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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영국 영화 (3)
미끼 [Bait] (2019)

(결말에 대한 누설이 있습니다.)

마크 젠킨의 <미끼>는 기묘한 영화다. 우선 이 영화는 영국 영화이면서 지역 영화다. 마크 젠킨은 영국 서남단에 있는 지방 (이자 독자적인 문화권인) 콘월 출신으로, 데뷔 후 줄곧 콘월에서 영화를 만들고 있다. <미끼> 역시 콘월 바닷가 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다. <미끼>의 이야기는 간단히 말해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한 노동 계급과 중산층 계급의 대립을 다루고 있다. 블랙 코미디로도, 진지한 사회 고발물로도 흐를 수 있는 소재인데, 마크 젠킨이 선택한 방식은 후자에 가깝다. 작가로써 마크 젠킨은 우직하고 성실하게 콘월 해안가에 대한 세세한 묘사와 함께 키친 싱크 리얼리즘에 기반한 비극으로 그려낸다. 인물들 역시 진지하기 그지 없고, 세련된 문학적인 상징성이나 아이러니나 이죽거림은 보이지 않는다. <미끼>의 서사는 어렵지 않게 명료한 비극이다.

<미끼>의 비극은 외지인과 현지인, 영국의 노동 계급과 중산 계급을 가로지르는 경제적인 문제에 기반하고 있다. 영화의 주인공 어부 마틴은 배를 사고 싶어한다. 마틴의 형인 스티븐에겐 배가 있지만 그 배는 게스트하우스를 방문하는 관광객을 위해 운영하고 있다. 마틴은 그게 싫어서, 경제적인 자립을 하려고 하지만 쉽지 않다. 마틴이 살고 있는 콘월 항구 마을은 이미 외부인 관광객 없이는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없는 상태다. 한편 마틴 형제의 옛 집은 리라는 중산층 가족이 사들여 게스트하우스로 운영중인데, 마틴과 관계는 썩 좋지 않다. 사소하게 쌓여있던 불편한 관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여러 상황이 겹치면서 점점 사이가 벌어지고, 결국 비극으로 치닫게 된다.

바닷가 마을의 외부인과 내부인이라는 소재, 현지인들의 생활에 대한 세미 다큐멘터리적인 접근, 인물 숏과 자연 풍경을 이어붙이는 편집 기조에서 <미끼>는 아녜스 바르다의 <라 푸앵 쿠르트로의 여행>의 영향력을 받은 영화다. 마크 젠킨은 콘월이라는 지역에 대한 애정과 디테일에 대한 풍부한 관찰력, 콘월인과 대비되는 외부-영국인으로 대표되는 경제적인 존속 관계,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두 축을 오가며 젠트리피케이션이 만들어내는 격차와 불만족, 소외, 갈등을 그려낸다. 작중 해안가 마을은 아름답긴 하지만, 살기엔 지루한 곳이다. 마틴의 조카 닐이 일과를 끝내고 펍에 가서 노는 시퀀스를 보면 알 수 있다. 펍엔 닐 같은 젊은이를 비롯해 사람들로 꽉 차있지만, 닐은 이런 북적거림에 대해 어떤 흥분도 보이지 않는다. 외부인 손님에게 수입을 의존하고 있을 펍의 풍경은, 닐에겐 그저 반복되는 일상에 불과하다. 펍 시퀀스와 리 가족과 관광객들이 게스트하우스에서 여유롭게 '일상'을 즐기는 장면을 비교해보면, 노동 계급과 유산 계급의 관점차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무료함은 평화가 아니라 언제든지 끓어오를수 있는 팽팽한 긴장감에 가깝다. 이 긴장감은 경제 활동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외부인-유산 계급이 주도하는 서비스업에 기생해야 하는 노동 계급의 불만이 담겨 있다. 마틴의 삶을 보자. 마틴은 끊임없이 생선과 해산물을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팔지만, 만족스러운 수입을 얻지 못한다. 그렇다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냐면 그런 것도 아니다. 마틴의 유일한 희망은 배를 얻어 좀 더 본격적으로 어업을 하는 것이지만, 돈은 모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마틴을 자신의 일상을 버텨내는 쪽에 가깝다. 이런 감정은 마틴에게만 한정된 것도 아니다. 펍 주인의 딸 웬나가 시종일관 까칠한 태도를 일관하는 것도 주체가 되지 못한 채 고여있는 삶에 대한 짜증스러움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웬나는 심지어 어머니에게 노골적으로 관광객-유산 계급에 들러붙는 기성 세대를 비난하기까지 한다. 그 점에서 마크 젠킨의 시선은 비교적 평화롭게 두 세계가 '분리'되어 각자의 길을 갔던 바르다보다 폭력적이고 절망적이다. 영화에서 이뤄지는 화해와 소통의 시도가 모두 실패로 돌아가는 것도 이런 무거운 분위기에 일조한다.

여기까지만 했더라면 마크 젠킨은 켄 로치 같은 키친 싱크 사실주의의 적통을 잇는 영국 영화감독으로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미끼>의 이야기는 제목처럼 진짜 파고들어야 하는 요소에 대한 밑밥이다. <미끼>에서 파고들어야 할 핵심은 시청각적인 즉물성에 있다. 곧장 말해 <미끼>는 시대착오적인 영화다. 볼렉스 16mm 필름 카메라로 촬영한 <미끼>는 아리 알렉사나 레드 에픽으로 만들어진 디지털 영화 애호가들의 혀를 차게 만드는 영화다. 흑백 필름의 훼손은 영화가 끝날때까지 계속 나타나며, 후시녹음으로 덧붙인 음향은 아날로그 모노로 녹음을 했나 확인해야 할 정도로 뭉그러져 들린다. <미끼>는 디지털의 깔끔함을 거부하는 러다이트 영화다. 마치 게스트하우스의 세련됨과 반대되는 어부의 투박함처럼 말이다.

마크 젠킨은 이런 시청각적인 도구를 이용해 서사 영화의 기본 화술과 격렬한 몽타주를 조합한다. 소리가 있긴 하지만, <미끼>의 방법론은 무성 영화에 가깝다. 좀 더 정확히는 독일 표현주의와 소련 몽타주 영화에서 많은 영감을 얻고 있다. 일부 평자는 케네스 앵거 같은 미국 아방가르드 영화 감독들을 언급하기도 했는데, 확실히 <미끼>의 몽타주는 <스콜피온 라이징>이나 <불꽃놀이> 같은 앵거의 영화에서 자주 보였던 꿈결같으면서도 불온한 긴장감으로 넘실거리는 초현실주의적 몽타주에서 많은 영감을 받은 모습을 보인다. 파편화된 거친 이미지가 편집으로 끊임없이 덧대지면서 불꽃놀이처럼 시각을 교란하는 영화를 생각하면 좋겠다. 바닷가 배경과 고전적인 시청각적인 도구들에서 로버트 에거스의 <더 라이트하우스>를 연상할수도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미끼>는 <더 라이트하우스>보다 훨씬 투박하고 거칠다.

이런 영향 속에 마크 젠킨은 서사에 필요한 숏들을 배치한 후, 그 뒤로 서사의 감정이나 감각을 포착한 파편적인 숏을 붙이는 식으로 캐릭터가 느끼는 감각과 감정, 심지어 시공간까지 끊임없이 확장하고 늘린다. <미끼>가 선택한 연출이 상당히 튀긴 하지만, 쉽사리 바닥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서사 영화에게 요구되는 기본기를 갖추고 핵심을 찌르는 숏을 정교하게 붙여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마틴이 리 가족의 아들인 휴고가 가재를 몰래 훔쳤다는 사실을 알고, 술집에서 휴고에게 다가가는 시퀀스를 보자. 이 장면은 캐릭터에 대해 가지게 되는 선입견 (투박하게 생겨서 마구 폭력을 휘두를것 같은 어부)을 뒤엎는 반전과 유머를 파편을 이어붙이는 몽타주로 구성해 서스펜스와 집중력을 선보이고 있다. 이런 편집은 동시에 서사와 관계 없이 지극히 표현주의적으로 심상과, 감정적 긴장을 끌어내기도 한다. 휴고가 훔친 가재로 저녁을 먹는 팀과 산드라의 시퀀스가 대표적이다. 밥을 먹는다는 단순한 행위지만, 젠킨은 이 단순한 행위에 노동 계급의 노동을 착취한다는 죄책감과 탐욕, 먹는다는 행위의 본능적인 감각을 드러내 불편하면서도 관능적인 분위기를 만든다 이외에도 젠킨은 닐의 죽음을 일부러 초반에 예지몽처럼 배치한다던가, 인물의 시점에서 불가능한 숏을 집어넣는 방식으로 몽타주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이런 표현주의적인 접근은, 린 램지처럼 마크 젠킨을 키친 싱크 사실주의에서 멀리 도약하려는 부류의 영국 영화 감독군에 포함하고 있다.

<미끼>가 영화를 만드는 방식은, 모든 것을 '생성'하는 디지털 CG 시대의 영화 만들기를 전면적으로 저항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이미지는 컴퓨터로 생성한 것이 아니라 직접 찍은 것이며, 편집이라는 기초적인 도구로 관객의 지각을 교란하고 자극한다. 이런 방식은 영화 속 어업과 일치하는 구석이 있다. 짐작했겠지만 <미끼>는 어업의 과정을 세세하게 보여주면서 행위와 질감을 잡는데 주력하고 있다. 그리고 그 질감은 영화의 투박한 모양새하고 닮아있다. 이와 관련해 사소하지만 주목할 소도구가 있다. 바로 스마트폰이나 노트북 같은 디지털 기기다. 동시대가 배경임에도, <미끼>는 이런 디지털 기기가 의도적일 정도로 비중이 낮다. 정확히는 마틴이나 닐 같은 어부들을 묘사할때는 디지털 기기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게스트하우스에 있는 리 가족과 관광객들이 디지털 기기를 쓴다.

이 배제와 사용은 명백히 의도적이기에, 러다이트적인 모양새와 함께 보면 아날로그 문화와 디지털 문화에 대한 서브텍스트로 읽힐 여지가 있다. 이 서브텍스트의 관점에서 보면 <미끼>는 필름-아날로그 문화와 이 문화를 밀어내고 주류로 차지한 디지털 문화 간의 충돌로 읽힐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젠킨의 입장은 명백하게 아날로그 문화를 옹호하고 있다. 어업이 1차 산업에 인간 생활에 필요한 식량을 생산하는 직업이라는 걸 유념하면 확실해진다. 사람은 서비스업 없이도 살수는 있지만, 먹을 것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마크 젠킨은 필름이 가지고 있는, 유물론적이고 즉물적 표현과 편집이라는 기초적인 도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1차 산업인 어업과 동일시한다. 디지털 시대에도 아날로그 영화은 필요하며 사멸하면 안 된다고 역설한다.

영화 도입부에서 앞을 노려보며 뚜벅뚜벅 걷는 마틴의 숏은 그 점에서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첫번째는 마틴이 느끼는 현실에 대한 불만이다. 두번째는 마틴의 강건한 표정에서 뿜어져나오는 고독한 뚝심이다. 이 도입부가 영화의 마무리에 붙여도 이상하지 않다는 점도 주목할만 하다. 선원으로 키우려던 닐이 휴고와의 다툼 끝에 우발적인 사망하고, 이 사건을 계기로 마틴과 스티븐은 분노하면서도 화해를 한다. 이때 스티븐은 과거의 흔적이 사라진 게스트하우스를 둘러보면서 말한다 "이 놈들은 우리 가족에 관련된 물건을 전부 치워버렸어!". 이 대사의 과녁이 어떤 계급과 문화를 겨냥하고 있는지는 명백하다. 마지막 장면. 이제 스티븐의 배는 관광업을 포기하고 어업을 나선다. 마을 현실에 불만이 많았던 웬나가 닐의 자리를 대신한다. 그렇게 어업을 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이 결말은 양가적이다. 먼저 긍정적인 면을 보자. 웬나가 닐을 대신한다는 점은 젠더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마초적인 부계 가족이 해체된 자리에, 이전엔 성차별적 인식으로 끼어들수 없었던 어업 현장에 여성이 끼어든다는 점에서 변화와 약간의 희망을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 결말은 씁쓸히 사멸을 받아들이고 그럼에도 자신의 길을 가겠다는 고독함도 포함하고 있다. <미끼>는 그 점에서 자본을 뒤쫓아 과거의 문화를 투박하고 느리다는 이유로 지나치게 빨리 치워버리는 현 시대에 대한 총체적인 비극을 다루는 영화라 할 수 있다. 그 '과거의 문화'는 콘월이라는 변두리 지방 문화권과 어업에 대한 것이기도 하며, 필름 영화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이런 과거의 문화에 대한 애착과 소멸을 논하는 영화를 디지털 영화 매체인 DCP나 코로나-19 사태로 VOD으로 본다는 사실은 그 점에서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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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표적 [Straw Dogs] (1971)


2018/01/30 - [Deeper Into Movie/리뷰] - 가르시아 [Bring Me The Head Of Alfredo Garcia] (1974)

샘 페킨파의 [어둠의 표적]은 매우 이상하게 시작한다. 잠깐 어딘가 앉아있는 아이들을 보여주더니 갑자기 이미지를 흐린 뒤 타이틀을 띄운다. 그 흐릿한 이미지의 정체가 다시 밝혀지는 순간은, 타이틀이 다 뜨고 난 뒤다. 사실 그 이미지는 교회 묘지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의 모습이다. 곧 데이비드와 에이미가 도착한다. 감독 이름을 알지 못하더라도 재빠르고 잘라낸 시선 숏으로만 제시되는 에이미에게서 상당한 불쾌함을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장면은 노골적인 관음 숏이기 때문이다. 대상은 그 자신이 노출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채 성적인 이미지를 흘리며, 관음은 혐오스러운 순진함과 추잡한 탐닉으로 재빠르게 이뤄진다. 

요컨데 샘 페킨파는 첫 장부터 관객들에게 이걸 견딜수 있겠냐고 도발을 하고 있다. 데이비드와 에이미가 에이미의 옛 남자친구들을 만나는 장면을 보면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걸 알 수 있을 것이다. 밀렵꾼을 잡기 위해 만들어진 인간 덫 이야기로 마을의 폭력성을 흘러둔 샘 페킨파는 마치 존 포드의 [말 없는 사나이]를 거스르듯이 이 장면을 불쾌한 남자들의 위압적이고 건들거리는 제스쳐로 채운다. 그 속에서 데이비드는 무력하다. 안경과 수학이 배경이 되는 영국 시골 노동자 문화의 거칠음과 반대된다는걸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 동료가 되어야 할 에이미 역시 데이비드 곁에 있지 않고, 찰리 패거리와 어울리는 모습을 보인다. 데이비드는 콘월에서 완벽하게 혼자다. 자기 전에 행하는 줄넘기가 우스꽝스러워 보인다면, 데이비드의 왜소한 남근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초반엔 데이비드는 이 마을 사람들과 잘 어울릴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데이비드가 가장 먼저 하는 행위는, 낡은 집을 수리하려는 시도다. [말 없는 사나이]의 존 웨인이 맡았던 숀 역시 옛날에 가족이 살던 집을 수리하려고 하면서 마을 사람들과 친해졌다. 하지만 혼자서 집을 정리하며 친해졌던 숀과 달리, 데이비드는 혼자서 집을 정리하지 못한다. 권투 선수였던 숀과 달리 데이비드는 본질적으로 도시에 익숙한 부르주아 지식인이다. 파국 직전까지 데이비드가 집에서 하는 행위는 방에 틀어박혀 수학 문제를 풀거나, 아니면  사람들을 부리는 장면 뿐이다. 그런데 데이비드가 집 수리를 위해 고용한 사람들은 누군가? 바로 찰리로 대표되는 에이미의 옛 남성 친구들이다. 이 남성 친구들은 거친 일에 능하다. 페킨파는 마치 순박한 아일랜드 시골 커뮤니티의 정의를 믿었던 [말 없는 사나이]에 침을 뱉듯이 사악한 영국 시골 커뮤니티의 불의를 강조한다.

마초 샘 페킨파가 가장 두려워하는 부분은 바로 남자가 해야 할 일을 여자가 아는 다른 남자의 손을 빌어야 하는 부분이다. 페킨파에게 데이비드는 지지리도 못한 쫌팽이 같은 남자다. 이를 대변하듯이 집을 수리하는 찰리 패거리와 데이비드가 대화를 나누는 시퀀스는 철저한 경멸의 숏과 리버스 숏으로 이뤄져 있다. 데이비드는 하이 앵글 숏에서 왜소하게 제시된다. 당연히 이 시컨스의 승자는 지붕 위에서 하이 앵글로 데이비드를 바라보는 찰리 패거리인데, 동물에게 이성적으로 반응해봤자 동물은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 뜻대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데이비드가 쥐고 있는 유일한 권력은 경제적인 관계인데, 그마저도 찰리 패거리는 연연하지 않는다. 일진에게 화를 내거나 돈을 바쳐도 일진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오히려 괴롭힐 구실을 잡았다고 생각할 뿐이다. 고양이를 죽이고 그 시체를 데이비드의 집에다 던져넣는 장난은 유치하지만 사악하다.

이 사이엔 에이미가 있다. 박찬욱 감독이 지적했듯이 에이미는 데이비드와 찰리 패거리에서 이중 스파이와 같은 존재다. 에이미는 데이비드를 사랑하지만, 그의 부족한 남성성에 큰 실망을 품고 있다. -를 +로 바꾸는 장면은, -된 욕망을 +로 바꾸고 싶어하는 에이미의 욕망을 드러낸다. 에이미 자신이 발산하는 성적 이미지라던가, 그런 이미지를 바라보는 남성들의 관음증적 시선 숏을 생각해보면 이 욕망이 성적인 것이라는 건 확실하다. 심지어 에이미는 데이비드 보고 대놓고 ‘비겁하다’라는 비난을 가하기도 하다. 이 비겁함은 남성성의 부족함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을 주체적인 묘사로 표출되기 보다는, 수동적으로 당한다는 점에서 명백한 여성혐오적이다. 에이미는 남자들에게 먼저 유혹하려는 태도는 취하지 않은 채 성적인 뉘앙스를 흩뿌리다가 강간당한다. 소위 말하는 수동적으로 성적 이미지를 표출하고 그것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는 여성 캐릭터라는 점에서 [어둠의 표적]은 1970년대 초기 페미니즘 영화 비평에서 비판을 받았던 영화이기도 하다. 

사실  원작자 고든 M. 윌리엄스와 페킨파, 각본가 데이비드 젤리그 굿맨은 에이미 캐릭터에 복잡한 생각을 할 두뇌를 주지 않았다. 그들이 이런 여성혐오적인 캐릭터 설정을 한 이유는 간단하다. 왜냐하면 에이미는 이 마을 출신이기 때문이다. 찰리 가문이 일종의 법도 도덕도 없는 흉악한 짐승 집단처럼 그려지는 걸 생각해보면 에이미의 성적인 방종함은 배경이 되는 콘월 지역에 대한 감독과 각본가들의 관점의 일부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일종의 에밀 졸라풍 자연주의적인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졸라가 만들어낸 나나가 그랬듯이 에이미는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본능을 뛰어넘는 복잡한 셈이나 생각을 하지 못한다. 물론 데이비드의 지성에 맞추려고 노력하긴 하지만, 잠자리에 등장하는 체스 대결 역시 입문서를 읽으면서 둬야지 간신히 진행되고, 그나마도 정정당당한 대결은 이뤄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데이비드의 수학 작업을 이해하지 못하고, 데이비드의 짜증어린 반응을 고양이하고 놀면서 회피하거나 1차원적인 단순한 리액션으로 받아칠 뿐이다. 데이비드와 에이미가 부부싸움을 하는 숏과 반응 숏을 자세히 보면 찰리 패거리의 무시하고 크게 다를 바 없다. 차이점이라면, 에이미의 동물적 반응 숏은 경멸보다는 짜증과 갈망에 가깝다는 것이다.  

도시에서였다면, 에이미의 방종한 성격은 백치미로 안전하게 가부장 관계에서 소비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에이미가 태어난 시골 마을이다. 안전한 백치미는, 시골에서는 통제불가능한 가부장 남성의 야수성을 자극하는 스위치가 되버린다. 그 점에서 에이미가 강간당하는 시퀀스와 데이비드가 마을 남자들에게 꼬여 사냥을 가는 시퀀스랑 교차 진행되는 전개는 서사상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데이비드는 시골 마을이 요구하는 남성적 행위를 수행하면서 마을에 편입되려고 한다. 하지만 데이비드의 남성성을 증명하기 위해 내부인들 앞에서 역할 수행을 하는 동안, 에이미는 집에 침입한 옛 남자친구 찰리에게 강간당하다가 화간으로 변모하게 된다. 이 악명높은 강간 장면은, 두가지 점에서 이중적이다. 하나는 에이미의 야만적인 남성성에 대한 욕망이 폭력으로 부서진다는 점이다. 강간으로 생긴 에이미의 트라우마는 직후 등장하는 교회 파티 시퀀스를 통해 드러난다. 이때 에이미는 갑자기 브라를 착용하는 정숙한 여인이 된 것처럼 보이고, 삽입 숏으로 제시되는 노골적인 성적 상징을 견디지 못한다.  

하지만 동시에 에이미가 후반부로 갈수록 찰리의 강간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였던 것도 인정해야 한다. 찰리가 에이미의 옛 애인이었다는 설정은, 끔찍한 강간 판타지에 기반한 에이미의 심리적 변화를 그려내기 위한 밑밥인 셈이다. 이 강간 판타지가 완성되는 순간 샘 페킨파는 데이비드가 사냥에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때 두 장면의 교차 편집은 동일하게 짧게 쏘아붙이는 숏으로 대비된다. 데이비드는 새 사냥에 성공하면서 남성성을 인정받지만, 동시에 옛 애인 찰리에게 성적으로 아내를 빼앗기고 만다. 폭력을 능숙하게 다루는 동안, 성적으로 되려 더 무능해지는 것이다. 

더 무서운 점은 이때 페킨파는 강간범인 찰리는 물론이고, 데이비드와 에이미 그 누구에게도 감정 이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냥의 기쁨이 강간의 고통과 동일시 되는 편집 기법에서 사냥의 성취는, 불쾌한 강간 판타지 앞에서 산산조각난다. 남은 건 공포와 낯설음, 그리고 역겨움이다. 페킨파에겐 강간과 사냥 모두 약한 자를 짓누르는 행위기 때문이다. 사냥에 돌아온 데이비드와 강간당한 에이미가 (당연하겠지만 에이미는 안경을 쓰지 않는다.) 싸우는 장면의 숏 연결 역시 시선 회피와 의도적인 어긋남으로 이뤄져 있다.  여성 혐오적 상황이 슬슬 인간 혐오적인 상황으로 확장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어둠의 표적]은 명백한 여성 혐오적 설정을 품고 있음에도, 여성 혐오적 상황을 안전하게 소비할수 없을 정도로 밀어붙인다. 영화의 원제는 그 점에서 노자가 세상사의 하찮음을 관조하는 자세를 악의적으로 뒤틀고 있다고 볼수 있을 것이다.

어떤 지점에서 [어둠의 표적]은 외양과 달리 샘 페킨파가 지독히도 서부극의 영역에 머물고 있다는 걸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영화이다. 서부가 개발된 현대에서 야만의 영역은 미국이 아니라 영국으로 등장하며, 문명의 본류라 믿었던 영국이야말로 야만을 방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어떤 지점에서는 미국의 서부극보다도 훨씬 끔찍한데 이 영화에서는 야만을 통제할 아버지의 법이 전혀 동작하지 않고 있기 떄문이다. 이 영화에서 정상적으로 중재할 수 있는 자는 퇴역 장군 존 스콧이지만, 영화의 파국은 그가 찰리 패거리의 우발적인 총격으로 맞아죽으면서 시작된다. 법이 통하지 않지만, 법을 집행할 자는 무력하다. 그렇기에 외부인의 활약이 필요하다. 하지만 집행을 대신할 외부인은 폭력을 한번도 써본적이 없는 수학자다. 페킨파는 이 아이러니에 아무런 감정도 가지지 않고 계속 밀어붙인다. 이를 위해 페킨파와 각본가들은 데이비드가 멀쩡히 잘 있다가 뒤집어진게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초반부에 에이미와의 대화를 보면 알겠지만 데이비드가 모종의 문제로 도시에서 쫓겨나 정착했다고 정보를 흘린다. 데이비드는 보기만큼 안전한 인물도, 이입할만한 인물이 아니다.

영화의 파국을 불러일으키는 캐릭터인 헨리는 그 점에서 흥미롭다. 지적 장애를 가지고 있는 헨리는 마을 사람들의 희생양, 호모 사케르나 다름 없다. 그는 핍박받으면서 마을의 규율을 유지하는 존재다. 영화의 파국 역시 헨리가 찰리의 사촌 재니스와 애정행각을 벌였다는 이유로 폭발한다. 하지만 헨리는 완벽하게 무고한 인물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마을 사람들의 야수성을 뒤집어 드러내는, 어린아이 같은 캐릭터다. 단적으로 파국의 상황에서 헨리는 발작하며 에이미랑 몸싸움을 벌이면서까지 도망가려고 한다. [어둠의 표적]의 아이러니는 무고하지만 순수하지는 않은 희생양을 지키려는 과정에서 폭발한다. 폭발은 공적 영역을 상징하는 교회를 벗어난, 사적 영역인 데이비드의 집에서 (그것도 밤에) 이뤄진다. 조명은 꺼져 있고, 무도덕한 짐승의 패악로 무장한 찰리 패거리는 총을 쏘아대며 짐승 소리를 흉내낸다. 가장 안전한 집이 가장 위험해지는 아이러니를 통해 페킨파는 호러 영화의 어법을 빌려온다. 찰리 패거리는 더 이상 이성의 수단이 통하지 않는 짐승이자 좀비다.  제약된 시선 바깥의 불쾌한 음향과 위협적인 액션을 통해 긴장을 불어넣는다는 점에서 존 카펜터의 [13번가의 습격]가 어디서 영향을 받았는지도 확인할 수 있다. 

찰리 패거리의 논리는 간단하지만 (“우리 여자를 건드린 병신 새끼를 족치자!”), 법 나아가 당연한 상식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약자를 향한 가부장의 패악질을 농축한 집단이다. 어떤 점에서 찰리 패거리는 [라이드 온 하이 컨트리]에 등장했던 엘사를 뒤쫓는 불쾌한 오빠들의 연장선상에 있다. 여성 대신 지적 장애인이 핍박받는 자로 변했을 뿐이다. 데이비드는 그 점에서 상술한 서부극의 외부에서 온 보안관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상술했지만 여기는 신화가 끝난 영국이다. 자신의 일을 하려는 데이비드의 폭력은 극단적이고 지저분한 수단으로 표출된다. [어둠의 표적]의 후반부가 무시무시하다면, 데이비드가 휘두르는 정의의 폭력과 찰리 패거리의 사악한 폭력 간의 차이를 발견할 수 없다는 점이다. 데이비드의 분노는, 헨리를 지킨다기보다는 일진에게 복수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실제로도 그렇다.) 자신의 의무를 강조하다가 도망가려는 헨리를 쥐어패고 다락에 가두는 장면이 대표적일 것이다. 물론 틈틈히 찰리 패거리를 옹호하면서 데이비드를 막다가 얻어맞는 에이미 같은 여성혐오적 묘사는 여전하다. 하지만 페킨파는 폭력의 동인을 계속 겹쳐놓으면서, 폭력의 명료성을 일부러 흐려버린다. [어둠의 표적]은 설정을 통해 폭력의 장르적 쾌감을 약속하지만 그 역치를 넘어버리는 수준까지 밀고가면서 그로테스크함을 구축한다. [가르시아]가 선악 구분이 명확한 대신, 자기도취성에 빠져있다면 [어둠의 표적]은 그런 자기도취성을 찾을 수 없다.

영화의 결말 역시 묵시록적이다. 우선 찰리 패거리에게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동시에 찰리에게 총을 쏜 이중 스파이 에이미는 파괴된 집에 남는다. 하지만 에이미 역시 고향 마을에 더 이상 정착할 수 없는건 분명하다. 그것은 데이비드와의 파국이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의 파국이기도 하다. 그 다음은 데이비드와 헨리다. 어둠 속에서 차를 타고 집을 빠져나오는 데이비드 옆에 앉은 헨리는 어디로 가냐고 물어본다. 데이비드는 모른다고 대답한다. 영화는 여기서 끝난다. 데이비드와 헨리 역시 어디로 갈지 모른다. 이 곳이 고향인 에이미는 집에서나마 머물수 있었지만, 데이비드와 헨리는 시골 공동체를 움직이던 구성원들을 살해함으로써 완벽한 외부자가 되고 말았다. 그들은 영원히 아침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공동체를 박살내고 영원하고도 비현실적인 어둠에 갇힌 인물들. [어둠의 표적]이 섬뜩하다면, 그 감금된 인물들에게 아무런 감정이입을 하지 않고 잠재된 괴물적인 본성을 끌어낸다는 점에 있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폭력의 역사]는 이 영화에게서 폭력의 동인과 쾌감이 지루한 시골 마을에서 반전되어 제시되는 섬뜩함을 배웠던 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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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 [The Life And Death Of Colonel Blimp] (1943)

얼마 전 마이크 파웰과 에머릭 프레스버거의 회고전에서 만난 영화들은, 그간 이 감독에 대해 많이 알지 못했다는 걸 깨닫게 해줬다. [호프만 이야기]를 보고 리뷰를 쓰면서 막연히 지적할 수 밖에 없었던 것들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파웰과 프레스버거의 영화들은 고전기 영화들의 간결한 우아함과 더불어 영화라는 매체의 즉물성을 잘 이해하고 있으며,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은 그 즉물성의 허망함을 역사 인식과 철학의 경지로 이끌어올린 걸작이다.

이 영화의 도입부는 매혹적인 미스터리로 구성되어 있다.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인물에 대한 정보를 의도적으로 미룬채 조각난 샷들을 이어 호기심을 이어간다. 한 무리의 군인들이 훈련을 하다가 전쟁 훈련을 위한 포로를 잡기 위해 터키탕을 찾아간다. 거기엔 늙은 군인 윈 캔디가 있다. 어느때처럼 꼰대질을 하다가 졸고 있는 윈 캔디는 현실을 내세우며 제멋대로 훈련을 시작하려는 젊은 장교 스피더에게 예의범절을 훈계하다가 망신을 당한다.

이때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영화사에서 손꼽힐 우아하고 아름다운 플래시백 도입부를 보여준다. 스피더에게 망신을 당하는 늙은 윈 캔디를 뒤로 한 채 카메라는 쭉 앞으로 트랙 인 하다가 냉탕에서 수영하다가 맵시있게 나온 젊은 윈 캔디를 보여준다. 볼품없고 추레한 육신이 카메라의 전진으로 이뤄지는 영화의 마술을 통해 젊은 육신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이 영화적으로 젊어졌다가 늙어가는 과정은 볼품없어지는 윈 캔디의 여정과 발맞춤한다.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새로 태어난 젊은 윈 캔디가 도입부의 윈 캔디가 되기까지 단 한번도 현재으로 돌아가지 않고, 플래시백의 이야기를 따라가길 고집한다. 따라서 우리는 늙은 윈 캔디의 이야기를 들으려면 그가 '늙어가는' 과정을 지켜봐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기초적인 정보만 쥔 상태에서 윈 캔디의 캐릭터를 알아가야 한다. 그런데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꼰대 캐리커처를 확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늙고 별볼일 없는 꼰대라는 첫인상과 달리 도입부 이후 젊은 윈 캔디는 그야말로 캡틴 잉글랜드나 다름없다. 어쩜 저렇게 티끌없이 해맑고 순수할 수가 있지 싶을 정도로 젊은 윈 캔디는 기사도와 이상을 숭상하는 혈기방장한 군인이다. 이를 뒷받침하듯 영화의 초반부는 수정주의적 관점 따윈 찾아볼 수 없는 구식 모험담이다. 인물들의 가치관은 명확하고, 실제 현실의 논리는 흑백에 따라 단순하게 재단된다.

스타일 면에서도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도입부의 비교적 절제된 톤을 벗어던진 극도로 인공적인 세트와 미술로 뛰어든다.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은 시각적 성찬이다. 화려한 드레스와 양복들, 예의와 격식을 차리는 인물들, 숨막힐 정도로 프레임을 수놓는 소도구들과 세트... 심지어 영화가 점점 냉정해질때에도 카메라는 영국 전원의 아름다움과 미로 같은 대저택의 웅장함을 빼어나게 뽑아낸다. 초기 컬러 영화 특유의 독특한 원색 역시 이런 인공적으로 구성된 세계를 강조하고 있다. 당시 관객들에게도 이런 묘사는 '비현실적'이었을것이다.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이 묘사하는 1차 세계 대전 이전의 유럽은 현실의 구질구질함이 완벽하게 제거되어 있는 인형놀이 배경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웨스 앤더슨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인공성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윈 캔디가 대영제국을 모욕한 독일 신문기사를 읽고 결투를 벌이기 위해 독일로 넘어가면서, 영화는 두 인물을 보여준다. 테오 크레치마르 슐도프와 이디스 헌터는 영화 내 윈 캔디의 세계를 구축하는 인물이다. 대결 상대로 나온 슐도프는 영국과 반대되는 유럽 대륙을 대표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하지만 역사상 영국의 라이벌로 그려지는 대상은 프랑스일텐데, 왜 이 영화는 프랑스인이 아닌 독일인을 영국인의 라이벌로 내세웠을까? 답은 영화 외적인 사실에서 비롯된다. 이 영화가 나왔을 당시는 막바지긴 해도, 아직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고 시절이었다. 이 영화는 전시 선전 영화로 기획되었다. 슐도프는 그 점에서 전시 유럽 대륙을 체화한 캐릭터다.

하지만 전시 선전 영화의 관점에서 봐도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는 좀 이상하다. 파웰과의 다른 전시 선전 영화인 [침입자들]이나 [콘트라밴드]와 달리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의 슐도프는 응징이나 구원의 대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럴수도 없는게, 윈 캔디와 슐도프가 처음 만난 시기는 양국 관계가 험악하지 않았던 1차 세계 대전 이전 얘기다. 아직 전쟁이 덜 크고 끔찍했던 시절, 조금이나마 19세기 신사도 문화가 남아있던 시절. 이쯤되면 알 수 있겠지만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영국과 유럽이라는 테마를 좀 더 큰 캔버스로 옮겨서 보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들은 복잡해져만 가는 영국과 유럽의 관계를 윈 캔디가 물려받은 미로 같은 저택처럼 확장해간다.

우아한 신사의 결투로 포장하긴 했지만 윈 캔디와 슐도프의 관계는 불알친구의 그것과 닮아있다. 어제의 격한 결투는 멋진 상처를 남겨주고 신문에서의 국가 간 설전은 우정을 위한 징검다리가 된다. 이디스 역시 그런 징검다리 중 하나다.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삼각관계로 이어질수 있는 관계를 신사적인 양보를 통해 깔끔하게 정리해버린다. 윈 캔디는 자신의 감정을 깔끔하게 접어버리고, 슐도프와 헌터의 행복을 빌어주며 떠난다.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초반부의 모든 사건들을 명쾌하고 긍정적인 논리로 정리하면서, 영화의 순진함과 구식 모험담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인공적인 세트를 강조한다. 

역설적으로 도입부에 제시된 순진한 아름다움은 영화가 이어질수록 조금씩 빛을 바래간다. 이 영화가 대영제국주의의 로맨틱한 회상을 그대로 옮겨왔다는 의혹을 대부분 지울수 있다면, 윈 캔디와 슐도프가 겪는 인생여정을 통해 초반부를 재구성할 여지와 동시에 안쓰러움을 전하기 때문이다. 괜한 싸움에 끼어들지 말라는 상사의 충고를 무시하고, 친구의 행복을 위해 쉽게 이디스를 포기했던 윈 캔디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 댓가를 받는다. 제1차 세계대전은 기사들의 소꿉장난과 같았던 군인을 현실의 위치에 되돌려놓고, 새로이 등장한 신병기들은 유럽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는다. 신대륙 미국 장교들은 무례하기 그지없고 언제라도 쉽게 화해할수만 있었던 영국과 독일의 관계는 깊은 골이 패지기 시작한다. 현실은 처음부터 조금씩 복잡했지만 윈 캔디는 파악하지 못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복잡해진다.

윈 캔디가 더욱더 비극적인 어릿광대처럼 보이는 이유는, 상실과 자식 세대의 과오를 지켜보며 성장하는 슐도프랑 달리 그 현실을 영화가 끝나기 직전까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포로 수용소에서 슐도프가 반가워하는 윈 캔디를 외면하는 반응 샷은 그 점에서 가슴은 찢는다.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대영제국의 환상을 반영한 초반부가 순진맹충하다는걸 분명하게 인식하지만, 그 순진맹충함 속에서 쌓인 두 사람의 관계를 부정하지 않는다. 슐도프의 처량한 모습은 결국 거대한 역사에 속해있지만 그 엄혹함을 쉽게 수긍하지 못하는 개인의 슬픔을 보여준다. 포로 수용소에서 풀러나 낙관론에 젖어있는 윈 캔디와 친구들 앞에서 보이는 슐도프의 무표정한 눈빛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두 사람의 대비를 통해 2차 세계 대전 직전 영국의 현실 인식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독일 현실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제공한다.

이런 변화는 데보라 카가 멋지게 연기해낸 세 사람의 '그녀'하고도 관련이 있다. 두 남자 주인공과 달리, 데보라 카의 '그녀'는 환상 속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확고한 개성을 지닌 독특한 캐릭터다. 윈 캔디의 '그녀'들은 매번 현실에 발맞춰 나타나지만, 윈 캔디에게 '그녀'들은 항상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윈 캔디는 이디스를 사랑하지만, 젊은날 우정을 위해 포기해야만 했고 이디스의 환영 바바라를 찾아내 사랑했지만 다시 떠나보내야만 한다. 그럼에도 윈 캔디는 이 세상에 없는 이디스 근처를 맴돈다. 정작 두 이디스의 환영들은 분명한 직업과 자기 삶을 살고 있음에도 말이다. (특히 조니는 윈 캔디를 현실로 이끌어내는데 큰 역할을 해낸다.) 윈 캔디는 환영에 자신의 인생 대부분을 바쳐버렸다.

친구를 외면했던 슐도프가 영국으로 넘어와 경찰들 앞에서 덤덤하게 인생역전을 설명하는 롱테이크 샷은 그 점에서 슬프다. 슐도프는 어려운 독일의 상황에서 자신이 믿었던 가치가 환상이라는걸 깨달았고, 현실에 맞춰 발빠르게 타락해버린 아들들에게서 떠나야만 했다.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화려함을 벗겨낸 경찰서에다 상처입은 유럽의 영혼을 앉혀놓고 그의 넋두리를 들으면서, 탄식한다. 우리 유럽에겐 (비록 환상이었더라도) 고결한 나날들이 있었는데, 지금 그 고결함은 어디로 가버렸는가! 이런 쓸쓸한 인식에 기반한 탄식은 파웰보다는 어쩔 수 없는 프레스버거의 입김이 강하기도 하다. 프레스버거는 헝가리에서 영국으로 넘어온 이민자이기 때문이다.

이러니 윈스턴 처칠이 바랄법한 전시 선전용 메시지로는 부적합해져버린다. 이 영화가 독려하는 나치에 대한 항전 의지는 선악 논리보다는 인간의 삶 그 자체에 기반해 있기 때문이다.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은 그 점에서 전쟁 이후의 복잡해질 도덕과 미덕을 예고하는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외부에서 나치를 객관적으로 바라볼수 있게 된 슐도프는 그렇게 생각한다. 자신들이 믿고 있었던 명료한 가치는 더 이상 쓸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아닌 것은 아니다. 슐도프는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할 순 없어도, 남아있는 삶과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게 있다고 믿는다. 그걸 말하려고 독일을 떠나 윈 캔디 앞에 나타난 것이다.

군대에서 밀려난 윈 캔디는 처음엔 그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계속 현역으로 있을 수 있다고 고집을 부리다가 결국 조니와 슐도프의 독려로 순순히 향토예비군을 창설하긴 하지만, 그 역시 완고한 윈 캔디의 고집에 일련의 소동극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우리는 윈 캔디를 동정하거나, 적어도 이해할수 있게 된다. 새로운 세대의 군인인 스피더는 그 점에서 윈 캔디의 거울상 같은 캐릭터다. 고집 세고 어른 말은 잘 안 들으려는 모습은 초반부 윈 캔디의 모습과 닮아있다. 그 모습에서 윈 캔디는 문득 깨닫는다.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이 때 윈 캔디의 시점 샷으로 등장하는 물 위에 뜬 낙엽은, 가히 오즈 야스지로의 필로우 샷을 연상케하는 심원한 통찰과 서정미를 지니고 있다. 파웰과 프레스버거를 설명하는 또다른 요소인 영국 전원에 대한 시적 예찬이 (윈 캔디와 바바라의 별장과 슐도프의 포로 수용소 시퀀스에서도 간간히 드러난다), 응축된 쇼트라고 할 수 있다. 저물어가는 낙엽은 나무에서 떨어지긴 했어도, 물 속으로 가라앉지 않았다. 한때 윈 캔디와 바바라가 살았던 집이 부셔졌더라도, 우리는 살아갈거라고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말하며 영화를 끝낸다.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이 불멸의 영화의 자격을 획득할 수 있다면, 꼰대라 불리는 기성세대들이 어떻게 꼰대가 되었는가를 보여준 뒤 그것이 인간이 겪어야 할 필연적인 과정이며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묻기 때문이다. 실로 영국 영화가 자랑할 보물이라 할 수 있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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