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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자크 타티 (2)
플레이타임 [Playtime] (1967)

2015/01/18 - [Deeper Into Movie/리뷰] - 나의 아저씨 [Mon Oncle / My Uncle] (1958)

자크 타티의 [플레이타임]은 그 자체로 완결된 전설로 남은 작품이다. 왜 타티는 성공적이였던 [나의 아저씨] 후속작을 만들지 않고 8년동안 이 영화를 만들며 침묵을 지켜왔는가? 적어도 그가 반복하는걸 싫어했다는건 명백했다. 그래도 [플레이타임]은 성공을 믿고 만들어냈다고 하기엔 너무나 무모한 영화다. 타티가 [플레이타임]를 위해 만들려고 했던 장소는 건물 몇 개가 아닌, 그 자체로 완성된 도시였다. 하나의 세계를 그대로 담은 세트로 만든다는 시도는 도무지 정상적인 선택이 아니다. 아무리 비물질인 주제를 다룬다고 하더라도 영화는 물질로 구성된 세계를 설계해 담아야 하는 매체다. 그렇기에 편법이 동원되는데 타티는 그걸 거부한 것이다. 매우 비효율적이고, 처음부터 실패가 내정되있는 선택이다. 실제로 타티는 영화의 실패로 몰락했고 평생 거기서 못 벗어났다.

대체 뭘 했길래 타티는 그렇게 파산했고, 그럼에도 이 영화를 만들었어야 했던가. 영화의 시작을 보자. 재즈 음악과 하늘이다. 처음부터 타티가 왜 그런 세계가 필요했는지 명징하게 설명된다. 재즈 음악의 복잡한 임프로바이제이션과 거대한 70mm 스크린과의 결합. 타티는 복잡하지만 자유롭게 요동치는 에너지를 영화로 다루기로 결정했다. 그 결정을 내린 다음 타티가 시작하는 곳은 공항이다. 어찌보면 지극히 논리적인 선택이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스크린을 통해 영화 내 세계로 관객이 초청받는 것이다. 그것이 배우의 얼굴이든, 풍경이든 영화의 시작은 어떤 대상을 다룰지를 보여주는 관문이라 할 수 있다. [플레이타임]은 그 전통을 공항과 관광객으로 통해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플레이타임]의 도입부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진귀한 풍경이다. 우리가 보는 것은 윌로 씨가 아닌, 윌로 씨가 나타나길 기다리는 장소에 배치된 무수한 사람들이다. 관객은 윌로 씨가 언제 나타날지 기다리면서, 거기 배치된 사람들의 행동과 대사를 유심히 귀를 기울이게 된다. 하지만 그 행동들과 대화들은 사실 그렇게 큰 의미가 없으며, 오직 그 공간이 어떤 곳인지 알려주기 위해 쓰여진 지문들이다. [플레이타임]은 처음부터 타티는 왜 자신에게 그런 무모한 짓이 필요했는지 설명해낸다. [나의 아저씨]에서 팬터마임과 무언극, 무성 코미디 영화의 결과물을 총결산한 타티는 그 총결산을 바탕으로 어떤 새로운 영화적 풍경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나의 아저씨]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대사가 아니라 윌로 씨가 만들어내는 행동이였던걸 생각해보라. [플레이타임]은 그런 행동의 업그레이드라 할 수 있는 영화다.

하지만 이 업그레이드는 범인의 상상력을 뛰어넘는다. [플레이타임]은 정말 아무도 가지 않았고, 쉽게 갈 수 없는 아름다움에 훌쩍 도달한 영화다. 윌로 씨와 바바라라는 미국 관광객이 표면적인 주인공이지만, 전작과 달리 이 큰 스크린에서 그들을 찾는 건 쉽지 않다. 타티빌이라고 불리는 이 작은 소우주에서 그들은 잘 보이지 않는다. 어차피 타티 영화에서 이야기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플레이타임]에 이르면 이야기는 몇 단어로 축소할 수 있을 정도에 이른다. 윌로 씨가 우연히 만난 바바라에게 여러 소동 끝에 꽃을 준다. 이게 전부다. [플레이타임]은 [윌리를 찾아라]가 그랬듯이 의미도 맥락도 거의 없어진 거대한 흐름이 만드는 리듬에 동참하고 발견해야지 영화의 중심에 들어설 수 있는 영화다. 그리고 거기서 서브플롯은 슬그머니 등장하고 사라졌다가 어느 순간 씬스틸러 역할을 한다.

자크 타티는 분명 이 영화에서 장 르누아르가 [게임의 규칙]에서 만들었던 흐름의 영화을 명백히 인식하면서 영화를 만들고 있다. 르누아르는 [게임의 규칙]로 대표되는 유동적인 카메라와 끊임없이 움직이는 캐릭터들을 통해 영화의 흐름을 잡아냈다. 타티는 거기서 더 나아가 기어이 인물을 삭제하고 도시 속 거대한 흐름에 주목한다. [플레이타임]의 코미디는 그런 거대한 흐름이 엉키는 순간에서 드러난다. [나의 아저씨]에서는 초자연적으로 사랑스러운 재해인 윌로 씨가 중심이 되어 주변을 돌아다니며 흐름을 만들어냈다면, [플레이타임]에서 흐름은 이제 윌로 씨에 머물지 않고 무수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무정부적 카오스로 넘어간다.
 
타티는 다양한 도시의 공간을 돌아다니면서 그 역동적인 에너지와 흐름이 어떻게 흐르는지 보여준다. 여기서 길을 잃거나 엉뚱한 슬랩스틱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나의 아저씨]에 등장했던 (현대 건축의 창시자 르 코르뷔지에가 흡족해할만한) 아르펠 씨의 집이 확장된 타티빌은 그렇게 인간에게 어울리지 않는데다, 타티의 카메라조차 그들을 위해 움직이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타티는 약간 짗궃게 '르 코르뷔지에 씨 보고 계신가요.... 당신이 멋지다고 생각하는 철근과 유리의 도시에선 인간들이 이렇게 산답니다 (에코)'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거기다 타티가 바라보는 관광객과 도시인들은 강박적인 목적을 위해 우스꽝스럽게 바둥바둥거리는 사람들이기에 이 우스꽝스러움은 강해진다. 

반대로 바바라와 윌로 씨는 그런 흐름에서 벗어나는 인물들이다. 바바라는 줄곳 길거리에서 꽃을 파는 할머니를 사진에 담을 기회를 노리려고 하고, 윌로 씨는 [나의 아저씨]에서 그랬듯이 어리숙한 표정으로 휩쓸리면서 선의에 가득찬 행동을 한다. 물론 그런 선의도 하나의 카오스를 일으키는건 자명하다. 그 점에서 [플레이타임]은 샤를 보들레르와 발터 벤야민이 바라보았던 '근대적 산보자로써의 대도시' 파리를 그려내고 있는 영화다. 근현대인인 윌로 씨와 바바라는 각각의 목적에 따라 도시를 거닐며 자신이 포함된 많은 사람들과 흐름을 관찰하고 동시에 휩쓸린다. 때문에 이 영화가 [심시티]가 나왔던 시대에 나왔다면 좀 더 대중들이 이해하기 쉬웠지 않았을까, 라는 아쉬움이 있다. 이 영화의 비전은 소름끼칠 정도로 거대한 도시 문명이나 사람들의 공시성을 현미경으로 들어다보는 [심시티]나 [심즈]의 비전을 닮았다.

종종 타티는 그런 엄청난 흐름 속에서 어처구니 없는 장면을 잡아내곤 한다. 윌로 씨가 군대 동기를 만나러 아파트에 들어가는 시퀀스이 그렇다. 여기서 타티는 음향마저 빼버린 채 아파트 하나를 만화 패널처럼 그려내고 있다. 이 장면에서 타티는 창에서 약간 떨어진 자리에서 카메라를 고정하고 창틀로 구성된 두 프레임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무성영화적으로 구성한다. 두 프레임에 있는 인물들은 서로를 인지하지 못하지만, 우리는 그 사건이 동시성을 가지고 움직인다는걸 알 수 있다. 그 와중에 전 시퀀스에 등장했던 인물이 개를 끌고 지나가는걸 볼 수 있다. 카메라가 위치한 곳에서 좌석이 되고, 그 앞에서 일어나는 서로 무관한 두 개의 흐름이 하나의 프레임에서 움직인다. 타티는 그게 바로 영화라고 생각했던 걸로 보인다. 타티의 이런 생각은 고전 영화적이라기 보다는 카메라의 자의식을 생각했던 현대 영화에 가깝다.

후반부를 장식하는 레스토랑의 재난은 타티빌의 미학을 한번에 압축하고 그걸 뛰어넘는 장면이다. 아직 완공되지 않은 레스토랑에 사람들을 끊임없이 들어오고 밴드는 연주를 하고 주문은 계속 들어오고 종업원의 옷은 끊임없이 더러워지고, 대화는 넘쳐나고, 몇몇 사람들은 떠나고.... 타티는 이 시퀀스에서 몇몇 상황을 정한 뒤 그것을 꾸준하게 반복/변주해 리듬을 쌓아가는 방식으로 유머를 만들어낸다. 그 장관의 몰입도가 엄청나고  길이도 제법 되는지라 아마 대부분의 관객들은 정교하고 치밀하게 구성된 영화적 임프로바이제이션에 현기증을 느낄지도 모른다. 은근 폐소공포증을 자극하게 한달까. 그렇기에 이 시퀀스 말미에 윌로 씨와 바바라가 거리로 나올때 해방감을 느끼는 거겠지만.

하지만 그 임프로바이제이션에 관객이 점점 익숙해질 무렵, 우리는 타티가 카메라를 윌로 씨와 바바라로 향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바바라가 무대에 올라와서 피아노 연주를 하는 장면에 타티는 클로즈업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인물들이 어떤 인물들인지 알려준다. 그는 도시 문명이 우스꽝스럽긴 하지만, 윌로 씨나 바바라, 미국인 부자 같이 그 카오스를 느긋하고 유머러스하게 즐길수 있는 인물들이 있는 한 괜찮을거라고 말한다. 영화 도중 히피를 연상케하는 캐릭터가 등장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타티가 히피를 어떻게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 카오스에서 히피는 자연스럽게 양복 입은 신사숙녀들 사이에서 잘 어울린다. 윌로 씨가 바바라에게 꽃을 건네주고 (그나마도 대신 부탁하기 때문에 만나지는 못하지만) 바바라가 행복해하는 결말은 그 점에서 타티의 낙천주의가 발하는 멋진 결말이다.

[플레이타임]과 타티빌의 종말은 비참했지만, 타티는 적어도 어렵게 살긴 해도 불행하지는 않았을거라는 믿음이 있다. 그는 여기서 자신이 평생 꿈꿨던 영화를 완성했고 아마 고생은 했어도 만든 사실에 대해서는 후회는 없었을 것이다. 윌로 씨의 익살스러움과 반대로 과묵하고 조용한 성격으로 유명했지만, 자크 타티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유머에 솔직하고 거기에 많은 이들이 동참하길 바라던 남자였다. 그렇기에 만약 당신이 영화를 좋아한다면 언제가 될지 몰라도 반드시 큰 스크린에서 [플레이타임]과 타티빌에 방문하길 바란다. 이 영화는 진정으로 영화가 무엇인지, 성숙하지만 낙천적인 긍정으로 살아갈 힘을 얻게 해주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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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저씨 [Mon Oncle / My Uncle] (1958)



나의 아저씨

My Uncle 
9
감독
자크 타티
출연
자크 타티, 장 피에르 졸라, 아드리안느 세르반티, 루시엥 프레지스, 베티 슈나이더
정보
코미디 | 프랑스, 이탈리아 | 117 분 | -


자크 타티의 [나의 아저씨]의 도입부를 장식하는 것은 개다. 우리는 별다른 설명 없이 개들이 쓰레기통을 뒤지고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놀고 있는동안 한 남자가 등장해 그들과 놀아주는걸 보게 된다. 타티는 이 장면에 대사를 넣지 않는다. 대신 키가 큰 멀대같은 남자가 자전거를 출근을 하고 일상을 즐기는 장면을 넣는다. 그러면서도 귀신같이 프레임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타이밍들을 조절해 어떤 이완과 수축으로 이뤄진 하나의 장관을 만들어낸다. 느긋할 정도로 헐렁하고 순진해보이지만 실제로는 조밀하게 짜여진 [나의 아저씨] 도입부는 곧 영화와 자크 타티의 매력을 설명하는데 중요 포인트가 된다.

윌로 씨의 일상은 2차 세계 대전 이전의 풍경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프랑스 어드메에 있는 동네에서 이뤄진다. 쓰레기도 제대로 치우지 않는 이 동네를 배경으로 타티는 시장과 카페를 위시한 낡은 장소들에 조밀한 사람들의 군상을 배치해 프레임 바깥에도 세상이 존재하는 것처럼 평등하게 프레임과 미장센을 구성한다. 마치 윌리를 찾아라 같은 느낌이랄까. 윌로 씨는 이 속에서 딱히 튀어보거나 두드러보이지 않은채 자연스럽게 그 속에 있는 엑스트라들과 교류한다. 윌로 씨를 위해 세상을 존재하는게 아니라 세상이 있고 윌로 씨가 거기에 있다는 느낌일까. 이런 타티의 미학이 잘 드러나는 부분은 바로 윌로 씨의 집일것이다. 한창을 꼬불꼬불거리며 올라가야 하는 윌로 씨의 집은 척 봐도 불편해 보이지만 윌로 씨는 그런 불편함과 상관없이 나름의 방식으로 즐겁게 살아간다. 창문을 이용해 카나리아랑 소통하는 장면 같은게 대표적이다.

그렇기에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사는 윌로 씨의 누나 아르펠 부부로 대표되는 50년대 말 프랑스 중산층의 삶은 더욱 기괴해보인다. 이 세계는 윌로 씨의 세계랑 대조되는 방식으로 세워져 있다. 우선 아르펠 부부의 세계에서는 부부 가족과 그 지인들을 제외하면 집 주변엔 사람들은 거의 등장하질 않는다. 쓰레기 같은 이물질 같은건 전혀 없는 진공포장된 세계의 화룡정점은 바로 아르펠 부부의 집이다. 아마 영화사에 등장한 집 중에서 강렬한 집 베스트에 꼽으라면 꼽힐 아르펠 부부의 집은 한마디로 르 코르뷔지에의 합리주의적 건축관을 극단적으로 반영한 집이다. 모든 공간은 열려 있으며, 방에 놓여진 가구들은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중시하고 있다. 그리고 최첨단 기기들이 부부의 생활을 도와주기 위해 배치되어 있다.

이 아르펠 부부의 삶은 절대로 편하지 않다는건 처음부터 명백하게 드러난다. 방문객이 오면 문을 열여줘야 하는 현관문을 지나면 인물들은 지나칠정도로 우스꽝스러운 포즈로 불편하게 배치된 디딤돌을 철저히 따라 움직인다. 기계들은 가끔 오작동을 일으켜 주인들을 가둬버리거나 윌로 씨랑 엉뚱한 방향으로 폭발한다. 이런 아르펠 부부의 초현대적인 삶이 가지고 있는 괴상함은 영화 사상 괴이한 포스를 자랑하고 있는 설치조각을 꼽으라면 분명 꼽힐 푸른 물을 신경질적으로 내뱉는 죽은 고등어 분수대로 나타난다. 이 고등어 분수대는 부부의 삶을 비출때마다 등장해 엉뚱한 리듬감을 형성함과 동시에 끊임없이 관객들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어 불편하게 만든다. 이 불편함은 아르펠 씨의 직장에서도 변주되고 확대 재생산된다. 전반적으로 아르펠 부부의 삶을 묘사할때 타티의 초현실적인 심미안과 유머 감각이 강렬해져 거의 이말년 병맛 만화 수준의 괴랄한 포스를 자랑하고 있다. 그 중 압권은 아르펠 부부의 집들이 장면일것이다. 사소한 오해와 실수, 인물들을 둘러싸고 있는 수직적인 권력 관계, 윌로 씨의 엉뚱함이 겹쳐져 만들어내는 이 황당할 정도로 웃긴 시퀀스에서 타티는 거의 흥겨울 정도로 치밀한 난장판을 유도하고 엉망이 되버린 집과 인물들을 모른체 하며 관객에게 은근슬쩍 윙크한다.

그렇지만 이 아르펠 부부의 삶은 우스꽝스럽고 불편하긴 해도 배척되야할 대상은 아니다. 타티의 시각은 종종 강렬해지긴 해도 날카롭진 않다. 차라리 그것은 자연스럽지 못한 삶을 방해하는 것들을 가지고 논다고 해야할까? 우선 윌로 씨와 아르펠 가족과의 관계가 나름 좋다는 점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제라드야 윌로랑 거의 동급인 캐릭터이니깐 넘어가자. 아르펠 부인은 현대적인 삶을 매우 추종하긴 하지만 아들 제라드가 윌로랑 나가서 노는것에 대해 별로 걱정하거나 말리지 않으며 (물론 먼지 투성이의 아들에 대해서는 질겁하긴 한다.) 심지어 그것에 대해 투덜거리는 남편에게 질투하는거 아니냐고 지적하기도 한다. 아르펠 가족은 무시무시한 자본가의 대리인 이런 느낌보다는 자신들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모른채 윌로 씨가 변해가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할까 걱정하는 소시민에 가깝다. 물론 그 와중에 그 사회에서 어떻게든 살아가야만 하는 아르펠 씨가 유독 우스꽝스럽게 그려지는건 어쩔수 없지만 말이다.

영화의 시선은 차라리 제라드에게 맞춰져 있다고 보는게 정확할 것이다. 제라드가 영화 내내 자신의 집에 대해 적응하지 못하고 투정부리는데 나오는데 이 [나의 아저씨]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왜냐하면 윌로 씨가 만드는 혼돈은 이 투정하고 밀접한 연관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영화의 주인공이자 거대한 아이인 윌로 씨는 아르펠 부부로 대표되는 현대 사회에 대해서는 그닥 불만이 없다. 그냥 거기에 있으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윌로 씨의 삶은 도무지 현대 사회와 잘 맞춰지지 않고 윌로 씨가 생리적인 불편함에 몸을 비틀다가 카오스가 발생한다. 그 카오스는 영화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아이들이 치는 장난과 유사한 수준에서 이뤄진다. 이 카오스는 가끔 재치있는 발명을 이끌어내기도 하지만 (불편한 소파를 눕혀서 침대처럼 사용한다던가) 대부분은 우스꽝스러운 폭발로 이뤄진다. 타티는 그런 자신의 유희 감각을 꺼내 스크린에 흩뿌려대고 영화는 흥겨운 난장이 뿜어내는 느슨하면서도 헐거운 휴식으로 가득차게 된다. 물론 그렇게 느슨하고 헐거워보이는 모든 요소들이 모두 타티의 치밀한 계산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되겠지만.

결말은 그렇기에 타협과 화합의 기묘한 이중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윌로 씨는 아르펠 씨의 소개를 받아 지방에 있는 세일즈맨으로 취직하게 된다. 적어도 윌로 씨가 [나의 아저씨]에서 누렸던 기묘한 자유는 영화의 끝에서 종결된다. 하지만 윌로 씨가 프레임에서 사라지는 장소는 아르펠 부부의 미학으로 뒤덮인 곳이 아닌, 자신처럼 느긋하고 시끌벅적한 유머로 가득한 시끌벅적한 버스 정류장이다. 그리고 영화 내내 윌로 씨가 못마땅해왔던 아르펠 씨가 마지막에 제라드와 함께 장난을 치고 웃는다. 적어도 윌로 씨가 영화 내내 벌였던 소동이 완전히 무의미 하지 않았단 증거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웃으며 사라지는 아르펠 씨와 제라드를 뒤로 개가 장식한다. 인간이 프레임이 퇴장한 자리에 개들이 즐겁게 논다. 타티는 이런 수미일관을 통해 자신의 영화가 진지한거나 심각한 것이 아닌 즐거운 것으로 받아들이길 원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의 아저씨]는 긴 말보다는 그냥 즐기는게 영화를 이해하는데 가장 정확한 방법이다. 자크 타티는 훌륭한 영상 작가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타고난 희극인이자 삶의 진리를 체득한 현인이였고 그 체득한 깊은 유머를 어떻게 영상에 녹여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현실의 자크 타티가 윌로 씨랑 달리 과묵하고 경제적으로 실패한 삶을 살았다고 해도 [나의 아저씨]를 비롯한 그가 남긴 영화들이 담고 있는 내공 깊은 유머는 절대로 거짓으로 만들어낸거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그가 보이는 통찰력은 온전히 그의 삶에서 나온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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