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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영화리뷰 (153)
미끼 [Bait] (2019)

(결말에 대한 누설이 있습니다.)

마크 젠킨의 <미끼>는 기묘한 영화다. 우선 이 영화는 영국 영화이면서 지역 영화다. 마크 젠킨은 영국 서남단에 있는 지방 (이자 독자적인 문화권인) 콘월 출신으로, 데뷔 후 줄곧 콘월에서 영화를 만들고 있다. <미끼> 역시 콘월 바닷가 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다. <미끼>의 이야기는 간단히 말해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한 노동 계급과 중산층 계급의 대립을 다루고 있다. 블랙 코미디로도, 진지한 사회 고발물로도 흐를 수 있는 소재인데, 마크 젠킨이 선택한 방식은 후자에 가깝다. 작가로써 마크 젠킨은 우직하고 성실하게 콘월 해안가에 대한 세세한 묘사와 함께 키친 싱크 리얼리즘에 기반한 비극으로 그려낸다. 인물들 역시 진지하기 그지 없고, 세련된 문학적인 상징성이나 아이러니나 이죽거림은 보이지 않는다. <미끼>의 서사는 어렵지 않게 명료한 비극이다.

<미끼>의 비극은 외지인과 현지인, 영국의 노동 계급과 중산 계급을 가로지르는 경제적인 문제에 기반하고 있다. 영화의 주인공 어부 마틴은 배를 사고 싶어한다. 마틴의 형인 스티븐에겐 배가 있지만 그 배는 게스트하우스를 방문하는 관광객을 위해 운영하고 있다. 마틴은 그게 싫어서, 경제적인 자립을 하려고 하지만 쉽지 않다. 마틴이 살고 있는 콘월 항구 마을은 이미 외부인 관광객 없이는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없는 상태다. 한편 마틴 형제의 옛 집은 리라는 중산층 가족이 사들여 게스트하우스로 운영중인데, 마틴과 관계는 썩 좋지 않다. 사소하게 쌓여있던 불편한 관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여러 상황이 겹치면서 점점 사이가 벌어지고, 결국 비극으로 치닫게 된다.

바닷가 마을의 외부인과 내부인이라는 소재, 현지인들의 생활에 대한 세미 다큐멘터리적인 접근, 인물 숏과 자연 풍경을 이어붙이는 편집 기조에서 <미끼>는 아녜스 바르다의 <라 푸앵 쿠르트로의 여행>의 영향력을 받은 영화다. 마크 젠킨은 콘월이라는 지역에 대한 애정과 디테일에 대한 풍부한 관찰력, 콘월인과 대비되는 외부-영국인으로 대표되는 경제적인 존속 관계,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두 축을 오가며 젠트리피케이션이 만들어내는 격차와 불만족, 소외, 갈등을 그려낸다. 작중 해안가 마을은 아름답긴 하지만, 살기엔 지루한 곳이다. 마틴의 조카 닐이 일과를 끝내고 펍에 가서 노는 시퀀스를 보면 알 수 있다. 펍엔 닐 같은 젊은이를 비롯해 사람들로 꽉 차있지만, 닐은 이런 북적거림에 대해 어떤 흥분도 보이지 않는다. 외부인 손님에게 수입을 의존하고 있을 펍의 풍경은, 닐에겐 그저 반복되는 일상에 불과하다. 펍 시퀀스와 리 가족과 관광객들이 게스트하우스에서 여유롭게 '일상'을 즐기는 장면을 비교해보면, 노동 계급과 유산 계급의 관점차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무료함은 평화가 아니라 언제든지 끓어오를수 있는 팽팽한 긴장감에 가깝다. 이 긴장감은 경제 활동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외부인-유산 계급이 주도하는 서비스업에 기생해야 하는 노동 계급의 불만이 담겨 있다. 마틴의 삶을 보자. 마틴은 끊임없이 생선과 해산물을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팔지만, 만족스러운 수입을 얻지 못한다. 그렇다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냐면 그런 것도 아니다. 마틴의 유일한 희망은 배를 얻어 좀 더 본격적으로 어업을 하는 것이지만, 돈은 모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마틴을 자신의 일상을 버텨내는 쪽에 가깝다. 이런 감정은 마틴에게만 한정된 것도 아니다. 펍 주인의 딸 웬나가 시종일관 까칠한 태도를 일관하는 것도 주체가 되지 못한 채 고여있는 삶에 대한 짜증스러움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웬나는 심지어 어머니에게 노골적으로 관광객-유산 계급에 들러붙는 기성 세대를 비난하기까지 한다. 그 점에서 마크 젠킨의 시선은 비교적 평화롭게 두 세계가 '분리'되어 각자의 길을 갔던 바르다보다 폭력적이고 절망적이다. 영화에서 이뤄지는 화해와 소통의 시도가 모두 실패로 돌아가는 것도 이런 무거운 분위기에 일조한다.

여기까지만 했더라면 마크 젠킨은 켄 로치 같은 키친 싱크 사실주의의 적통을 잇는 영국 영화감독으로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미끼>의 이야기는 제목처럼 진짜 파고들어야 하는 요소에 대한 밑밥이다. <미끼>에서 파고들어야 할 핵심은 시청각적인 즉물성에 있다. 곧장 말해 <미끼>는 시대착오적인 영화다. 볼렉스 16mm 필름 카메라로 촬영한 <미끼>는 아리 알렉사나 레드 에픽으로 만들어진 디지털 영화 애호가들의 혀를 차게 만드는 영화다. 흑백 필름의 훼손은 영화가 끝날때까지 계속 나타나며, 후시녹음으로 덧붙인 음향은 아날로그 모노로 녹음을 했나 확인해야 할 정도로 뭉그러져 들린다. <미끼>는 디지털의 깔끔함을 거부하는 러다이트 영화다. 마치 게스트하우스의 세련됨과 반대되는 어부의 투박함처럼 말이다.

마크 젠킨은 이런 시청각적인 도구를 이용해 서사 영화의 기본 화술과 격렬한 몽타주를 조합한다. 소리가 있긴 하지만, <미끼>의 방법론은 무성 영화에 가깝다. 좀 더 정확히는 독일 표현주의와 소련 몽타주 영화에서 많은 영감을 얻고 있다. 일부 평자는 케네스 앵거 같은 미국 아방가르드 영화 감독들을 언급하기도 했는데, 확실히 <미끼>의 몽타주는 <스콜피온 라이징>이나 <불꽃놀이> 같은 앵거의 영화에서 자주 보였던 꿈결같으면서도 불온한 긴장감으로 넘실거리는 초현실주의적 몽타주에서 많은 영감을 받은 모습을 보인다. 파편화된 거친 이미지가 편집으로 끊임없이 덧대지면서 불꽃놀이처럼 시각을 교란하는 영화를 생각하면 좋겠다. 바닷가 배경과 고전적인 시청각적인 도구들에서 로버트 에거스의 <더 라이트하우스>를 연상할수도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미끼>는 <더 라이트하우스>보다 훨씬 투박하고 거칠다.

이런 영향 속에 마크 젠킨은 서사에 필요한 숏들을 배치한 후, 그 뒤로 서사의 감정이나 감각을 포착한 파편적인 숏을 붙이는 식으로 캐릭터가 느끼는 감각과 감정, 심지어 시공간까지 끊임없이 확장하고 늘린다. <미끼>가 선택한 연출이 상당히 튀긴 하지만, 쉽사리 바닥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서사 영화에게 요구되는 기본기를 갖추고 핵심을 찌르는 숏을 정교하게 붙여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마틴이 리 가족의 아들인 휴고가 가재를 몰래 훔쳤다는 사실을 알고, 술집에서 휴고에게 다가가는 시퀀스를 보자. 이 장면은 캐릭터에 대해 가지게 되는 선입견 (투박하게 생겨서 마구 폭력을 휘두를것 같은 어부)을 뒤엎는 반전과 유머를 파편을 이어붙이는 몽타주로 구성해 서스펜스와 집중력을 선보이고 있다. 이런 편집은 동시에 서사와 관계 없이 지극히 표현주의적으로 심상과, 감정적 긴장을 끌어내기도 한다. 휴고가 훔친 가재로 저녁을 먹는 팀과 산드라의 시퀀스가 대표적이다. 밥을 먹는다는 단순한 행위지만, 젠킨은 이 단순한 행위에 노동 계급의 노동을 착취한다는 죄책감과 탐욕, 먹는다는 행위의 본능적인 감각을 드러내 불편하면서도 관능적인 분위기를 만든다 이외에도 젠킨은 닐의 죽음을 일부러 초반에 예지몽처럼 배치한다던가, 인물의 시점에서 불가능한 숏을 집어넣는 방식으로 몽타주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이런 표현주의적인 접근은, 린 램지처럼 마크 젠킨을 키친 싱크 사실주의에서 멀리 도약하려는 부류의 영국 영화 감독군에 포함하고 있다.

<미끼>가 영화를 만드는 방식은, 모든 것을 '생성'하는 디지털 CG 시대의 영화 만들기를 전면적으로 저항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이미지는 컴퓨터로 생성한 것이 아니라 직접 찍은 것이며, 편집이라는 기초적인 도구로 관객의 지각을 교란하고 자극한다. 이런 방식은 영화 속 어업과 일치하는 구석이 있다. 짐작했겠지만 <미끼>는 어업의 과정을 세세하게 보여주면서 행위와 질감을 잡는데 주력하고 있다. 그리고 그 질감은 영화의 투박한 모양새하고 닮아있다. 이와 관련해 사소하지만 주목할 소도구가 있다. 바로 스마트폰이나 노트북 같은 디지털 기기다. 동시대가 배경임에도, <미끼>는 이런 디지털 기기가 의도적일 정도로 비중이 낮다. 정확히는 마틴이나 닐 같은 어부들을 묘사할때는 디지털 기기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게스트하우스에 있는 리 가족과 관광객들이 디지털 기기를 쓴다.

이 배제와 사용은 명백히 의도적이기에, 러다이트적인 모양새와 함께 보면 아날로그 문화와 디지털 문화에 대한 서브텍스트로 읽힐 여지가 있다. 이 서브텍스트의 관점에서 보면 <미끼>는 필름-아날로그 문화와 이 문화를 밀어내고 주류로 차지한 디지털 문화 간의 충돌로 읽힐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젠킨의 입장은 명백하게 아날로그 문화를 옹호하고 있다. 어업이 1차 산업에 인간 생활에 필요한 식량을 생산하는 직업이라는 걸 유념하면 확실해진다. 사람은 서비스업 없이도 살수는 있지만, 먹을 것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마크 젠킨은 필름이 가지고 있는, 유물론적이고 즉물적 표현과 편집이라는 기초적인 도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1차 산업인 어업과 동일시한다. 디지털 시대에도 아날로그 영화은 필요하며 사멸하면 안 된다고 역설한다.

영화 도입부에서 앞을 노려보며 뚜벅뚜벅 걷는 마틴의 숏은 그 점에서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첫번째는 마틴이 느끼는 현실에 대한 불만이다. 두번째는 마틴의 강건한 표정에서 뿜어져나오는 고독한 뚝심이다. 이 도입부가 영화의 마무리에 붙여도 이상하지 않다는 점도 주목할만 하다. 선원으로 키우려던 닐이 휴고와의 다툼 끝에 우발적인 사망하고, 이 사건을 계기로 마틴과 스티븐은 분노하면서도 화해를 한다. 이때 스티븐은 과거의 흔적이 사라진 게스트하우스를 둘러보면서 말한다 "이 놈들은 우리 가족에 관련된 물건을 전부 치워버렸어!". 이 대사의 과녁이 어떤 계급과 문화를 겨냥하고 있는지는 명백하다. 마지막 장면. 이제 스티븐의 배는 관광업을 포기하고 어업을 나선다. 마을 현실에 불만이 많았던 웬나가 닐의 자리를 대신한다. 그렇게 어업을 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이 결말은 양가적이다. 먼저 긍정적인 면을 보자. 웬나가 닐을 대신한다는 점은 젠더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마초적인 부계 가족이 해체된 자리에, 이전엔 성차별적 인식으로 끼어들수 없었던 어업 현장에 여성이 끼어든다는 점에서 변화와 약간의 희망을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 결말은 씁쓸히 사멸을 받아들이고 그럼에도 자신의 길을 가겠다는 고독함도 포함하고 있다. <미끼>는 그 점에서 자본을 뒤쫓아 과거의 문화를 투박하고 느리다는 이유로 지나치게 빨리 치워버리는 현 시대에 대한 총체적인 비극을 다루는 영화라 할 수 있다. 그 '과거의 문화'는 콘월이라는 변두리 지방 문화권과 어업에 대한 것이기도 하며, 필름 영화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이런 과거의 문화에 대한 애착과 소멸을 논하는 영화를 디지털 영화 매체인 DCP나 코로나-19 사태로 VOD으로 본다는 사실은 그 점에서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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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행로 [Love Streams] (1984)

존 카사베츠의 <사랑의 행로>은 카사베츠의 유작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주의할 점이 있다면 <사랑의 행로>가 진짜 유작은 아니라는 점이다. 카사베츠는 <사랑의 행로>를 만든 뒤 컬럼비아 픽처스에서 <빅 트러블>을 만들었다. 그러나 <빅 트러블>은 카사베츠가 평생 겪어야 했던 스튜디오 체제하고 충돌로 망가진 영화였다. 카사베츠 본인도 <빅 트러블>에 대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을 정도다. 그 지점에서 보면 <사랑의 행로>를 실질적인 유작이라 부르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다 내용 자체도 고단했던 카사베츠의 '행로'의 종지부로 어울린다. <사랑의 행로>에 이르면, 카사베츠는 분명한 빛을 혼란스러운 캐릭터에게 안겨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빛에 도달하기까지, 영화의 두 주인공들은 카사베츠의 인물들이 겪는 방황과 신경증, 삽질을 거쳐야 한다.

테드 앨런의 동명 희곡을 각색한 <사랑의 행로>는 희곡과 공통점이 적다고 알려져 있다. 희곡을 보거나 읽지 않았으니 자세한 비교는 불가능하지만, 일부는 카사베츠 특유의 소규모 가내수공업적 작업 스타일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싶은 부분이 있다. <사랑의 행로>를 만들면서 존 카사베츠는 공연 당시 배우 (존 보이트)를 기용하지 않고, 직접 주인공 로버트 하몬 역을 맡고 아내 지나 롤랜즈에게 상대역인 여동생 사라 하몬 역을 맡겼다. 그리고 <얼굴들>을 본 사람이라면 눈치챘겠지만, 배경 대부분을 차지하는 로버트의 집은 <얼굴들>에도 등장했던 실제 카사베츠 부부의 집이다. <얼굴들>을 보고 <사랑의 행로>를 본다면 데자뷰를 겪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두 영화의 후반부는 기절한 여성과 그를 깨우려는 남성의 액션으로 이뤄져 있어서 유사점이 두드러진다. 종종 영화에서 하몬 남매에게서 근친상간적인 성적 긴장감이 느껴지기도 하는데, 이 역시 실제 부부였으며 연기 파트너이기도 했던 카사베츠와 롤랜즈의 관계가 반영되어 있을 것이다.

공통점이 적다곤 하지만, 그래도 테드 앨런의 희곡이 '더티 리얼리즘'과 친연성이 있는 카사베츠의 개성과 충돌하는 부류는 아니었을꺼라는 추측은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주인공인 하몬 남매는 매우 카사베츠스럽게 엉망진창에 기벽적인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다만 상황의 시궁창스러움은 올라갔다. <사랑의 행로>는 카사베츠가 천착했던 가정의 붕괴가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영화다. 물론 <얼굴들>이나 <영향 아래의 여자>도 가족이 흔들리는 모습을 담았지만, <사랑의 행로>의 하몬 남매는 처음부터 정상 가족이라는 개념이 파괴된 채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들은 가족을 만들지 않고 욕망으로만 구성된 낙원에 만족하거나 (로버트), 가족에게 쫓겨난 상태다. (사라) 카사베츠는 2시간이 살짝 넘는 시간 동안 정상 가족을 가지지 못하거나 추방된 두 주인공이, 정상 가족에 집착하거나 복원에 실패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먼저 로버트는 갑자기 나타난 아들 앞에서 정상 가족의 '가부장'으로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 에로스의 공동체를 파괴한다. 하지만 결국 로버트는 호텔 방에 아들을 버려두고 자기 욕망에 충실하면서 '가부장'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이 실패는 다른 폭력적인 '가부장'과의 난투극으로 파국을 마무리 짓는다. 한편 <차이니즈 부키의 죽음>의 코스모가 그랬듯이 로버트는 흑인 어머니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데, 이 관심을 끝내 이뤄지지 못한다. 요컨대 로버트는 과잉된 에로스로 사랑을 대체하거나, 사랑하는 법을 흉내내다가 실패하는 캐릭터다. 반대로 사라는 한창 전에 끝나버린 정상 가족을 끊임없이 맴돈다. 사라가 처음 등장하는 장소는 이혼 법정이다. 이혼 법정에서 사라는 자신을 딸의 친권을 가지려고 하지만, 딸은 자신을 거부한다. 심사가 끝나고 사라는 변호사에게 말한다. '사랑은 끊임없이 흐르는 것이다'. 그러나 사라의 흐름은 이혼 소송으로 끊어졌다. 프랑스 여행에서 돌아와 힘겹게 짐을 끌며 나아가서 몸을 흔들어대는 사라의 모습은 술에 취해 애인의 집 앞에서 뒹구는 로버트랑 별반 다름없어 보인다. 다만 로버트랑 달리 사라는 과거 충만했던 사랑을 다시 한번 재현하고자 할 뿐이다. 그 점에서 사라는 <영향 아래의 여자>의 머틀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광기와 불안증상에 빠진 인물이다. 머틀은 고단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채 몸만 커버린 아이였지만, 사라는 실패한 과거의 잔해에 매달리는 어른이다. 초기 시절 얼굴들을 잡아대던 거친 카메라의 클로즈업은 줄어들었지만, 패닝과 줌인으로 격정적으로 변하는 인물의 표정을 포착하는 후기 카사베츠의 카메라도 이런 불안함을 잡아내고 있다.

<사랑의 행로>가 흥미로운 부분은, 이 두 남매가 만나기까지 상당한 시간을 들여서 둘의 시공간을 분리해서 진행한다는 점이다. 카사베츠는 이미 <별난 인연> 도입부에서 미니와 시모어 두 인물의 시공간을 독립적으로 놓고 진행한 적이 있다. <별난 인연>가 서로 다른 시공간에 살고 있는 독립적인 두 인물이 하나의 공간으로 모이면서, 히스테릭한 흐름을 만들었던 것처럼 <사랑의 행로> 역시 비슷하면서도 다른 두 흐름을 지닌 인물이 만나면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지 보여주고 있다. 영화의 후반부를 장식하는 사건이 폭풍우라는 건, 카사베츠가 <사랑의 행로>에서 관찰하고자 하는 감정의 상태를 드러내는 장치인 건 당연하다. 카사베츠의 다른 영화들을 본 사람이라면, 로버트와 사라가 영화 내내 어떤 행동을 할지 대충 감이 잡힐 것이다. 그들은 술을 마시고, 사랑을 채우기 위해 동물을 마구 사들이거나, 외출을 해 다른 이성과 동침을 하거나, 가족에게 매달린다. 다만 <사랑의 행로>는 이런 히스테리를 표출하기 위해 이전 존 카사베츠 영화보다 적극적으로 환상과 무대에서의 연기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있다. 간헐적으로 끼어드는 사라의 폭력성과 불편함을 드러내는 환상 시퀀스, <차이니즈 부키의 죽음>이나 <오프닝 나이트>를 연상시키는 후반부 뮤지컬 시퀀스가 대표적이다. 이 영화가 사실상 카사베츠가 자기 방식대로 만든 마지막 영화라는 걸 생각해보면, 미완으로 남은 발전 아니었을까하는 의문도 있다.

<사랑의 행로>의 후반부와 결말은 일종의 부활과 각성에 가깝다. 끊임없이 이혼한 남편과 딸에게 대화를 시도하던 사라는 갑자기 기절해서 깨어나지 않고, 로버트는 안절부절하면서 사라를 깨우려고 애쓴다. 이를 위해 로버트는 폭풍우 속으로 사라가 마구잡이로 사들인 동물들을 불러모으고 마침내 깨어난 사라는 이혼한 남편과 딸을 찾아가 다시 재결합을 시도해보겠다고 선언한다. 막무가내로 당장 떠날 준비를 하는 사라를 말리던 로버트는, 거실에 앉아있다가 앞에 앉아있던 개가 벌거벗은 남자로 교차되는 환상 숏을 보게 된다. 지금까지 환상 시퀀스의 주체가 사라였다는 걸 생각해보면 로버트의 시점으로 제시된 이 환상은 이례적이고 뜬금없다. 다만 이 개가 사라가 막무가내로 데려온 반려 동물이라는 점은 실마리가 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로버트가 본 개 (실체)와 벌거벗은 남자 (환상)은, 사라가 떠날 자리를 대신 채워질 무언가가 아니었을까? 적어도 이 환영 숏은 사라가 꾸는 환영 시퀀스와 달리 묘하게 포근한 익살이 담겨 있다.

카사베츠의 다른 영화가 그렇듯이 <사랑의 행로>는 사건의 결말를 보여주는게 아니라, 그 직전에서 멈춰서서 인물들의 표정을 보여주면서 끝난다. 이때 로버트는 폭풍우 속에서 떠날 준비를 하지 않는 사라를 더 이상 말리지 않고, 그저 집 창문으로 지켜볼 뿐이다. 떠나는 자와 남는 자로 구성된 결말 시퀀스의 인물 배치와 시선은 어딘가 짠한 구석이 있다.사라는 기나긴 앓음과 붕괴 끝에 재건의 가능성에 대해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로버트는 어설프고 실수를 저지르면서 사라를 챙겨주려고 노력했다. 이제 사라는 다가올 고난을 향해 당당히 나아가고, 로버트는 그걸 지켜본다. 당시 시한부 선고를 받고 투병중이었던 카사베츠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앞으로 자신 없이 거친 세상의 폭풍우 속에서 살아가야 할 아내 지나 롤랜즈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카사베츠가 생각하는 '사랑의 흐름'이란 거칠고 충동적이며 많은 충돌을 일으키지만 결국 얽히면서 위무 받을수 밖에 없는 강렬한 에너지다. <사랑의 행로>은 그 점에서 제멋대로에 엉망진창인 현실 속에서 사랑받고 싶어했던 카사베츠의 캐릭터들에게 주는 작별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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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은 어떻게 형상화되는가?: [딥 엔드], [외침], [문라이팅]을 통해 본 예지 스콜리모프스키의 결핍과 히스테리
 
 
예지 스콜리모프스키는 로만 폴란스키의 동료로 시작했지만, 폴란드 영화사에서도 잊힌 감독에 가깝다. 그가 만든 영화 중 가장 대중적으로 성공한 영화는 1982년에 공개한 [문라이팅]이었으며, 대부분의 영화는 제대로 개봉하지 못했거나 아직도 먼지에 슬어있다. 심지어 1980년대 말부터 2000년대 말까지 영화를 만들지 않고 그림에 전념하던 시기도 있을 정도다. 차라리 그를 설명하자면 [어벤져스]의 러시아 악당이나 [이스턴 프라미스]의 늙고 고루한 주인공의 러시아계 할아버지를 드는 게 더 빠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예지 스콜리모프스키는 권투 선수와 재즈 음악가를 했다는 특이한 이력과 동시에, 개성 강한 폴란드 영화감독들 중에서도 불안과 결핍, 히스테리의 문제에 천착해온 감독이라 할 수 있다. 스콜리모프스키는 1960년대 말 폴란드를 떠난 뒤 영국, 독일, 프랑스를 전전하면서 국외자로서 영화를 만들어야 했다. 예지 스콜리모프스키의 영화는 어떤 지점에서는 망명자로서 불안과 히스테리를 안고, 그것을 어떻게 영화로 표현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본 장평은 스콜리모프스키가 197-80년대 영국 시절 만든 영화 세 편 [딥 엔드], [외침], [문라이팅]을 가지고 어떻게 스콜리모프스키의 불안을 형상화하는지 있는지 다뤄볼 생각이다.
 
  1. 불안의 요소
예지 스콜리모프스키의 영화를 보면 주인공 캐릭터에게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걸 알 수 있다. 바로 불안이다. 이 불안은 짜증스러움과 공격적인 태도, 기행, 또는 자존감 부족으로 드러나고 있다. 스콜리모프스키의 영화가 흥미로운 부분은, 영화가 진행될수록 주인공 뿐만이 아니라 다른 인물들에게도 불안이 강력하게 드러나며, 이 불안이 만들어내는 에너지로 영화를 이끌고 간다는 점이다. 스콜리모프스키는 이를 구현하기 위해 시나리오 단계부터 캐릭터에게 불안과 스트레스를 주는 상황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에피소드 형식으로 풀어내고 있다. 스콜리모프스키는 이를 하나로 묶는 틀로써 불안이라는 감정을 내세우며, 이 불안이 도무지 나아갈 수 없을때까지 계속 부풀리다가 갑자기 멈춰세우고 결론을 내리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든다. 그 결과 스콜리모프스키의 영화에서 인물들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며, 그 결핍 끝에 정신 착란적인 상황과 초현실적인 이미지를 경험하게 된다. 이런 짜증과 경험에 설득력을 배우의 연기에서 끌어내고 있는데, 감독의 배우 경력하고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본 단락에서는 영국 시절 스콜리모프스키가 만든 세 편의 영화가 서사에서 어떻게 불안을 형상화하는지 살펴볼 생각이다.    
 
예지 스콜리모프스키가 단순한 서사를 선호하는 감독임에도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이유라면 무엇일까? 그 이유로는 스콜리모프스키가 돌발성과 의외성을 통해 장르의 규칙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어떻게 진척될지를 쉽사리 파악하기 힘든 영화를 만든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스콜리모프스키가 종종 장르 영화의 특성에 끌려들어 가는 것처럼 보여도, 장르적인 전형성에 대한 만족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이유 역시, 이 불안이 방향성을 모호하게 만들며, 나아가 초현실적인 무드로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연기 역시 대사보다는 배우의 제스처에서 만들어내는 에너지에 집중하고 있다. 특히 [문라이팅] 같은 경우, 대사를 되도록 배제하고 제레미 아이언스의 행동에 집중하는 무성 영화적인 시도에 가까운 대사 활용을 보여주고 있다.
 
        1-1. [딥 엔드]: 스윙잉 런던의 섹스 코미디가, 섹스 희비극이 되기까지 
 
[딥 엔드]를 살펴보자. 이 영화는 1960년대 말 목욕탕 직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10대 마이크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 마이크는 부모님 때문에 목욕탕에 취직하고, 거기서 같이 일하는 또래 여자인 수잔을 짝사랑하게 된다. 수잔도 마이크를 싫어하진 않는다. 여기까지는 1960년대 서구권에서 우후죽순 등장한 성 혁명의 자유를 누리려는 섹스 코미디와 크게 다를 게 없는 전제다. 수잔 역 역시 당시 스윙잉 런던을 대표했던 모델이자 배우 제인 애셔를 기용하고 있다. 장르의 법칙에서 예상되는 [딥 엔드]의 서사적 귀결은 마이크가 짝사랑하는 수잔과 사랑을 이룬다, 일 것이다. 그리고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여러 코믹한 수난을 거칠 것이다. 실제로 틴에이지 섹스 코미디에서는 성적 수난은 코믹한 성장 과정의 일환을 그려진다.
 
하지만 스콜리모프스키가 마이크라는 인물을 끌고 가는 방식은 전제가 약속하는 안정된 전개를 무시하는 방식으로 이뤄져 있다. 사실 마이크와 수잔이 일하는 목욕탕은, 손님에게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다. 수잔은 이런 상황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다. 심지어 수잔은 마이크에게 성적 매력이 있으니 손님들에게 적극적으로 활용해보라고 충고를 한다. 하지만 마이크는 자신이 마주하게 된 상황을 어색하고 불편하게 생각하며 끊임없이 어긋난다. 영화의 초반부는 마이크가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그린다. 마이크는 성적으로 노련한 성인 여성들에 주눅이 들거나, 수잔의 남자들이나 경찰 같은 성인 남성에게 수난을 당한다. 마이크의 불안한 위치는 임신이 가능한 남자 포스터를 뒤집어쓴 장면이라던가, 직장에 등장한 부모님에게 의존적인 모습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마이크는 부모에게 의존적이며 미숙한 소년 성으로 여성들에게 호감을 얻지만, 그 호감은 일정선 이상 발전하지 않으며 본인 역시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성적인 상황을 통제하지 못한다.
 
반대로 수잔 같은 경우엔 남자들과 원조교제에 익숙해져 있고,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실제로 수잔은 마이크의 추궁에도 '나는 유부남과 섹스하는 훨씬 나쁜 여자다. 그럼 내가 어떤 여자야 하냐'고 반문하기까지 한다. 심지어 스콜리모프스키는 부모님이 사망했다는 설정을 통해 수잔이 마이크랑 달리, 미성년적 가치관에서 졸업했다는걸 명백히 밝히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수잔은 자신의 육체만을 탐하는 남자들을 경멸한다. 약혼자 크리스에게 너도 날 덮치지 않냐며 쏘아붙이면서 '결혼하면 영원히 나를 가질 수 있다'며 말하는 수잔의 대사는 섹스의 현실을 알아버렸고 결혼의 낭만성도 믿지 않는 캐릭터라는 걸 잘 보여주고 있다. 수잔은 명백히 성 혁명이나 페미니즘 이후에 가능한 여성상이다. 하지만 수잔은 자신이 처한 성인을 상대로 한 성적 매력의 거래와 착취라는 상황을 좋아하지 않는다. 수잔과 관계를 맺는 크리스나 수영 강사가 '결혼'과 관련 있다는걸 (크리스는 수잔의 약혼남, 수영 강사는 유부남이다) 생각해보면 가부장의 위선적이고 일탈적인 성적 해방의 덫에 걸려들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구도 때문에 [딥 엔드]의 연애 노선은 배배 꼬여있다. 수잔은 마이크에게 호감을 표하지만, 마이크가 가지고 있는 가부장에서 벗어난 듯한 순수함 때문이지 이성적인 매력 때문에 끌리지 않는다. 반대로 마이크는 현실성 없는 플라토닉한 사랑만으로 성적인 관계로 발전하려고 애쓴다. 그렇기에 수잔과 마이크의 관계는 영화가 끝나기 직전까지 직장 동료 이상에서 발전하질 못한다. 이 방향성의 어긋남은 끊임없이 불안과 히스테리로 누적되고 극단적으로 변한다. 마이크가 지하철에 타서 누드 핀업을 수잔에게 들이대며 '너는 그런 여자가 아니잖아'라고 히스테리를 부리다가 결국 수잔에게 제지당하는 장면은, 마이크의 성 관념이 유아적인 혼돈에 빠져있다는 걸 보여준다. 스콜리모프스키는 이 유아적 혼돈을 바라보는 승객의 숏을 통해, 마이크의 히스테리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보여준다. 수영장으로 돌아와 빠트린 누드 핀업이 여성으로 변하는 시퀀스를 마이크의 기대가 마침내 망상에 이르렀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결말을 장식하는 눈 속에서 반지 보석 찾기 시퀀스는 스콜리모프스키의 불안과 히스테리를 파국을 통해 농축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이 시퀀스는 수잔의 사소한 실수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스콜리모프스키는 이 사소한 실수를 논리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거창하게 확장하는 방식을 취한다. 수잔과 마이크는 보석을 찾기 위해 눈을 퍼다가 물 빠진 수영장에서 녹여서 찾기로 결정하는 것이다. 영화의 결말은 이 눈을 녹이는 수영장을 떠나지 않으며, 마이크와 수잔의 섹스 역시 반지를 찾은 이후 이뤄진다. 이 과정 도중에 수잔 역시 반지를 찾지 못할까 초조해하며, 심지어 자신과 관계가 있던 유부남 수영 강사에게 필요 이상의 짜증과 저주를 퍼붓는 모습을 보인다. 반지를 찾을 수 없다는 불안함과 초조함이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겼던 서비스적 관계를 거부하기에 이른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하지만 반대로 마이크는 보석을 미끼로 수잔에게 섹스를 거래하는 모습을 보인다. 어찌 보면 이 거래가 파국의 방아쇠를 당겼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거래가 이뤄진 후 수잔과 마이크는 수잔이 지금까지 해왔던 원조교제적인 관계나 다름없어지기 때문이다. 후술하겠지만 마이크와 수잔의 섹스 장면을 묘사할 때 등장하는 현란한 앵글과 편집은, 섹스의 친밀함보다는 기교로 심적인 거리감을 강조하고 있다. 섹스 후 등장하는 마이크의 발악이 수잔을 향한 크리스라던가, 수영 강사의 반응과 다를 게 없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스콜리모프스키는 여기다 갑작스러운 결말을 내면서, 이런 답답함을 박제해버린다. 이 [딥 엔드]가 성적으로 문란한 여성을 남성이 처벌한다는 상당히 반 페미니즘적인 읽힐 수 있을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음에도, 그런 위험에 빠지지 않았다면 수잔과 마이크라는 두 인물의 양면성을 표현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에드워드 양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처럼 反-성장물이라 볼 수 있다면, 성장하려고 애쓰다가 성인 남성이 당연시하는 자기중심적이고 여성 혐오적인 행동 방식에 물들어 여성을 우발적으로 살해해버린 소년의 파국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1-2. [외침]: 음향의 주체가 드러내는 문명과 야만의 대립
 
시골 데본에서 진행되는 [외침]은 스콜리모프스키 특유의 불안이 공포/괴담 장르에서 어떻게 전개될 수 있을지, 를 보여주는 영화다. 그리고 다른 두 편보다 이야기 구조에 대한 실험과 더불어, 음향과 이미지의 결합이라는 점에서 심리적인 불안을 구체화하고 있다. 앤서니와 레이철은 이상적인 부부라는 껍데기 아래에 각각 간통과 불임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다. 이들의 부부 관계는 호주 원주민들에게 외침을 배운 찰스 크로슬리가 끼어들면서 해체된다. [외침]이 흥미로운 점은, [딥 엔드]에서 볼 수 있었던 히스테리 연기나 자잘한 사건식 구성은 줄어들었지만 대신 설명을 축소하고 서사를 추상화하는 방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외침]의 초반부를 보면, 앤서니와 레이철 부부가 이미 등장하고 있음에도 처음 볼 때 그 사실을 알아차리기 힘들다. 왜냐하면, 액자 밖 이야기는 크리켓 점수 기록 때문에 정신병동에 온 그레이브스의 시점을 따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앤서니 부부와 크로슬리가 등장하는 숏은 처음 보는 관객 입장에서는 어떤 맥락에서 등장하는지 알 수 없다. 화자를 의도적으로 혼란스럽게 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인데, 실제로 액자 속 얘기 역시 명백히 크로슬리가 화자임에도 앤서니와 레이철의 시점을 따라가고 있다. 그리고 영화 후반부에 이르면, 이야기의 주체는 다시 크로슬리로 바뀌면서 끝나면서 혼란을 가중하고 있다.
 
또한 스콜리모프스키와 각본가 마이클 오스틴은 설명을 의도적으로 생략하고 갑작스러운 전개 방식을 취하고 있다. 크로슬리가 사라졌다가 재등장하는 장면이라던가 앤서니가 몰래 사귀고 있는 여자의 남편이 갑자기 저주로 고통받는 회상 시퀀스, 크로슬리의 영혼을 보관한 돌을 어떤 복선 없이 앤서니가 찾아내는 부분이 그렇다. 그리고 액자 속 서사가 끝났을때 스콜리모프스키는 앤서니나 레이철이 어떤 상태인지 설명하지 않고, 영화 도입부에 등장한 레이철이 크로슬리의 시체를 확인하는 장면을 다시 반복한다. 이 반복을 통해 스콜리모프스키는 이 이야기를 과연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지를 질문한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제대로 된 답은 없이, 불길한 감정을 남긴 채 마무리된다. 다만 이런 식의 전개가 스콜리모프스키의 개성을 드러내기보다는 호러나 괴담 장르의 전형성과 비틂에 기대고 있다는 점에서는 [외침]은 스콜리모프스키의 정수를 확인하기엔 다소 아쉽다는 인상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액자 안에서 진행되는 [외침]의 서사는 사실 장르를 일탈하는 내용은 아니다. 성을 기반으로 한 부르주아 해체극과 문명과 야만이라는 갈등 자체는 이미 다른 영화에서도 많이 쓰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주술이라는 개념도 1970년대 오스트레일리아 뉴웨이브 영화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원작 소설에서 영화로 각색하면서 스콜리모프스키는 소리라는 개념을 부각하며, 소리를 '만드는' 과정을 이미지로 담는데 집착하는 데다 장르에도 반영하면서 긴장감을 만들고 있다. 원작과 달리, [외침]에서 앤서니의 직업은 교회 오르간 연주자이자, 현대 음악가다. 그는 교회 신자들을 위해 오르간을 연주하면서도, 현대적인 스튜디오에서 예술 작업을 이어간다. 앤서니의 직업과 활동은 그 점에서 서구 문명에 사는 지식인의 믿음 체계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크로슬리는 이런 믿음 체계를 교란하는 자로 등장한다. 앤서니를 만난 크로슬리가 갑자기 종교와 영혼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토론을 하는 것도 이런 연장선에 있다. 전근대성의 파괴성을 지닌 크로슬리에겐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고발하고 영적 각성을 촉구하는 교회 목사의 말들은 공허하기 그지없기 때문이다.
 
[외침]의 서사에서 주목할 만 부분이라면, 크로슬리가 갑자기 사라졌다가 다시 등장하는 지점이다. 이때 앤서니의 반응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앤서니는 크로슬리가 사라지는 걸 고대했지만, 정작 사라졌을 때 반응은 안심하면서도 어딘가 찜찜하다는 심리를 드러낸다. 이후 이들의 삶은 크로슬리가 등장하기 이전처럼 진행된다. 다소 모호하게 처리된 부분이 있다면, 앤서니와 간통 상대의 관계일 것인데 스콜리모프스키는 갑작스럽게 교회를 나가는 간통 상대의 숏과 자전거가 걸려 넘어진 숏을 집어넣으면서, 이들의 간통이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라는 걸 암시한다. 하지만 집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레이철과 앤서니는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신경질적으로 변해있다. 심지어 앤서니는 크로슬리의 외침을 흉내 내는 모습을 보인다. 이때 다시 크로슬리가 등장하는데, 부부의 반응은 크로슬리에게 홀려있는 상태다. 스콜리모프스키는 관계를 처음으로 돌리는 척하면서, 이들의 관계에 크로슬리라는 야만적 타자한테 얼마나 잠식돼버렸는지 보여준다. 하지만 레이철과 달리 앤서니는 얼마 안 있어 크로슬리의 홀림에서 벗어나 버리는데, 야만의 세계에서 수컷들은 결국 경쟁할 수밖에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여성에게 주술을 걸어 소유물로 전락시키고 나아가 수컷들 간의 적대심을 불러일으키는 도구가 된다는 점에서, [외침]의 전개는 분명 여성 혐오적인 지점이 있다. 다만 영화의 결말은 이런 구도를 이상하게 틀고 있기도 하다. 상술했듯이 수컷들은 죽거나 병원에 입원해 등장하지 않고 레이철 혼자서 크로슬리의 시체를 확인하는 것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여기다 앤서니와 레이철의 관계 역시 보기보다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었다는 점이라던가, 레이철이 크로슬리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꼈다는 지점을 생각해보면 관계를 단순한 주종 관계라 볼 수 없는 부분도 있다. 되려 결말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레이철이 남성들에게 해방되었다는 인상마저 준다. 물론 이런 해방이 매우 단편적으로 그려진다는 점에서, [외침]이 여성 혐오에서 벗어났다고 보긴 힘들다. 다만 [딥 엔드]의 갑작스러운 살해라던가 [문라이팅]의 의처증과 거기서 비롯된 망상에 대한 객관적인 관찰처럼 스콜리모프스키의 영화에서는 남성성에 대한 거리 두기가 이뤄지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인상을 준다.
 
        1-3. 문라이팅: 귀환의 불확실성에 홀로 갇혀버린 폴란드 남자
 
[문라이팅]은 영국 하위층에 속한 불법 체류자의 비루함이라는 정치적 상황을 불만족과 히스테리로 연계하는 영화다. 영국인을 주인공으로 삼고 심리에 집중했던 두 영화랑 달리, [문라이팅]은 영국 내 폴란드인이라는 민족적인 텍스트와 1980년대 자유 폴란드 노조 사태라는 정치적인 텍스트를 직접적으로 끌어들인다. [문라이팅]의 불만족은 귀환의 불확실성에서 비롯된다. 영화는 입국 심사장에서 시작하는데 [딥 엔드]의 도입부 면접 시퀀스와 닮아있는 구석이 있다. 먼저 장소 설정은 마치 영국이라는 사회가 이 폴란드 남자들을 허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검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딥 엔드]가 그렇듯이 [문라이팅]의 주인공들 역시 이 심사 과정이 어색하고 불안하다. 마스터 숏 없이 끊임없이 머리를 다듬는 직원의 클로즈업으로 시작하는 점이라던가, 번쩍거리는 형광등이 만들어내는 불안한 조명, 말없이 보기만 하는 얼굴 숏들을 이런 불안함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스콜리모프스키가 망명한 폴란드인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이 불안함을 스콜리모프스키의 불안감하고도 연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의 폴란드인인 노박과 볼스키, 바나샥, 쿠데이는 이중 착취 구조에 빠져 있다. [문라이팅]의 시작은 영국의 값싼 급여가 폴란드의 비싼 급여가 될 수 있다고 꾀어 1달 동안 저임금으로 일하게 만드는 것에서 비롯된다. 스콜리모프스키는 이 설정을 통해 폴란드의 공산주의 체제와 영국의 자본주의 체제의 격차와 그 격차에서 이득을 챙기려는 자들을 보여준다. 도입부 티나 터너 공연을 회상하는 장면은 사실상 공산주의 체제와 자본주의 체제가 별반 다를 게 없어졌다는 감독의 선언이기도 하다. 하지만 폴란드가 자유 노조 문제로 상황이 불안해지자, 이 착취의 허위성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 착취 구조를 알고 있고 유일하게 영어를 할 줄 아는 폴란드인인 주인공 노박은 부하들과 달리 권력을 쥘 수 있게 되지만 대신 온갖 수난을 당하게 된다.
 
노박을 불안하게 상황들은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번째로는 어떻게든 사실을 숨기고 생존하기 위해 애쓰는 노박과 사실을 모르는 세 노동자들의 관계가 파탄난다. 거짓말과 무급으로 착취하는 노박과 모르고 당하는 세 노동자의 관계는 그 점에서 공산당의 착취에 반대하며 정당한 노조 구성을 요구하는 폴란드 자유 노조 사태의 거울쌍 같은 존재다. 결말의 사실을 알고 분노한 노동자들은 자유 노조 사태에 대한 씁쓸한 풍자라 할 수 있다. 두 번째로는 적은 돈으로 영국에서 작업해야 하는 바람에 재정난이 발생해,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 그 결과 빠르게 귀국해 편안하게 살려는 계획이 망가져 버린다. 세 번째로는 아내 안나가 사장과 간통을 저지르고 있다는 의심이다. 이 의심은 폴란드로 돌아가야 해결되지만, 노박은 돌아갈 수 없다. 왜냐하면 레흐 바웬사와 자유 노조 운동 때문에 귀국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노박의 권력은 중요하지만 하찮기 그지없는데, 상황을 조감할 수 없는 중간관리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영국인들의 외국인 혐오증이다. 서브플롯으로 등장하는 폴란드인들에게 공사 소음을 욕하며 폴란드로 돌아가라고 외치는 영국인들이 대표적이다. 폴란드와 영국이 꽤 오랜 시간 동안 우호적인 외교 관계였지만, 영국의 외국인 혐오증과 더불어 2차 세계 대전의 자유 폴란드군 문제처럼 두 나라에서 버림받은 어둠이 있다는 걸 생각해보면 이 서브플롯은 매우 뼈아픈 정치적 문제를 찌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세 문제가 오가면서 노박은 상당한 박탈감과 불안감에 시달리게 된다. [문라이팅]은 [딥 엔드]의 런던 도회의 에피소드 위주의 전개로 돌아가면서도 대사와 언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불법 체류자의 박탈감과 불안감을 파고든다. [문라이팅]은 대사가 많은 영화다. 하지만 정작 대사의 대부분은 외화면에서 펼쳐지는 노박의 영어 내레이션에 기대고 있다. 반대로 영화 속 노박의 대사들은 자막 없는 폴란드어나, 최소한의 문장으로 이뤄진 영어뿐이다. 그렇기에 [문라이팅]은 노박의 심리 묘사는 넘쳐나는데, 화면 속 실제 소통은 부족한 불균형을 이루고 있다. 게다가 볼스키, 바나샥, 쿠데이는 폴란드어 밖에 할 줄 모르는 데다 고국의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심리를 읽을 수 없다. 한마디로 타자로 그려진다. 때문에 [문라이팅]은 1인 퍼포먼스 극에 가까운 영화로 변모한다. 스콜리모프스키는 영화 대부분을 노박이 물건을 훔치거나, 어떻게 돈을 아낄 수 있을지 전전긍긍하거나, 동료들을 속이는 방법을 궁리하는 에피소드로 채운다. 자잘한 사건의 연속으로 영화를 이끌어간다는 점에서는 [딥 엔드]의 구조로 회귀했다고 할 수 있지만, 초라함은 더욱 강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초라함은 영화의 엔딩에서 쓸쓸하게 드러난다.

        1-4. 학대당하는 자전거, 결말의 모호함

재미있는 점은 이 세 편의 영화에서 자전거가 중요하게 등장한다는 점이다. 자전거는, 자동차랑 달리 미성년도 소유할 수 있는 탈 것이다. 탈 것 중에서도 가장 왜소한 모양새라는 점도 주목할만하다. 왜냐하면 세 편의 영화에서 자전거는 남성 주체의 왜소함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스콜리모프스키의 영화에서 자전거를 타는 남성은 차를 타지 못하거나, 타더라도 조수석에 앉아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타고 다니던 자전거 역시 훼손되거나 처박히거나, 아니면 도둑맞기까지 한다. [딥 엔드]에서 마이크가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장면으로 영화를 시작한다.  이 도입부 이후 [딥 엔드]는 마이크의 자전거를 험하게 다룬다. 그중 가장 노골적인 상징은 자동차 바퀴 아래에 낀 마이크의 자전거다. 자전거가 사라진 마이크는 얼마 안 있어 소호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전철을 타는데, 여기서도 소동을 불러일으키는 등 불안감은 해소되질 못한다. 마이크는 소심하게 자동차 타이어를 펑크내는 것으로 복수를 하지만, 끝내 자동차를 타지 못한 채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이런 대우는 마치 미성년으로써 마이크의 불안한 위치를 반영하는 것처럼 보인다.
 
반대로 [외침]에서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건 성인 남성인 앤서니다. 그렇지만 앤서니는 한 번도 자동차를 운전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대신 간통 대상과 함께 자전거를 타거나 레이철이 운전하는 자동차 조수석에 앉아 있다. 반대로 크로슬리는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모습을 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크로슬리와 앤서니의 만남 역시 앤서니의 자전거 바퀴의 바람을 빼면서 이뤄진다는 점이다. 앤서니는 크로슬리 앞에서 바람 빠진 바퀴에 펌프질하는데, 이 행위는 뒤에 등장하는 앤서니랑 간통 상대가 자전거랑 타는 시퀀스랑 붙어 분명한 성적인 암시를 남긴다. [외침]에서 자전거는 성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지만, 미성년의 불안보다는, 크로슬리로 대표되는 야만 앞에 불안한 문명인의 위치를 은유하는 쪽으로 다뤄진다. 한편 [문라이팅]에서 자전거는 성적인 의미보다는 정치 사회적인 의미에 가깝다. 노박은 불법 체류자이기 때문에 자동차를 얻지 못한다. 대신 자전거에 기댈 수 밖에 없는데, 기껏 얻은 자전거는 도둑맞고, 새로 자전거를 훔쳐야 하는 상황까지 이른다. 전반적으로 스콜리모프스키 영화에서 자전거의 대접은 그리 좋다고 할 수 없는데, 주로 인물의 불안을 가중하는 방식으로 쓰이고 있다.
 
영화의 결말 역시 중요한 단서다. 스콜리모프스키는 파국 이후 혼란스러움에서 영화를 끝내는 경향이 있다. [딥 엔드] 같은 경우, 수잔이랑 섹스를 한다는 최종적인 목표에 도달하는 순간, 갑작스럽게 싸늘한 비극을 동반한 초현실적인 결말에 도달한다. 스콜리모프스키는 이 결말을 위해 영화를 만들었다고 설명한 적이 있는데, 이 인터뷰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딥 엔드]는 예정된 운명으로 달려가는 희비극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외침]은 호러 장르가 가지고 있는 모호함을 이용해, 의도적으로 설명을 무시하면서 그 불안을 촉발한다. [외침]의 결말에서 대체 앤서니는 어떻게 된 것인지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숏은 크로슬리 시체를 확인하러 온 레이철에서 끝나기 때문에 합당한 설명이 없고 모호한 상태 그대로 남게 된다. 한편 [문라이팅]는 어떻게 영국에서 살아남아 폴란드로 돌아가는 데 성공하지만, 비행기를 타기 전 진상을 밝힌 노박이 동료들에게 두들겨 맞는 것으로 끝난다. 안나가 정말로 간통하고 있었는지, 노박과 일당들이 제대로 보상받을 수 있을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인물들이 갈망하는 목표나 정황에 대한 합당한 설명을 주지 않은 채 끝나는 결론을 선호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1. 불안의 형상화
        2-1.촬영과 편집의 파편화, 초현실적 투사
 
그렇다면 스콜리모프스키는 어떤 식으로 불안을 영화 언어로 형상화하고 있는가? 먼저 스콜리모프스키의 영화에서는 촬영과 편집이 파편화된 방식으로 이뤄지며, 궁극적으로는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창출하고 있다는 걸 지적해야 할 듯하다. [딥 엔드]를 살펴보자. 이 영화에서 인상적인 몽타주는 도입부에 등장하는 떨어지는 빨간 액체에서 좀 아웃되어 자전거라는 걸 밝히는 숏과 결말 부근에 등장하는 마이크와 수잔의 섹스 장면이다. 전자를 통해 스콜리모프스키는 이 [딥 엔드]라는 영화가 도착할 결말이, 해피 엔딩이 아닌 배드 엔딩에 가깝다는 걸 액체의 질감과 기괴함을 통해 감각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한편 후자 같은 경우 스콜리모프스키는 눈 같은 신체 부위만을 담은 극단적인 클로즈업과 짧은 숏, 부감 숏을 빠르게 교차하면서 섹스의 쾌락과 행위를 시각화한다. 하지만 이 몽타주에서 에로스 행위는 매우 짧게 제시되기 때문에 감각을 파편화하는 쪽에 가깝다. 이 장면 이후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를 생각해보면 이 파편화가 에로스를 싸늘하게 분해하는 쪽에 가깝다.
 
[외침]은 스콜리모프스키 영화 중에서도 촬영과 몽타주의 파편화가 심한 영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극단적인 줌 사용도 그렇지만, 영화는 음향을 증폭하거나 몽타주를 추상적으로 연결하는 방식으로 감각 기관의 불연속성과 압도됨을 표현하고 있다.  [외침]에서 주목할 장면은 레이철과 크로슬리의 섹스 시퀀스일 것이다. 이 장면은 앤서니가 권력을 상실하고, 크로슬리의 지배가 본격화된다는 점에서 서사의 변곡점이라 할만하다. 이 섹스 시퀀스가 [딥 엔드]가 그렇듯이 파편화된 숏의 연결로 이뤄져 있다는 점도 주목할만하다. 그런데 스콜리모프스키는 이 섹스 시퀀스에서 갑자기 앤서니의 스튜디오에 걸려있던 나체 여자 사진을 옷을 다 벗은 레이철이 흉내 내는듯한 흑백 숏을 집어넣는다. 레이철은 어째서 스튜디오에 걸린 사진의 자세를 흉내 냈을까? 우선 이 시퀀스의 주체가 누군지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답은 간단하다. 스콜리모프스키는 이 시퀀스를 앤서니가 달리는 숏이랑 교차 편집하고 있다. 즉 레이철과 크로슬리의 섹스 시퀀스는 앤서니의 상상이다. 요컨대 레이철이 자세를 흉내 낸 것은, 앤서니가 늘 머무는 스튜디오의 풍경이 앤서니의 악몽과 뒤섞였기 때문에 등장한 것이다. 그 점에서 레이철과 크로슬리의 섹스 시퀀스는 스콜리모프스키의 초현실주의적 경향이 호러 장르의 불안과 어떻게 결합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문라이팅]은 파편화된 몽타주는 자제하되, 지속해서 등장하는 텔레비전 숏과 더불어 줌과 클로즈업을 통해 노박의 생존을 위한 범죄과 초조함을 물화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문라이팅]의 초현실주의가 잘 드러나는 장면은 크리스마스 파티를 벌이고 난 뒤, 잠자리에 든 노박이 안나의 환영을 보는 시퀀스일 것이다. 이 장면이 흥미로운 이유는 텔레비전 브라운관이라는 스크린을 통해 안나의 환영이 실체화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문라이팅]에서 텔레비전은 고국 폴란드의 상황을 보여주는 Showing 역할이기도 하지만, 노박의 불안을 투사 Projection 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딥 엔드]와 [외침]에도 그랬듯이, 스콜리모프스키의 초현실주의는 주인공의 무의식이 투영된 이미지의 실체화를 보여주는 경향이 있는데 정작 그 실체화는 주인공의 불안과 결핍을 해소해주지 못한다. 노박이 아내의 환영을 보자마자 브라운관을 깨버리는 장면은, 스콜리모프스키가 스트레스나 망상을 이미지로 '형상화'하는 데 관심이 많다는걸 보여주고 있다.
 
        2-2. 고립과 소외, 컨텍스트로써 음향
 
한편 음향이라는 부분에서도 주목할 점이 많다. 재즈 연주자였다는 이력답게 스콜리모프스키의 영화적 특징 중 하나라면, 망명자로서 망명한 국가의 영화적 조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영화를 만든다는 점이다. 때문인지 몰라도 스콜리모프스키는 음향을 통해 불안과 고립을 강조함과 동시에 문화적 컨텍스트에 관심을 보이는 모습을 보인다. 우선 [딥 엔드] 같은 경우에는 당시 유명했던 록이나 팝 음악가가 참여하고 있다. 영국 포크 가수 캣 스티븐스의 'But I Might Die Tonight'하고 독일 록 밴드 캔의 'Mother Sky'가 대표적이다. 'But I Might Die Tonight' 같은 경우 애상적인 멜로디와 외침으로 강렬한 초현실주의적 분위기에 영향을 미친다면, 'Mother Sky' 같은 경우에는 신경질적이고 반복적인 기타 독주, 의미 없는 가사를 읊조리다 외치는 보컬을 통해 마이크가 밤거리를 방황하는 시퀀스에 긴장감을 부여하고 있다. 그런데 두 가수의 국적을 촬영 장소랑 연계하면 흥미로운 해설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딥 엔드]는 실외 장면을 포함한 절반은 영국에서 찍었지만, 실내 장면을 포함한 다른 절반은 영국이 아닌 서독일 스튜디오에서 촬영했다. 스콜리모프스키는 두 삽입곡을 통해 이 영화가 두 개의 국가에서 촬영했다는 걸 주지해주길 요청하는 것처럼 보인다. [딥 엔드]의 삽입곡은 어떤 지점에서는 당시 영국과 서독일의 문화을 반영하면서, 감정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킨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삽입곡이 등장하지 않는 [외침]이나 [문라이팅]를 살펴보자. [외침] 같은 경우엔 프로그레시브 록이라는 복잡한 구성의 록 음악을 추구했던 밴드 제네시스의 멤버를 기용해 음악을 맡기고 있다. 사운드트랙 자체는 호러 영화의 전형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지만, 음향을 문명과 야만의 대비와 연계하는 방식에서 주목할 부분이 있다. 영화는 앤서니가 스튜디오에서 소리를 채집하고 만드는 장면을 공들여 보여준다. 여기서 앤서니의 채집과 합성 행위가 앤서니의 육체하고 분리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할 듯 하다. 병에 사로잡힌 벌레가 내는 음이라던가 연장 도구, 담배를 이용해 만든 음들은 앤서니의 성대를 거치지 않고 마이크로 녹음된 뒤, 신시사이저로 합성된다. 요컨대 앤서니의 작업과 생활은 파편화되어 있고, 기계를 통해 인위적인 합성 과정을 거쳐야 완성할 수 있다. 반대로 크로슬리의 '외침'을 보자. 이 외침을 보여줄때 스콜리모프스키는 크로슬리의 얼굴과 입을 극단적으로 클로즈업해서 이 외침이 크로슬리가 냈다는 걸 강조하고 있다. 앤서니의 합성된 소리가 기괴하지만, 파괴력이 없다면, 크로슬리의 육성은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 크로슬리의 육성을 통해 전해지는 외침은 이런 안정 되어 있는 문명인의 파편화와 합성 개념을 교란하고 있다. 앤서니의 작업에 대한 크로슬리의 조롱이라던가, 외침 장면 이후 크로슬리의 지배가 본격화된다는 점, 크로슬리가 사라진 뒤 앤서니가 외침을 흉내낸다는 점은 그 점에서 육성이 가지고 있는 원초성과 파편화된 문명의 허약함을 드러낸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문라이팅]는 전작들과 달리 사운드트랙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영화는 아니지만, 대신 침묵과 소음의 대비에 집중하고 있다. 우선 이 영화의 대사가 외화면에서는 지나치게 과다하지만 내화면에서는 지나치게 부족한 상황에 놓여있다는 점은 언급한 적이 있다. 스콜리모프스키가 대사 대신 내화면을 채워 넣는 음향은 공사 소음과 텔레비전 뉴스다. 먼저 공사 소음 같은 경우, 작업 특성상 전기톱과 드릴이 만들어내는 살벌한 음향들이 대부분이다. 이 음향은 영화 내내 등장하여 폴란드어 대사를 지우거나 짜증을 불러일으킨다. 이 소음의 살벌함은 영국인들의 외국인 혐오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노박과 다른 동료들과 소통이 단절된 상황을 은유하고 있다. 한편 [문라이팅]은 텔레비전이 상당히 중요하게 등장하는 영화인데, 노박과 동료들이 일하는 공간에서 보는 텔레비전은 전파가 제대로 잡히지 않거나, 노박의 음모로 보이질 않는다. 반대로 노박이 혼자 있을 때 들려오는 폴란드 자유 노조 사태를 전달하는 뉴스는 영어를 들을 수 있는 노박의 초조함을 가중한다. 노박은 텔레비전을 통한 소통을 가로막지만, 반대로 텔레비전이 전하는 현실에 위기의식과 소외감을 느낀다. [문라이팅]은 그 점에서 음향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고립'과 '소외'라는 상황과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데 주력하고 있다.
 
  1. 결론 
세 편의 영화로 살펴본 예지 스콜리모프스키의 영화 세계는 크게는 불안함을 일으키는 서사적 요소, 음향에 대한 민감함, 파편화된 숏과 편집, 초현실적인 이미지의 투사 및 형상화로 종합해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다 영화적 조류에 대한 민감함이라던가 세 편에 등장하는 자전거의 활용 역시 주목할만하다. 스콜리모프스키의 영화의 독특함은 불안함과 히스테리라는 비가시적인 심리 상태를 형상화하는데서 드러난다. 물론 이런 연출이 폴란드 시절에서 어떻게 발전하고 변해왔는지를 논증할 수 없다는 점은 아쉽다. 2011년 영국판 [딥 엔드] 블루레이 발매를 알리는 씨네21 기사에서도 "스콜리모프스키는 자기 영화를 접하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알고 있으며", "스콜리모프스키 영화의 DVD는 지금도 희귀한 편"라는 얘기를 했을 정도다. 8년이나 지난 지금 역시 스콜리모프스키의 영화는 한 두 편 정도 더 복원되었을 뿐, 제대로 된 회고전 역시 보기 힘든 상황이다. 이에 따라 한국은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예지 스콜리모프스키 영화에 대한 담론은 다른 폴란드 출신 감독들에 비해 그리 활발하지 않은 편이다. 다만 그나마 쉽게 볼 수 있는 스콜리프스키의 영화를 분석한 이 장평이 감독에 대한 이해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기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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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코 [寝ても覚めても / Asako I & II] (2018)


하마구치 류스케의 [아사코]는 도시 전경을 담은 마스터 쇼트에서 시작한다. 이 도시 마스터 쇼트는 초반부가 끝난 이후에도, 장소를 바꿔가면서 제시되는데 마치 이 영화의 이야기가 어디서 진행하고 있는지 기억해달라는 것처럼 보인다. 중학생들의 불꽃놀이가 터지고 아사코는 미술관에 사진 전시를 보러 간다. 여기서 아사코가 멈춰서 보고 있는 사진은 두 명의 쌍둥이를 찍은 사진이다. 마치 같지만 다른 쌍둥이처럼, 같은 얼굴이지만 다른 정체성을 지닌 남자를 사랑하게 되는 걸 예언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사코는 미술관에서 바쿠를 만나지만, 둘의 관계는 자기소개가 아닌 우연을 가장한 숨바꼭질 끝에 느닷없는 키스로 시작한다. 그리고 알고 봤더니 그들은 서로의 친구랑 아는 사이라는 '운명' 같은 기연이 이어진다. 아사코와 바쿠랑 친한 오카자키가 말했듯이 "말이 안 되는" 상황인 셈이다. 순정 만화에서도 작위적이라고 말할 정도로 너무나도 완벽하게 짜인 구도다. 아사코의 친구인 하루요 역시 절대 사귀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도 이해가 될 정도다. 그 말을 증명하듯이 이 말도 안 되는 사랑은 얼마 안 있어 바쿠가 사라지면서 끝나고 만다.

주목해야 할 점은 아사코와 바쿠의 연애가 러닝타임 120분 중 20분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에 끝난다는 점이다. [아사코]는 타이틀이 뜬 후, 도쿄로 배경을 옮겨간다. 그리고 후반부까지 대부분의 이야기가 도쿄에서 진행된다. 이때 하마구치가 관심을 갖는 것은 반복과 차이다. 아사코는 도쿄에서 같은 얼굴, 다른 이름을 가진 남자 료헤이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아사코는 료헤이를 보고 몇 번이나 되물어보고 당혹해한다. 아사코는 료헤이를 피하려고 하지만, 사진가 고쵸 시게요의 전시가 도쿄에서 다시 열렸을 때 아사코와 료헤이는 감정적으로 얽히게 된다. 이때 다시 등장한 고쵸 시게오의 사진은 트래킹 쇼트가 아닌, 고정된 쇼트로 제시된다.

두 번의 고쵸 시게오 전 시퀀스는 [아사코]를 이해하는 단서다. 하마구치는 처음 20분 동안 바쿠와 아사코의 연애를 통해 영화의 진행 방식을 세운 뒤, 료헤이가 다시 등장했을 때 진행 방식이 어떻게 달라져 있는지 관객이 인지하길 원한다. 이 변화는 인물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변화기도 하고, 아사코 자신 SELF가 같지만 다른 두 타자 OTHERS를 어떤 식으로 바라보느냐를 다루고 있기도 하다. 실제로 초반부 아사코는 료헤이를 볼 때 유리에 비친 모습으로 인지하거나 시선을 던진다. 초반부 반사된 이미지로 아사코 앞에 등장하는 료헤이야말로 도쿄에서 아사코와 료헤이의 연애 (2) 가 오사카의 아사코와 바쿠의 연애 (1)에서 벗어날 수 없는 반사 이미지나 다름없다는 불길한 현기증이기도 하다. 이를 증명하듯이 료헤이와 아사코가 첫 입맞춤을 할 때 하마구치는 갑자기 점프 컷으로 입맞춤을 두 번 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이후 이어지는 아사코와 료헤이의 연애는 유혹이 아닌 불안과 공포에 기반한 밀고 당기기로 진행된다. 바쿠와 달리 료헤이가 아사코에 빠진 이유는 명확하게 그려진다. 마야를 두둔하면서, 아사코는 이전의 소극적인 모습과 달리 적극적으로 마야를 두둔하는 모습에서 아사코에 올곧고 망설이지 않는 구석이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료헤이는 자신이 바쿠랑 닮았다는 사실을 모르기에 그런 올곧고 망설이지 않는 아사코가 가지고 있는 두려움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 때문에 연애가 진행될까 싶으면 갑자기 뒤로 물러나는 상황이 지속된다.

이 상황에 대해 료헤이는 직설적으로 말한다. "원점으로 돌아간 것 같다"고. 계속 원점으로 돌아가는 상황을 반전시키는 것은 동일본 대지진이다. 아사코랑 만나기 위해 마야의 [들오리] 연극을 보러 온 료헤이는 동일본 대지진을 겪는다. 그리고 직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밤이 될 때까지 걸어간다. 밤이 되자 료헤이는 다리에서 아사코를 만나고 둘은 처음으로 포옹을 한다. 이때 동선을 살펴보면 료헤이가 기다리고 있던 아사코에 돌아온 모양새이기도 한데, 이는 '반복'에서 비롯된 '귀환'이라는 행위하고도 연결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아사코]의 대지진은 하마구치의 전작보다 연애 서사에서 갑자기 부로 끼어드는 인상이 강한 편이긴 하다. 애당초 원작이 된 소설은 동일본 대지진 이전에 발매된 소설이었고, 역사의 흐름이 언급되긴 하지만 상투적인 설정 위에서 주관적인 시점에서 비틀어진 연애라는 주제에 집중하는 소설이었다. 어떤 지점에서 [아사코]의 지진은 연애가 잘 진행되지 않을 때 등장해 흔들 다리 효과로 연인들을 이어주게 하는 소도구에 머문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 끼어드는 대지진이 과연 소도구에만 머무는 것일까? 그 의문을 대답하듯이 2의 2번째 장이 시작된다. 아사코와 료헤이는 본격적으로 사귀고 있으며, 고양이 진땅을 키운다. 한편 이들은 어느새 결혼해 아이를 가진 마야와 쿠시하시 부부하고도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상황 설명이 끝난 뒤, 아사코와 료헤이가 센다이로 가서 자원봉사 활동을 한다. 분명히 외삽적인 장면임에도, 이 흐름에는 꽤 당황스러운 구석이 있다. 새로운 공간 축이 갑자기 추가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아사코] 내 장소 관계도를 다시 그려야 할 것이다. 오사카-도쿄-센다이로 말이다. 이런 장소의 추가는 당연하겠지만, 동일본 대지진이라는 사건에 따른 추가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영화에서 등장하지 않지만, 센다이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바쿠의 고향 홋카이도가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하마구치는 센다이를 바다와 해산물의 공간으로 그린다는 점이다. 아사코와 료헤이는 센다이 주민들과 어울리면서 생선과 해산물을 팔고 먹는다. 그런데 하마구치는 료헤이와 아사코가 센다이에서 주민들과 해산물을 먹을 때, 아사코의 1인칭 시점으로 료헤이가 해산물을 먹는 쇼트를 찍었다. 다음 쇼트에서 아사코가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있는 걸 보면 이 쇼트는 사적인 기록으로 보존될 순간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왜 료헤이가 해산물을 먹는 장면을 녹화할 때 아사코의 눈으로 봐야 했는가? 이 시퀀스에서는 그 답을 찾기 어렵다. 그렇다면 다른 시퀀스에서 찾아야 하는데, 답은 엉뚱하게도 봉사활동 시퀀스가 아닌 아사코가 오사카로 돌아가기 전 환송 모임 시퀀스에서 등장한다. 여기서 아사코는 센다이 자원봉사 활동을 하는 것에 대해 '틀린 일을 하고 싶지 않아서'라고 말한다. 후쿠시마 방사능으로 오염된 물 근처에서 자라야만 하는 해산물을 먹는 료헤이의 모습을 목격하고 보존하고자 하는 아사코의 모습은, 커피포트를 돌려주면서 '술 만드는 회사에서 일하는지라 물의 귀중함을 알고 있다'라고 말하는 료헤이의 속내와 공명하면서 대지진 이후 새로운 윤리가 만들어져 작동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환송 모임 시퀀스는 동시에 아사코가 잊고 있었던 바쿠가 본격적으로 돌아오는 시퀀스이기도 하다. 그 점에서 환송 모임 시퀀스는, 연애 영화로써 선택을 다루는 [아사코]와 대지진 이후의 일본인의 삶을 다루는 [아사코]가 만나는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실제로 첫 번째 봉사활동 장면 이후 하마구치가 준비한 사건은 다름 아닌, 오사카 시절의 귀환이다. 사랑니 치료를 위해 외출한 료헤이와 아사코 앞에 아사코의 친구 하루요가 다시 나타난다. 하루요는 아사코에 바쿠가 돌아왔음을 알린다.

이 소식을 들은 아사코는 어떤 행동을 취하는가? 아사코는 단호하게 사실을 주변인들에게 밝힌다. 마야와 하루요랑 같이 텔레비전 보던 아사코는 바쿠의 광고를 보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광고는 신용카드 관계다. 관계에 신용이라는 개념이 전혀 없는 바쿠에는 어울리지 않는 광고다) 적당히 무마하려는 하루요의 말을 대신해 사실을 고백한다. 아사코의 이런 모습은 초반부 료헤이의 연애에서 보였던 모습에서 확실히 진화했다는걸 알 수 있다. 직후 료헤이에게 사실을 얘기하는 부분 역시 '틀린 일을 하고 싶지 않아서'라는 관점에서 이뤄진 행동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아사코의 이런 선택은 료헤이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면서 쉽게 해소되는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아사코의 고백과 료헤이의 평정심이 평화롭게 성립하기 위해서는 한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바쿠가 그들 앞에 다시 나타나지 않는 점이다. 하지만 [아사코]는 바쿠를 기어이 그들 앞에 귀환하게 만들면서 선택의 문제를 난제로 만든다. 촬영지에서 차를 타고 떠나는 바쿠에 손을 흔든 직후, 이삿짐을 싸던 아사코는 진땅을 안고 손을 흔든다. 그런데 이때 갑작스럽게 아무것도 없는 반응/리버스 쇼트가 등장한다. 아사코는 대체 누구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는가? 이에 대한 답은 갑작스럽게 등장한 바쿠를 통해 제시된다.

아사코는 여기서 자신이 취한 이별 방식이 어설펐다는 걸 깨닫게 된다. 다시 환송 모임 시퀀스로 돌아와서, 갑자기 나타난 바쿠는 이렇게 말한다. "역시 기다리고 있었잖아." 바쿠의 이 말은 공포 영화의 귀신이 복수하기 위해 희생자에게 저주를 내리는 대사와 동일하다. 어떤 지점에서 바쿠는 매우 전지적으로 행동하는 이해할 수 없는 캐릭터다. 히가시데 마사히로가 지적했듯이 바쿠는 대체 환송 모임 장소를 어떻게 알고 왔단 말인가? 이 전지성을 지닌 옛 연인 앞에서 아사코는 다시 선택해야 한다.

관객은 논리적으로는 답을 알고 있다. 아사코가 유예된 이별을 마무리 짓기 위해서는 바쿠하고 어떤 식으로 대면해야 한다는 것을. 하지만 연애물이라는 장르에서 보자면 아사코의 선택은 암묵적인 금기를 깨트리고 있다. 왜냐하면 연애물에서는 여성이 잘 이어가는 관계 도중 옛 남자 친구를 선택하는 것은, 현 남자 친구에 대한 용서할 수 없는 배신으로 취급되는 경향이 있다. 특히 비 처녀 논란 같은 지점에서 드러나는 여성의 정조와 헌신을 강요하는 일본 (나아가 동아시아)라는 문화권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여기서 대지진 직전 등장한 입센과 체호프의 연극들을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두 작품을 간략히 살펴보자면 체호프의 [세 자매]는 현실과 이상적인 꿈에 대한 괴리로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지지만, 현실을 깨닫고 이별하는 여성이 등장했고, 반대로 입센의 [들오리]는 평온한 관계가 실은 거짓으로 덮여있다는 걸 알고 비극에 치닫지만, 다시 새로이 시작하는 부부의 얘기를 다루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을 언급할 때 [아사코]는 감정 이입하지 말라고 주문하거나 ([세 자매]), 연극이 지진으로 중단되어버린다. ([들오리]). [아사코]는 왜 이런 문학적 모티브들에 대해 감정적으로 이입하지 말라고 말하거나 중단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아사코]에서 아사코가 처한 상황이 두 작품의 유사성과 연계성은 있되, 독자적인 상황으로써 객관적으로 관찰해달라는 걸 하마구치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아사코는 바쿠를 따라가지 않고 떠내 보낸다. 여기서 다시 아사코가 왜 최종적으로 바쿠가 아니라 료헤이를 선택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이다. 첫째로는 연애물에서 볼 수 있는 가치 판단과 기준이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쿠는 처음부터 끝까지 멋대로 행동하고, 아사코의 기분을 이해하는 언동을 보이지 않는다. 한마디로 같이 살기엔 부적합한 인물이다. 드라이브 시퀀스의 차이가 대표적일 것인데 좀 더 자두라고 말하는 료헤이랑 달리 바쿠는 자기 얘기만 할 뿐이다.

[아사코]가 흥미로운 점은 이런 연애 영화로써 감정 이입과 선택의 문제를 끊임없이 동일본 대지진이라는 사건이 외삽의 한계를 무릅쓰고 얽혀 들어간다는 점이다. 센다이에서 연애의 종지부가 난다는 점도 그렇고, 아사코와 바쿠의 연애는 바다에서 끝난다. 바쿠는 바다를 보지 않았다. 정확히는 거대한 방파제를 보고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데 바쿠를 떠나보낸 뒤, 아사코는 무엇을 하는가? 방파제를 올라가 바다를 본다. 아사코는 끊임없이 자신의 눈을 통해 확인하고 기억하고자 한다. 속내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캐릭터는 아니지만, 아사코가 방파제에 올라가 바다를 바라보는 시퀀스가 아름답게 느껴진다면 이 부분에 있다. 연애 관계에서 자신의 주체를 잡으려는 의지와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방사선 누출이라는 비극을 인정하고 나아가려는 일본인의 다짐이 겹쳐지기 때문이다.

다시 남겨진 료헤이에게 돌아가 보자. 바쿠의 손을 잡고 떠나가는 아사코를 찍는 트래킹 쇼트는 그 점에서 1부의 아사코와 친구들을 놔두고 떠나는 카메라의 트래킹 아웃 쇼트와 닮아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 트래킹 쇼트의 피사체가 달라져 있다는 점이다. 1부에서 트래킹 아웃 쇼트는 아사코와 친구들을 남기고 떠난다면 2부에서 미묘하게 구도가 달라진 트래킹 아웃 쇼트는 료헤이와 친구들을 남기고 떠난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가 아사코의 1인칭을 포기하자 바쿠에 대한 료헤이의 공포가 구체적으로 변했다는 점이다. 심지어 아사코와 바쿠가 떠나자 료헤이의 반응 쇼트는 예감한 표정으로 침묵과 분노의 표정을 짓고 있다.

료헤이의 예감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먼저 성적 매력의 부족함이 있다. 료헤이와 바쿠 중에서 가장 이상적인 매력을 지닌 남자는 바쿠다. 아사코랑 재회한 후, 예전에 괜찮다고 말한 건 거짓말이라고 털어놓기까지 한다. 바쿠는 그 점에서 료헤이의 거울 쌍이 만들어낸 억압된 악몽이다. 이런 연애 라이벌로서 두려움과 더불어 대지진 문제와 엮어서 본다면, 대지진 이후 '모든 게 정상적이었던 대지진 이전 일본의 귀환'에 대한 일본 남성성의 공포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독해의 여지는 료헤이는 왜 아사코의 선택에 분노하는가? 에 대한 답을 제공하기도 한다. 료헤이의 관점에서 아사코는 '대지진 이전 우월한 전 남자 친구를 선택하고 대지진 이후 열등한 자신을 버린 여자'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결말 부분은 료헤이에게 생긴 트라우마를 아사코가 어떻게 설득하는가에 대한 과정이기도 하다.

비록 연애 영화로써 서사 장치가 동일본 대지진이 긴밀하게 연결되었냐는 문제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아사코]의 강점은 관계의 허울성과 추한 감정을 인정하며 시간을 껴안고 살아간다는 행위에 긍정함에 있다. 하마구치는 함께 한 시간이 위태한 위장이라고 해도, 의미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하마구치는 아사코와 오랫동안 알고 지내왔던 오사카 인물들에게 시간의 흔적과 더불어 긍정성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원작과 달리 하루요가 아사코랑 절교하지 않게 된 점이 대표적일 것이다. 에이코가 들려주는 연애사의 비화는 원작에서도 있던 부분이라 넘어가도, 왜 하루요는 아사코의 선택을 일부 긍정했을까?

여기서 오사카로 대표되는 칸사이 지방이 이미 고베 대지진을 겪었던 지역이라는 걸 떠올려야 할 필요가 있다. 각색된 하루요의 긍정은 어떤 점에서는 에이코의 비화와 상응하는 구석이 있다. 이 변화는 이미 대지진을 겪은 오사카에서 현 일본의 난제에 대한 지혜를 구하려는 시도이며, 하마구치가 동일본 대지진이라는 사건 이후에 [아사코]의 원작으로 영화를 만들면서 느꼈던 의무감의 일종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물론 동일본 대지진은 고베 대지진과 달리 방사능 오염 같은 더 큰 난제가 있으며, 트래킹 쇼트로 절박한 추격전을 벌인 후에도 아사코와 료헤이의 관계는 여전히 깨진 채로 남아있다. 그런데도 아사코는 진흙 강을 아름답다고 말한다. [아사코]는 불가항력으로 더러워졌더라도 아름다움을 찾아낼 수 있는 용기가 동일본 대지진 이후 삶에서 필요하다고 말하는 영화다. [아사코]를 통해 하마구치 류스케라는 감독을 지지하고 싶다면, 그 자세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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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악마가 [Le diable probablement / The Devil Probably] (1977)

로베르 브레송의 [아마도 악마가]는 처음부터 결말을 정해놓고 영화를 시작한다. 샤를은 친구의 손을 통해 자살한다. 아니면 살해당한다던가. 브레송은 샤를의 죽음이 가질수 있는 감정이입의 가능성을 건조한 기사와 글자 이미지로 막아버린다. 그런데 왜 샤를은 죽음을 선택해야 했을까? 브레송은 이를 위해 샤를과 그 친구들이 어떻게 사는지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명백히 브레송보다 어린 그들은 모든 것을 혐오하지만 새로운 대답을 찾지 못한다. 이를 대변하듯이 영화 도입부의 대사는 힘을 제대로 주지 못해 걷지 못하는 것에 대한 얘기다. 그 말처럼 샤를과 친구들은 영화 내내 어느쪽이든 힘을 주지 못하고 걷는다. 이 불균형하고 무기력한 상황이야말로 [아마도 악마가]가 탐구하려는 정신적 상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브레송은 샤를과 그 친구들이 어떤 관계를 맺는지 보여주면서, 사회의 축을 이루는 거대 담론을 하나씩 부정해간다. 영화의 대사들은 다른 브레송 영화들보다 더욱 심화된, 담론과 철학에 대한 토론으로 이뤄져 있지만, 대부분의 대화는 헤매거나 부정하길 반복한다. 도입부 이후 첫 시퀀스가 정치 혁명 토론장이라는건 의미심장하다. 당연하겠지만 샤를과 친구들은 파괴의 권리를 주창하는 정치 혁명이 현실을 바꿀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은 경멸은, 아무리 옳은 의도로 파괴를 행한다고 해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가능한 것이다. 정치 혁명의 장에서 빠져나온 그들은 환경 운동에 관심을 기울이는데, 이때 브레송은 슬라이드 쇼와 영상으로 잔혹한 동물 학살과 죽어가는 지구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이미지를 보는 브레송의 카메라는 아무런 연민이 없다. 이 이미지들은 인류를 비판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인류 그 자체에 대한 애정을 잃어버렸다는 신호에 가깝다. 이런 신호를 잘 보여주는 시퀀스가 피크닉 시퀀스다. 이 시퀀스에 등장하는 소음과 농약, 군중의 아우성의 몽타주와 프레임 밖으로 잘려나간 얼굴과 파편화된 신체들은 공포스럽다.

당연히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의 고통스러운 구도의 길을 걷는 신부 같은 캐릭터는 여기에 없다. 브레송은 1968년 [온순한 여인]부터 믿음과 희생양을 무대에 올리려고 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렇게 인간이 고통받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집중한다. [아마도 악마가]는 그 중 가장 적극적으로 바닥을 찍은 영화일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파멸에 이르렀던 마지막 영화인 [돈]과 달리 [아마도 악마가]는 적극적으로 인간의 조건을 부정하고 자신을 파괴하는 사람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하듯이 브레송은 인간 관계의 두 축을 사랑과 경제로 설정한다. 이 두 축이 얽히는 순간, 인간관계는 냉담해지고 사랑은 거래 관계로 변해버린다. 이미 [온순한 여인]이나 [호수의 랑슬로]에서도 탐구한 지점이기도 하지만, 브레송은 후기로 갈수록 사랑의 진정성을 믿지 않는다. 그런걸 믿기엔 사랑은 철저한 거래 또는 현실에서 이룰수 없는 무언가로 변했기 때문이다. 사랑의 구원을 믿었던 [소매치기]와 비교하면 더더욱 잘 알 수 있다. 샤를과 친구들이 지리멸렬하게 관계를 이합집산하고 경제적 관계에 따라 애인을 바꾸고, 끝내 자신이 상대방에게 짐이 되지 않을까 내심 불안해한다.

대신 그들이 집착하는 것은 허무다. 독약이나 손바닥 위에 올려진 총알, 물로 넘쳐나는 욕조는 그들의 감수성 근처에 죽음이 어른거린다는걸 알 수 있다. [아마도 악마가]가 브레송의 이전작에 비해 더욱 절망적이라면, 패배 없는 패배자에 대한 영화기 때문이다. [온순한 여인]과 [호수의 랑슬로]의 주인공들은 자신이 어떤 윤리적 전투에서 패배하고 길을 잃었다는걸 조금이나마 인지하고 있었다. [아마도 악마가]의 샤를과 그 친구들은 무엇에 패배했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그저 그들은 승자가 될 수 없다는 걸 알 뿐이다. 브레송은 이런 패배 없는 패배자들이 느끼는 허무의 공기를 모델이 가지고 있는 즉물적 이미지를 포착하는 시네마토그래프 작법에 기반해, 이미지와 음향의 삭막한 리듬으로 치환한다. 악마에 대한 토론 시퀀스 도중 삽입된 버스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숏의 몽타주가 대표적이다. 이 장면은 마치 사람들이 주장하는 어두운 세상과 그것을 조종하는 악마의 계략이 아무런 의미없는 기계적인 운동처럼 보이게 만든다. 후기 브레송 영화들은 음향과 이미지 간의 관계에 민감해지는 모습을 보이는데, [아마도 악마가]는 의미없는 기계적 운동 이미지와 음향으로 절망을 형상화한 영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샤를의 자살 또는 타살은 이런 경멸과 무의미, 기계적인 운동이 지나가고 난 뒤 등장한다. 영화가 본격적으로 바닥을 향하는 부분은 바로 샤를의 상담 시퀀스다. 지금까지 이어왔던 거대 담론에 대한 부정을 다시 정리한 뒤, 샤를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영원한 삶을 믿을 뿐이에요. 자살한다 해도 심판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 것을 이해하지 못한 게 이유가 될 수는 없죠." 이 대사가 나온 이후부터 [아마도 악마가]는 도스토예프스키적 지옥으로 달려가기 시작한다. 샤를의 친구들은 상담이 끝나고 샤를이 변할것이라 기대하지만 브레송이 보여주는 이미지는 떨궈진 공중 전화기 숏이다. 버려진 소통의 이미지 이후, 샤를의 친구들은 결말까지 등장하지 않는다. 마침내 샤를은 친구들을 배제해버린 것이다. 샤를은 성당에 가서 잠을 청하는데, 브레송은 여기서 다시 한번 샤를을 내쫓는 성당 사람들을 보여주면서, 종교가 끝내 젊은이들을 이해하지 못했음을 명백히 한다. 샤를은 자신을 살해할 친구를 만나 그와 함께 다니는데, 브레송은 경제적인 이득과 허무의 극단으로 관계를 맺은 이들만 남은 밤의 파리를 보여주면서 그들이 어디에도 속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샤를은 묘지에서 죽는다. 심지어 유언도 제대로 남기지 못한 채 뒤통수에 총을 맞은 채. 다시 질문하자. 그는 자살한 것일까? 아니면 타살당한 것일까? 브레송은 이 대답의 애매함이야말로 동시대의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악마가]는 엔딩 크레딧이 없고 마지막 장면이 끝나자마자 영화도 끝난다. 환해진 스크린 또는 검게 남은 화면은 그 점에서 브레송의 암울한 심경을 보여주는 도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가 발표된 해가 1977년이라는걸 생각해보자. 크리스 마르케가 [붉은 대기]를 통해 한탄했듯이 1968년 혁명은 프랑스에서 실패로 돌아갔고, 프랑스는 급격하게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과 조르주 퐁피두 같은 보수주의로 기울어지게 된다. 루이스 부뉴엘은 이런 반동에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을 내놔 격렬히 조롱했다. 한편 브레송은 68 혁명의 패배자들이 흩어져가는 과정을 그린 [몽상가의 나흘밤]과 선과 악이 패배하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리에 죽은 말과 자유로운 새만 남았던 신화적 우화인 [호수의 랑슬로]로 대답했다. 영화를 만들수록 브레송은 프랑스의 반동적인 기운과 바뀌지 않는 현실에 절망감을 느끼고 영화에 대한 믿음을 잃어갔다. 그리고 1977년, 펑크 세대가 도래했다. 섹스 피스톨즈의 허무주의가 시대적 정신으로 받아들이던 시절. [아마도 악마가]는 1968년 혁명이 10주년을 맞이하는 순간, 새로이 등장한 경멸과 허무의 세대에게 바치는 영화다. 실제로 펑크 록 씬의 중요한 인물인 리처드 헬은 [아마도 악마가]를 자신이 좋아하는 브레송 영화로 꼽은 적이 있다. 펑크 세대가 불경한 문화로 경멸받던 그 해, [아마도 악마가]는 자살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한동안 개봉이 금지되었지만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나 리처드 헬 같은 민감한 이들은 이 어두컴컴한 절망을 파악한 모습을 파악하고 지지를 보냈다. 이 영화를 싫어할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 어두컴컴한 종막이 깊은 관찰과 사유를 통해 드러났다는건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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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송대 [La Jetée / The Jetty] (1962)

2017/09/05 - [Deeper Into Movie/리뷰] - 태양 없이 [Sans Soleil / Sunless] (1982)

마르케가 '병렬 편집'을 통해 사유했던 것은, 전쟁 이후인 현재에서 과거를 끌어들이는 방식이라고 본다. 여기엔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무언가 일어났다. 이 불연속적인 두 문장 사이의 간극을 채우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레네는 그것을 편집이라고 보았다. 상이한 두 요소를 하나의 영화로 조형하는 작업이 바로 편집인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이어붙인다고 해서 새로운 의미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상이한 것에서 어떤 유사성과 감정을 잡아내느냐이다. 레네는 그 사실을 로베르트 로셀리니의 [스트롬볼리](와 루키노 비스콘티의 [흔들리는 대지])과 아녜스 바르다의 [라 푸앵트 쿠르트로의 여행]을 보면서 배웠다.

로셀리니는 [이탈리아 여행]과 [스트롬볼리]를 통해 픽션을 연기하는 스타 잉그리드 버그만과, 다큐멘터리의 관점으로 담긴 이탈리아 시골을 영화 속에 배치하면서 영적인 구원과 낯섬이라는 감각을 이끌어냈다. 한편 바르다는 라 푸앵쿠르트를 여행하는 현대적인 성 규범을 받아들인 젊은 여행자 커플의 픽션적 시점과 가부장적인 삶을 사는 라앵쿠르트이라는 다큐멘터리적 시점을 병렬적으로 배치하면서 페미니즘적인 관점과 다큐멘터리적 관점을 결합하려고 했다. [밤과 안개]는 네오 리얼리즘과 [라 푸앵트 쿠르트로의 여행]의 성과를 발전시키는데 성공했고, 이는 레네와 마르케에게 큰 유산이 되었다.

앙드레 바쟁은 크리스 마르케가 '밤과 안개' 이후 1958년 내놓은 데뷔작 '시베리아에서 온 편지'라는 기행문 다큐멘터리를 분석하면서 '영화에 의해 다큐멘트된' 에세이며,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독특함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병렬 편집'이라는 개념으로 구체화했다. 바쟁이 지적한 병렬 편집은, '밤과 안개'가 크리스 마르케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보여준다. 알랭 레네가 밤과 안개를 편집하면서 도입한 두 개의 시공간의 병렬적 배치는 특정 공간에 속한 개인이 다른 시공간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 설명하는 예라고도 할 수 있다. 알랭 레네가 [밤과 안개]와 [석상 역시 죽는다]에서 도입했던 병렬 편집의 가능성을 픽션의 영역에서 실험했다면, 크리스 마르케는 다큐멘터리의 영역에서 발전시켰다고도 볼 수 있다.

'시베리아에서 온 편지' 이후 크리스 마르케를 주목받게 만든 단편은 바로 [환송대 La Jetee]라는 단편 영화였다. 크리스 마르케가 만든 첫 픽션 영상물인 이 영화는 그러나, 활동사진Motion picture가 아니다. 크리스 마르케는 '포토 로망'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마치 사진 슬라이드처럼 영화를 만들었다. 파리에서 핵폭탄이 터지고, 그동안 알고 있던 문명이 멸망한다. 지하로 숨어든 사람들은 한 남자를 찾아낸다. 이 남자는 핵폭탄이 터지는 순간, 공항 환송대에서 보았던 한 여자의 이미지에 집착한다. 시간 여행하는 약을 먹게 된 남자는 이미지의 근원을 찾아 시간 여행을 하게 된다.

[환송대]가 흥미로운 이유는, 기억 이미지의 근원을 찾기 위한 여정 전체가 멈춰진 사진으로 이뤄진다는 점이다. 중간에 등장하는 한 순간을 제외하고, 영화는 정지된 사진을 영화적 샷 구조처럼 배치한다. 이 정지된 이미지 속에서 끊임없이 기억을 찾으려고 한다. 이때 크리스 마르케는 말한다: "일상적인 것은 일상적인 순간에서는 아무것도 추억되지 않는다. 나중에 그 순간의 상흔들을 보여줄 때 비로소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그가 보았던 얼굴은 전쟁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평화의 모습이었다. (중략) 다가올 광기를 버텨내기 위해 부드러운 순간을 만들어낸 것일까?" 라카프라식으로 말하자면 환송대의 남자는 현재를 지배하고 있는 멸망의 풍경으로 대표되는 1차 기억을 극복하기 위해 1차 기억 직전에 있던 여인의 얼굴이라는 파생된 1차 기억을 만들었던 것이다. 약을 먹고 시간 여행을 하는 것은, 그 1차 기억을 쫓아가 2차 기억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이다.

남자가 시간 여행을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남자는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른다. 남자의 과거에서 여자는 한 순간의 강렬한 이미지만으로 남은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이미지만으로는 기억은 온전히 보존할수 없다. 그렇기에 남자는 과거로 돌아가 여자를 만나면서 구체적인 기억을 만들어야 한다. 일례로 여자는 남자를 보고 유령이라고 말하는데, 반대로 보자면 여자야말로 유령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남자가 사는 파괴된 현재에서 여자는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자는 절멸의 순간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그렇기에 남자는 자신이 살아가는 현재에서 여자를 찾지 않는다. 대신 약과 시간 여행이라는 과학적/SF 장르적 수단을 통해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1차 기억의 순간으로 돌아가 자기 방식으로 2차 기억으로 재구성하려고 한다. 이 2차 기억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는, 여자로 대표되는 절멸의 순간에서 살아남지 못한 자들을 기억하려는 남자의 절박한 시도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시도는 분절적인 순간들로 표출된다. 홀린듯한 만남에서 여자의 이미지는 조각난 채로 남자의 체내로 흡수된 뒤, 재구성된다.

마르케는 이 디테일이 확장되가는 과정을 다큐멘터리 사진의 방향성과 겹친다. 남자가 여자를 만나는 과정에 담긴 파리의 풍경은 ([아름다운 5월]이 그랬듯이) 1960년대 프랑스 파리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영화가 발표되고 시간이 많이 지난 시점에서 보자면, [환송대]는 1960년대 프랑스 파리를 기록한 횡단면이다. 1960년대가 지나가버린 미래에 살고 있는 관객은 그 시절과 함께 호흡할 수 없지만, 크리스 마르케가 35mm 필름 위에 남긴 사진을 통해 어땠을지는 상상할 수 있다. 중간에 등장하는 박물관 시퀀스는 즉물적으로 남아있던 트라우마의 기억을 스스로의 선택과 만남으로 2차 기억으로 재구성하려는 남자, 나아가 영화의 의도를 은유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 사진들은 SF 픽션 장르인 디스토피아라는 틀로써 재구성되고 있다. [환송대]는 1960년대 파리라는 공간을 두 가지 관점으로 보길 관객들에게 요청한다. 하나는 이전에 있었던 전쟁을 서서히 잊으며 평온한 일상을 누리는 현실의 파리, 또 하나는 이미 일어난 가상의 전쟁으로 파괴된 미래의 파리. 이 단편을 보면서 어딘가 2차 세계 대전 시절 파리를 연상했다면, 정확히 본 것이다. 마르케는 SF 장르를 인용하면서 과거의 한 순간이 미래의 한 순간이 될수도 있었다고, 혹은 그 역으로 전쟁으로 파괴된 2차 세계 대전 시절 파리에 대한 기록이 될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다. 1차 기억을 2차 기억으로 재구성하기 위한 시도는, 과거의 순간을 반복하지 않고 나아가고자 하는 시도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과 관계는 희미해지고, 아름다움과 파괴에 대한 시적 우울함은 1960년대 파리와 도래할지도 모르는 파국의 미래를 상상케 한다. 이런 이중화 작업은 후술할 [태양 없이]의 중심이 되는 영상과 음향의 재조립, 기계적 장치를 통한 기억의 재구성에 큰 단초가 되고 있다.

여기서 질문이 하나 더 생긴다. 결국엔 끊어질수 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 남자는 왜 여자에게 다가가려고 하는가? 서사에서는 생존의 수단이라고 설명한다. 남자를 조종하는 의사와 과학자들은 생존을 하기 위해 과거를 기억시키려고 한다. 하지만 남자에겐 의사와 과학자의 의도를 뛰어넘는 좀 더 본능적인 이유가 있다. 그것은 생의 에너지에 대한 갈망이다. 연출에서 마르케는 좀 더 흥미로운 이유를 배치해둔다. 남자를 지배하고 있는 기억 이미지의 주인공인 여자는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흐르는' 자다. 침대에 누워서 미소지으며 카메라/남자를 바라보는 여인의 모습은, 사진이 아니라 영상으로 이뤄져 있다.

스틸 샷으로만 이뤄진 영화의 구조를 생각해보면, 남자가 왜 여자의 얼굴을 떠올리려고 하는지 알 수 있다. 그것은 움직임Motion이 가지고 있는 행복함으로 다가고자 하는 본능적인 발버둥이다. 파괴된 세상에서 이전에 남아있던 움직임을 포착하려는 집착은, 남자가 여자로 대표되는 과거의 행복함에 어떤 죄책감이 있다는걸 보여준다. 이 집착은 영상의 움직임에 대한 영화광적인 매혹을 담고 있기도 하다. 실제로 마르케는 어린 시절 보았던 마르크 드 가스틴의 'La Mervilleuse vie de Jeanne d'arc'라는 무성 영화에 출연한 시몬 쥬느비에브라는 배우에 매혹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마르케의 사진집 [북녘 사람들]에서도 조선 여인의 얼굴을 담은 사진에 대한 묘사가 있었던 걸 보면, 마르케는 여성의 얼굴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에서,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근원적인 에너지를 찾았던 걸로 보인다.

하지만 마르케는 생에 대한 로맨티시즘적 감상과 낙관주의에 머무르지 않는다. 오히려 움직임을 담은 생에 대한 발버둥이 좌절되는 것으로 영화를 마무리짓는다. 로버트 하인리히의 '당신 모두 좀비'를 연상케하는 [환송대]의 순환 고리는 우로보로스적 비극이다. 영화는 시간을 탈출하는 방법은 없었으며 '자신을 사로잡는 순간'이 오히려 죽음의 순간이였다는걸 밝히면서 끝난다. 여인의 움직임이 비극과 파괴의 또다른 1차 기억에 종속되어 있다는 걸 알았을때 남자는 자신의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마르케가 생각하는 역사의 비극이란, 결과에 속한 사람이 자신을 만들어낸 원인과 과정을 바꾸지 못하는데서 시작된다. 시간 여행은 실패로 돌아가고, 남자는 끝내 미래의 여행자들에 속하지 못한다. 그저 자신이 속한 현재의 지도자들이 보낸 암살자를 통해 과거의 순간에서 죽음을 맞게 된다.

라카프라는 1차 기억과 2차 기억이 순수한 형태로만 이뤄질수 없고 트라우마를 떠올리려는 시도는 2차적일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환송대]는 1차 기억을 2차 기억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자신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고자 하는 사람으 이야기다. 과거에 대한 기억을 만드려는 2차적인 시도를 파괴된 현재가 방해하면서 무위로 돌아간다는 결말은, 현재에 대한 마르케의 인식이 아도르노적 부정성으로 이뤄져 있다는걸 알 수 있다. 당시 프랑스는 식민지에 대한 제국주의적 탄압이었던 알제리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상태였고, 2차 세계 대전에 대한 객관적 재평가는 드골 정부의 강력한 우파 정권의 힘 앞에서 뒤로 물러난 상태였다. 드골은 표면적으로는 레지스탕스를 우대하고 나치 부역자들을 처단했지만, 중요한 자리엔 나치 부역자들을 받아들였다. 나아가 알제리 같은 식민지들을 탄압하고 착취하는 것으로 구체제를 존속시키려고 했다.

[환송대] 직후 만든 [아름다운 5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나레이션은 "감옥이 있는 한 세상은 행복할 수 없다." 였다. 시간의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끝나는 [환송대]의 순환적 비극은 아도르노가 부정성 미학에서 주장했던, "고통의 언어를 통해서 화해되지 않는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라는 슬로건과 맞닿아있다. 알제리 전쟁과 과거 인식을 방해하는 내부의 파시즘이라는 당시 프랑스의 부정성은 단 한 순간의 행복에 다가가려고 하는 남자를 암살하는 남자의 시대로 표출되고, 또다른 비극의 순환 고리를 만든다. 마르케는 SF 장르의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으로 현재를 파괴된 순간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이 어떻게 1차 기억과 2차 기억을 재정립하는 시도를 방해하는지 [환송대]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크리스 마르케의 [환송대]는 시간 여행이라는 장르적 틀과 움직임에 대한 인식으로 기억을 재인식하려는 시도와 좌절을 그렸으며, [태양 없이]는 기계적 조작을 통한 추상화와 비디오 게임적 구성을, 다양한 공간과 시간에 남아있는 시간의 현기증을 포착하려고 했다. 마르케의 시도들은 병렬 편집이라는 개념에서 출발해 1차 기억을 재구성하려는 2차 기억의 방법론에 대한 고찰이기도 하며, 소비에트 몽타주 이론가들의 찬란한 자유연상적 성과를 이어가려는 시도기도 하다. 그리고 이 사유 과정에서 크리스 마르케는 이미지를 추상화하면서 동시에 역사/사회적 의미를 잃지 않는 정교한 방법론에 관심을 보였던 것 같다. 실제로 1995년 마르케는 역사 게임을 만드는 게임 디자이너의 나레이션으로 이끌어가는 [레벨 파이브]라는 작품으로 사유를 확장시킨다. 또한 말년의 크리스 마르케는 유튜브와 비디오 영상에 관심을 기울여 짧은 클립들을 올리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 그 점에서 크리스 마르케는 라카프라가 주장했던 "기억과 역사는 상호보완적인 관계며, 이 관계망 전체를 성찰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방식에 관심을 기울였던 영화 감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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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끝나지 않았다 [Jusqu'a La Garde / Custody] (2017)


영화의 시작은 이혼 소송을 위해 출근하는 조정위원들이다. 그들이 자리에 앉고 나면 카메라는 두 인물(과 그들의 변호사)을 병렬로 배치한다. 앙트완과 미리암. 미리암은 앙트완이 가족들에게 수시로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이었다고 주장하며, 반대로 앙트완은 미리암이 믿을수 없는 아내였으며, 자식들을 협박해 자신을 피해 다녔다고 한다. 그 다음 부부의 성격에 대한 다른 이들의 증언이 나온 뒤 이야기는 부부의 아들인 줄리앙으로 넘어간다. 줄리앙의 증언은 부부의 소송에 영향을 미칠 중대한 증언이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입증되기 부족하다고 앙트완은 주장한다. 

감독 자비에 르그랑은 주장을 하는 두 인물의 숏을 병렬적으로 배치하고 (둘은 시퀀스가 끝날때까지 서로 마주보지 않고 조정위원만 바라본다.) 주장이 끝났을 무렵 앙트완과 미리암, 조종위원를 동시에 보여준 뒤 묻는다.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거죠?" 이 말은 관객을 향한 말이다. 르그랑 감독은 관객에게 사전 정보를 배제하고 주장 숏을 배치한 뒤, 각자의 숏에 숨어있는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있냐고 물어본다. 아이러니하게도 소송의 중간 결과는 표면적으로는 중립적이다. (앙투안의 친자 접견권을 인정하여 줄리앙에게 2주에 한번 주말을 아버지와 보내게 하라고 판결한다.) 왜냐하면 이 시퀀스의 다른 숏에서도 한 쪽으로 기울어질만한 물질적인 증거가 끝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결정적이어야 할 조세핀의 부상 역시 앙트완의 알리바이로 반박된다. 요컨데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그걸 파악하는게 얼마나 힘든지' 보여주는 영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도입부에서 앙트완에 대해 설명하는 동료들의 증언은, 사실인것처럼 보여도 자기 포장적인 전술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미리암은 자기 포장적 전술을 거의 쓰지 않고, 실제적인 피해와 대책을 호소한다. 언술의 차이에서 폭력의 징후를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상술했듯이 조정위원회라는 공적 공간에서는 두 주장 모두 일리가 있는것처럼 보인다. 앙트완의 자기포장과 미리암의 호소는, 사적 언어가 아니라 예의바른 공적 언어를 통해 제시되기 때문이다. 요컨데 공적 영역에서는 위장이 이뤄지고 있으며, 법 체계는 그에 대한 판단을 미룰수 밖에 없다. 법은 논리적이고 명확한 설명을 요구한다. 하지만 사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명확한 설명을 하기 어렵게 꼬여있다.

이 두 영역을 제대로 판단하려면 도구와 관찰이 필요하다. 그 점에서 르그랑이 이야기를 진행하는 방식은, 가정을 세워놓고 전개하는 연구자에 가깝다. 등장인물들이 공적인 (나아가 법) 영역에서 벗어났을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야말로 [아직 끝나지 않았다]의 대전제인 셈이다. 그리고 이 대전제는 이전에 르그랑이 만든 단편 [모든 것을 잃기 전에]서 일부 선험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모든 것을 잃기 전에]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의 프리퀄이다.) 이를 증명하듯이 도입부가 끝나자 르그랑은 인물들을 공적 공간에서 사적 공간으로 보낸다. 아이러니하게도 미리암과 아이들이 새로 정착한 곳은 국가에서 지원하는 공영 아파트다.

미리암은 앙트완에게 집 주소를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미리암이 사는 곳은 현 시점의 앙트완에게는 공적인 장소나 다름없다. 이를 증명하듯이 앙트완과 줄리앙의 만남은 미리암 부모의 집 앞에서 이뤄진다. 이미 이혼 소송 중인 앙트완에게 미리암 부모는 남이며, 실제로도 미리암의 가족은 앙트완을 적대한다. 앙트완은 이를 용납하지 못한다. 여기서 르그랑은, 관계에 대한 부담감이 폭력을 가능케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앙트완은 가장 약한 고리인 줄리앙을 건드면서 자신이 빠진 (그러나 있어야 할) 사적 영역으로 진입하려고 한다. 집 문을 나서는 순간, 줄리앙은 앙트완의 뜻에 따라야 한다. 왜냐하면 줄리앙에게는 미리암이 있기 때문이다. 줄리앙이 거짓말을 한 이유도 어머니 미리암 때문이었다. 요컨데 르그랑이 관심을 가지는 부분은 공간과 폭력, 인간 관계의 네트워크인 것이다.

앙트완은 이 사실을 이용해 미리암과 줄리앙을 괴롭힌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의 무시무시함은 사적 영역에서 행해지는 폭력과 권력 관계가 얼마나 교묘하며, 그것이 공권력의 사각지대에 있다는걸 보여주는데 있다. 보안 요원이라는 설정답게 앙트완은 통제하는 법에 익숙한 사람이다. 그는 남들 앞에서는 위협하지 않으며, 직접적인 폭력을 가하지 않는다. 줄리앙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며, 줄리앙에게 직접적인 소리나 폭력을 가하지 않는다. 도망가던 줄리앙이 차량에 치일뻔하자 돌아서는 모습을 보자. 그는 아무도 안 보이는데서 정신적으로 괴롭힐줄 아는 사람이다. 그는 줄리앙을 무장해제시키면서, 조세핀 나아가 미리암에게 접근하려고 한다.

르그랑이 생각하는 권력의 근원은 거리감이다. 르그랑은 앙트완이 어떻게 줄리앙과 미리암을 가두는지 프레이밍 기법으로 인물들을 불안정하게 배치한다. 앙트완이 자신의 감정을 토로하는 시퀀스에 줄리앙이나 미리암이 없으며, 줄리앙이나 미리암이 앙트완을 거북스러워할때 앙트완은 거구로 프레임 속 두 사람을 가리거나 짓누른다. 끊임없이 회유하는 앙트완의 입은 줄리앙의 도망칠수 없는 감옥이며 미리암은 앙트완의 폭력적인 포옹을 받아줘야 한다. 당연하겠지만 앙트완/미리암,줄리앙의 시선은 서로 닿지 않는다. 심지어 사적인 공간인 집안으로 이동했을때도 이런 권력 관계는 더욱더 강해진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인물의 거리와 시선 제약을 통해 폭력의 구조화에 매달린다. 가끔 집요하다 못해 어깨에 힘이 들어간 구조적인 숏들이 보이긴 하지만, 르그랑의 야심이 단단한 뿌리가 있다는걸 보여주고 있다.

영화를 보는 관객이라면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앙트완은 왜 괴물이 되었을까?  르그랑는 캐릭터의 전사前史를 설명하지 않는다. (프리퀄 단편 [모든 것을 잃기 전에]에서도 나오지 않는다.) 다만 르그랑은 중요한 힌트를 앙트완의 친정집 시퀀스에 배치해뒀다. 먼저 앙트완과 앙트완의 아버지 조엘이 처음 만나서 하는 대사는 사냥에 대한 것이다. 매우 폭력적인 행위를 함께하는 남성성의 확인이 제시되는 것이다. 그 다음 소동을 일으킨 앙트완을 내쫓을때 조엘은 뭐라고 말하는가? "내가 이 집의 왕이다"라고 말한다. 조엘의 대사는 사적 공간의 주인으로써 선언이다. 그 선언이 매우 가부장적인 폭력으로 이뤄져있다는 건 앙트완을 대하는 조엘의 폭력적인 행동에서 잘 드러난다. 앙트완이라는 괴물이 만들어진 것은 조엘의 실책이 크다. 그렇다면 다른 질문이 생길 것이다. 왜 조엘과 아내 마들레인은 앙트완과 같은 파국을 맞이하지 않았는가. 이는 조엘을 대하는 마들레인의 태도로 설명된다. 기성 세대인 마들레인은 미리암과 달리 조엘이 보이는 폭력적인 태도에 대항할 방법을 쓰지 못한다. 요컨데 부모와 자식으로 이어지는 세대의 젠더적 관점이 반영되어 있는 셈이다.

앙트완이 줄리앙을 건드는 이유는 단순하다. 앙트완의 장녀인 조세핀은 자기결정권이 있는 어른이기 때문이다. 이는 조정위원회에서도 언급되는 사실이며, 르그랑 역시 조세핀이 임신을 확인하는 장면을 통해 이미 성년에 들어선 캐릭터라는걸 보여준다. 실제로 영화 내내 앙트완은 조세핀 근처에도 가지 못한다. 재미있는건 조세핀의 설정엔, 미묘한 계급적 욕망이 깔려 있다는 점이다. 조세핀은 음악 학교를 다니고 있고, 직장을 관둔 미리암이 감당하기엔 부담스러운 학비라고 언급된다. 여기서 조세핀이 배우는 음악이 클래식 같은 초기 투자 비용이 상당한 음악이라는걸 유추해볼수 있을 것이다. 조세핀의 음악 학교는 어떤 계급 상승 욕망이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무엘에게 연애를 통해 조세핀의 학교 생활을 방해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는 미리암의 말은, 조세핀의 성공을 통해 자신의 상황을 개선해보려는 하는 의중이 깔려 있다.

조세핀의 생일 파티는 그 점에서 여러모로 이상한 시퀀스다. 파티장에서 성대하게 열리는 조세핀의 생일은 마치 누구한테 보여주기 위해 열리는 것 같다. 대체 누구인가? 답은 파티장에 오지 못한 '그 사람'이다. 실제로 앙트완이 미리암을 만나서 하는 말이, 내가 아버지인데 딸의 생일을 축하하지도 못하냐, 다. 조세핀의 성대한 생일 파티는 앙트완을 향한 선전포고다. "더 이상 날 때리지 못할 것." 이 파티장을 빌리라고 돈을 낸 사람이 앙트완을 죽여버리겠다고 으르렁거리는 미리암의 아버지라는걸 생각해보면 더 명백해진다. 그것을 증명하듯이 르그랑은 파티장 시퀀스 중 일부에서 대화를 빼버리고 배경 음향만 남긴다. 이 영화에서 앙트완의 벨소리가 음향 몽타주로 불편함과 긴장감을 유도한다는걸 생각해보면 파티장의 소음이 앙트완의 벨소리를 차단하는 안전 장치 역할을 하고 있다. 즉슨 미리암과 남매는 공적 영역에서 타인들의 소음을 통해 보호받는다.

그런데 이 뒤 등장하는 시퀀스에게 밖으로 불려나가 앙트완에게 위협받는 미리암과, 조세핀과 남자친구 사뮤엘의 축가 연주 장면이다. 두 시퀀스가 동시에 전개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조세핀과 사무엘의 연주 장면을 분석해보자. 조세핀과 사무엘이 무대에 올라와서 연주하는 곡은 클래식이 아닌 록이다. 심지어 연주하는 곡은 C.C.R.의 Proud Mary다. 이 곡은 일상을 떠나 미국을 방랑하는 내용의 곡이다. 원곡은 남성이 불렀지만, 이 곡을 커버해서 유명해진 가수 중엔 여성인 티나 터너가 있다. 그런데 티나 터너는 가정 폭력을 당한 경력이 있다. 마지막으로 조세핀과 사뮤엘은 모든 불을 끄고 인사를 하듯이 쪽지를 남기고 퇴장하는 장면을 끝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이 모든 행동과 상징은 마치 미리암의 상황을 은유함과 동시에, 계급 상승의 바람을 배반하는 것처럼 보인다.

당연하겠지만 조세핀과 사뮤엘의 퇴장은 임신으로 인한 도주다. 임신이라는 사건은 어떻게 조용하게 수습될만한 사건이 아니다. 조세핀은 앙트완이 개입하는게 싫어서 계급 상승에 대한 노력을 포기하고 도주를 선택한다. 요컨데 더 이상 쫓아올수 없을 정도로 자신과 아버지 간의 거리를 벌리는 것이다. 하지만 조세핀의 도주엔 상황의 회피 뿐만이 아니라 공황으로 인한 판단력의 마비도 포함되어 있다. 다시 조세핀이 임신을 확인하는 장면으로 돌아가보자. 조세핀이 임신을 확인한 순간 보이는 반응은, 기쁨이 아닌 공포과 충격에 질린 숨소리다. 조세핀은 가정의 파탄을 지켜본 아이다. 아이가 생긴다는 것은 가정이 생긴다는 얘기고, 자신의 부모를 반복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마주하는 일이다. (작년 말 개봉한 [초행]이 그랬다.) 조세핀은 이런 현실에 이성적으로 대처할 연륜을 쌓지 못했다. 그런걸 쌓을 수 있는 환경도 아니기도 했고. 조세핀과 사무엘의 도주에 어둠이 깔려있다는 점은 그 점에서 불길하기 그지 없다. 남은 희망은 사뮤엘이 앙트완과 달리 조세핀의 공황을 얼마나 진정시킬수 있는가, 이다.

그러나 조세핀과 사뮤엘의 퇴장한 뒤 남은 어둠이 미리암과 줄리앙으로 이어지면, 불길한 예감을 할 수 밖에 없다. 미리암은 대체 왜 앙트완에게 들통난 공용 아파트로 돌아오는가? 그것은 일종의 자기 위로일것이다. 그 정도로 했으면 앙트완이 자신의 영역에 접근하지 않으리라는 믿음. 하지만 그 믿음은 현관을 두들기는 앙트완의 음향을 통해 박살난다. 여기서부터 르그랑은 명백히 호러 영화로 만든다. 줄리앙이 앙트완이 총을 발사하면서 일시적으로 청각을 상실하는 장면은, 앙트완에게서 신경질적으로 울려대던 벨소리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제 더 이상 줄리앙은 앙트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고, 들을 가치도 잃어버렸다. 상황은 연쇄살인마에게서 도주하려는 모자로 변모한다. 미리암과 줄리앙이 숨어든 장소가 화장실이라는 점은 [샤이닝]을 의식한 것일까?

이때 미리암과 줄리앙을 구원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두 얼굴이다. 하나는 경찰서 오퍼레이터고, 또다른 하나는 앞집에 사는 할머니다. 이들은 앙트완 시야 바깥에서 앙트완의 행동을 제지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오퍼레이터의 정면 숏과 욕조 안에 숨은 미리암과 줄리앙의 숏이 붙는 순간 긴장과 동시에 어떤 안도감을 느낄 수 있다면, 공권력이 마침내 사적 영역의 폭력을 파악헀기 때문이다. 이제 오퍼레이터는 앙트완/미리암, 줄리앙 사이에서 벌어지는 폭력을 증언할 수 있는 자가 된다. 앙트완이 제압당하는 장면은 그 점에서 이상하게 연출되었다. 우선 샷건을 들고 어둠 속에서 걸어오는 앙트완의 숏은, 가정폭력범의 모습이 호러 영화의 공식을 통해 구체화된 숏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앙트완은 연쇄살인마나 다름없다. 이때 경찰들이 등장해 앙트완을 제압한다. 

르그랑은 이 상황의 전후 숏과 동선을 이상하게 붙였다: 이전까지 보이지 않았던 경찰 기동대가 갑자기 나타나 앙트완의 뒤에 순간이동해 제압하는 것처럼 붙였다. 이때 경찰 기동대의 음향은 전혀 들리지 않는다. 대체 그들은 어디서 나타났단 말인가? 상식적인 답은 '앙트완 몰래 현관문을 열고 숨어든 경찰 기동대가 덮쳤다'가 답일 것이다. (상황 자체도 그것 말고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이 기습과 국면 전환의 숏이 앙트완의 시점에 맞춰 갑작스럽기 때문에 전후 관계를 다시 생각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 상식적인 동선을 상식적인 숏과 편집으로 붙이지 않았다면 다른 의도가 있다는 뜻이다. 공간의 주도권이 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 편집을 이렇게 구상했다, 라고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미리암의 공영 아파트는 앙트완과 공포에 떠는 미리암과 줄리앙 밖에 없었다. 앙트완은 한때 자신에게 공적이었던 영역을 밀고 들어왔고 사적인 지옥으로 화하기 직전이다. 하지만 미리암과 줄리앙, 앞집 할머니는 경찰에 도움을 요청했고, 앙트완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 무지로 인해 앙트완은 공간의 권력을 잃고 경찰에게 제압당한다. 앙트완의 단말마가 "내 아내"라는 소유격적인 대사라는 점은 공간의 권력을 잃은 자의 발악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남는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적 영역 속 폭력에 대한 시민 사회의 감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영화일까?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사람이 미리암이나 줄리앙이 아닌, 앞집 할머니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이 할머니는 어둠 속에서 전화를 걸고, 불을 끄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위험을 피하는 상식적인 행동이긴 하지만, 앞집 할머니가 보이는 극도의 조심스러움은 흥미롭다. 앙트완은 할머니, 나아가 앞집에 누가 사는지 인지하지 못했다. 앞집에 할머니가 산다는 걸 아는 사람은 미리암과 줄리앙 뿐이다. 할머니의 행동이 보이는 조심스러움과 시점 숏으로 제시된 미리암과의 시선 교환, 총격전으로 부서진 문 이미지는 익명의 선의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암시를 남기고 있다.이 부분을 설명하면 내용을 넘어서는 상상의 문제가 되기 때문에 확언을 하지 않겠다. 다만 할머니의 시점 숏에서 사건 이후의 삶과 상처를 걱정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는건 확실하다. 그리고 이 걱정은 냉철한 연구자의 태도로 서사를 전개했던 자비에 르그랑의 연민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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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표적 [Straw Dogs] (1971)


2018/01/30 - [Deeper Into Movie/리뷰] - 가르시아 [Bring Me The Head Of Alfredo Garcia] (1974)

샘 페킨파의 [어둠의 표적]은 매우 이상하게 시작한다. 잠깐 어딘가 앉아있는 아이들을 보여주더니 갑자기 이미지를 흐린 뒤 타이틀을 띄운다. 그 흐릿한 이미지의 정체가 다시 밝혀지는 순간은, 타이틀이 다 뜨고 난 뒤다. 사실 그 이미지는 교회 묘지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의 모습이다. 곧 데이비드와 에이미가 도착한다. 감독 이름을 알지 못하더라도 재빠르고 잘라낸 시선 숏으로만 제시되는 에이미에게서 상당한 불쾌함을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장면은 노골적인 관음 숏이기 때문이다. 대상은 그 자신이 노출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채 성적인 이미지를 흘리며, 관음은 혐오스러운 순진함과 추잡한 탐닉으로 재빠르게 이뤄진다. 

요컨데 샘 페킨파는 첫 장부터 관객들에게 이걸 견딜수 있겠냐고 도발을 하고 있다. 데이비드와 에이미가 에이미의 옛 남자친구들을 만나는 장면을 보면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걸 알 수 있을 것이다. 밀렵꾼을 잡기 위해 만들어진 인간 덫 이야기로 마을의 폭력성을 흘러둔 샘 페킨파는 마치 존 포드의 [말 없는 사나이]를 거스르듯이 이 장면을 불쾌한 남자들의 위압적이고 건들거리는 제스쳐로 채운다. 그 속에서 데이비드는 무력하다. 안경과 수학이 배경이 되는 영국 시골 노동자 문화의 거칠음과 반대된다는걸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 동료가 되어야 할 에이미 역시 데이비드 곁에 있지 않고, 찰리 패거리와 어울리는 모습을 보인다. 데이비드는 콘월에서 완벽하게 혼자다. 자기 전에 행하는 줄넘기가 우스꽝스러워 보인다면, 데이비드의 왜소한 남근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초반엔 데이비드는 이 마을 사람들과 잘 어울릴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데이비드가 가장 먼저 하는 행위는, 낡은 집을 수리하려는 시도다. [말 없는 사나이]의 존 웨인이 맡았던 숀 역시 옛날에 가족이 살던 집을 수리하려고 하면서 마을 사람들과 친해졌다. 하지만 혼자서 집을 정리하며 친해졌던 숀과 달리, 데이비드는 혼자서 집을 정리하지 못한다. 권투 선수였던 숀과 달리 데이비드는 본질적으로 도시에 익숙한 부르주아 지식인이다. 파국 직전까지 데이비드가 집에서 하는 행위는 방에 틀어박혀 수학 문제를 풀거나, 아니면  사람들을 부리는 장면 뿐이다. 그런데 데이비드가 집 수리를 위해 고용한 사람들은 누군가? 바로 찰리로 대표되는 에이미의 옛 남성 친구들이다. 이 남성 친구들은 거친 일에 능하다. 페킨파는 마치 순박한 아일랜드 시골 커뮤니티의 정의를 믿었던 [말 없는 사나이]에 침을 뱉듯이 사악한 영국 시골 커뮤니티의 불의를 강조한다.

마초 샘 페킨파가 가장 두려워하는 부분은 바로 남자가 해야 할 일을 여자가 아는 다른 남자의 손을 빌어야 하는 부분이다. 페킨파에게 데이비드는 지지리도 못한 쫌팽이 같은 남자다. 이를 대변하듯이 집을 수리하는 찰리 패거리와 데이비드가 대화를 나누는 시퀀스는 철저한 경멸의 숏과 리버스 숏으로 이뤄져 있다. 데이비드는 하이 앵글 숏에서 왜소하게 제시된다. 당연히 이 시컨스의 승자는 지붕 위에서 하이 앵글로 데이비드를 바라보는 찰리 패거리인데, 동물에게 이성적으로 반응해봤자 동물은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 뜻대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데이비드가 쥐고 있는 유일한 권력은 경제적인 관계인데, 그마저도 찰리 패거리는 연연하지 않는다. 일진에게 화를 내거나 돈을 바쳐도 일진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오히려 괴롭힐 구실을 잡았다고 생각할 뿐이다. 고양이를 죽이고 그 시체를 데이비드의 집에다 던져넣는 장난은 유치하지만 사악하다.

이 사이엔 에이미가 있다. 박찬욱 감독이 지적했듯이 에이미는 데이비드와 찰리 패거리에서 이중 스파이와 같은 존재다. 에이미는 데이비드를 사랑하지만, 그의 부족한 남성성에 큰 실망을 품고 있다. -를 +로 바꾸는 장면은, -된 욕망을 +로 바꾸고 싶어하는 에이미의 욕망을 드러낸다. 에이미 자신이 발산하는 성적 이미지라던가, 그런 이미지를 바라보는 남성들의 관음증적 시선 숏을 생각해보면 이 욕망이 성적인 것이라는 건 확실하다. 심지어 에이미는 데이비드 보고 대놓고 ‘비겁하다’라는 비난을 가하기도 하다. 이 비겁함은 남성성의 부족함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을 주체적인 묘사로 표출되기 보다는, 수동적으로 당한다는 점에서 명백한 여성혐오적이다. 에이미는 남자들에게 먼저 유혹하려는 태도는 취하지 않은 채 성적인 뉘앙스를 흩뿌리다가 강간당한다. 소위 말하는 수동적으로 성적 이미지를 표출하고 그것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는 여성 캐릭터라는 점에서 [어둠의 표적]은 1970년대 초기 페미니즘 영화 비평에서 비판을 받았던 영화이기도 하다. 

사실  원작자 고든 M. 윌리엄스와 페킨파, 각본가 데이비드 젤리그 굿맨은 에이미 캐릭터에 복잡한 생각을 할 두뇌를 주지 않았다. 그들이 이런 여성혐오적인 캐릭터 설정을 한 이유는 간단하다. 왜냐하면 에이미는 이 마을 출신이기 때문이다. 찰리 가문이 일종의 법도 도덕도 없는 흉악한 짐승 집단처럼 그려지는 걸 생각해보면 에이미의 성적인 방종함은 배경이 되는 콘월 지역에 대한 감독과 각본가들의 관점의 일부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일종의 에밀 졸라풍 자연주의적인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졸라가 만들어낸 나나가 그랬듯이 에이미는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본능을 뛰어넘는 복잡한 셈이나 생각을 하지 못한다. 물론 데이비드의 지성에 맞추려고 노력하긴 하지만, 잠자리에 등장하는 체스 대결 역시 입문서를 읽으면서 둬야지 간신히 진행되고, 그나마도 정정당당한 대결은 이뤄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데이비드의 수학 작업을 이해하지 못하고, 데이비드의 짜증어린 반응을 고양이하고 놀면서 회피하거나 1차원적인 단순한 리액션으로 받아칠 뿐이다. 데이비드와 에이미가 부부싸움을 하는 숏과 반응 숏을 자세히 보면 찰리 패거리의 무시하고 크게 다를 바 없다. 차이점이라면, 에이미의 동물적 반응 숏은 경멸보다는 짜증과 갈망에 가깝다는 것이다.  

도시에서였다면, 에이미의 방종한 성격은 백치미로 안전하게 가부장 관계에서 소비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에이미가 태어난 시골 마을이다. 안전한 백치미는, 시골에서는 통제불가능한 가부장 남성의 야수성을 자극하는 스위치가 되버린다. 그 점에서 에이미가 강간당하는 시퀀스와 데이비드가 마을 남자들에게 꼬여 사냥을 가는 시퀀스랑 교차 진행되는 전개는 서사상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데이비드는 시골 마을이 요구하는 남성적 행위를 수행하면서 마을에 편입되려고 한다. 하지만 데이비드의 남성성을 증명하기 위해 내부인들 앞에서 역할 수행을 하는 동안, 에이미는 집에 침입한 옛 남자친구 찰리에게 강간당하다가 화간으로 변모하게 된다. 이 악명높은 강간 장면은, 두가지 점에서 이중적이다. 하나는 에이미의 야만적인 남성성에 대한 욕망이 폭력으로 부서진다는 점이다. 강간으로 생긴 에이미의 트라우마는 직후 등장하는 교회 파티 시퀀스를 통해 드러난다. 이때 에이미는 갑자기 브라를 착용하는 정숙한 여인이 된 것처럼 보이고, 삽입 숏으로 제시되는 노골적인 성적 상징을 견디지 못한다.  

하지만 동시에 에이미가 후반부로 갈수록 찰리의 강간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였던 것도 인정해야 한다. 찰리가 에이미의 옛 애인이었다는 설정은, 끔찍한 강간 판타지에 기반한 에이미의 심리적 변화를 그려내기 위한 밑밥인 셈이다. 이 강간 판타지가 완성되는 순간 샘 페킨파는 데이비드가 사냥에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때 두 장면의 교차 편집은 동일하게 짧게 쏘아붙이는 숏으로 대비된다. 데이비드는 새 사냥에 성공하면서 남성성을 인정받지만, 동시에 옛 애인 찰리에게 성적으로 아내를 빼앗기고 만다. 폭력을 능숙하게 다루는 동안, 성적으로 되려 더 무능해지는 것이다. 

더 무서운 점은 이때 페킨파는 강간범인 찰리는 물론이고, 데이비드와 에이미 그 누구에게도 감정 이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냥의 기쁨이 강간의 고통과 동일시 되는 편집 기법에서 사냥의 성취는, 불쾌한 강간 판타지 앞에서 산산조각난다. 남은 건 공포와 낯설음, 그리고 역겨움이다. 페킨파에겐 강간과 사냥 모두 약한 자를 짓누르는 행위기 때문이다. 사냥에 돌아온 데이비드와 강간당한 에이미가 (당연하겠지만 에이미는 안경을 쓰지 않는다.) 싸우는 장면의 숏 연결 역시 시선 회피와 의도적인 어긋남으로 이뤄져 있다.  여성 혐오적 상황이 슬슬 인간 혐오적인 상황으로 확장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어둠의 표적]은 명백한 여성 혐오적 설정을 품고 있음에도, 여성 혐오적 상황을 안전하게 소비할수 없을 정도로 밀어붙인다. 영화의 원제는 그 점에서 노자가 세상사의 하찮음을 관조하는 자세를 악의적으로 뒤틀고 있다고 볼수 있을 것이다.

어떤 지점에서 [어둠의 표적]은 외양과 달리 샘 페킨파가 지독히도 서부극의 영역에 머물고 있다는 걸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영화이다. 서부가 개발된 현대에서 야만의 영역은 미국이 아니라 영국으로 등장하며, 문명의 본류라 믿었던 영국이야말로 야만을 방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어떤 지점에서는 미국의 서부극보다도 훨씬 끔찍한데 이 영화에서는 야만을 통제할 아버지의 법이 전혀 동작하지 않고 있기 떄문이다. 이 영화에서 정상적으로 중재할 수 있는 자는 퇴역 장군 존 스콧이지만, 영화의 파국은 그가 찰리 패거리의 우발적인 총격으로 맞아죽으면서 시작된다. 법이 통하지 않지만, 법을 집행할 자는 무력하다. 그렇기에 외부인의 활약이 필요하다. 하지만 집행을 대신할 외부인은 폭력을 한번도 써본적이 없는 수학자다. 페킨파는 이 아이러니에 아무런 감정도 가지지 않고 계속 밀어붙인다. 이를 위해 페킨파와 각본가들은 데이비드가 멀쩡히 잘 있다가 뒤집어진게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초반부에 에이미와의 대화를 보면 알겠지만 데이비드가 모종의 문제로 도시에서 쫓겨나 정착했다고 정보를 흘린다. 데이비드는 보기만큼 안전한 인물도, 이입할만한 인물이 아니다.

영화의 파국을 불러일으키는 캐릭터인 헨리는 그 점에서 흥미롭다. 지적 장애를 가지고 있는 헨리는 마을 사람들의 희생양, 호모 사케르나 다름 없다. 그는 핍박받으면서 마을의 규율을 유지하는 존재다. 영화의 파국 역시 헨리가 찰리의 사촌 재니스와 애정행각을 벌였다는 이유로 폭발한다. 하지만 헨리는 완벽하게 무고한 인물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마을 사람들의 야수성을 뒤집어 드러내는, 어린아이 같은 캐릭터다. 단적으로 파국의 상황에서 헨리는 발작하며 에이미랑 몸싸움을 벌이면서까지 도망가려고 한다. [어둠의 표적]의 아이러니는 무고하지만 순수하지는 않은 희생양을 지키려는 과정에서 폭발한다. 폭발은 공적 영역을 상징하는 교회를 벗어난, 사적 영역인 데이비드의 집에서 (그것도 밤에) 이뤄진다. 조명은 꺼져 있고, 무도덕한 짐승의 패악로 무장한 찰리 패거리는 총을 쏘아대며 짐승 소리를 흉내낸다. 가장 안전한 집이 가장 위험해지는 아이러니를 통해 페킨파는 호러 영화의 어법을 빌려온다. 찰리 패거리는 더 이상 이성의 수단이 통하지 않는 짐승이자 좀비다.  제약된 시선 바깥의 불쾌한 음향과 위협적인 액션을 통해 긴장을 불어넣는다는 점에서 존 카펜터의 [13번가의 습격]가 어디서 영향을 받았는지도 확인할 수 있다. 

찰리 패거리의 논리는 간단하지만 (“우리 여자를 건드린 병신 새끼를 족치자!”), 법 나아가 당연한 상식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약자를 향한 가부장의 패악질을 농축한 집단이다. 어떤 점에서 찰리 패거리는 [라이드 온 하이 컨트리]에 등장했던 엘사를 뒤쫓는 불쾌한 오빠들의 연장선상에 있다. 여성 대신 지적 장애인이 핍박받는 자로 변했을 뿐이다. 데이비드는 그 점에서 상술한 서부극의 외부에서 온 보안관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상술했지만 여기는 신화가 끝난 영국이다. 자신의 일을 하려는 데이비드의 폭력은 극단적이고 지저분한 수단으로 표출된다. [어둠의 표적]의 후반부가 무시무시하다면, 데이비드가 휘두르는 정의의 폭력과 찰리 패거리의 사악한 폭력 간의 차이를 발견할 수 없다는 점이다. 데이비드의 분노는, 헨리를 지킨다기보다는 일진에게 복수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실제로도 그렇다.) 자신의 의무를 강조하다가 도망가려는 헨리를 쥐어패고 다락에 가두는 장면이 대표적일 것이다. 물론 틈틈히 찰리 패거리를 옹호하면서 데이비드를 막다가 얻어맞는 에이미 같은 여성혐오적 묘사는 여전하다. 하지만 페킨파는 폭력의 동인을 계속 겹쳐놓으면서, 폭력의 명료성을 일부러 흐려버린다. [어둠의 표적]은 설정을 통해 폭력의 장르적 쾌감을 약속하지만 그 역치를 넘어버리는 수준까지 밀고가면서 그로테스크함을 구축한다. [가르시아]가 선악 구분이 명확한 대신, 자기도취성에 빠져있다면 [어둠의 표적]은 그런 자기도취성을 찾을 수 없다.

영화의 결말 역시 묵시록적이다. 우선 찰리 패거리에게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동시에 찰리에게 총을 쏜 이중 스파이 에이미는 파괴된 집에 남는다. 하지만 에이미 역시 고향 마을에 더 이상 정착할 수 없는건 분명하다. 그것은 데이비드와의 파국이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의 파국이기도 하다. 그 다음은 데이비드와 헨리다. 어둠 속에서 차를 타고 집을 빠져나오는 데이비드 옆에 앉은 헨리는 어디로 가냐고 물어본다. 데이비드는 모른다고 대답한다. 영화는 여기서 끝난다. 데이비드와 헨리 역시 어디로 갈지 모른다. 이 곳이 고향인 에이미는 집에서나마 머물수 있었지만, 데이비드와 헨리는 시골 공동체를 움직이던 구성원들을 살해함으로써 완벽한 외부자가 되고 말았다. 그들은 영원히 아침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공동체를 박살내고 영원하고도 비현실적인 어둠에 갇힌 인물들. [어둠의 표적]이 섬뜩하다면, 그 감금된 인물들에게 아무런 감정이입을 하지 않고 잠재된 괴물적인 본성을 끌어낸다는 점에 있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폭력의 역사]는 이 영화에게서 폭력의 동인과 쾌감이 지루한 시골 마을에서 반전되어 제시되는 섬뜩함을 배웠던 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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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느냐 죽느냐 [To Be or Not To Be] (1942)


저 유명한 햄릿의 대사에서 따온 제목을 보면 마치 거창한 영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에른스트 루비치의 [사느냐 죽느냐]는 셰익스피어 영화가 아니다. 그렇다고 왕실 암투극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영화의 시대는 1940년대 폴란드 극단, 즉 동시대다. 이 영화에서 사느냐 죽느냐는 나치 앞에서 이뤄지는 문제다. 그런데 이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는 거창한 레지스탕스 활동이 아니다. 영화는 마치 현재의 암울함과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모르는 것처럼 희극적 설정을 깔아둔다. 마리아와 요셉은 반 나치적인 풍자극과 셰익스피어를 연기하는 폴란드 배우 부부다. 요셉이 고뇌에 잠겨 있는 동안, 마리아는 자신의 팬인 소빈스키 중위를 만나게 된다. 마리아는 소빈스키에 푹 빠지게 되고 요셉은 우연히 그 사실을 알고 질투하게 된다. 문제는 이 뒤다. 소빈스키는 반나치 운동에 가담해 있었고, 나치가 폴란드로 들어오면서 전쟁의 불길로 휩싸이게 된다. 소빈스키는 나치 스파이를 제거하기 위해 바르샤바로 돌아오고, 마리아와 요셉은 소빈스키의 작전에 휘말리게 된다.

영화는 무대에서 연기하는 배우들을 보여주면서 시작하는데, 이 시퀀스는 마치 이후 이어질 기나긴 연기를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리아와 요셉은 배우로써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영화가 시작했을땐 그들은 총체적인 위기에 봉착해 있고 둘은 이것을 해결해야 한다. 이 영화의 가장 이상한 부분이라면 이 위기와 해결과정이 한 영역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느냐 죽느냐]는 일반적인 극영화로 위장해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상이한 연극 두 편이 뒤엉켜있다. 마리아와 요셉, 소빈스키의 개인적 삼각관계, 나치를 상대로 한 스파이 작전으로 대표되는 역사/사회적 관계다. 루비치는 이 둘을 분리하지 않고 하나로 합쳐버린다. [사느냐 죽느냐]가 코미디 영화라 할 수 있다면 전혀 들어맞지 않는 두 영역, 세계와 개인이 겪는 위기가 얼렁뚱땅이지만 세련된 임기응변 (혹은 연기)을 통해 전환점이 되거나 전진하기 때문이다. 와중에 도덕적 가치는 불경할 정도로 흐려진다. 소빈스키와 마리아의 통정은 햄릿의 명대사를 방아쇠 삼아 전개되고, 반대로 통정의 디테일에 대한 상대방의 무지는 스파이가 누군지 밝혀내는 장치가 된다. 한편 요셉의 개인적 질투는 안면도 없는 나치 장교를 속이는 행동에 동참해서라도 아내의 사랑을 되찾고 한다. 당연하겠지만 파시즘과 애국주의는 아무런 무게를 가지지 못하고 붕붕 날아다닌다.

루비치는 이 모든 상황과 캐릭터를 일종의 가면 놀이처럼 만들어간다. 루비치는 관객에게만 이 가면들 간의 관계를 알려준다. 작중 인물들은 상대가 쓰고 있는 가면이 어떤 관계인지 알지 못하거나, 일부분만 알 뿐이다. 그렇기에 인물들은 가면 속에서 연기하면서 상황이 어떤지 파악해야 한다. 루비치가 써내린 유려한 대사는 상황을 은폐함과 동시에 가면 뒤의 핵심을 찌르는 도구다. 은유와 비유, 예의와 비꼼의 전투가 가면 앞과 뒤에서 이뤄진다. 가면은 단순히 연기에 그치지 않고 문이라는 도구로도 확장된다. [사느냐 죽느냐]의 서스펜스와 이완은 문의 열림과 닫힘을 통해 제시된다. 문을 열었을떄 거기엔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 있고 (마리아가 실렌츠키 교수의 방문을 받는 장면이 그렇다.), 문이 닫히고 난 숏에서 사람들은 한숨을 돌리거나 직전의 상황을 파악하려고 애쓴다. 문은 그 점에서 등장인물의 분투이자 그 분투의 희극성을 보여준다. 동시에 문은 연기와 현실의 경계를 열어젖히는 도구기도 하다. 문을 열고 들어간 요셉이 실렌스키 교수로 위장해 나치 앞에서 거짓말하는 시퀀스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정말 이 소재와 시대배경으로 이런 코미디를 해도 되는 것일까? 라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사느냐 죽느냐]는 프로파간다 영화다. 폴란드 연극인들이 나치 스파이를 잡아내고 연합군으로 탈출하는 내용에서 프로파간다적인 성향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엔 프로파간다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아무런 힘을 얻지 못한다. 프로파간다를 내세워야 하는 배우들과 자유 폴란드 군인들은 선전물적으로 용감하기 보다는 루비치 특유의 가벼움을 유지하고 있다. 루비치가 독일 국적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폴란드인에 대한 이런 묘사들은 아슬아슬한 지점이라 할 수 있다. 루비치 역시 그런 점을 의식했는지 초반부 극단원의 대사를 빌어 제시된다. ‘연극인이 전쟁에서 할 수 있는건 숨는 것 뿐.’ 현실적으로 보면 맞는 말이다. 배우가 총을 들게 되면, 그것은 배우가 아니라 배우였던 군인일 뿐이다. 배우가 싸우기 위해서는 연기를 해야 하지만, 현실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답은 현실을 무대로 만드는 일 뿐이다. 문은 그 점에서 현실을 무대로 만드는 마술이다. 마리아와 요셉 부부는 대사를 반하듯이 나치가 머무는 곳들을 희극 무대로 만들어버린다.

이 권력 관계에서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게 나치가 아닌 폴란드인이라는 점에서 [사느냐 죽느냐]는 명백한 프로파간다적인 목적이 있다. 음모의 연극은 현실의 비극을 과장되게 모사한 희극으로 진행되고, 음모의 주체들은 죽지 않고 행복한 결말로 끝난다. 루비치에게 나치는 지루하고 재미없고 유머도 없는 사악한 발연기 배우들이다. 그들은 현실과 연극을 파악할 재간이 없으며, 영문도 모른채 죽거나 강제로 퇴장당한다. 중요한 점은 이런 퇴장이 아무런 의미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의미를 얻는 것은, 필사적으로 연기를 해서 얻어내는 자들이다. 이 영화의 무례해보일 정도로 경박한 태도는 역사적 비극을 이겨내려는 도피적이면서도 역설적인 페이소스다. 루비치는 현실과 픽션의 접합점을 넘나들며 현재진행적인 역사의 비극 속에 숨어있는 폭력성을 점잖게 놀린다. 그는 파시즘에게 심각함과 위압을 빼버리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걸 알고 있다. 사느냐 죽느냐의 영어 대사는 To Be Or Not To Be다. 투 비가 되느냐 낫 투비가 되느냐. 조종당하는 인형이 되느냐 줄을 자르고 달려나가는 자동 인형이 되느냐. 이 순간 경박해보이는 인물들이 벌이는 희극은 역사의 폭압을 저항하는 도구가 된다.

결말은 어떤 지점에서 양가적이다. 이 영화의 결말은 명백한 해피 엔딩이다. 하지만 그 해피 엔딩이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는 방향은 아니다. [사느냐 죽느냐]가 발표된 해는 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이다. 망명객인 루비치의 입지를 반영하듯이 폴란드 배우들과 군인들은 고국에 남지 못하고 최종적으로 영국으로 도망친다. 영국에서 마무리짓는 결말은 셰익스피어의 고향에서 햄릿을 연기한다는 배우로써 성취를 보여주는 결말이면서도, 동시에 가면놀이의 유희가 궁극적으로 폴란드 현실을 바꾸지 못했다는 솔직한 고백이기도 하다. (전후 이어지는 폴란드의 수난사와 망명 폴란드인들의 운명을 생각해보면 더욱 비극적이다.) 정리되지 않은 채 남은 소빈스키와 부부 간의 삼각 관계은 그 자체로 웃기기도 하지만, 극 초에 생겼던 긴장 관계가 전혀 해소되지 않았다는 걸 명백히 보여준다. 오로지 루비치가 만들어낸 픽션 속에서만 그들은 파시즘의 폭압을 이겨내고, 어정쩡한 삼각관계를 해피엔딩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영화 자체를 너무 비관적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듯 하다. 소빈스키와 요셉과 마리아의 관계는 나치즘의 뻣뻣한 폭압하고 거리가 먼 불경하지만 즐거운 에너지가 있기 때문이다.

[사느냐 죽느냐]는 불경할 정도로 경계 흐리기와 경쾌한 폭소로 파시즘을 하찮게 만들면서도 전혀 해결되지 않은 상황을 같이 제시하는 것으로 동시대의 그림자를 포착했다. 언제 전쟁이 끝날지 알 수 없었던 루비치는 이 모든 것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라고 눈을 찡긋거리며 ‘반복’으로 마무리짓는다. 그 찡긋거림이야말로, 어두운 현실에서도 유머의 힘을 믿었던 자의 제스쳐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3년뒤 역사는 루비치와 영화의 손을 들었다. 루비치는 짧긴 해도 나치가 패망하는걸 보고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살아남지 못한 자도 있었다. 영화의 주연이었던 캐롤 롬바드는 영화 촬영 후 전쟁 채권 독려 집회에 참여했다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그렇게 [사느냐 죽느냐]는 어두웠던 한 시대의 증언이자 희극으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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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밤 사자는 잠든다 [Le lion est mort ce soir / The Lion Sleeps Tonight] (2017)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카메라가 돌아간다. 죽음을 맞이하게 된 배우는 테라스에 있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는다. 이때 카메라는 늙은 배우의 얼굴로 다가간다. 스와 노부히로는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를 시작하면서, 의도적인 기만을 부린다. 사전정보 없이 이 영화의 도입부를 보게 된다면, 시퀀스 배치가 잘못된 것 아닌가라는 위화감을 받게 될 것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시작으로 하다니. 당연하겠지만 이 장면은 극중극이다. 컷 소리와 함께 배우는 눈을 다시 뜨게 되고, 다음 시퀀스인 분장실로 넘어간다.

촬영을 종료하고 장은 스태프에게 말한다. 옛날 독립 영화는 원 신 원 컷으로 찍었고 다음이 없었다고. 스와는 여기에 동조하듯이 도입부를 원 신 원 컷으로 찍었다. 시간 이미지가 타임코드의 데이터로 기록되는 시대에서 스와와 장은 시간을 기록하는 매개체라는 개념으로써 영화를 주장한다. 하지만 동조와 별개로 장은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 사실 영화에서 죽음을 연기한다는 것만큼이나 기묘한 영역도 없을 것이다. 생물이 죽음을 경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태사다르 얘기가 아니다.) 하지만 영화에서 죽음을 재현하는 일은 의외로 흔하다. 스와는 이 지점에서 서사의 모티브를 얻는다. 대체 경험없는 재현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 이 질문 앞에서 촬영 현장은 잠시 중단된다.

스와는 실마리를 유령 영화에서 찾는다. 영화 제작은 중단되고 장은 근처 마을에서 휴가를 보내기로 한다. 그런데 그 저택은 장의 옛 여자친구 쥘리에트가 살던 집이다. 그 집에 머물면서 장은 쥘리에트의 유령을 만나게 된다.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는 유령 들린 저택 영화지만, 호러 영화는 아니다. 쥘리에트의 유령은 별다른 원한도 해결해야할 숙원도 없다. 그들은 산책을 하거나 앉아서 대화를 나눈다. 이 둘이 나란히 놓였을때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역시 육체적인 대조일것이다. 이미 죽어서 실체 없는 과거의 이미지로만 남은 쥘리에트는 여전히 젊고 아름답지만, 장은 늙었다. 그 대비에서 세월의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장을 맡은 장 피에르 레오는 팔팔한 소년의 얼굴로 은막에 데뷔했다. 소년에서 시작해 청춘, 장년까지 인생 전부를 은막에 맡긴 사람이다. 그런 그가 늙고 노쇠한 육신으로 앉아있다.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는 그 점에서 제임스 맨골드의 [로건]처럼 스타의 노쇠한 육체 이미지가 영화의 분위기를 결정짓는 영화다.

쥘리에트가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의 진리를 상징한다면, 쥘을 비롯한 아이들은 시간의 흐름을 상징한다. 아이들의 시점에서 본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는 귀신 들린 저택 영화다. 아이들은 쥘리에트를 알지 못한다. 안다고 해도 막연한 소문 뿐이다. 그렇기에 아이들과 장의 만남은 어딘가 어색한 거리감이 감돈다. 장은 과거의 회고에 젖어 조용히 있고 싶지만, 이 저택의 내막을 잘 모르는 아이들은 장을 유령이라 착각한다.  그런데 이 착각은 어느정도 뼈가 있는 착각이다. 아이들은 쥘리에트를 모르는 것 이상으로 장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장은 영화를 찍고 있지만, 아이들은 장이 나왔던 영화를 언급하지 않는다. 요컨데 그들은 스타로써 장이 아닌, 평범한 배우로 그들을 받아들인다. 이를 위해 스와 노부히로는 배경이 되는 마을에서 어른의 비중을 확 빼버린다. 이 영화에서 초반부 이후로 등장하는 어른은 아이들의 영화 만들기를 돕는 영사 기사와 쥘의 어머니 뿐이다. 그런데 영사 기사는 장을 아는 체 하지 않고, 쥘의 어머니는 영화가 끝날때까지 장과 만나지 않는다. 요컨데 장은 현재에 뚝 떨어진 과거다.

그런데 아이들은 대체 뭘 하러 저택에 왔단 말인가? 장이 배우라는걸 생각해보면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의 아이들이 영화를 찍으려고 온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불쌍한 장은 촬영을 쉬러 왔음에도 영화를 찍어야 하는 신세다. 물론 아이들의 영화 촬영은 초반부에 등장했던 진지함과는 거리가 멀다. 호러 영화를 자처하지만, 돈도 없고 특수 효과비도 없는 아이들도 뭔가 거창한 영화를 만들 생각은 전혀 하고 있지 않다. 아이들에게 영화 만들기는 놀이다. 아이들이 들고 있는 카메라가 디지털 캠코더라는 점 역시 그 유희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영화 만들기는 놀이 이상으로 어떤 구체적인 계획이 필요하다. 정작 아이들은 딱히 계획이 없다. 그저 장이 배우라는 사실을 알고 캐스팅을 시도하려는 정도다. 상술했던 필름 시절 원 신 원 컷의 정신에 대한 초반부 대사랑 스와 노부히로가 디지털 삼인삼색으로 DV 영화를 찍었던 걸 생각해보면 흥미로운 지점이다.

결국 노련한 배우 장은 아이들에게 영화 만드는 법을 하나씩 가르치기 시작한다.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의 미덕은 이 가르침이 고압적인 방식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장은 실제 장 피에르 레오의 성격을 반영한듯한 퉁명스러운 노인네지만 최대한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주려고 한다. 다소 실소가 나오는 호러 코메디 시나리오도 진지하게 받아준다. 물론 시행착오는 있다. 장과 아이들이 한 시퀀스를 반복해 찍는 장면이 그렇다. 이 장면에서 아이들은 언제 들어와서 어떤 대사를 하고 어떻게 나가는지 모른채 끊임없이 실수한다. 마지막 테이크에서 장이 제멋대로 대사를 치고 나가버리는 것도 그의 짓궃은 유머가 반영되어 있다. 어찌보면 영화의 중반부는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젊음과 죽음을 준비하는 노년 간의 희극적인 줄다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영화는 기어이 만들어진다. 아마도 쥘의 고백이 큰 공헌을 했을지도 모른다. 쥘은 아이들 중 유일하게 상실과 그 이후의 삶이 뭔지 아는 아이다. 쥘은 아버지를 잃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려는 어머니에게 혼란을 느낀다. 쥘의 고백을 통해 장은 쥘에게 동질감을 느낀다. 쥘은 그 점에서 쥘리에트의 거울쌍적인 변주라 할 수 있는 캐릭터다. 쥘리에트를 잃은 장은 이제 막 상실을 경험한 쥘을 위로하기 위해 영화에 조금 더 진지해진다. 아이들과 장이 찍기로 한 마지막 장면은 호수에서 이뤄진다. 호수로 가는 버스에서 아이들은 The Lion Sleeps Tonight이라는 노래를 듣고 들어본적이 있다며 알아차린다. 연결고리가 없는 두 세대 간에 연결고리가 만들어지는 순간, 즐거운 합창이 영화 속 영화의 결말로 인도한다. 이 즐거운 합창은 스와 노부히로가 생각하는 예술의 힘이다. 그리고 장은 처음으로 쥘리에트의 비극적 죽음에 대해 아이들에게 털어놓는다.

장이 잠시 혼자 남아있을때 장은 쥘리에트의 유령을 다시 만나게 된다. 해후와 애끓는 안타까움의 고백 뒤에 쥘리에트는 장을 남겨두고 사라진다. 다시 만날수 있냐는 장의 말에 쥘리에트는 모호하지만 긍정의 뜻을 남긴다. 쥘리에트는 물 속으로 걸어들어가 사라지는데, 이 쇼트는 아이들이 찍던 영화의 결말과 비슷하다. 장의 기억을 반영한 아이들의 영화가 만들어지는 동안 쥘리에트는 장 앞에서 현존했고, 반대로 아이들의 영화가 완성되자 쥘리에트는 완전하게 영점으로 돌아갔다. 쥘리에트는 다시 만난다는 것은 기적 또는 죽음을 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장은 죽지 않는다. 또는 자살하지 않는다. 로건이 죽은 이들을 거쳐 로라와 아이들에게 마지막 생의 의지를 되찾었던 것처럼, 장은 아이들과의 영화 작업을 통해 자신에게 아직 남아있는 일이 있다는걸 알게 된다. 바로 죽음을 연기하는 일이다. 짧은 휴가는 그렇게 끝나고 장은 마치 백일몽처럼 아이들앞에서 사라진다. 아이들의 반응 역시 신기루를 놓친듯한 아쉬움과 묘한 깨어남을 보인다.

하지만 쥘이 남아있다. 다른 아이들처럼 아쉬움을 품고 마을을 거닐던 쥘은 골목에서 사자를 발견한다. 뜬금없는 환상 시퀀스지만, 쥘만이 볼수 있다는 점에서 스와 노부히로의 의도는 명백하다. 쥘은 장과의 짧은 만남이 결코 신기루가 아니라는걸 알고 있다. 쥘과 장이 다시 만날 가능성은 적을 것이다. 하지만 장은 쥘을 통해 버스에 흘러나오던 노래처럼 불멸의 존재가 되는데 성공했다. 스와 감독은 죽음을 극복하는 것을 누군가 기억되는 것이며, 그것이 영화라는 매체와 배우의 본질과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영화의 마지막은 다시 죽음을 연기하는 장이다. 하지만 망설였던 초반부와 달리, 마지막의 장은 더이상 망설이지 않는다. 아이들과 함께 영화를 만들면서 죽음과 소멸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넘어서, 그것이 자신의 일부였다는걸 알게 된 것이다. 이 망설이지 않음은, 이제 말년에 접어든 장 피에르 레오 자신의 다짐이기도 할 것이다. 스와 노부히로는 그 다짐을 노사자의 뜬 눈을 강조하는 것으로 구체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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