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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1994 (3)
지옥 [L'enfer / The Hell] (1994)

2017/05/09 - [Deeper Into Movie/리뷰] - 도살자 [Le Boucher / The Butcher] (1970)

클로드 샤브롤의 [지옥]은 프랑스 시골 마을의 전경을 트래킹하면서 시작한다. 그 다음 샤브롤은 결혼식장으로 옮겨가 인물들을 소개한다. 아마 샤브롤 매니아들은 이 정경에 움찔할지도 모르겠다. 의도적인지 아니면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지만 이 영화의 도입부는 샤브롤의 대표작인 [도살자]를 닮았다. 샤브롤은 또다시 피와 비극으로 얼룩진 로맨스를 다루고 싶은 것일까?

글쎄, 결론만 말하자면 절반만 맞는 사실이다. [지옥]의 러브 스토리는 비극으로 얼룩진 건 맞다. 하지만 빛과 어둠의 연인들이 애절하게 이별하는 [도살자]와 달리 [지옥]의 커플을 바라보는 샤브롤의 시선은 차갑다 못해 얼어붙을 지경이다. 어쩌면 이 냉혹함은 존경하는 선배에게도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지옥]은 소름끼치는 [디아볼릭]을 만들어낸 앙리 조르주 클루조의 미완성 프로젝트를 리메이크한 영화기 때문이다. [디아볼릭]의 냉혈함과 샤브롤의 어두컴컴함이 만나다니 처음부터 행복한 결말 따윈 없는 것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도입부의 결혼식을 장식했던 넬리와 폴이라는 커플이다. 프랑스 시골 마을에 호텔을 운영하며 사는 넬리와 폴은 그 누구보다도 행복해야 할 커플처럼 보인다. 하지만 어느날 넬리가 결혼 전 연애 경험을 폴에게 털어놓으면서 이 둘의 관계는 금이 가기 시작한다. 폴은 넬리가 자신 몰래 바람을 피우고 있다고 단정하고, 넬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시작한다.

[지옥]에서 흥미로운 점은, 샤브롤 영화에서 간과하기 쉬운 루이스 부뉴엘의 영향을 받은, 비논리적이고 초현실적인 연출을 비교적 알기 쉽게 (?) 찾아볼 수 있는 영화 중 하나라는 점이다. 이미 샤브롤은 1970년대에 [파멸]이라는 영화에서 거의 캠피할 지경까지 가는 무의미하고 초현실적인 쇼트와 폭력적인 인물 관계를 결합시키는 실험을 진행한 바 있다. 이 영화에서 샤브롤은 엘렌 주변의 인물들의 캐리커처성을 부풀림과 동시에 엘렌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플롯의 정합성을 가볍게 흘러보내면서 야비하고 불쾌한 유머로 부르주아들을 공격해댔다.

[파멸]은 그 실험이 지나친 나머지 병맛 부조리극을 연상케하는 블랙 코미디 영화가 되었지만, [지옥]은 사정이 다르다. 모든 인물들이 얄팍했던 [파멸]과 달리, [지옥]은 그런 얄팍함이 덜하다. 우선 샤브롤은 [지옥]의 넬리에겐 어느 정도 감정 이입을 하고 있다. 객관적으로 봤을때도 폴의 의처증은 도를 지나쳤고 무시무시하다. 작중 넬리가 겪는 폭력은 일상적인 부부싸움이라 보기에도 어렵다. 심지어 폴과 넬리 이외의 등장인물들은 객관성을 유지하면서 폴의 비정상성과 대조된다. [지옥]은 데이트 폭력 보고서라 할만큼, 부부 간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폭력이 어떻게 가속화되는지 보여주고 있다.

샤브롤이 야비한 조소를 보내는 대상은 남편인 폴이다. 샤브롤이 폴을 조롱할때 [지옥]은 히치콕의 [이창]과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욕망]에서 많은 걸 빌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지옥]은 집착의 시선이 어떻게 영화 전체의 시공간을 잡아먹게 되는지 약간의 초현실주의를 동원해 보여주는 영화다. 도입부 폴의 일상에서 샤브롤은 힌트를 흘러놓는다. 폴이 친구랑 같이 드라이브를 하면서 얘기하는 시퀀스가 그렇다. 평범한 대화 시퀀스처럼 보이지만, 폴의 샷과 친구의 샷은 어딘가 시선이 맞지 않는다. 샷을 떼어넣고만 본다면 폴과 친구는 서로의 시선을 교환하지 않고 분리되어 있다. 이 분리된 몽타주의 의도는 명백하다: 폴은 처음부터 자신의 시선만을 고집하며 타인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다. [도살자]가 그랬듯이, 샤브롤은 일상을 보여줄때도 어딘가 초현실적이고 불안한 샷으로 몽타주를 교란해 은밀한 긴장을 조성한다.

이처럼 [지옥]은 슬금슬금 의심과 집착을 풀어놓으면서 주관과 객관의 세계를 흐트러트리기 시작한다. 넬리는 종종 폴의 시각에서 수상쩍은 행동을 하지만 그 수상쩍은 행동의 진상은 쉽게 밝혀지지 않는다. 넬리가 자동차 수리공 마르티노랑 배를 타고 놀러간건 사실이지만, 정말로 놀러간건지 아니면 은밀하게 섹스를 했는지 알 수 없다. 그 알수 없음이 폴의 의심과 분노를 낳는다. [지옥]의 지옥은 진상을 파악할 수 없는 이미지가 점진적으로 쌓이면서 만들어진다. 

어둠 속에서 호텔 손님이 찍은 필름을 즐겁게 보다가, 넬리와 마르티노를 떠올리고 폴이 발광하는 시퀀스는 그 점에서 전환점이라 할 만하다. 남들의 행복한 홈 비디오 앞에서 폴이 떠올리는 것은 역설적으로 모호하지만 집요한 간통의 이미지다. 폴은 그 이미지를 떨쳐내지 못하고 결국 미쳐버린다. 이 잔인한 아이러니가 지나간 후, 폴은 영화 속 현실을 제대로 지각할 자격을 잃어버린다. 간신히 상황이 진정된 순간에도 폴은 넬리를 계속 의심하고, 특정한 주관적 이미지에 집착해 폭력을 휘두른다. 샤브롤은 그것이 부르주아가 필연적으로 품고 있는 신경증이며, 끔찍한 폭력이라고 말한다. 부부의 호텔이 어둠으로 가득한 감옥으로 돌변하는 것도 이때부터다. 샤브롤은 전원의 빛으로 가득했던 영화 속 세계를 최종적으로 표현주의 특유의 강렬한 어둠에 가둬버림으로써 지옥을 완성한다.

무시무시한 감금과 폭력의 반복의 끝에 도달한 결말은 도입부의 반복이다. 샤브롤은 아까까지 이뤄졌던 아비규환과 도래할 파국 앞에서, 갑자기 모든 것을 리셋해버린다. 그리고 이해하지 못한 채 당황해하는 폴을 냅둔뒤 도입부의 평온한 전원을 트래킹하는 샷으로 돌아간다. 이 때 샤브롤이 마지막으로 올리는 자막은 다음과 같다. "끝도 없이." 거기서 [지옥]은 끝난다. 크로넨버그의 [코스모폴리스]에서 그랬듯이 샤브롤은 파국 직전의 진공 상태에서 영화를 끝내고, 평온한 도입부로 돌아가 이 지옥이 영원히 이어질 것이라고 선언해버린다. 참으로 악랄하기 그지 없는 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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숏 컷 [Short Cuts] (1993)

2017/04/19 - [Deeper Into Movie/리뷰] -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 [McCabe & Mrs. Miller] (1971)

로버트 알트만의 [숏 컷]의 시작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살충제 헬리콥터다. 중요한 점은 이 헬리콥터에 대한 정보가 보이스 오버 형식을 통해 인물들이 보는 뉴스로 전해진다는 점이다. 도입부의 의도는 명백하다. 알트만은 불특정 다수의 개인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파편화된 사건들을 조합해서 그릴 예정이다. 몇몇은 이야기가 진행되는 도중에 만나겠지만 몇몇은 영화가 끝날때까지 만나지 못할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같은 LA 하늘 아래에서 살고 있다. 알트만은 이렇게 분절된 개별 캐릭터들을 하나의 영화로 묶는 과정을 헬리콥터-살충제-뉴스를 거쳐 도식화하고 암시한다.

조각나고 분절된 상황처럼 보이지만 하나로 엮어지는 [숏 컷]의 서사 구조 자체는 알트만 영화를 조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익숙할 것이다. 알트만은 이미 [내시빌]에서 이 도식을 완성시킨바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소 느슨하게 구성되어있던 [내시빌]과 달리, [숏 컷]은 훨씬 치밀하게 직조되어 있다. 레이먼드 카버가 쓴 단편 소설들을 엮어낸 [숏 컷]의 캐릭터들과 상황들은 하나하나가 인상적이기에 도입부의 교통정리가 끝나면 그들이 누군지 파악하기 어렵지 않다. 웨이트리스가 일으킨 교통 사고로 아들을 잃은 부부, 돌아다니며 불륜을 저지르는 경찰, 시체를 발견하고도 신고하지 않고 낚시에 집중하는 사내들, 어릿광대 일을 하는 여자....

레이먼드 카버가 제공하는 세계는 그야말로 질척하기 그지 없다. 원작 소설도 그렇지만, 카버의 세계는 침이나 땀으로 범벅이 된 원초적인 본능이 구질구질한 감정들과 계급 양태랑 얽혀있는 리얼리즘의 세계다. 시체가 잠긴 강에서 남편이 건져올린 생선을 먹었다가 역겨워하는 아내, 술과 담배로 쩌든 집에 앉아 기계적인 폰섹스를 나누는 여자, 아들을 잃은 슬픔을 생일 케이크를 먹으면서 해결하는 부부... 카버의 세계에서 욕망과 감정은 날것으로 내던져지고, 인물들은 그 폭풍 속에서 끙끙 머리를 앓으며 욕설을 내뱉는다. 알트만은 그 영역에 발을 내딯으며 생생하게 그 폭풍을 잡아낸다. 그 점에서 [숏 컷]은 존 카사베티스의 세계에 가까운 알트만 영화일것이다. 비슷한 알트만 군상극이였던 [내시빌]이 기본적으로 학자의 시점을 견지했던 것과는 대조된다.

중요한 점은 이 과정에서 관객은 알지만, 작중 인물들은 모르는 정보의 차이가 상당히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점이다. 개별 시퀀스 내에서도 꾸준히 등장인물들을 마주치게 하고 심지어 중대한 사건까지 일으키지만, 그 인과관계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다. 웨이트리스 도린은 자신이 친 아이가 죽어버린걸 끝내 알지 못한채 괜찮을거라고 믿으며, 메리안과 랄프가 꼴불견으로 싸웠던 것을 클레어와 스튜어트는 알지 못한다. 이렇듯 [숏 컷]은 인물들은 단선으로 이해하고 있는 상황을 관객이 입체적으로 받아들이도록 유도하면서 감정적인 긴장을 만들어낸다. 그 긴장은 안타까움이기도 하고, 블랙 코미디적 조소이기도 하고 허무함이기도 하다.

어떤 점에서는 얄밉고 냉소적이기까지 하다. [숏 컷]은 독립적이었던 카버의 단편들이 하나의 세계에서 서로 얽히고 섥히게 한 뒤, 조감하면서 생기는 거리감이 있다. 주인공들의 고민과 감정은 묵직하고 진지하지만 영화가 취하고 있는 헬리콥터의 시점에서는 일부에 불과하다. 단일 구조에서는 진지했을 감정들과 행동이 각각의 상이한 구조가 얽히고 파편화되면서 전체적인 인상은 가벼워지는 것이다. 알트만의 이런 태도는 상이한 음표들을 모아서 통일된 곡으로 만들어내는 작곡 과정을 연상케 하는 구석이 있다. 실제로 [내시빌]이 그렇듯이 [숏 컷] 역시 가수가 노래를 부르는 샷을 집어넣어 영화의 전체적인 통일성을 부여하고 있다.

[숏 컷]의 마지막은 카버의 리얼리즘을 흔드는듯 하면서, 동시에 카버가 추구했던 인생의 깨달음를 동시에 그려내고 있다. 이 영화의 결말에 등장하는 지진과 살해는 뜬금없고 당황스럽다. 노골적으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표방하는 이 영화의 결말은 그러나 상당히 일관된 이해의 결과물이다. 먼저 지진은 도입부에 등장한 살충제와 수미상관적 댓구를 이루는 도구다. 살충제가 모기를 죽이는 유독한 물질로,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시점을 제시했다면 지진은 그 시점의 존재감과 죽음의 존재를 다시 확인시키며 파편화되어있던 사건들을 일시적으로 하나로 묶는다. 지진 앞에서 느끼는 공포는 모두에게 평등하게 적용되며, 동시에 살충제의 유독성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이 지진은 궁극적으로 파국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알트만은 끝없이 지리하게 이어질것만 같은 개별 일상의 리듬에 격렬한 충격을 가하지만, 아무렇지 않게 돌아가는 인물들의 삶을 보여주면서 아이러니를 끌어낸다. 극단적인 욕망이 살해라는 행위로 폭발하지만, 그 극단 역시 자연스럽게 일상의 리듬으로 회귀하는 아이러니. 심지어 알트만은 짜증나서 유기했던 개를 다시 찾아와 데려오는 서브플롯을 집어넣으면서 그 아이러니를 강조한다. 궁극적으로 이 아이러니는 도덕적으로 쉽게 판별될 수 없는, 인간의 양면성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숏 컷]은 군상극 이외의 알트만적 인장인 '아이러니'를 발견할 수 있는 영화기도 하다.

[숏 컷]은 그런 아이러니에서 긍정과 부정 어느 쪽으로 떨어지지 않는 독특한 영화다. [내시빌]에서 있었던 얄밉고 냉소적인 태도는 여전하지만, 알트만은 카버가 담아냈던 '인생에서 일어나는 긍정과 부정, 그리고 기이한 깨달음'이라는 테마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데 성공했다. 이 영화의 무지막지한 길이는 그 파편화된 긍정과 부정을 하나의 영화로써 조각모음하기 위해 필요한 도구라 할 수 있다. 그 점에서 [숏 컷]은 후기 알트만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영화이며, 단편의 흐름을 공시성을 가지고 조직했다는 점에서 서사 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밀어붙인 걸작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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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암의 집 [Casa De Lava / Down to Earth] (1994)

2014/05/17 - [Deeper Into Movie/리뷰] - 뼈 [Ossos / Bone] (1997)

2016/05/29 - [Deeper Into Movie/리뷰] - 피 [O Sangue / The Blood] (1989)

2016/06/24 - [Deeper Into Movie/리뷰] - 행진하는 청춘 [Juventude em Marcha / Colossal Youth] (2006)

2016/07/03 - [Deeper Into Movie/리뷰] - 반다의 방 [No Quarto Da Vanda / In Vanda's Room] (2000)

일련의 폰타야나스 연작을 거슬러 올라와 도착한 페드로 코스타의 [용암의 집]은 말그대로 연대기적으로도, 영화적으로도 [피]와 [뼈] 사이에 놓여져 있는 영화다. 아직은 완벽한 픽션의 영역에서 [피]의 주연이였던 이네스 드 메디어로스가 기용되었지만, 집안과 리스본 시내를 머물던 흑백 카메라가 리스본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떠나 총천연색 카보베르데에 도착했다. 페드로 코스타가 왜 [피]를 만든 후 리스본에서 영화를 만들지 않고 카보베르데에서 영화를 만들기로 결정했는지는 자료 부족으로 추측할수 밖에 없지만 무언가 치열한 고민의 산물이였거니, 하고 추측해본다.

[용암의 집]의 시작은 카보베르데에서 분화하는 화산이다. 필름입자가 도드라지게 찍혀진 분화하는 화산과 마그마 다음으로, 카보베르데 주민의 얼굴 클로즈업이 담긴 몽타쥬가 흘러간다. 마노엘 드 올리베이라는 이 시작을 '코스타의 실수'라고 말했지만 [용암의 집]의 도입부는 카보베르데가 품고 있는 이미지를 포착한 뒤, 몽타쥬로 연결해 조용히 폭발시키는 멋진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이 도입부가 흥미로운 점은 고요함과 뜨거움이 동시에 응축되어 있다는 점에 있다. 카보베르데 주민들의 얼굴들은 로베르 브레송을 연상시키는 침묵에 잠겨있지만, 격렬하게 흐르는 영화 음악과 분절된 편집은 그와 대조되는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 페드로 코스타는 [용암의 집] 도입부를 통해 조용하게 분출하는 카보베르데의 분위기를 영화적으로 무대화하는데 성공한다.

페드로 코스타는 서사를 다룰때 어떠한 설명을 일부러 무시하고 생략과 결과를 통해 정서를 전달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렇다면 페드로 코스타가 묘사하고자 하는 분위기는 무엇일까? 도입부가 지나 짤막하게 등장하는 리스본에서 어느 정도 답이 나온다. 활기차게 웃으며 일하러 가는 동료 노동자들과 달리, 영화의 중심인 레앙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의 무표정은 놀랍게도 카보베르데 사람들의 얼굴들을 배치한 초반부 컷과 닮아있다. 여기까지 봤다면 알 수 있겠지만 [용암의 집]은 숨길것도 없이 '유령 영화' 혹은 '좀비 영화'다.

마리아나가 카보베르데에 도착하면서 이런 좀비 영화적인 성격은 강해진다. 영화 속 카보베르데는 분명한 인과관계 없이 흘러가는 느릿한 악몽과 같은 곳이다. 통성명을 하지 않았음에도 사람들은 마리아나를 알아보며, 레앙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사람은 자신은 아이가 50명이나 있다고 말한다. 해변가를 산책하던 마리아나는 왠 소년에게 공격받고, 개는 살해당한다. 자연히 이런 분위기에서 마리아나가 가지고 있는 서구의 지식들은 해체되어간다. 온다던 헬리콥터는 영화가 끝날때까지 등장하지 않고, 레앙을 위해 준비해둔 백신은 그대로 사라져버린다. 낯선 곳에서 마리아나는 철저한 타자다.

하지만 [용암의 집]은 착취적으로 이국을 소모하는 영화는 아니다. 페드로 코스타는 이 악몽을 타자화하지 않고, 카보베르데라는 공간에 대해 묵상한다. 페드로 코스타는 카보베르데를 떠나는 청년들을 보여주면서, 이 느릿한 몽유병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흐름이 있다는 걸 보여준다. 폰타야나스가 그랬듯이, [용암의 집]에 등장하는 카보베르데의 느릿한 우울은 부정적이지도, 긍정적이지도 않고 '그냥 살아가는 곳'이다.

흥미롭게도 [용암의 집]엔 [행진하는 청춘]의 모티브라 할 수 있는 부분들이 보인다. 레앙은 벤투라처럼 카보베르데에서 포르투갈로 넘어온 공사 노동자이며 [행진하는 청춘]에 등장했던 렌토의 "용암으로 만든 집에서 같이 살고 싶다"는 연서는, 레앙과 아내(로 추정되는 인물) 간의 연서로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다시 등장한다. 그렇다면 렌토는 레앙의 또다른 모습이라 할 수 있는 것일까? 물론 명확한 대답은 나오지 않지만, 적어도 [행진하는 청춘]에서 희망을 점차 잃다가 우발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렌토의 모습은 [용암의 집]에 등장하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좀비 레앙에서 이어진 것은 명백하다.

레앙이 카보베르데인들의 생기 잃은 모습을 집약해 보여준다면, [얼굴 없는 눈]으로 유명한 에디트 스콥이 맡은 이디스는 훨씬 복잡한 의미를 내포한 캐릭터라 할 수 있다. 포르투갈 살리자르 정권의 상흔을 지니고 카보베르데의 섬에 정착한 이디스는, 꽤나 모호한 캐릭터로 그려진다. 이디스의 아들이 말하길, 이디스는 마리아나를 싫어한다고 말한다. 마리아나가 살리자르 정권 이후 세대라는걸 생각해보면 마리아나에 대한 이디스의 거부감은 자신을 버리고 망각한 포르투갈에 대한 거부감일것이다. 그렇기에 이디스는 인종과 관계없이 카보베르데인이나 다름없는 존재로 그려진다. 코스타 감독은 이디스가 카보베르데 주민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모습을 통해, 우리에겐 알려지지 않았던 포르투갈과 카보베르데 간의 묘한 관계를 암시한다. 좀 더 확장하자면 [얼굴 없는 눈]에서 가면만 쓰고 세상과 유리되어 성에 갖혀 살아가던 크리스티앙의 연장선상에 있는 캐릭터라 할수도 있을것이다.

이디스와 마리아나의 엇갈린 운명은 그래서 흥미롭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마리아나는 카보베르데의 일원이 되어간다. 이디스의 아들과 충동적으로 자는 것부터 시작해, 깨어난 레앙을 보고도 리스본에 있을때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페드로 코스타는 마리아나가 붉은 원피스에서 무채색의 옷을 갈아입는걸로, 마리아나가 카보베르데에 정착했음을 명백하게 한다. 마리아나가 등장하는 마지막 장면는 용암의 집 밖에서 돌을 던지며 분해하는 장면이다. 

반대로 완벽하게 정착한듯한 보였던 이디스는 영화 마지막에 카보베르데를 떠나 포르투갈로 향한다. 그의 아들이 살해당했다는 암시에도 불구하고 이디스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마냥. 이디스가 향하는 곳은 어디인가?라는 질문처럼 페드로 코스타는 [피]처럼 침묵을 택한다. 그저 문턱에 걸쳐 잠든 아이가 집으로 들어가는 컷을 통해, 경계선상에 있던 마리아나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는 암시를 남길 뿐이다.

[피]가 인공적인 상징과 고도로 계산된 영화광적인 이미지들을 서사를 배치하는 전형적인 아트하우스 영화였다면, [용암의 집]은 추상적인 내러티브를 기반에 두면서도 다큐멘터리적인 연출을 도입해, 카보베르데인과 그 곳의 풍경을 그대로 포착/채집하는 방식으로 서사를 구축하고 있다. 단적으로 영화에 나오는 카보베르데인들이 축제를 벌이는 시퀀스은 외지인인 페드로 코스타가 영화를 위해 조작했다기보는, 촬영날 우연히 일어났던 카보베르데인들의 축제 속으로 코스타가 들어가서 찍은것처럼 보인다. 어찌보면 후작들이 인물 다큐멘터리스러웠다면 [용암의 집]은 인류학 다큐멘터리스럽다고도 할 수 있을것이다.

[용암의 집]은 지금 시점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자연 풍광이 가져다 주는 미적 쾌감을 영화적 동력으로 삼는 페드로 코스타 영화기도 하다. 붉은 색 태양과, 검은색 화강암, 갈색 토양이 어우러진 카보베르데의 풍광은 마치 황야같이 보이는데 어찌보면 [용암의 집]을 만들면서 페드로 코스타는 서부극을 만들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물론 시공간이 모호해진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마리아나의 클로즈업을 담은 컷이라던가 거의 흑백 호러 영화를 연상케하는 해변가 시퀀스는 [피]에서 보였던 영화광적인 매료가 담겨있기도 하다.

[용암의 집]은 이후작들에 비해 독해할 수 있는 많은 상징이 표면에 드러나 있는 영화기도 하다.  이것은 장점으로도 단점으로도 작용하는데, 적어도 [반다의 방] 이후 작들에 있던 자기고백에 담긴 아름다움은 [용암의 집]엔 없다. 반대로 정교하게 계산된 촬영이라던가 [피]보다는 덜 관습적이면서도 상대적으로 이해하기 편한 서사 전개는 [반다의 방]을 보면서 졸았던 사람이라면 매력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어느 쪽을 선택할지는 관객의 자유겠지만 적어도 [용암의 집]에 드러난 표면은 이후 페드로 코스타 영화와 무관하지 않다. 그렇기에 어찌보면 원점이라 할 수 있는 영화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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