끝까지 멋대로 행동하고, 아사코의 기분을 이해하는 언동을 보이지 않는다. 한마디로 같이 살기엔 부적합한 인물이다. 드라이브 시퀀스의 차이가 대표적일 것인데 좀 더 자두라고 말하는 료헤이랑 달리 바쿠는 자기 얘기만 할 뿐이다.

[아사코]가 흥미로운 점은 이런 연애 영화로써 감정 이입과 선택의 문제를 끊임없이 동일본 대지진이라는 사건이 외삽의 한계를 무릅쓰고 얽혀 들어간다는 점이다. 센다이에서 연애의 종지부가 난다는 점도 그렇고, 아사코와 바쿠의 연애는 바다에서 끝난다. 바쿠는 바다를 보지 않았다. 정확히는 거대한 방파제를 보고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데 바쿠를 떠나보낸 뒤, 아사코는 무엇을 하는가? 방파제를 올라가 바다를 본다. 아사코는 끊임없이 자신의 눈을 통해 확인하고 기억하고자 한다. 속내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캐릭터는 아니지만, 아사코가 방파제에 올라가 바다를 바라보는 시퀀스가 아름답게 느껴진다면 이 부분에 있다. 연애 관계에서 자신의 주체를 잡으려는 의지와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방사선 누출이라는 비극을 인정하고 나아가려는 일본인의 다짐이 겹쳐지기 때문이다.

다시 남겨진 료헤이에게 돌아가 보자. 바쿠의 손을 잡고 떠나가는 아사코를 찍는 트래킹 쇼트는 그 점에서 1부의 아사코와 친구들을 놔두고 떠나는 카메라의 트래킹 아웃 쇼트와 닮아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 트래킹 쇼트의 피사체가 달라져 있다는 점이다. 1부에서 트래킹 아웃 쇼트는 아사코와 친구들을 남기고 떠난다면 2부에서 미묘하게 구도가 달라진 트래킹 아웃 쇼트는 료헤이와 친구들을 남기고 떠난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가 아사코의 1인칭을 포기하자 바쿠에 대한 료헤이의 공포가 구체적으로 변했다는 점이다. 심지어 아사코와 바쿠가 떠나자 료헤이의 반응 쇼트는 예감한 표정으로 침묵과 분노의 표정을 짓고 있다.

료헤이의 예감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먼저 성적 매력의 부족함이 있다. 료헤이와 바쿠 중에서 가장 이상적인 매력을 지닌 남자는 바쿠다. 아사코랑 재회한 후, 예전에 괜찮다고 말한 건 거짓말이라고 털어놓기까지 한다. 바쿠는 그 점에서 료헤이의 거울 쌍이 만들어낸 억압된 악몽이다. 이런 연애 라이벌로서 두려움과 더불어 대지진 문제와 엮어서 본다면, 대지진 이후 '모든 게 정상적이었던 대지진 이전 일본의 귀환'에 대한 일본 남성성의 공포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독해의 여지는 료헤이는 왜 아사코의 선택에 분노하는가? 에 대한 답을 제공하기도 한다. 료헤이의 관점에서 아사코는 '대지진 이전 우월한 전 남자 친구를 선택하고 대지진 이후 열등한 자신을 버린 여자'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결말 부분은 료헤이에게 생긴 트라우마를 아사코가 어떻게 설득하는가에 대한 과정이기도 하다.

비록 연애 영화로써 서사 장치가 동일본 대지진이 긴밀하게 연결되었냐는 문제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아사코]의 강점은 관계의 허울성과 추한 감정을 인정하며 시간을 껴안고 살아간다는 행위에 긍정함에 있다. 하마구치는 함께 한 시간이 위태한 위장이라고 해도, 의미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하마구치는 아사코와 오랫동안 알고 지내왔던 오사카 인물들에게 시간의 흔적과 더불어 긍정성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원작과 달리 하루요가 아사코랑 절교하지 않게 된 점이 대표적일 것이다. 에이코가 들려주는 연애사의 비화는 원작에서도 있던 부분이라 넘어가도, 왜 하루요는 아사코의 선택을 일부 긍정했을까?

여기서 오사카로 대표되는 칸사이 지방이 이미 고베 대지진을 겪었던 지역이라는 걸 떠올려야 할 필요가 있다. 각색된 하루요의 긍정은 어떤 점에서는 에이코의 비화와 상응하는 구석이 있다. 이 변화는 이미 대지진을 겪은 오사카에서 현 일본의 난제에 대한 지혜를 구하려는 시도이며, 하마구치가 동일본 대지진이라는 사건 이후에 [아사코]의 원작으로 영화를 만들면서 느꼈던 의무감의 일종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물론 동일본 대지진은 고베 대지진과 달리 방사능 오염 같은 더 큰 난제가 있으며, 트래킹 쇼트로 절박한 추격전을 벌인 후에도 아사코와 료헤이의 관계는 여전히 깨진 채로 남아있다. 그런데도 아사코는 진흙 강을 아름답다고 말한다. [아사코]는 불가항력으로 더러워졌더라도 아름다움을 찾아낼 수 있는 용기가 동일본 대지진 이후 삶에서 필요하다고 말하는 영화다. [아사코]를 통해 하마구치 류스케라는 감독을 지지하고 싶다면, 그 자세라고 생각한다.


  Comments,   0  Trackbacks
댓글 쓰기
아마도 악마가 [Le diable probablement / The Devil Probably] (1977)

로베르 브레송의 [아마도 악마가]는 처음부터 결말을 정해놓고 영화를 시작한다. 샤를은 친구의 손을 통해 자살한다. 아니면 살해당한다던가. 브레송은 샤를의 죽음이 가질수 있는 감정이입의 가능성을 건조한 기사와 글자 이미지로 막아버린다. 그런데 왜 샤를은 죽음을 선택해야 했을까? 브레송은 이를 위해 샤를과 그 친구들이 어떻게 사는지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명백히 브레송보다 어린 그들은 모든 것을 혐오하지만 새로운 대답을 찾지 못한다. 이를 대변하듯이 영화 도입부의 대사는 힘을 제대로 주지 못해 걷지 못하는 것에 대한 얘기다. 그 말처럼 샤를과 친구들은 영화 내내 어느쪽이든 힘을 주지 못하고 걷는다. 이 불균형하고 무기력한 상황이야말로 [아마도 악마가]가 탐구하려는 정신적 상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브레송은 샤를과 그 친구들이 어떤 관계를 맺는지 보여주면서, 사회의 축을 이루는 거대 담론을 하나씩 부정해간다. 영화의 대사들은 다른 브레송 영화들보다 더욱 심화된, 담론과 철학에 대한 토론으로 이뤄져 있지만, 대부분의 대화는 헤매거나 부정하길 반복한다. 도입부 이후 첫 시퀀스가 정치 혁명 토론장이라는건 의미심장하다. 당연하겠지만 샤를과 친구들은 파괴의 권리를 주창하는 정치 혁명이 현실을 바꿀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은 경멸은, 아무리 옳은 의도로 파괴를 행한다고 해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가능한 것이다. 정치 혁명의 장에서 빠져나온 그들은 환경 운동에 관심을 기울이는데, 이때 브레송은 슬라이드 쇼와 영상으로 잔혹한 동물 학살과 죽어가는 지구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이미지를 보는 브레송의 카메라는 아무런 연민이 없다. 이 이미지들은 인류를 비판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인류 그 자체에 대한 애정을 잃어버렸다는 신호에 가깝다. 이런 신호를 잘 보여주는 시퀀스가 피크닉 시퀀스다. 이 시퀀스에 등장하는 소음과 농약, 군중의 아우성의 몽타주와 프레임 밖으로 잘려나간 얼굴과 파편화된 신체들은 공포스럽다.

당연히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의 고통스러운 구도의 길을 걷는 신부 같은 캐릭터는 여기에 없다. 브레송은 1968년 [온순한 여인]부터 믿음과 희생양을 무대에 올리려고 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렇게 인간이 고통받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집중한다. [아마도 악마가]는 그 중 가장 적극적으로 바닥을 찍은 영화일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파멸에 이르렀던 마지막 영화인 [돈]과 달리 [아마도 악마가]는 적극적으로 인간의 조건을 부정하고 자신을 파괴하는 사람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하듯이 브레송은 인간 관계의 두 축을 사랑과 경제로 설정한다. 이 두 축이 얽히는 순간, 인간관계는 냉담해지고 사랑은 거래 관계로 변해버린다. 이미 [온순한 여인]이나 [호수의 랑슬로]에서도 탐구한 지점이기도 하지만, 브레송은 후기로 갈수록 사랑의 진정성을 믿지 않는다. 그런걸 믿기엔 사랑은 철저한 거래 또는 현실에서 이룰수 없는 무언가로 변했기 때문이다. 사랑의 구원을 믿었던 [소매치기]와 비교하면 더더욱 잘 알 수 있다. 샤를과 친구들이 지리멸렬하게 관계를 이합집산하고 경제적 관계에 따라 애인을 바꾸고, 끝내 자신이 상대방에게 짐이 되지 않을까 내심 불안해한다.

대신 그들이 집착하는 것은 허무다. 독약이나 손바닥 위에 올려진 총알, 물로 넘쳐나는 욕조는 그들의 감수성 근처에 죽음이 어른거린다는걸 알 수 있다. [아마도 악마가]가 브레송의 이전작에 비해 더욱 절망적이라면, 패배 없는 패배자에 대한 영화기 때문이다. [온순한 여인]과 [호수의 랑슬로]의 주인공들은 자신이 어떤 윤리적 전투에서 패배하고 길을 잃었다는걸 조금이나마 인지하고 있었다. [아마도 악마가]의 샤를과 그 친구들은 무엇에 패배했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그저 그들은 승자가 될 수 없다는 걸 알 뿐이다. 브레송은 이런 패배 없는 패배자들이 느끼는 허무의 공기를 모델이 가지고 있는 즉물적 이미지를 포착하는 시네마토그래프 작법에 기반해, 이미지와 음향의 삭막한 리듬으로 치환한다. 악마에 대한 토론 시퀀스 도중 삽입된 버스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숏의 몽타주가 대표적이다. 이 장면은 마치 사람들이 주장하는 어두운 세상과 그것을 조종하는 악마의 계략이 아무런 의미없는 기계적인 운동처럼 보이게 만든다. 후기 브레송 영화들은 음향과 이미지 간의 관계에 민감해지는 모습을 보이는데, [아마도 악마가]는 의미없는 기계적 운동 이미지와 음향으로 절망을 형상화한 영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샤를의 자살 또는 타살은 이런 경멸과 무의미, 기계적인 운동이 지나가고 난 뒤 등장한다. 영화가 본격적으로 바닥을 향하는 부분은 바로 샤를의 상담 시퀀스다. 지금까지 이어왔던 거대 담론에 대한 부정을 다시 정리한 뒤, 샤를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영원한 삶을 믿을 뿐이에요. 자살한다 해도 심판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 것을 이해하지 못한 게 이유가 될 수는 없죠." 이 대사가 나온 이후부터 [아마도 악마가]는 도스토예프스키적 지옥으로 달려가기 시작한다. 샤를의 친구들은 상담이 끝나고 샤를이 변할것이라 기대하지만 브레송이 보여주는 이미지는 떨궈진 공중 전화기 숏이다. 버려진 소통의 이미지 이후, 샤를의 친구들은 결말까지 등장하지 않는다. 마침내 샤를은 친구들을 배제해버린 것이다. 샤를은 성당에 가서 잠을 청하는데, 브레송은 여기서 다시 한번 샤를을 내쫓는 성당 사람들을 보여주면서, 종교가 끝내 젊은이들을 이해하지 못했음을 명백히 한다. 샤를은 자신을 살해할 친구를 만나 그와 함께 다니는데, 브레송은 경제적인 이득과 허무의 극단으로 관계를 맺은 이들만 남은 밤의 파리를 보여주면서 그들이 어디에도 속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샤를은 묘지에서 죽는다. 심지어 유언도 제대로 남기지 못한 채 뒤통수에 총을 맞은 채. 다시 질문하자. 그는 자살한 것일까? 아니면 타살당한 것일까? 브레송은 이 대답의 애매함이야말로 동시대의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악마가]는 엔딩 크레딧이 없고 마지막 장면이 끝나자마자 영화도 끝난다. 환해진 스크린 또는 검게 남은 화면은 그 점에서 브레송의 암울한 심경을 보여주는 도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가 발표된 해가 1977년이라는걸 생각해보자. 크리스 마르케가 [붉은 대기]를 통해 한탄했듯이 1968년 혁명은 프랑스에서 실패로 돌아갔고, 프랑스는 급격하게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과 조르주 퐁피두 같은 보수주의로 기울어지게 된다. 루이스 부뉴엘은 이런 반동에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을 내놔 격렬히 조롱했다. 한편 브레송은 68 혁명의 패배자들이 흩어져가는 과정을 그린 [몽상가의 나흘밤]과 선과 악이 패배하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리에 죽은 말과 자유로운 새만 남았던 신화적 우화인 [호수의 랑슬로]로 대답했다. 영화를 만들수록 브레송은 프랑스의 반동적인 기운과 바뀌지 않는 현실에 절망감을 느끼고 영화에 대한 믿음을 잃어갔다. 그리고 1977년, 펑크 세대가 도래했다. 섹스 피스톨즈의 허무주의가 시대적 정신으로 받아들이던 시절. [아마도 악마가]는 1968년 혁명이 10주년을 맞이하는 순간, 새로이 등장한 경멸과 허무의 세대에게 바치는 영화다. 실제로 펑크 록 씬의 중요한 인물인 리처드 헬은 [아마도 악마가]를 자신이 좋아하는 브레송 영화로 꼽은 적이 있다. 펑크 세대가 불경한 문화로 경멸받던 그 해, [아마도 악마가]는 자살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한동안 개봉이 금지되었지만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나 리처드 헬 같은 민감한 이들은 이 어두컴컴한 절망을 파악한 모습을 파악하고 지지를 보냈다. 이 영화를 싫어할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 어두컴컴한 종막이 깊은 관찰과 사유를 통해 드러났다는건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Comments,   0  Trackbacks
댓글 쓰기
환송대 [La Jetée / The Jetty] (1962)

2017/09/05 - [Deeper Into Movie/리뷰] - 태양 없이 [Sans Soleil / Sunless] (1982)

마르케가 '병렬 편집'을 통해 사유했던 것은, 전쟁 이후인 현재에서 과거를 끌어들이는 방식이라고 본다. 여기엔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무언가 일어났다. 이 불연속적인 두 문장 사이의 간극을 채우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레네는 그것을 편집이라고 보았다. 상이한 두 요소를 하나의 영화로 조형하는 작업이 바로 편집인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이어붙인다고 해서 새로운 의미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상이한 것에서 어떤 유사성과 감정을 잡아내느냐이다. 레네는 그 사실을 로베르트 로셀리니의 [스트롬볼리](와 루키노 비스콘티의 [흔들리는 대지])과 아녜스 바르다의 [라 푸앵트 쿠르트로의 여행]을 보면서 배웠다.

로셀리니는 [이탈리아 여행]과 [스트롬볼리]를 통해 픽션을 연기하는 스타 잉그리드 버그만과, 다큐멘터리의 관점으로 담긴 이탈리아 시골을 영화 속에 배치하면서 영적인 구원과 낯섬이라는 감각을 이끌어냈다. 한편 바르다는 라 푸앵쿠르트를 여행하는 현대적인 성 규범을 받아들인 젊은 여행자 커플의 픽션적 시점과 가부장적인 삶을 사는 라앵쿠르트이라는 다큐멘터리적 시점을 병렬적으로 배치하면서 페미니즘적인 관점과 다큐멘터리적 관점을 결합하려고 했다. [밤과 안개]는 네오 리얼리즘과 [라 푸앵트 쿠르트로의 여행]의 성과를 발전시키는데 성공했고, 이는 레네와 마르케에게 큰 유산이 되었다.

앙드레 바쟁은 크리스 마르케가 '밤과 안개' 이후 1958년 내놓은 데뷔작 '시베리아에서 온 편지'라는 기행문 다큐멘터리를 분석하면서 '영화에 의해 다큐멘트된' 에세이며,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독특함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병렬 편집'이라는 개념으로 구체화했다. 바쟁이 지적한 병렬 편집은, '밤과 안개'가 크리스 마르케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보여준다. 알랭 레네가 밤과 안개를 편집하면서 도입한 두 개의 시공간의 병렬적 배치는 특정 공간에 속한 개인이 다른 시공간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 설명하는 예라고도 할 수 있다. 알랭 레네가 [밤과 안개]와 [석상 역시 죽는다]에서 도입했던 병렬 편집의 가능성을 픽션의 영역에서 실험했다면, 크리스 마르케는 다큐멘터리의 영역에서 발전시켰다고도 볼 수 있다.

'시베리아에서 온 편지' 이후 크리스 마르케를 주목받게 만든 단편은 바로 [환송대 La Jetee]라는 단편 영화였다. 크리스 마르케가 만든 첫 픽션 영상물인 이 영화는 그러나, 활동사진Motion picture가 아니다. 크리스 마르케는 '포토 로망'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마치 사진 슬라이드처럼 영화를 만들었다. 파리에서 핵폭탄이 터지고, 그동안 알고 있던 문명이 멸망한다. 지하로 숨어든 사람들은 한 남자를 찾아낸다. 이 남자는 핵폭탄이 터지는 순간, 공항 환송대에서 보았던 한 여자의 이미지에 집착한다. 시간 여행하는 약을 먹게 된 남자는 이미지의 근원을 찾아 시간 여행을 하게 된다.

[환송대]가 흥미로운 이유는, 기억 이미지의 근원을 찾기 위한 여정 전체가 멈춰진 사진으로 이뤄진다는 점이다. 중간에 등장하는 한 순간을 제외하고, 영화는 정지된 사진을 영화적 샷 구조처럼 배치한다. 이 정지된 이미지 속에서 끊임없이 기억을 찾으려고 한다. 이때 크리스 마르케는 말한다: "일상적인 것은 일상적인 순간에서는 아무것도 추억되지 않는다. 나중에 그 순간의 상흔들을 보여줄 때 비로소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그가 보았던 얼굴은 전쟁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평화의 모습이었다. (중략) 다가올 광기를 버텨내기 위해 부드러운 순간을 만들어낸 것일까?" 라카프라식으로 말하자면 환송대의 남자는 현재를 지배하고 있는 멸망의 풍경으로 대표되는 1차 기억을 극복하기 위해 1차 기억 직전에 있던 여인의 얼굴이라는 파생된 1차 기억을 만들었던 것이다. 약을 먹고 시간 여행을 하는 것은, 그 1차 기억을 쫓아가 2차 기억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이다.

남자가 시간 여행을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남자는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른다. 남자의 과거에서 여자는 한 순간의 강렬한 이미지만으로 남은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이미지만으로는 기억은 온전히 보존할수 없다. 그렇기에 남자는 과거로 돌아가 여자를 만나면서 구체적인 기억을 만들어야 한다. 일례로 여자는 남자를 보고 유령이라고 말하는데, 반대로 보자면 여자야말로 유령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남자가 사는 파괴된 현재에서 여자는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자는 절멸의 순간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그렇기에 남자는 자신이 살아가는 현재에서 여자를 찾지 않는다. 대신 약과 시간 여행이라는 과학적/SF 장르적 수단을 통해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1차 기억의 순간으로 돌아가 자기 방식으로 2차 기억으로 재구성하려고 한다. 이 2차 기억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는, 여자로 대표되는 절멸의 순간에서 살아남지 못한 자들을 기억하려는 남자의 절박한 시도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시도는 분절적인 순간들로 표출된다. 홀린듯한 만남에서 여자의 이미지는 조각난 채로 남자의 체내로 흡수된 뒤, 재구성된다.

마르케는 이 디테일이 확장되가는 과정을 다큐멘터리 사진의 방향성과 겹친다. 남자가 여자를 만나는 과정에 담긴 파리의 풍경은 ([아름다운 5월]이 그랬듯이) 1960년대 프랑스 파리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영화가 발표되고 시간이 많이 지난 시점에서 보자면, [환송대]는 1960년대 프랑스 파리를 기록한 횡단면이다. 1960년대가 지나가버린 미래에 살고 있는 관객은 그 시절과 함께 호흡할 수 없지만, 크리스 마르케가 35mm 필름 위에 남긴 사진을 통해 어땠을지는 상상할 수 있다. 중간에 등장하는 박물관 시퀀스는 즉물적으로 남아있던 트라우마의 기억을 스스로의 선택과 만남으로 2차 기억으로 재구성하려는 남자, 나아가 영화의 의도를 은유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 사진들은 SF 픽션 장르인 디스토피아라는 틀로써 재구성되고 있다. [환송대]는 1960년대 파리라는 공간을 두 가지 관점으로 보길 관객들에게 요청한다. 하나는 이전에 있었던 전쟁을 서서히 잊으며 평온한 일상을 누리는 현실의 파리, 또 하나는 이미 일어난 가상의 전쟁으로 파괴된 미래의 파리. 이 단편을 보면서 어딘가 2차 세계 대전 시절 파리를 연상했다면, 정확히 본 것이다. 마르케는 SF 장르를 인용하면서 과거의 한 순간이 미래의 한 순간이 될수도 있었다고, 혹은 그 역으로 전쟁으로 파괴된 2차 세계 대전 시절 파리에 대한 기록이 될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다. 1차 기억을 2차 기억으로 재구성하기 위한 시도는, 과거의 순간을 반복하지 않고 나아가고자 하는 시도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과 관계는 희미해지고, 아름다움과 파괴에 대한 시적 우울함은 1960년대 파리와 도래할지도 모르는 파국의 미래를 상상케 한다. 이런 이중화 작업은 후술할 [태양 없이]의 중심이 되는 영상과 음향의 재조립, 기계적 장치를 통한 기억의 재구성에 큰 단초가 되고 있다.

여기서 질문이 하나 더 생긴다. 결국엔 끊어질수 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 남자는 왜 여자에게 다가가려고 하는가? 서사에서는 생존의 수단이라고 설명한다. 남자를 조종하는 의사와 과학자들은 생존을 하기 위해 과거를 기억시키려고 한다. 하지만 남자에겐 의사와 과학자의 의도를 뛰어넘는 좀 더 본능적인 이유가 있다. 그것은 생의 에너지에 대한 갈망이다. 연출에서 마르케는 좀 더 흥미로운 이유를 배치해둔다. 남자를 지배하고 있는 기억 이미지의 주인공인 여자는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흐르는' 자다. 침대에 누워서 미소지으며 카메라/남자를 바라보는 여인의 모습은, 사진이 아니라 영상으로 이뤄져 있다.

스틸 샷으로만 이뤄진 영화의 구조를 생각해보면, 남자가 왜 여자의 얼굴을 떠올리려고 하는지 알 수 있다. 그것은 움직임Motion이 가지고 있는 행복함으로 다가고자 하는 본능적인 발버둥이다. 파괴된 세상에서 이전에 남아있던 움직임을 포착하려는 집착은, 남자가 여자로 대표되는 과거의 행복함에 어떤 죄책감이 있다는걸 보여준다. 이 집착은 영상의 움직임에 대한 영화광적인 매혹을 담고 있기도 하다. 실제로 마르케는 어린 시절 보았던 마르크 드 가스틴의 'La Mervilleuse vie de Jeanne d'arc'라는 무성 영화에 출연한 시몬 쥬느비에브라는 배우에 매혹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마르케의 사진집 [북녘 사람들]에서도 조선 여인의 얼굴을 담은 사진에 대한 묘사가 있었던 걸 보면, 마르케는 여성의 얼굴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에서,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근원적인 에너지를 찾았던 걸로 보인다.

하지만 마르케는 생에 대한 로맨티시즘적 감상과 낙관주의에 머무르지 않는다. 오히려 움직임을 담은 생에 대한 발버둥이 좌절되는 것으로 영화를 마무리짓는다. 로버트 하인리히의 '당신 모두 좀비'를 연상케하는 [환송대]의 순환 고리는 우로보로스적 비극이다. 영화는 시간을 탈출하는 방법은 없었으며 '자신을 사로잡는 순간'이 오히려 죽음의 순간이였다는걸 밝히면서 끝난다. 여인의 움직임이 비극과 파괴의 또다른 1차 기억에 종속되어 있다는 걸 알았을때 남자는 자신의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마르케가 생각하는 역사의 비극이란, 결과에 속한 사람이 자신을 만들어낸 원인과 과정을 바꾸지 못하는데서 시작된다. 시간 여행은 실패로 돌아가고, 남자는 끝내 미래의 여행자들에 속하지 못한다. 그저 자신이 속한 현재의 지도자들이 보낸 암살자를 통해 과거의 순간에서 죽음을 맞게 된다.

라카프라는 1차 기억과 2차 기억이 순수한 형태로만 이뤄질수 없고 트라우마를 떠올리려는 시도는 2차적일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환송대]는 1차 기억을 2차 기억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자신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고자 하는 사람으 이야기다. 과거에 대한 기억을 만드려는 2차적인 시도를 파괴된 현재가 방해하면서 무위로 돌아간다는 결말은, 현재에 대한 마르케의 인식이 아도르노적 부정성으로 이뤄져 있다는걸 알 수 있다. 당시 프랑스는 식민지에 대한 제국주의적 탄압이었던 알제리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상태였고, 2차 세계 대전에 대한 객관적 재평가는 드골 정부의 강력한 우파 정권의 힘 앞에서 뒤로 물러난 상태였다. 드골은 표면적으로는 레지스탕스를 우대하고 나치 부역자들을 처단했지만, 중요한 자리엔 나치 부역자들을 받아들였다. 나아가 알제리 같은 식민지들을 탄압하고 착취하는 것으로 구체제를 존속시키려고 했다.

[환송대] 직후 만든 [아름다운 5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나레이션은 "감옥이 있는 한 세상은 행복할 수 없다." 였다. 시간의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끝나는 [환송대]의 순환적 비극은 아도르노가 부정성 미학에서 주장했던, "고통의 언어를 통해서 화해되지 않는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라는 슬로건과 맞닿아있다. 알제리 전쟁과 과거 인식을 방해하는 내부의 파시즘이라는 당시 프랑스의 부정성은 단 한 순간의 행복에 다가가려고 하는 남자를 암살하는 남자의 시대로 표출되고, 또다른 비극의 순환 고리를 만든다. 마르케는 SF 장르의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으로 현재를 파괴된 순간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이 어떻게 1차 기억과 2차 기억을 재정립하는 시도를 방해하는지 [환송대]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크리스 마르케의 [환송대]는 시간 여행이라는 장르적 틀과 움직임에 대한 인식으로 기억을 재인식하려는 시도와 좌절을 그렸으며, [태양 없이]는 기계적 조작을 통한 추상화와 비디오 게임적 구성을, 다양한 공간과 시간에 남아있는 시간의 현기증을 포착하려고 했다. 마르케의 시도들은 병렬 편집이라는 개념에서 출발해 1차 기억을 재구성하려는 2차 기억의 방법론에 대한 고찰이기도 하며, 소비에트 몽타주 이론가들의 찬란한 자유연상적 성과를 이어가려는 시도기도 하다. 그리고 이 사유 과정에서 크리스 마르케는 이미지를 추상화하면서 동시에 역사/사회적 의미를 잃지 않는 정교한 방법론에 관심을 보였던 것 같다. 실제로 1995년 마르케는 역사 게임을 만드는 게임 디자이너의 나레이션으로 이끌어가는 [레벨 파이브]라는 작품으로 사유를 확장시킨다. 또한 말년의 크리스 마르케는 유튜브와 비디오 영상에 관심을 기울여 짧은 클립들을 올리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 그 점에서 크리스 마르케는 라카프라가 주장했던 "기억과 역사는 상호보완적인 관계며, 이 관계망 전체를 성찰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방식에 관심을 기울였던 영화 감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Comments,   0  Trackbacks
댓글 쓰기
아직 끝나지 않았다 [Jusqu'a La Garde / Custody] (2017)


영화의 시작은 이혼 소송을 위해 출근하는 조정위원들이다. 그들이 자리에 앉고 나면 카메라는 두 인물(과 그들의 변호사)을 병렬로 배치한다. 앙트완과 미리암. 미리암은 앙트완이 가족들에게 수시로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이었다고 주장하며, 반대로 앙트완은 미리암이 믿을수 없는 아내였으며, 자식들을 협박해 자신을 피해 다녔다고 한다. 그 다음 부부의 성격에 대한 다른 이들의 증언이 나온 뒤 이야기는 부부의 아들인 줄리앙으로 넘어간다. 줄리앙의 증언은 부부의 소송에 영향을 미칠 중대한 증언이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입증되기 부족하다고 앙트완은 주장한다. 

감독 자비에 르그랑은 주장을 하는 두 인물의 숏을 병렬적으로 배치하고 (둘은 시퀀스가 끝날때까지 서로 마주보지 않고 조정위원만 바라본다.) 주장이 끝났을 무렵 앙트완과 미리암, 조종위원를 동시에 보여준 뒤 묻는다.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거죠?" 이 말은 관객을 향한 말이다. 르그랑 감독은 관객에게 사전 정보를 배제하고 주장 숏을 배치한 뒤, 각자의 숏에 숨어있는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있냐고 물어본다. 아이러니하게도 소송의 중간 결과는 표면적으로는 중립적이다. (앙투안의 친자 접견권을 인정하여 줄리앙에게 2주에 한번 주말을 아버지와 보내게 하라고 판결한다.) 왜냐하면 이 시퀀스의 다른 숏에서도 한 쪽으로 기울어질만한 물질적인 증거가 끝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결정적이어야 할 조세핀의 부상 역시 앙트완의 알리바이로 반박된다. 요컨데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그걸 파악하는게 얼마나 힘든지' 보여주는 영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도입부에서 앙트완에 대해 설명하는 동료들의 증언은, 사실인것처럼 보여도 자기 포장적인 전술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미리암은 자기 포장적 전술을 거의 쓰지 않고, 실제적인 피해와 대책을 호소한다. 언술의 차이에서 폭력의 징후를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상술했듯이 조정위원회라는 공적 공간에서는 두 주장 모두 일리가 있는것처럼 보인다. 앙트완의 자기포장과 미리암의 호소는, 사적 언어가 아니라 예의바른 공적 언어를 통해 제시되기 때문이다. 요컨데 공적 영역에서는 위장이 이뤄지고 있으며, 법 체계는 그에 대한 판단을 미룰수 밖에 없다. 법은 논리적이고 명확한 설명을 요구한다. 하지만 사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명확한 설명을 하기 어렵게 꼬여있다.

이 두 영역을 제대로 판단하려면 도구와 관찰이 필요하다. 그 점에서 르그랑이 이야기를 진행하는 방식은, 가정을 세워놓고 전개하는 연구자에 가깝다. 등장인물들이 공적인 (나아가 법) 영역에서 벗어났을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야말로 [아직 끝나지 않았다]의 대전제인 셈이다. 그리고 이 대전제는 이전에 르그랑이 만든 단편 [모든 것을 잃기 전에]서 일부 선험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모든 것을 잃기 전에]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의 프리퀄이다.) 이를 증명하듯이 도입부가 끝나자 르그랑은 인물들을 공적 공간에서 사적 공간으로 보낸다. 아이러니하게도 미리암과 아이들이 새로 정착한 곳은 국가에서 지원하는 공영 아파트다.

미리암은 앙트완에게 집 주소를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미리암이 사는 곳은 현 시점의 앙트완에게는 공적인 장소나 다름없다. 이를 증명하듯이 앙트완과 줄리앙의 만남은 미리암 부모의 집 앞에서 이뤄진다. 이미 이혼 소송 중인 앙트완에게 미리암 부모는 남이며, 실제로도 미리암의 가족은 앙트완을 적대한다. 앙트완은 이를 용납하지 못한다. 여기서 르그랑은, 관계에 대한 부담감이 폭력을 가능케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앙트완은 가장 약한 고리인 줄리앙을 건드면서 자신이 빠진 (그러나 있어야 할) 사적 영역으로 진입하려고 한다. 집 문을 나서는 순간, 줄리앙은 앙트완의 뜻에 따라야 한다. 왜냐하면 줄리앙에게는 미리암이 있기 때문이다. 줄리앙이 거짓말을 한 이유도 어머니 미리암 때문이었다. 요컨데 르그랑이 관심을 가지는 부분은 공간과 폭력, 인간 관계의 네트워크인 것이다.

앙트완은 이 사실을 이용해 미리암과 줄리앙을 괴롭힌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의 무시무시함은 사적 영역에서 행해지는 폭력과 권력 관계가 얼마나 교묘하며, 그것이 공권력의 사각지대에 있다는걸 보여주는데 있다. 보안 요원이라는 설정답게 앙트완은 통제하는 법에 익숙한 사람이다. 그는 남들 앞에서는 위협하지 않으며, 직접적인 폭력을 가하지 않는다. 줄리앙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며, 줄리앙에게 직접적인 소리나 폭력을 가하지 않는다. 도망가던 줄리앙이 차량에 치일뻔하자 돌아서는 모습을 보자. 그는 아무도 안 보이는데서 정신적으로 괴롭힐줄 아는 사람이다. 그는 줄리앙을 무장해제시키면서, 조세핀 나아가 미리암에게 접근하려고 한다.

르그랑이 생각하는 권력의 근원은 거리감이다. 르그랑은 앙트완이 어떻게 줄리앙과 미리암을 가두는지 프레이밍 기법으로 인물들을 불안정하게 배치한다. 앙트완이 자신의 감정을 토로하는 시퀀스에 줄리앙이나 미리암이 없으며, 줄리앙이나 미리암이 앙트완을 거북스러워할때 앙트완은 거구로 프레임 속 두 사람을 가리거나 짓누른다. 끊임없이 회유하는 앙트완의 입은 줄리앙의 도망칠수 없는 감옥이며 미리암은 앙트완의 폭력적인 포옹을 받아줘야 한다. 당연하겠지만 앙트완/미리암,줄리앙의 시선은 서로 닿지 않는다. 심지어 사적인 공간인 집안으로 이동했을때도 이런 권력 관계는 더욱더 강해진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인물의 거리와 시선 제약을 통해 폭력의 구조화에 매달린다. 가끔 집요하다 못해 어깨에 힘이 들어간 구조적인 숏들이 보이긴 하지만, 르그랑의 야심이 단단한 뿌리가 있다는걸 보여주고 있다.

영화를 보는 관객이라면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앙트완은 왜 괴물이 되었을까?  르그랑는 캐릭터의 전사前史를 설명하지 않는다. (프리퀄 단편 [모든 것을 잃기 전에]에서도 나오지 않는다.) 다만 르그랑은 중요한 힌트를 앙트완의 친정집 시퀀스에 배치해뒀다. 먼저 앙트완과 앙트완의 아버지 조엘이 처음 만나서 하는 대사는 사냥에 대한 것이다. 매우 폭력적인 행위를 함께하는 남성성의 확인이 제시되는 것이다. 그 다음 소동을 일으킨 앙트완을 내쫓을때 조엘은 뭐라고 말하는가? "내가 이 집의 왕이다"라고 말한다. 조엘의 대사는 사적 공간의 주인으로써 선언이다. 그 선언이 매우 가부장적인 폭력으로 이뤄져있다는 건 앙트완을 대하는 조엘의 폭력적인 행동에서 잘 드러난다. 앙트완이라는 괴물이 만들어진 것은 조엘의 실책이 크다. 그렇다면 다른 질문이 생길 것이다. 왜 조엘과 아내 마들레인은 앙트완과 같은 파국을 맞이하지 않았는가. 이는 조엘을 대하는 마들레인의 태도로 설명된다. 기성 세대인 마들레인은 미리암과 달리 조엘이 보이는 폭력적인 태도에 대항할 방법을 쓰지 못한다. 요컨데 부모와 자식으로 이어지는 세대의 젠더적 관점이 반영되어 있는 셈이다.

앙트완이 줄리앙을 건드는 이유는 단순하다. 앙트완의 장녀인 조세핀은 자기결정권이 있는 어른이기 때문이다. 이는 조정위원회에서도 언급되는 사실이며, 르그랑 역시 조세핀이 임신을 확인하는 장면을 통해 이미 성년에 들어선 캐릭터라는걸 보여준다. 실제로 영화 내내 앙트완은 조세핀 근처에도 가지 못한다. 재미있는건 조세핀의 설정엔, 미묘한 계급적 욕망이 깔려 있다는 점이다. 조세핀은 음악 학교를 다니고 있고, 직장을 관둔 미리암이 감당하기엔 부담스러운 학비라고 언급된다. 여기서 조세핀이 배우는 음악이 클래식 같은 초기 투자 비용이 상당한 음악이라는걸 유추해볼수 있을 것이다. 조세핀의 음악 학교는 어떤 계급 상승 욕망이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무엘에게 연애를 통해 조세핀의 학교 생활을 방해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는 미리암의 말은, 조세핀의 성공을 통해 자신의 상황을 개선해보려는 하는 의중이 깔려 있다.

조세핀의 생일 파티는 그 점에서 여러모로 이상한 시퀀스다. 파티장에서 성대하게 열리는 조세핀의 생일은 마치 누구한테 보여주기 위해 열리는 것 같다. 대체 누구인가? 답은 파티장에 오지 못한 '그 사람'이다. 실제로 앙트완이 미리암을 만나서 하는 말이, 내가 아버지인데 딸의 생일을 축하하지도 못하냐, 다. 조세핀의 성대한 생일 파티는 앙트완을 향한 선전포고다. "더 이상 날 때리지 못할 것." 이 파티장을 빌리라고 돈을 낸 사람이 앙트완을 죽여버리겠다고 으르렁거리는 미리암의 아버지라는걸 생각해보면 더 명백해진다. 그것을 증명하듯이 르그랑은 파티장 시퀀스 중 일부에서 대화를 빼버리고 배경 음향만 남긴다. 이 영화에서 앙트완의 벨소리가 음향 몽타주로 불편함과 긴장감을 유도한다는걸 생각해보면 파티장의 소음이 앙트완의 벨소리를 차단하는 안전 장치 역할을 하고 있다. 즉슨 미리암과 남매는 공적 영역에서 타인들의 소음을 통해 보호받는다.

그런데 이 뒤 등장하는 시퀀스에게 밖으로 불려나가 앙트완에게 위협받는 미리암과, 조세핀과 남자친구 사뮤엘의 축가 연주 장면이다. 두 시퀀스가 동시에 전개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조세핀과 사무엘의 연주 장면을 분석해보자. 조세핀과 사무엘이 무대에 올라와서 연주하는 곡은 클래식이 아닌 록이다. 심지어 연주하는 곡은 C.C.R.의 Proud Mary다. 이 곡은 일상을 떠나 미국을 방랑하는 내용의 곡이다. 원곡은 남성이 불렀지만, 이 곡을 커버해서 유명해진 가수 중엔 여성인 티나 터너가 있다. 그런데 티나 터너는 가정 폭력을 당한 경력이 있다. 마지막으로 조세핀과 사뮤엘은 모든 불을 끄고 인사를 하듯이 쪽지를 남기고 퇴장하는 장면을 끝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이 모든 행동과 상징은 마치 미리암의 상황을 은유함과 동시에, 계급 상승의 바람을 배반하는 것처럼 보인다.

당연하겠지만 조세핀과 사뮤엘의 퇴장은 임신으로 인한 도주다. 임신이라는 사건은 어떻게 조용하게 수습될만한 사건이 아니다. 조세핀은 앙트완이 개입하는게 싫어서 계급 상승에 대한 노력을 포기하고 도주를 선택한다. 요컨데 더 이상 쫓아올수 없을 정도로 자신과 아버지 간의 거리를 벌리는 것이다. 하지만 조세핀의 도주엔 상황의 회피 뿐만이 아니라 공황으로 인한 판단력의 마비도 포함되어 있다. 다시 조세핀이 임신을 확인하는 장면으로 돌아가보자. 조세핀이 임신을 확인한 순간 보이는 반응은, 기쁨이 아닌 공포과 충격에 질린 숨소리다. 조세핀은 가정의 파탄을 지켜본 아이다. 아이가 생긴다는 것은 가정이 생긴다는 얘기고, 자신의 부모를 반복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마주하는 일이다. (작년 말 개봉한 [초행]이 그랬다.) 조세핀은 이런 현실에 이성적으로 대처할 연륜을 쌓지 못했다. 그런걸 쌓을 수 있는 환경도 아니기도 했고. 조세핀과 사무엘의 도주에 어둠이 깔려있다는 점은 그 점에서 불길하기 그지 없다. 남은 희망은 사뮤엘이 앙트완과 달리 조세핀의 공황을 얼마나 진정시킬수 있는가, 이다.

그러나 조세핀과 사뮤엘의 퇴장한 뒤 남은 어둠이 미리암과 줄리앙으로 이어지면, 불길한 예감을 할 수 밖에 없다. 미리암은 대체 왜 앙트완에게 들통난 공용 아파트로 돌아오는가? 그것은 일종의 자기 위로일것이다. 그 정도로 했으면 앙트완이 자신의 영역에 접근하지 않으리라는 믿음. 하지만 그 믿음은 현관을 두들기는 앙트완의 음향을 통해 박살난다. 여기서부터 르그랑은 명백히 호러 영화로 만든다. 줄리앙이 앙트완이 총을 발사하면서 일시적으로 청각을 상실하는 장면은, 앙트완에게서 신경질적으로 울려대던 벨소리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제 더 이상 줄리앙은 앙트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고, 들을 가치도 잃어버렸다. 상황은 연쇄살인마에게서 도주하려는 모자로 변모한다. 미리암과 줄리앙이 숨어든 장소가 화장실이라는 점은 [샤이닝]을 의식한 것일까?

이때 미리암과 줄리앙을 구원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두 얼굴이다. 하나는 경찰서 오퍼레이터고, 또다른 하나는 앞집에 사는 할머니다. 이들은 앙트완 시야 바깥에서 앙트완의 행동을 제지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오퍼레이터의 정면 숏과 욕조 안에 숨은 미리암과 줄리앙의 숏이 붙는 순간 긴장과 동시에 어떤 안도감을 느낄 수 있다면, 공권력이 마침내 사적 영역의 폭력을 파악헀기 때문이다. 이제 오퍼레이터는 앙트완/미리암, 줄리앙 사이에서 벌어지는 폭력을 증언할 수 있는 자가 된다. 앙트완이 제압당하는 장면은 그 점에서 이상하게 연출되었다. 우선 샷건을 들고 어둠 속에서 걸어오는 앙트완의 숏은, 가정폭력범의 모습이 호러 영화의 공식을 통해 구체화된 숏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앙트완은 연쇄살인마나 다름없다. 이때 경찰들이 등장해 앙트완을 제압한다. 

르그랑은 이 상황의 전후 숏과 동선을 이상하게 붙였다: 이전까지 보이지 않았던 경찰 기동대가 갑자기 나타나 앙트완의 뒤에 순간이동해 제압하는 것처럼 붙였다. 이때 경찰 기동대의 음향은 전혀 들리지 않는다. 대체 그들은 어디서 나타났단 말인가? 상식적인 답은 '앙트완 몰래 현관문을 열고 숨어든 경찰 기동대가 덮쳤다'가 답일 것이다. (상황 자체도 그것 말고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이 기습과 국면 전환의 숏이 앙트완의 시점에 맞춰 갑작스럽기 때문에 전후 관계를 다시 생각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 상식적인 동선을 상식적인 숏과 편집으로 붙이지 않았다면 다른 의도가 있다는 뜻이다. 공간의 주도권이 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 편집을 이렇게 구상했다, 라고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미리암의 공영 아파트는 앙트완과 공포에 떠는 미리암과 줄리앙 밖에 없었다. 앙트완은 한때 자신에게 공적이었던 영역을 밀고 들어왔고 사적인 지옥으로 화하기 직전이다. 하지만 미리암과 줄리앙, 앞집 할머니는 경찰에 도움을 요청했고, 앙트완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 무지로 인해 앙트완은 공간의 권력을 잃고 경찰에게 제압당한다. 앙트완의 단말마가 "내 아내"라는 소유격적인 대사라는 점은 공간의 권력을 잃은 자의 발악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남는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적 영역 속 폭력에 대한 시민 사회의 감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영화일까?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사람이 미리암이나 줄리앙이 아닌, 앞집 할머니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이 할머니는 어둠 속에서 전화를 걸고, 불을 끄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위험을 피하는 상식적인 행동이긴 하지만, 앞집 할머니가 보이는 극도의 조심스러움은 흥미롭다. 앙트완은 할머니, 나아가 앞집에 누가 사는지 인지하지 못했다. 앞집에 할머니가 산다는 걸 아는 사람은 미리암과 줄리앙 뿐이다. 할머니의 행동이 보이는 조심스러움과 시점 숏으로 제시된 미리암과의 시선 교환, 총격전으로 부서진 문 이미지는 익명의 선의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암시를 남기고 있다.이 부분을 설명하면 내용을 넘어서는 상상의 문제가 되기 때문에 확언을 하지 않겠다. 다만 할머니의 시점 숏에서 사건 이후의 삶과 상처를 걱정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는건 확실하다. 그리고 이 걱정은 냉철한 연구자의 태도로 서사를 전개했던 자비에 르그랑의 연민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Comments,   0  Trackbacks
댓글 쓰기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 [Le lion est mort ce soir / The Lion Sleeps Tonight] (2017)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카메라가 돌아간다. 죽음을 맞이하게 된 배우는 테라스에 있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는다. 이때 카메라는 늙은 배우의 얼굴로 다가간다. 스와 노부히로는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를 시작하면서, 의도적인 기만을 부린다. 사전정보 없이 이 영화의 도입부를 보게 된다면, 시퀀스 배치가 잘못된 것 아닌가라는 위화감을 받게 될 것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시작으로 하다니. 당연하겠지만 이 장면은 극중극이다. 컷 소리와 함께 배우는 눈을 다시 뜨게 되고, 다음 시퀀스인 분장실로 넘어간다.

촬영을 종료하고 장은 스태프에게 말한다. 옛날 독립 영화는 원 신 원 컷으로 찍었고 다음이 없었다고. 스와는 여기에 동조하듯이 도입부를 원 신 원 컷으로 찍었다. 시간 이미지가 타임코드의 데이터로 기록되는 시대에서 스와와 장은 시간을 기록하는 매개체라는 개념으로써 영화를 주장한다. 하지만 동조와 별개로 장은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 사실 영화에서 죽음을 연기한다는 것만큼이나 기묘한 영역도 없을 것이다. 생물이 죽음을 경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태사다르 얘기가 아니다.) 하지만 영화에서 죽음을 재현하는 일은 의외로 흔하다. 스와는 이 지점에서 서사의 모티브를 얻는다. 대체 경험없는 재현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 이 질문 앞에서 촬영 현장은 잠시 중단된다.

스와는 실마리를 유령 영화에서 찾는다. 영화 제작은 중단되고 장은 근처 마을에서 휴가를 보내기로 한다. 그런데 그 저택은 장의 옛 여자친구 쥘리에트가 살던 집이다. 그 집에 머물면서 장은 쥘리에트의 유령을 만나게 된다.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는 유령 들린 저택 영화지만, 호러 영화는 아니다. 쥘리에트의 유령은 별다른 원한도 해결해야할 숙원도 없다. 그들은 산책을 하거나 앉아서 대화를 나눈다. 이 둘이 나란히 놓였을때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역시 육체적인 대조일것이다. 이미 죽어서 실체 없는 과거의 이미지로만 남은 쥘리에트는 여전히 젊고 아름답지만, 장은 늙었다. 그 대비에서 세월의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장을 맡은 장 피에르 레오는 팔팔한 소년의 얼굴로 은막에 데뷔했다. 소년에서 시작해 청춘, 장년까지 인생 전부를 은막에 맡긴 사람이다. 그런 그가 늙고 노쇠한 육신으로 앉아있다.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는 그 점에서 제임스 맨골드의 [로건]처럼 스타의 노쇠한 육체 이미지가 영화의 분위기를 결정짓는 영화다.

쥘리에트가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의 진리를 상징한다면, 쥘을 비롯한 아이들은 시간의 흐름을 상징한다. 아이들의 시점에서 본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는 귀신 들린 저택 영화다. 아이들은 쥘리에트를 알지 못한다. 안다고 해도 막연한 소문 뿐이다. 그렇기에 아이들과 장의 만남은 어딘가 어색한 거리감이 감돈다. 장은 과거의 회고에 젖어 조용히 있고 싶지만, 이 저택의 내막을 잘 모르는 아이들은 장을 유령이라 착각한다.  그런데 이 착각은 어느정도 뼈가 있는 착각이다. 아이들은 쥘리에트를 모르는 것 이상으로 장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장은 영화를 찍고 있지만, 아이들은 장이 나왔던 영화를 언급하지 않는다. 요컨데 그들은 스타로써 장이 아닌, 평범한 배우로 그들을 받아들인다. 이를 위해 스와 노부히로는 배경이 되는 마을에서 어른의 비중을 확 빼버린다. 이 영화에서 초반부 이후로 등장하는 어른은 아이들의 영화 만들기를 돕는 영사 기사와 쥘의 어머니 뿐이다. 그런데 영사 기사는 장을 아는 체 하지 않고, 쥘의 어머니는 영화가 끝날때까지 장과 만나지 않는다. 요컨데 장은 현재에 뚝 떨어진 과거다.

그런데 아이들은 대체 뭘 하러 저택에 왔단 말인가? 장이 배우라는걸 생각해보면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의 아이들이 영화를 찍으려고 온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불쌍한 장은 촬영을 쉬러 왔음에도 영화를 찍어야 하는 신세다. 물론 아이들의 영화 촬영은 초반부에 등장했던 진지함과는 거리가 멀다. 호러 영화를 자처하지만, 돈도 없고 특수 효과비도 없는 아이들도 뭔가 거창한 영화를 만들 생각은 전혀 하고 있지 않다. 아이들에게 영화 만들기는 놀이다. 아이들이 들고 있는 카메라가 디지털 캠코더라는 점 역시 그 유희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영화 만들기는 놀이 이상으로 어떤 구체적인 계획이 필요하다. 정작 아이들은 딱히 계획이 없다. 그저 장이 배우라는 사실을 알고 캐스팅을 시도하려는 정도다. 상술했던 필름 시절 원 신 원 컷의 정신에 대한 초반부 대사랑 스와 노부히로가 디지털 삼인삼색으로 DV 영화를 찍었던 걸 생각해보면 흥미로운 지점이다.

결국 노련한 배우 장은 아이들에게 영화 만드는 법을 하나씩 가르치기 시작한다.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의 미덕은 이 가르침이 고압적인 방식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장은 실제 장 피에르 레오의 성격을 반영한듯한 퉁명스러운 노인네지만 최대한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주려고 한다. 다소 실소가 나오는 호러 코메디 시나리오도 진지하게 받아준다. 물론 시행착오는 있다. 장과 아이들이 한 시퀀스를 반복해 찍는 장면이 그렇다. 이 장면에서 아이들은 언제 들어와서 어떤 대사를 하고 어떻게 나가는지 모른채 끊임없이 실수한다. 마지막 테이크에서 장이 제멋대로 대사를 치고 나가버리는 것도 그의 짓궃은 유머가 반영되어 있다. 어찌보면 영화의 중반부는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젊음과 죽음을 준비하는 노년 간의 희극적인 줄다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영화는 기어이 만들어진다. 아마도 쥘의 고백이 큰 공헌을 했을지도 모른다. 쥘은 아이들 중 유일하게 상실과 그 이후의 삶이 뭔지 아는 아이다. 쥘은 아버지를 잃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려는 어머니에게 혼란을 느낀다. 쥘의 고백을 통해 장은 쥘에게 동질감을 느낀다. 쥘은 그 점에서 쥘리에트의 거울쌍적인 변주라 할 수 있는 캐릭터다. 쥘리에트를 잃은 장은 이제 막 상실을 경험한 쥘을 위로하기 위해 영화에 조금 더 진지해진다. 아이들과 장이 찍기로 한 마지막 장면은 호수에서 이뤄진다. 호수로 가는 버스에서 아이들은 The Lion Sleeps Tonight이라는 노래를 듣고 들어본적이 있다며 알아차린다. 연결고리가 없는 두 세대 간에 연결고리가 만들어지는 순간, 즐거운 합창이 영화 속 영화의 결말로 인도한다. 이 즐거운 합창은 스와 노부히로가 생각하는 예술의 힘이다. 그리고 장은 처음으로 쥘리에트의 비극적 죽음에 대해 아이들에게 털어놓는다.

장이 잠시 혼자 남아있을때 장은 쥘리에트의 유령을 다시 만나게 된다. 해후와 애끓는 안타까움의 고백 뒤에 쥘리에트는 장을 남겨두고 사라진다. 다시 만날수 있냐는 장의 말에 쥘리에트는 모호하지만 긍정의 뜻을 남긴다. 쥘리에트는 물 속으로 걸어들어가 사라지는데, 이 쇼트는 아이들이 찍던 영화의 결말과 비슷하다. 장의 기억을 반영한 아이들의 영화가 만들어지는 동안 쥘리에트는 장 앞에서 현존했고, 반대로 아이들의 영화가 완성되자 쥘리에트는 완전하게 영점으로 돌아갔다. 쥘리에트는 다시 만난다는 것은 기적 또는 죽음을 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장은 죽지 않는다. 또는 자살하지 않는다. 로건이 죽은 이들을 거쳐 로라와 아이들에게 마지막 생의 의지를 되찾었던 것처럼, 장은 아이들과의 영화 작업을 통해 자신에게 아직 남아있는 일이 있다는걸 알게 된다. 바로 죽음을 연기하는 일이다. 짧은 휴가는 그렇게 끝나고 장은 마치 백일몽처럼 아이들앞에서 사라진다. 아이들의 반응 역시 신기루를 놓친듯한 아쉬움과 묘한 깨어남을 보인다.

하지만 쥘이 남아있다. 다른 아이들처럼 아쉬움을 품고 마을을 거닐던 쥘은 골목에서 사자를 발견한다. 뜬금없는 환상 시퀀스지만, 쥘만이 볼수 있다는 점에서 스와 노부히로의 의도는 명백하다. 쥘은 장과의 짧은 만남이 결코 신기루가 아니라는걸 알고 있다. 쥘과 장이 다시 만날 가능성은 적을 것이다. 하지만 장은 쥘을 통해 버스에 흘러나오던 노래처럼 불멸의 존재가 되는데 성공했다. 스와 감독은 죽음을 극복하는 것을 누군가 기억되는 것이며, 그것이 영화라는 매체와 배우의 본질과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영화의 마지막은 다시 죽음을 연기하는 장이다. 하지만 망설였던 초반부와 달리, 마지막의 장은 더이상 망설이지 않는다. 아이들과 함께 영화를 만들면서 죽음과 소멸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넘어서, 그것이 자신의 일부였다는걸 알게 된 것이다. 이 망설이지 않음은, 이제 말년에 접어든 장 피에르 레오 자신의 다짐이기도 할 것이다. 스와 노부히로는 그 다짐을 노사자의 뜬 눈을 강조하는 것으로 구체화한다.


  Comments,   0  Trackbacks
댓글 쓰기
패터슨 [Paterson] (2016)

뉴저지 주 패터슨 시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인구 10만명 정도 되는 이 소도시는 치안이 그리 좋지 않다는걸 제외하면 흔한 교외 지역이다. 하지만 짐 자무시의 눈에 이 평범함은 단점이 아니다. 오히려 강점이다. [패터슨]은 일종의 농담으로 영화를 시작한다. 패터슨 시에 사는 버스 드라이버이자 시인 패터슨 (아담 드라이버가 연기하는)이라는 말을 들으면, 보통 코미디 영화인가 싶을 것이다. 어느 정도는 유머기도 하다. 자무시가 유머를 싫어했던 적이 있었던가? 하지만 A-B-A 구조가 문학의 운율이나 리듬을 연상케하는걸 주의해보면, [패터슨]의 반복된 유머는 영화의 구조를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고다르 이후에 데뷔한 영화 감독답게 구조를 생각하면서 만드는 감독이긴 했지만, [패터슨]은 여타 자무시 영화 중에서도 그 구조가 뚜렷하게 보이는 영화다.

[패터슨]은 월요일에서 일요일까지 개별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개별 장으로 구성된 영화들은 대체로 장마다 다른 상황과 샷, 몽타주를 보여주기 마련이다. 하지만 [패터슨]은 장이 넘어가도 비슷한 상황과 샷을 반복한다. 전제를 살펴보자. 패터슨은 아내 로라와 함께 사는 아마추어 시인이며, 버스 운전사다. 매일 아침 일어나 프레이크로 아침을 먹고, 버스 운전을 한 뒤 퇴근해 바에 가서 술을 마신다. 전개로 보자면, [패터슨]은 같은 순간을 반복하는 영화다. 도입부인 월요일은 영화 전체의 구성을 관객에게 각인시키는 역할을 한다. 화요일이 되었을때 영화는 패터슨의 삶, 나아가 영화의 리듬을 깨닫게 하고 수요일부터 변주에 들어간다. 이렇게 시작한 변주는 주말이 되면서, 변화를 맞이하고 결말에 도달하게 된다. 자무시는 [패터슨]을 만들면서 기승전결의 구조를 최소한으로 남겨두고 뼈대로만 영화를 만들고 있다.

[다운 바이 로]의 숲 속에서 헤매는 시퀀스라던가 [고스트 독]의 아이스크림 장수 시퀀스에서 드러나듯이, 자무시는 같은 요소의 반복과 변주로 최면을 걸 줄 아는 감독이다. 그의 영화 중 가장 오즈 야스지로 영화에 가까운 [패터슨]는 패터슨의 심리 변화를 일상을 구성하는 개별 쇼트에 섬세하게 깔아두고 관객이 파악하도록 만들었다. 첫번째 날을 통해 관객은 패터슨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게 된다. 두번째 날부터 관객은 패터슨의 삶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알게 된다. 버스, 폭포, 골목길, 도시락, 불독, 바, 성냥갑 그리고 시 노트....

영화가 진행될수록 이 디테일은 늘어나거나 달라지거나, 심지어 사라진다. [패터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별 쇼트를 차지하는 삶의 요소가 패터슨과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키는지 감지해야 한다. 로라가 만든 컵케이크를 한 입 베어물고 다시 도시락 통에 집어넣는 패터슨의 쇼트라던가 각 장 마지막을 장식하는 맥주잔을 들여다보는 쇼트의 유무가 대표적이다. 가끔 자무시는 패터슨의 심리를 반영한 오버랩과 음향 몽타주로 일상의 순간을 채색하기도 하다.

자무시가 보는 패터슨 시는 웃기면서도 어둠을 간직한 도시다. 먼저 주목할만한 부분은 인종/사회 서브텍스트다. 패터슨은 백인이지만, 패터슨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은 흑인이나 인도인이 많다. 생활에 찌든 인도인 버스 기사 동료, 세탁소에서 랩을 하는 메소드 맨부터 시작해 패터슨 시는 백인보다는 흑인이나 인도인 같은 인종들이 눈에 보인다. 심지어 패터슨의 아내인 로라조차 이란계라는 암시가 들어간다. 허리케인 카터와 아나키즘에 대한 언급부터 차를 탄 채 흥청망청 노는 건달들, 금요일에 등장하는 에버렛의 가짜 총격전 소동은 패터슨 시의 불안과 어둠이 어떤 식인지 편린을 살짝 보여준다. 패터슨은 그 불안과 어둠에서 한발 짝 떨어져 평화롭게 살지만,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이 불안과 어둠은 패터슨이 겪는 창작의 난항과 맞물려간다. 

여기다 패터슨의 과거는 의외로 밝지 않다. 침대 근처 놓여진 사진들을 추측해보면 패터슨은 군에서 제대한 사람이다. 패터슨이 (실제 미군으로 복역했던) 애덤 드라이버의 자전적인 캐릭터일리는 없겠지만, 나이가 애덤 드라이버랑 비슷하고 2010년대가 배경이라고 생각하면 패터슨은 9/11 테러 이후 입대한 미군 세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패터슨]의 인종 설정은 조금 특별해진다. 험악했던 21세기 미국-중동 간 정세에 관련되어 있던 폭력 전문가가 제대 후 이란계 아내과 다양한 인종의 동료들을 두고 시를 쓰며 평온하게 살고 있게 되기 때문이다. 자무시는 이 설정을 통해 반 이민주의 시대에 미국이라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폭력 전문가가 어떻게 현실로 돌아올수 있었는지 한번 곱씹어보고 싶었던 것 같다.

다시 창작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패터슨]의 창작은 더블 이미지와 연계되어 있다. 월요일 아침, 로라는 쌍둥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로라는 만약 낳는다면 자신과 패터슨을 닮은 쌍둥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직후 밥을 먹던 패터슨은 오하이오 블루 매치를 보고 시를 쓰기 시작한다. 자무시는 창작 과정을 일상 속에 배치된 대상을 인식하고 그것을 자신의 감각으로 다시 만들어내는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낸 창작물은 대상을 반영했지만, 궁극적으로 다른 더블 이미지로 남게 된다. 마치 쌍둥이처럼 말이다. 스크린 위에 새겨지는 패터슨의 시어를 담은 자막은 실재하는 대상을 재창조하는 과정을 형상화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패터슨 뿐만이 아니라 로라에게도 해당되는데, 로라는 그것이 매우 기술친화적인 방식으로 이뤄진다는 점에서 차이점이 있다. 패터슨이 반복한다면 로라는 매일 새로운 것을 시도한다. 로라는 기타 연주와 컵케이크 만들기를 유튜브 영상을 통해 체득한다. 자무시는 부부가 서로 존중하듯이 두 가지 방법 모두 존중한다. '방법'은 다르지만 결국 똑같은 '원칙'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봉 후 인터뷰에서 자무시는 음반을 모으고 연필로 시나리오 작업하는 자신의 삶에 자식들이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하면서도 창작의 방식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한바 있는데 패터슨은 그 점에서 자무시의 지론이 반영된 캐릭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재능이 있다. 영화 중반부에 들어서면 재능의 문제는 영화 핵심을 관통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는 로라와 패터슨의 포물선이 다르다. 로라는 모든 창작에 대해 초보자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시작한다. 로라는 처음 창작을 했을때 느끼는 신선함에 매혹된 사람이다. 당연히 로라의 시도는 어딘가 어설프기 그지 없다. 꾸준히 축적되어 있는 상태의 창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무시는 이 어설픔을 도로 도시락통에 들어가는 한 입 베어문 컵케이크라는 필로우 쇼트로 압축해 보여준다. 로라를 바라보는 패터슨의 눈빛이 약간 걱정을 담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로라는 꾸준한 자세로 자신의 어설픔을 극복하고 소기의 성과를 낸다. 주말에 이르면 판 컵케이크는 대성공을 거두고 기타 연주 역시 그럴싸해진다. 

반대로 패터슨은 이전부터 꾸준히 쓰고 있는걸로 묘사된다. 그러나 정작 패터슨은 자신이 쓴 시를 발표할 생각이 없다. 가장 큰 이유는 겸손함이다. 패터슨은 시에 엄청난 자부심 같은 것은 없고 명성에 대한 욕심도 없다. 패터슨은 자신의 시를 로라와 같이 공유하는 것으로 만족할 뿐이다. 하지만 동시에 패터슨은 내심 자신이 쓰는 시가 뛰어나길 바란다. 이 모순된 감정이야말로 패터슨의 좌절을 이끄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패터슨은 시를 쓰는 소녀를 만나, 자신이 생각하지 못했던 시어가 쓰여진 시 노트를 본다. 이내 무표정으로 묻히지만 패터슨의 감정에 동요가 일어났다는걸 눈치챌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자무시의 태도는 마츠모토 타이요의 [핑퐁]만큼이나 현실적이고 명확하게 말한다. 세상 어딘가엔 범인을 뛰어넘는 천재가 있다. 패터슨의 재능은 노력으로 갈고 닦은 재능이지, 선천적으로 타고난 천재의 재능은 아니다. 계속 반복될 것만 같은 패터슨의 일상을 흔들리는 순간도 천재를 만났을때 이뤄진다. 다소 생뚱맞은 [잃어버린 영혼의 섬] 인용은 외친다. "사람을 해부하고 있어요. 살아 있는 사람을 조각 낸다고요! 원주민이 이상한 이유를 알았어요 그들은 희생자들이에요!"

패터슨은 자신의 창작 과정이 천재의 그것과 달리 살아있는 일상을 조각내면서 만든 키메라가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자신의 창작물에 대한 의심이 커졌을때, 일상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고 좌절감은 지속된다. 여자에게 버림받고 가짜 총격전 소동을 일으키는 에버렛과 시 노트를 아작낸 부부의 개 마빈은 그 점에서 패터슨의 심리에 반응한 사건일지도 모른다. 자무시는 여기서 물질 매체의 유한함을 언급하면서 패터슨이 그동안 만들어왔던 창작물 대부분을 무로 만들어버린다. 발표되지 않은 시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 백업하지 않은 문서는 영원히 어둠 속으로 묻혀버린다. 심지어 기술조차도 일어나버린 소멸을 막지 못한다. 일순간에 패터슨의 시는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그동안 써왔던 시는 사라지고 패터슨은 창작을 지속해야 하는지 고민에 빠진다. 창작의 상징이었던 폭포 앞에서 패터슨은 패터슨 시로 여행 온 일본인 시인을 만난다. 일본인 시인은 패터슨 시의 지정학적 정보를 꺼내며, 패터슨이 좋아하던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 얘기를 꺼낸다. 일본인 시인은 패터슨에게, 몇 가지 사실을 가르쳐준다. 어떤 예술가는 일상을 유지하면서 훌륭한 작품을 써냈다는 걸. 그리고 "때때로 빈 종이가 가장 큰 가능성을 보여주지요."라는 말을 남긴다. 일본인 시인이 떠난 뒤, 패터슨은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한다. 자무시는 이 일본인 시인을 통해 일본 문화에 대한 매혹과 더불어 노자/장자부터 시작해 세이 쇼나곤의 오카시로 이어지는 관찰과 깨달음의 경지를 영화로 끌어온다.  아하, 라는 대사는 그 점에서 새로운 깨달음이자 시작이다.

창작물이 파괴되고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일상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패터슨 시의 패터슨가 할 수 있는 것은 포기하지 않고 빈 종이의 가능성을 지속하는 것이다. 어찌보면 패터슨은 로라의 깨달음을 다른 형태로 받아들인 셈이다. 매번 새로운 것을 접근하고 만들어내는 로라의 접근방식은 패터슨에게도 적용되고 교훈을 남긴다. 결말은 새로운 공책과 일주일의 시작이다. 패터슨 시는 그렇게 하루를 살 것이고, 패터슨은 유명해지지 않더라도 시를 계속 쓸 것이다. 짐 자무시의 [패터슨]은 그 점에서 패터슨 시의 지정학적인 정보에서, 미국의 일상을 찾아낸 뒤 일상의 신비로움과 창작의 회노애락을 사람들에게 깨우치게 만드는 영화다. 그리고 그는 창작의 과정이 더 많은 가능성을 만들어내기 위해서존재한다고, 시의 문장을 마무리짓는다.

우리는 뮤즈를 부를 수는 없지만 이렇게 각자의 할 일을 하다 보면 어느 날 음악이 우릴 행복하게 하는 밤뮤즈가 다녀갔다는 걸 알 수 있을 뿐.
-김목인, '뮤즈가 다녀가다'


  Comments,   0  Trackbacks
댓글 쓰기
바다의 침묵 [Le Silence De La Mer / The Silence of the Sea] (1949)

장 피에르 멜빌은 이전까지 없는 길을 만들면서 영화를 시작했다. 멜빌은 메이저 스튜디오에 들어가지 않고 존 카사베티스가 그랬듯이 개인 스튜디오를 차렸다. 멜빌은 장편 데뷔작으로 베르코르 (본명 장 브륄레)의 소설 [바다의 침묵]을 점찍었다. 멜빌이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던 도중, 런던 공습 아래에서 마음을 빼앗겼던 소설이었다. 하지만 당시 영화계가 그랬듯이 조합에 소속된 멜빌이 판권과 영화 제작 권리를 얻는건 힘든 일이었다. 결국 긴 투쟁 끝에 베르코르가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고 영화화하는데 허락했다. 그 조건은 바로 24명의 레지스탕스 멤버들에게 영화를 보여준 뒤, 투표를 해 공개 여부를 결정한다는 점이었다. 말이 결정이었지, 24명 중 1명이라도 반대했다면 감독 멜빌은 다른 데뷔작을 들고와야 할 상황이었다. 이제 겨우 전쟁이 끝난 시기인데다 멜빌 역시 레지스탕스 출신이니 이 조건을 거부할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멜빌의 데뷔작은 어렵게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오프닝은 그 점에서 갓 장편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초짜 감독 멜빌의 조심스러움과 끝나버린 한 시대를 바라보는 시선이 담겨있다. [바다의 침묵] 도입부는 단순히 액자식 구조라 하기 힘들다. 멜빌은 책을 주고받는 과정을 익명화된 얼굴과 은밀한 행동, 장식 없는 하얀 표지의 책이라는 이미지로 일종의 범죄 거래처럼 묘사한 뒤, 책을 펼치면서 관객을 이야기로 인도한다. 이 이상한 오프닝은 어딘가 간절하다. 이후 대두될 범죄 장르적 묘사는 차치하더라도, 이 은밀한 행동과 이미지들은 억압되어 있다. 멜빌은 마치 얼마전까지 있었던 비시 프랑스 시절의 생활 양태가 어땠는지 잊지 않으려고 한다. 전체와 어울리지 않는 사족같이 보일지 몰라도, 멜빌은 [바다의 침묵]을 만들면서 자신이 겪었던 역사의 비극을 어떻게 다뤄야할지 고민하고 있다.

이 억압은 [바다의 침묵]의 기이한 구조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단서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프랑스 시골 마을에 나치 군대가 주둔하고, 나치 장교 베르너 폰 에브레낙은 한 노인과 노인의 질녀가 머물고 있는 집에 하숙하게 된다. 프랑스를 좋아하는 베르너는 친절하고 정중하게 노인과 노인의 질녀에게 말을 건다. 그 주제는 베르너 자신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 프랑스 문화에 대한 매혹이기도 하다. 하지만 노인과 노인의 질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날마다 베르너는 두 사람이 있는 거실로 찾아와 말을 걸고 베르너의 대화 시도는 독백으로 끝난다. 

이 작품에서 침묵은 그 점에서 복잡한 함의를 갖는다. 침묵은 매우 수동적인 저항이다. 침묵은 사람을 죽일수도, 바꿀수도 없다. 하지만 말을 해야 하는 강제된 상황을 거부할수는 있다. 노인과 노인의 질녀는 살고 싶으면서도,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베르너는 그걸 알고 있다. 그가 계속 말을 걸러 오는 이유도, 그 침묵을 깨고 나치 독일로써 프랑스를 받아들이기 위한 시도다. 베르코르는 그 긴장 관계를 서술 방식을 통해 구축한다. 원작 소설은 노인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하지만 노인은 주변을 관찰하거나 최소한의 행동만 할뿐 끝나기 직전까지 베르너한테 말을 걸지 않기에 1인칭 주인공 시점은 이내 질녀와 진주인공 베르너를 관찰하는 1인칭 관찰자 시점이 되버린다. 베르코르는 침묵을 이용해 시점을 교묘하게 넘나들고 있다.

하지만 소설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서술 방식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레이션을 이용할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원작의 문장 일부가 나레이션으로 등장한다.) 영화는 시각적인 매체이기에 보이지 않는 나레이션은 보이는 이미지에게 밀려나기 마련이다. 그가 선택한 방식은 무성 영화와 유성 영화 간의 충돌을 은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멜빌은 끊임없이 시선을 맞추려는 베르너와 노력과 아예 베르너에게 등진 두 사람을 프레임에 배치하면서 침묵의 권력 관계를 설정한다. 그리고 대사가 흐르는 동안 두 사람의 클로즈업를 배치하면서 침묵하는 얼굴의 부동성을 강조한다. 무수한 클로즈업은 베르너의 유창한 대사에 대항해 베르너의 모습을 지워버리려고 한다. 어떤 지점에서 [바다의 침묵]은 정기적으로 연극 무대에 오르는 배우들에 대한 얘기이기도 하다. 날마다 인물들은 위치가 배정받고 정해진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중요한 점은 원작과 영화 모두 권력을 쥐고 있는 베르너를 타자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서술을 담당하는 노인과 노인의 질녀는 사실 '침묵'외는 다른 부분은 두드러지지 않는다. 가끔 베르너가 등장하지 않을때, 얘기를 나누지만 그리 중요한 정보는 나오지 않는다. 어떤 점에서 그들은 무거운 침묵 자체가 캐릭터화된 것처럼 보인다. 자연히 우리는 서술의 대상이 되는 베르너에게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베르너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력에 살짝 도취된듯 하면서 교양과 인류애, 잔혹한 현실 간의 괴리에 좌절감을 느끼는 입체적인 캐릭터다. 질녀는 베르너의 입체적인 모습에 망국의 치욕과 성적 긴장감을 동시에 느낀다. 

영화로 옮겨지면서 이 경향은 더 심화된다. 전반적으로 멜빌의 카메라는 노인과 노인의 질녀보다는 베르너를 따라다니는데 더 관심이 많아보인다. 영화 [바다의 침묵]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베르너가 파리로 가는 시퀀스에 있다. 이 시퀀스 도입부에서 노인과 노인의 질녀는 아예 등장하지 않고 파리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려는 베르너의 클로즈업과 파리의 화려함이 교차편집된다. 개선문과 역사적인 동상들을 올려다 보면서 기웃기웃거리는 베르너의 모습에서 그가 정말로 프랑스 문화에 존경을 담고 있다는걸 알 수 있다. 베르너는 진심으로 나치 장교로써 권위와 이웃 국가 간의 교류라는 상반된 요소의 양립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이 시퀀스에서 멜빌은 전쟁이 막 끝난 파리에 서서 나치 시점에서 파리는 어떻게 다가왔을지 고민한다.

[바다의 침묵]이 잔인해지는 순간은, 베르너가 침묵의 클로즈업이 어떤 뜻인지 이해하는 순간에 있다. 장교 클럽 시퀀스는 그 점에서 노인의 집 시퀀스를 뒤집어놓으면서 각성을 유도케한다. 베르너는 나치즘으로 찌든 동생과 장교들에게 프랑스 문화를 이해하고 같이 발전해야 한다고 설득하지만 베르너를 둘러싼 나치 장교들은 베르너를 조롱하며 아리아 우월주의와 파시즘의 파괴 욕구를 외친다. 같은 장소와 같은 샷, 같은 행동과 대사의 반복과 변주에서 벗어났을때 베르너는 자신이 얼마나 외부 세계와 동떨어져 있는 이상주의자며 자신을 향한 노인 가족의 '바다의 침묵'이 강제적으로 지워진 굴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멜빌은 실내극을 통풍시키면서 역사의 비극을 상기시킨다. 무대에서 내려와 주변을 둘러보는 순간, 인물은 자신들의 역할이 실로 하찮지만 폭력적인 걸 깨닫는다. 멜빌의 침묵의 클로즈업은 그 점에서 베르코르가 보여주고자 했던 하찮지만 폭압적인 족쇄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노인의 집으로 돌아온 베르너는 마지막 독백을 남긴다. 하지만 이전과 달리 자신에게 주워진 위치를 알아버린 베르너는 확신하지 못한다. 그는 동부 전선으로 가기로 한다. 안락한 후방에서 허위와 기만에 갇혀 있기 보다는 실제로 행동하러 가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동부 전선이 어땠는지 아는 사람들에게 베르너의 선택은 자살이나 다름없다. 베르너는 다른 나치과 달리 순수하지만 열성적으로 자신의 가치관에 대해 믿고 회의하고 말을 걸었지만 노인과 노인의 질녀처럼 역사가 만들어버린 무대의 굴레를 부수지 못한다. 선함을 믿을수록 죽음과 가까워질 수 밖에 없는 운명. 

그 어찌할수 없는 엄숙한 비극의 순간에서 베르너는 드디어 침묵의 클로즈업과 대화하게 된다. "안녕히 가세요." 노인 역시 말한다. "진정한 군인은 불의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다." 이 두마디만큼 처절하게 가슴을 찢는 대사도 별로 없을 것이다. 다소 단조로울수도 있는 젊은 감독의 연출을 불멸의 순간으로 만드는 것도 침묵의 클로즈업이 입을 여는 순간이다. 그 순간을 통해 영화는 역사의 폭력을 이해하고 끊을 단초를 제공한다. 프랑스 레지스탕스는 막 끝난 역사의 비극과 얘기하고 싶어서 영화를 만들었고, 거기서 영원히 남을 자신의 영화 세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베르코르는 그 의도를 이해하고 이 영화를 세상에 공개했다. [바다의 침묵]은 가장 멜빌답거나 가장 완숙한 영화는 아닐지 몰라도, 가장 간절한 멜빌의 영화라 할 수 있다.
  Comments,   0  Trackbacks
댓글 쓰기
굿타임 [Good Time] (2017)

(누설이 있습니다.)

[굿타임]의 시작은 뉴욕 상공이다. 사프디 형제는 그 상공에서 한 건물로 쭉 확대해 들어가다가 한 인물의 클로즈업으로 바꿔치기 한다. 이 도입부는 당혹스럽다. 뉴욕이라는 배경이 제시되자마자 마스터 샷 없이 한 인물의 내밀한 표정이 곧바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인물은 정상이 아니다. 닉이라 불리는 인물과 상담사와의 대화는 제대로 된 샷-리버스 샷 구조를 구축하지 못하고 계속 빗나간다. 부조리극 같은 오프닝 시퀀스에서 폐소공포증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굿타임]을 보는건 그리 적합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굿타임]은 이 장면 이후로도 뉴욕이라는 대도시를 배경으로 끊임없는 클로즈 업의 미로로 관객을 인도하는 영화기 떄문이다.

이 불편한 대화 시퀀스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형 코니에게 방해받는다. 상담사에게 욕을 하고 닉을 끌고 나가는 코니. 이쯤되면 코니가 닉을 위해 무언가를 해줄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코니는 닉를 데리고 은행으로 털기로 한다. 코니는 지옥같은 뉴욕이 싫고, 버지니아로 대표되는 남부로 동생과 떠나고 싶다. 그러기 위해 돈이 필요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동생을 범죄에 끌어들인다. 하지만 그들은 어설프다. 사프디 형제가 그들의 은행 털이를 묘사하는 부분도 비장르적이다. 대체 어느 강도가 무기 없이 협박문 하나로 은행을 턴단 말인가? 코니는 득의양양해하지만, 곧 그의 판단은 완전히 틀렸다는게 드러난다. [굿타임]의 도입부는 장르의 실패를 다루는 부조리한 블랙 코미디다.

곧 닉은 잡혀가고 코니는 쫓기는 신세가 된다. 코니의 바뀐 목표는 닉의 보석금 획득이다. 하지만 브로커 (아이러니하게도 사프디 형제처럼 유대인이다.)에게 바칠 지폐는 손상되어 쓸 수 없고, 애인의 어머니 신용카드를 이용해 카드깡할 기회도 사라진다. 코니는 병원에 입원한 동생을 몰래 꺼내기로 하지만, 정작 데려왔더니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와중에 코니가 만난 사람들은 전부 코니 때문에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하게 된다.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그랬듯이,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선의와 관계없이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쯤되면 [굿타임]의 부조리가 단순히 장애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지성체처럼 주인공을 가지고 논다는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코니는 뭘 해도 사프디 형제와 로널드 브론스틴이 만든 미로를 뛰어넘을 수 없다. 코니가 할 수 있는 것은 거대한 뉴욕의 밤을 해메는 것 뿐이다. 하지만 코니는 오디세우스와 달리 영웅 서사가 될 수 없다. 대도시의 익명성과 대중 문화의 아이콘들은 여정을 CCTV 영상 기록처럼 만들어버리고, 코니의 덜떨어짐과 후술할 성격적 결함은 인물의 헤멤을 더욱 초라하게 만든다. 분명 필름 느와르스러운 구조에도 코니는 필름 느와르의 주인공조차 되지 못한다. '굿타임'은 '운수 좋은 날'이나 다름없다.

[굿타임]을 구성하는 클로즈업과 부감은 그 점에서 영화 속 미로를 대하는 사프디 형제의 관점을 보여준다. 등장인물들, 특히 코니는 마이크 리의 [네이키드]처럼 자신만의 프레임에 갇혀 얘기를 늘어놓고 이는 끊임없이 다른 이의 클로즈업과 충돌을 일으킨다. 심지어 말을 하지 않을때도 사프디 형제는 전경을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미장센을 조밀하게 잡는다. 때문에 이 영화의 인물들은 같은 공간임에도 길을 못 찾고 해메는 것처럼 보인다. 크리스탈의 집 시퀀스는 [굿타임]의 동선이 어떤 식으로 혼돈을 주고 있는지 보여준다. 하지만 이런 클로즈업들은 시퀀스 사이에 배치된 롱 샷과 부감 샷 앞에서 그 절박함을 잃어버린다. 반대로 너무 넓어져서 인물들이 어디 있는지 파악하기 힘들어지는 것이다. [굿타임]은 클로즈업의 절박함과 롱 샷/부감의 하찮음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인물을 초라하게 만든다.

사프디 형제가 보여주는 미로의 세부 묘사들은 팝 아트에 기반한 표현주의로 세공되어 있다. 마리오 바바나 마이클 만을 컬러리스트로 초빙한듯한 형광빛 색채, 대중문화 아이콘과 르포식 영상 기법, 실험적인 일렉트로닉 뮤지션으로 유명한 원오트릭스 포인트 네버가 제공한 1980년대 풍 사운드트랙 속에서 사프디 형제의 카메라는 춤을 추듯이 절박하게 목표를 향하는 인물과 혼돈스러운 공간을 오간다. 전반적으로 샷과 편집의 리듬은 감정과 혼돈에 맡기고 있다. 그 점에서 마약과 섹스, 우연으로 점철된 레이의 혼돈스러운 플래시백은 [굿타임]의 방향을 잘 보여준다. 당신은 이 영화를 [핫라인 마이애미] 세계에 떨어진 비토리오 데 시카의 [자전거 도둑]이라고 부를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점은 코니가 이 부조리한 미로에서 벗어나 동생을 구하려는 시도는 영화가 진행될수록 서서히 맥거핀화된다는 것이다. 초반부 닉이 구치소에서 두들겨맞는 시퀀스는 코니에게 강한 동기를 부여하지만, 정작 영화는 그 동기에서 코니를 떼어놓으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중후반부가 되면 닉의 행보와 존재감은 사라지고 코니는 완전히 닉을 잊어버린듯이 행동한다. 그렇다면 대체 이들의 관계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질수 밖에 없다.

닉이 코니에게 의지하고 있다는건 명백하다. 하지만 코니가 닉을 생각하는 방식은 이상하다. 그 이상함이 잘 드러나는 부분은 코니가 레이를 닉으로 착각하고 데려오는 시퀀스다. 아무리 그래도 코니와 닉은 20년 이상을 같이 살아왔을 것이다. 단순히 붕대를 감고 있다고 해서 남을 동생으로 착각한다는건 도무지 정상적인 판단력이라 할 수 없다. [굿타임]의 가장 중요한 의문점은 코니의 '착각'이 어떤 의미를 가지느냐에 있다.

그렇다면 코니의 부주의함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어쩌면 코니가 닉을 사랑하는건 마약을 향한 마약 중독자의 심정으로 봐야 할지도 모른다. 코니는 닉이 없으면 우월해질수도, 자신감을 얻을수 없다. '네가 있어서 나는 훌륭하다.'는 반대로 말하자면 '네가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뜻이다. 코니가 닉을 상담사에게 보내려는 할머니의 팔을 부수고 가출한 것도, 중독자의 독점욕에서 비롯된 저항에 가깝다. 코니는 닉을 마약처럼 사랑한다. 그 점에서 그는 매우 허약한 존재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코니의 사랑은 닉을 위기로 밀어넣는다. 닉은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으며 그저 엉뚱한 말을 뱉으며 끌려다니는 인물이다. 닉에게 필요한 것은 제대로 생각할 수 있도록 지도해주는 인물이다. 코니는 그런 인물이 아니다. [굿타임]의 초라한 비극은 여기서 비롯된다. 코니는 닉을 어떻게 대할지 정상적인 방식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엇나간다. 이 와중에 마약이 들어간 스프라이트와 닉은 코니에게 그닥 다를 바 없어진다. 혈육 닉이 마약을 팔려는 레이로 바뀌는 과정은 마약 중독에 대한 은유다. 하지만 혈육은 마약으로 대체될 수 없다. 코니에게 남은 것은 광폭하지만 왜소한 종말이다.

버지니아로 가자는 코니의 말은 그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코니가 생각하는 뉴욕은 자신들을 방해하는 상담사와 할머니가 있고, 춥고 외로운 곳이다. 코니는 뉴욕에서 빠져나가야지 형제가 행복해질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런데 그게 다른 남부도 아니고 미국의 시발점 중 하나인 버지니아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뉴욕의 군상들은 그 점에서 버지니아와 대비되는 현대 미국의 사회/정치적 텍스트를 함유하고 있다. 코니의 발버둥 때문에 가장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흑인들이다. 유대인 브로커는 법망을 넘나들며 알트 라이트의 상징이 되버린 개구리 페페가 무분별한 향락과 범죄를 장식한다. 한편 코니의 체포와 마약상 레이의 추락사는 마치 유튜브 충격 범죄 실황처럼 부감 샷과 로우 앵글/롱 샷을 빌어 연출된다. 코니는 춥고 싸늘한 광란의 이미지로 점철된 현대 미국과 뉴욕이 싫고 동생을 데리고 미국의 개척 정신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코니의 마지막 클로즈업이 일종의 페이소스가 느껴진다면 뉴욕 탈주가 실패했기 때문이다. 사프디 형제는 코니가 실패한 이유를 누군가를 사랑하는 법을 몰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프디 형제의 마지막 클로즈업은 그 점에서 코니를 바라보는 사프디 형제의 시선이 어떤 건지 보여주고 있다. 코니를 가두고 있던 경찰차 창살은 끊임없이 지속되는 줌 인에 흐려져 사라진다. 이미지를 광폭하게 확대하는 것으로 뉴욕의 창살을 넘어가려고 시도하는 셈이다. 하지만 그런 연출로 창살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걸 코니나, 사프디 형제나, 관객 모두 알고 있다. 코니는 그 실패를 끝으로 영화 속에서 퇴장한다.

남은 것은 닉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닉은 상담사를 따라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환자들의 방으로 이동한다. 영화의 결말은 갑작스럽다. 환자들을 모아놓고 상담사는 물어본다. "무언가 좋아하는게 있으면 지나가세요." 그 다음 이어지는 질문들. "사탕을 좋아하시나요?" "사랑에 빠져본적 있나요?" "거짓말을 해본적이 있나요?" 환자들은 지나가고 당황해하던 닉 역시 그 질문에 대답하듯이 하나하나 지나간다. 이 시퀀스의 카메라는 군중 속에서 방향 감각을 잃은것처럼 보인다. 인물들은 계속 한 방향으로 움직이지만 그게 어떤 형태인지 관객은 알 수 없다. 사프디 형제는 어느 부분에서 편집되었는지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한다. 이 시퀀스의 인물 동선은 마치 영화 내내 이어졌던 클로즈업을 은유하는것처럼 보인다.

다시 질문. "친구가 있으면 지나가세요." 닉이 지나간다. "외로웠던 적이 있나요?" 갑자기 카메라는 방 밖으로 나가 방 안에서 계속 움직이는 환자들을 보여준다. 이 카메라 위치 변화는 의미심장하다. 닉이 지나가던 지나가지 않던 상관없다. 닉은 형을 친구로 생각했고, 그 어설픈 은행 강도짓을 형제로써 우애를 다지는 과정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어쩌면 닉은 코니와 함께 타락한 뉴욕을 떠나 태초의 버지니아에서 행복하게 지낼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코니는 닉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몰랐고 파멸에 치달았다. 닉은 퀸스에 홀로 남겨졌다. 방 밖에서 닉은 다른 환자들, 나아가 영화 내내 부감 쇼트로 보여졌던 도시 풍경 속 사람들과 다를 바 없어보인다.

과거 시제의 질문이었지만, 닉은 현재 시제로 외롭고 외로울 것이다. 홀로 남겨진 닉은 앞으로 어떻게 될지 확신하지 못한채 외로이 군중 속에서 휩쓸려 다닐 것이다. 이때 사프디 형제는 닉에게 연민을 금치 못한다. 이기 팝의 엔딩 주제곡은 그 연민의 감정을 외화면에서 '순수한 녀석과 망할 녀석은 하나였다', 라며 체화한다. 분명 사프디 형제는 [굿타임]에서 더 나아간 영화를 만들겠지만, 이 연민의 감정은 쉽사리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Comments,   0  Trackbacks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