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번째 창문
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로베르 브레송 (2)
아마도 악마가 [Le diable probablement / The Devil Probably] (1977)

로베르 브레송의 [아마도 악마가]는 처음부터 결말을 정해놓고 영화를 시작한다. 샤를은 친구의 손을 통해 자살한다. 아니면 살해당한다던가. 브레송은 샤를의 죽음이 가질수 있는 감정이입의 가능성을 건조한 기사와 글자 이미지로 막아버린다. 그런데 왜 샤를은 죽음을 선택해야 했을까? 브레송은 이를 위해 샤를과 그 친구들이 어떻게 사는지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명백히 브레송보다 어린 그들은 모든 것을 혐오하지만 새로운 대답을 찾지 못한다. 이를 대변하듯이 영화 도입부의 대사는 힘을 제대로 주지 못해 걷지 못하는 것에 대한 얘기다. 그 말처럼 샤를과 친구들은 영화 내내 어느쪽이든 힘을 주지 못하고 걷는다. 이 불균형하고 무기력한 상황이야말로 [아마도 악마가]가 탐구하려는 정신적 상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브레송은 샤를과 그 친구들이 어떤 관계를 맺는지 보여주면서, 사회의 축을 이루는 거대 담론을 하나씩 부정해간다. 영화의 대사들은 다른 브레송 영화들보다 더욱 심화된, 담론과 철학에 대한 토론으로 이뤄져 있지만, 대부분의 대화는 헤매거나 부정하길 반복한다. 도입부 이후 첫 시퀀스가 정치 혁명 토론장이라는건 의미심장하다. 당연하겠지만 샤를과 친구들은 파괴의 권리를 주창하는 정치 혁명이 현실을 바꿀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은 경멸은, 아무리 옳은 의도로 파괴를 행한다고 해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가능한 것이다. 정치 혁명의 장에서 빠져나온 그들은 환경 운동에 관심을 기울이는데, 이때 브레송은 슬라이드 쇼와 영상으로 잔혹한 동물 학살과 죽어가는 지구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이미지를 보는 브레송의 카메라는 아무런 연민이 없다. 이 이미지들은 인류를 비판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인류 그 자체에 대한 애정을 잃어버렸다는 신호에 가깝다. 이런 신호를 잘 보여주는 시퀀스가 피크닉 시퀀스다. 이 시퀀스에 등장하는 소음과 농약, 군중의 아우성의 몽타주와 프레임 밖으로 잘려나간 얼굴과 파편화된 신체들은 공포스럽다.

당연히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의 고통스러운 구도의 길을 걷는 신부 같은 캐릭터는 여기에 없다. 브레송은 1968년 [온순한 여인]부터 믿음과 희생양을 무대에 올리려고 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렇게 인간이 고통받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집중한다. [아마도 악마가]는 그 중 가장 적극적으로 바닥을 찍은 영화일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파멸에 이르렀던 마지막 영화인 [돈]과 달리 [아마도 악마가]는 적극적으로 인간의 조건을 부정하고 자신을 파괴하는 사람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하듯이 브레송은 인간 관계의 두 축을 사랑과 경제로 설정한다. 이 두 축이 얽히는 순간, 인간관계는 냉담해지고 사랑은 거래 관계로 변해버린다. 이미 [온순한 여인]이나 [호수의 랑슬로]에서도 탐구한 지점이기도 하지만, 브레송은 후기로 갈수록 사랑의 진정성을 믿지 않는다. 그런걸 믿기엔 사랑은 철저한 거래 또는 현실에서 이룰수 없는 무언가로 변했기 때문이다. 사랑의 구원을 믿었던 [소매치기]와 비교하면 더더욱 잘 알 수 있다. 샤를과 친구들이 지리멸렬하게 관계를 이합집산하고 경제적 관계에 따라 애인을 바꾸고, 끝내 자신이 상대방에게 짐이 되지 않을까 내심 불안해한다. 

대신 그들이 집착하는 것은 허무다. 독약이나 손바닥 위에 올려진 총알, 물로 넘쳐나는 욕조는 그들의 감수성 근처에 죽음이 어른거린다는걸 알 수 있다. [아마도 악마가]가 브레송의 이전작에 비해 더욱 절망적이라면, 패배 없는 패배자에 대한 영화기 때문이다. [온순한 여인]과 [호수의 랑슬로]의 주인공들은 자신이 어떤 윤리적 전투에서 패배하고 길을 잃었다는걸 조금이나마 인지하고 있었다. [아마도 악마가]의 샤를과 그 친구들은 무엇에 패배했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그저 그들은 승자가 될 수 없다는 걸 알 뿐이다. 브레송은 이런 패배 없는 패배자들이 느끼는 허무의 공기를 모델이 가지고 있는 즉물적 이미지를 포착하는 시네마토그래프 작법에 기반해, 이미지와 음향의 삭막한 리듬으로 치환한다. 악마에 대한 토론 시퀀스 도중 삽입된 버스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숏의 몽타주가 대표적이다. 이 장면은 마치 사람들이 주장하는 어두운 세상과 그것을 조종하는 악마의 계략이 아무런 의미없는 기계적인 운동처럼 보이게 만든다. 후기 브레송 영화들은 음향과 이미지 간의 관계에 민감해지는 모습을 보이는데, [아마도 악마가]는 의미없는 기계적 운동 이미지와 음향으로 절망을 형상화한 영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샤를의 자살 또는 타살은 이런 경멸과 무의미, 기계적인 운동이 지나가고 난 뒤 등장한다. 영화가 본격적으로 바닥을 향하는 부분은 바로 샤를의 상담 시퀀스다. 지금까지 이어왔던 거대 담론에 대한 부정을 다시 정리한 뒤, 샤를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영원한 삶을 믿을 뿐이에요. 자살한다 해도 심판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 것을 이해하지 못한 게 이유가 될 수는 없죠." 이 대사가 나온 이후부터 [아마도 악마가]는 도스토예프스키적 지옥으로 달려가기 시작한다. 샤를의 친구들은 상담이 끝나고 샤를이 변할것이라 기대하지만 브레송이 보여주는 이미지는 떨궈진 공중 전화기 숏이다. 버려진 소통의 이미지 이후, 샤를의 친구들은 결말까지 등장하지 않는다. 마침내 샤를은 친구들을 배제해버린 것이다. 샤를은 성당에 가서 잠을 청하는데, 브레송은 여기서 다시 한번 샤를을 내쫓는 성당 사람들을 보여주면서, 종교가 끝내 젊은이들을 이해하지 못했음을 명백히 한다. 샤를은 자신을 살해할 친구를 만나 그와 함께 다니는데, 브레송은 경제적인 이득과 허무의 극단으로 관계를 맺은 이들만 남은 밤의 파리를 보여주면서 그들이 어디에도 속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샤를은 묘지에서 죽는다. 심지어 유언도 제대로 남기지 못한 채 뒤통수에 총을 맞은 채. 다시 질문하자. 그는 자살한 것일까? 아니면 타살당한 것일까? 브레송은 이 대답의 애매함이야말로 동시대의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악마가]는 엔딩 크레딧이 없고 마지막 장면이 끝나자마자 영화도 끝난다. 환해진 스크린 또는 검게 남은 화면은 그 점에서 브레송의 암울한 심경을 보여주는 도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가 발표된 해가 1977년이라는걸 생각해보자. 크리스 마르케가 [붉은 대기]를 통해 한탄했듯이 1968년 혁명은 프랑스에서 실패로 돌아갔고, 프랑스는 급격하게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과 조르주 퐁피두 같은 보수주의로 기울어지게 된다. 루이스 부뉴엘은 이런 반동에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을 내놔 격렬히 조롱했다. 한편 브레송은 68 혁명의 패배자들이 흩어져가는 과정을 그린 [몽상가의 나흘밤]과 선과 악이 패배하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리에 죽은 말과 자유로운 새만 남았던 신화적 우화인 [호수의 랑슬로]로 대답했다. 영화를 만들수록 브레송은 프랑스의 반동적인 기운과 바뀌지 않는 현실에 절망감을 느끼고 영화에 대한 믿음을 잃어갔다. 그리고 1977년, 펑크 세대가 도래했다. 섹스 피스톨즈의 허무주의가 시대적 정신으로 받아들이던 시절. [아마도 악마가]는 1968년 혁명이 10주년을 맞이하는 순간, 새로이 등장한 경멸과 허무의 세대에게 바치는 영화다. 실제로 펑크 록 씬의 중요한 인물인 리처드 헬은 [아마도 악마가]를 자신이 좋아하는 브레송 영화로 꼽은 적이 있다. 펑크 세대가 불경한 문화로 경멸받던 그 해, [아마도 악마가]는 자살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한동안 개봉이 금지되었지만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나 리처드 헬 같은 민감한 이들은 이 어두컴컴한 절망을 파악한 모습을 파악하고 지지를 보냈다. 이 영화를 싫어할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 어두컴컴한 종막이 깊은 관찰과 사유를 통해 드러났다는건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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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매치기 [Pickpocket] (1959)



소매치기

Pickpocket 
8
감독
로베르 브레송
출연
마틴 라살, 마리카 그린, 장 펠레그리, 돌리 스칼, 피에르 레이마리
정보
범죄, 드라마 | 프랑스 | 75 분 | -


로베르 브레송의 [소매치기]는 [무셰트]가 그랬던 것처럼 선언으로 시작한다. 이 영화는 스릴러가 아니라는 걸 밝히면서 한 청년의 죄의식을 다룰것이라고 선언한다. 그 뒤 우리는 가난한 청년 미셸이 등장해 소매치기를 할 것이라고 다짐하는 걸 듣는데, 미셸은 행동하지 않는 자에 대해 결별을 선언하면서 그는 '행동'하겠다고 말한다. 그 후 우리는 미셸이 무슨 행동을 할때마다 자신의 생각을 내레이션을 들려주는걸 듣게 된다. 이렇게 섬세하게 짜여진 내레이션와 미셸의 방에 등장하는 책을 보면 알겠지만 미셸은 책을 읽는 젊은 청년 지식인이다. 청년 지식인이 '부도덕한 행동'을 하기로 마음 먹는걸로 시작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소매치기]가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서 추구했던 문제의식에서 출발하고 있다는걸 깨닫게 된다. (지식인의 도덕적인 딜레마에 대한 문제는 이후 나온 [아마도 악마가]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런 점에서 [소매치기]는 현실에 잠식되어 가는 지성에 대한 얘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상대로 [소매치기]는 도덕의식에 대한 문제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처음엔 벌벌 떨면서 돈을 훔칠수 있을지 없을지 고민하던 미셸은 시간이 지나갈수록 점점 자신의 죄의식에 대해 무뎌져가기 시작한다. 첫 범죄 후 사소한 징후들에 신경쓰며 잡혀갈걸 걱정하던 미셸은 이내 손 움직임이 굉장해지고 자신의 범죄를 합리화하는 과정에 빠지게 된다. 그 와중에 미셸은 두 사람을 만나게 된다. 하나는 수사관이고 하나는 잔이라는 여인이다. 수사관은 그를 찾아와 그의 범죄 사실을 추궁하면서도 그의 인간답지 못한 삶을 걱정한다. 잔은 미셸의 어머니 근처에 살면서 미셸처럼 밑바닥 삶을 전전하는 인물이지만 나름의 도덕을 지키는 인물이다.

이 둘이 어떤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건 확실한데 작중 전개에서 어머니라는 존재가 중요하게 존재하는 것도 재미있다. 미셸은 병들어가는 어머니의 돈을 훔치면서도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을 지니고 있는데, 브레송의 다른 작품들에서 등장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인용과 가톨릭적인 죄의식을 생각해보면 미셸의 어머니는 성모 마리아와 같은 어머니상으로 볼 수 있을것이다. 반대로 미셸의 아버지는 술주정뱅이에 가족을 버린 것으로 언급될뿐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 내에서 수사관이 일종의 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그려지는걸 보면 미셸의 희미해져 가는 도덕 의식은 아버지의 부재와 어머니의 죽어감이 복합적으로 작용되고 있다는걸 눈치챌 수 있다. [소매치기]가 나왔던 시대를 생각해보면 이는 전쟁의 상흔이 완전히 치유되지 않은 젊은 세대의 공황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어머니가 죽고 난 뒤 미셸의 도덕관념은 붕괴하고 그는 거리낌없이 소매치기를 하기 시작한다. 버스 정류장으로 가서 사람들의 주머니를 터는 이 장면을 묘사하면서 브레송은 매우 간결하고 정확한 터치로 범죄물의 매력을 살려낸다. 빠르고 테크니컬한 손놀림에 맞춰 편집된 컷들로 이뤄진 은밀하게 사람들의 주머니를 터는 장면들은 브레송이 이 장르의 언어에 전혀 모른다는건 아니라는걸 주지시킨다. 그렇다면 초반부의 선언은 차라리 이 매력에 빠져 영화의 메시지를 잊지 말라는 경고라고 볼수도 있을 것이다.

미셸의 속죄 과정은 도피로 시작된다. 잔은 같이 살자는 미셸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고 어머니마저 잃은 미셸은 그렇게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모으게 된 미셸은 도무지 견딜수 없어서 프랑스를 떠나 이탈리아로 간다. 브레송은 미셸의 이탈리아 생활에 대해 전혀 묘사하지 않는다. 짧게도 아니고 1년을 그렇게 보냈다는데도 말이다. 브레송은 내레이션으로 그가 그런 행동을 했다고 딱 설명해준 뒤 다음 장면에서 미셸은 프랑스로 돌아온다. 이 칼같은 선택은 미셸의 도피가 결국엔 그의 죄의식과 무뎌진 도덕 감각을 회복하는데 도움이 안 된다는걸 주지시키고 있다. 그렇게 돌아온 미셸은 다시 처음 그가 소매치기를 하려고 했던 경마장으로 돌아와 소매치기를 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 마지막 소매치기를 브레송은 이례적으로 긴 호흡으로 망설임과 능숙함 사이에서 갈등하는 미셸을 보여준다. 미셸이 초반부처럼 처음 소매치기를 해서 달달달 떠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벽하게 회심한 것도 아니다. 미셸은 그 애매한 경계 사이에서 해메고 있다. 실제로는 이 장면의 연출은 이전에 등장한 소매치기 장면들처럼 매우 단순하고 능수능란하지만 어느 한 부분에서 예리하게 변주되어 있는데, 이 단순함이 갖는 서스펜스와 감정적인 진폭은 만만치 않다. 이 장면 때문에 [소매치기]는 평범한 범죄 영화와 다른 예리한 윤리에 대한 질문과 메시지를 획득하게 된다. 물론 그것이 가져다주는 장르적 쾌감도 놓치지 않는다.

이 마지막 소매치기의 끝은 체포다. 미셸은 감옥에 갇히고 도덕적 방황은 일단락된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영화 내내 그가 올바른 길로 가길 원하던 수사관은 체포 이후 존재감을 잃어버린다. 결말에서 존재감을 내비치는 것은 여성인 잔이다. 미셸이 감옥에 앉아서 자신의 죄를 성찰하고 있는 동안, 잔이 미셸을 찾아온다. 이때 미셸은 정상참작을 해주겠다는걸 번복해서 상황을 어렵게 만들었다고 잔에게 고백한다. 그리고 잔에게 '당신은 내 추락하는 모습을 즐길 셈이요? 누구도, 아무것도 내게는 필요없소.'라고 말하면 한번 내친다. 이는 미셸의 도덕적 방황이 아직도 완전하게 정리되지 않았다는걸 보여줌과 동시에 그가 잔에게 유약해지고 있다는걸 복합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 다음 이어지는 미셸의 초조함은 다른 종류를 띄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잔이 자신을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는걸 두려워하고 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은 이내 사소한 것으로 밝혀진다. 결국 마지막에 자신을 찾아온 잔의 손을 창살 사이로 잡으며 미셸은 이렇게 독백한다. 그리고 독백이야말로 영화를 요약하기 딱 좋은 말일지도 모른다. 


"잔... 당신에게 이르기 위해서 나는 이 얼마나 기이한 길을 걸어 왔단 말이오!"


[소매치기]는 이처럼 평범하고 나약해보이지만 누구보다 강한 여성이자 선함으로 대표되는 잔에게 돌아가기 위해 한 나약한 남성 지식인이 겪는 도덕적인 모험과 구원을 다루고 있는 영화다. 브레송 영화 중에서는 중기에 속하는 이 영화는 감정적으로는 이후에 나온 걸작 [무셰트]보다는 덤덤한 편이지만 (무엇보다 미셸은 매우 들여다보기 쉬운 인물이라는 점도 있다.), 그렇다고 매력이 없는 영화라는건 아니다. 브레송은 언제나 그렇듯이 짧은 러닝타임 속에서도 자신이 하고 싶싶은 이야기를 간결하게 뽑아내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장르보다는 이미지와 감정에 집중했던 [무셰트]와 달리 [소매치기]는 범죄물이라는 대중적인 장르 속에서도 자신의 메시지를 능수능란하게 다루고 있다. 로베르 브레송에 전혀 일면식이 없다면 추천하고 싶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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