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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يس هناك ما هو صحيح ، كل شيء مسموح به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JIFF20 (1)
미끼 [Bait] (2019)

(결말에 대한 누설이 있습니다.)

마크 젠킨의 <미끼>는 기묘한 영화다. 우선 이 영화는 영국 영화이면서 지역 영화다. 마크 젠킨은 영국 서남단에 있는 지방 (이자 독자적인 문화권인) 콘월 출신으로, 데뷔 후 줄곧 콘월에서 영화를 만들고 있다. <미끼> 역시 콘월 바닷가 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다. <미끼>의 이야기는 간단히 말해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한 노동 계급과 중산층 계급의 대립을 다루고 있다. 블랙 코미디로도, 진지한 사회 고발물로도 흐를 수 있는 소재인데, 마크 젠킨이 선택한 방식은 후자에 가깝다. 작가로써 마크 젠킨은 우직하고 성실하게 콘월 해안가에 대한 세세한 묘사와 함께 키친 싱크 리얼리즘에 기반한 비극으로 그려낸다. 인물들 역시 진지하기 그지 없고, 세련된 문학적인 상징성이나 아이러니나 이죽거림은 보이지 않는다. <미끼>의 서사는 어렵지 않게 명료한 비극이다.

<미끼>의 비극은 외지인과 현지인, 영국의 노동 계급과 중산 계급을 가로지르는 경제적인 문제에 기반하고 있다. 영화의 주인공 어부 마틴은 배를 사고 싶어한다. 마틴의 형인 스티븐에겐 배가 있지만 그 배는 게스트하우스를 방문하는 관광객을 위해 운영하고 있다. 마틴은 그게 싫어서, 경제적인 자립을 하려고 하지만 쉽지 않다. 마틴이 살고 있는 콘월 항구 마을은 이미 외부인 관광객 없이는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없는 상태다. 한편 마틴 형제의 옛 집은 리라는 중산층 가족이 사들여 게스트하우스로 운영중인데, 마틴과 관계는 썩 좋지 않다. 사소하게 쌓여있던 불편한 관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여러 상황이 겹치면서 점점 사이가 벌어지고, 결국 비극으로 치닫게 된다.

바닷가 마을의 외부인과 내부인이라는 소재, 현지인들의 생활에 대한 세미 다큐멘터리적인 접근, 인물 숏과 자연 풍경을 이어붙이는 편집 기조에서 <미끼>는 아녜스 바르다의 <라 푸앵 쿠르트로의 여행>의 영향력을 받은 영화다. 마크 젠킨은 콘월이라는 지역에 대한 애정과 디테일에 대한 풍부한 관찰력, 콘월인과 대비되는 외부-영국인으로 대표되는 경제적인 존속 관계,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두 축을 오가며 젠트리피케이션이 만들어내는 격차와 불만족, 소외, 갈등을 그려낸다. 작중 해안가 마을은 아름답긴 하지만, 살기엔 지루한 곳이다. 마틴의 조카 닐이 일과를 끝내고 펍에 가서 노는 시퀀스를 보면 알 수 있다. 펍엔 닐 같은 젊은이를 비롯해 사람들로 꽉 차있지만, 닐은 이런 북적거림에 대해 어떤 흥분도 보이지 않는다. 외부인 손님에게 수입을 의존하고 있을 펍의 풍경은, 닐에겐 그저 반복되는 일상에 불과하다. 펍 시퀀스와 리 가족과 관광객들이 게스트하우스에서 여유롭게 '일상'을 즐기는 장면을 비교해보면, 노동 계급과 유산 계급의 관점차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무료함은 평화가 아니라 언제든지 끓어오를수 있는 팽팽한 긴장감에 가깝다. 이 긴장감은 경제 활동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외부인-유산 계급이 주도하는 서비스업에 기생해야 하는 노동 계급의 불만이 담겨 있다. 마틴의 삶을 보자. 마틴은 끊임없이 생선과 해산물을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팔지만, 만족스러운 수입을 얻지 못한다. 그렇다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냐면 그런 것도 아니다. 마틴의 유일한 희망은 배를 얻어 좀 더 본격적으로 어업을 하는 것이지만, 돈은 모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마틴을 자신의 일상을 버텨내는 쪽에 가깝다. 이런 감정은 마틴에게만 한정된 것도 아니다. 펍 주인의 딸 웬나가 시종일관 까칠한 태도를 일관하는 것도 주체가 되지 못한 채 고여있는 삶에 대한 짜증스러움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웬나는 심지어 어머니에게 노골적으로 관광객-유산 계급에 들러붙는 기성 세대를 비난하기까지 한다. 그 점에서 마크 젠킨의 시선은 비교적 평화롭게 두 세계가 '분리'되어 각자의 길을 갔던 바르다보다 폭력적이고 절망적이다. 영화에서 이뤄지는 화해와 소통의 시도가 모두 실패로 돌아가는 것도 이런 무거운 분위기에 일조한다.

여기까지만 했더라면 마크 젠킨은 켄 로치 같은 키친 싱크 사실주의의 적통을 잇는 영국 영화감독으로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미끼>의 이야기는 제목처럼 진짜 파고들어야 하는 요소에 대한 밑밥이다. <미끼>에서 파고들어야 할 핵심은 시청각적인 즉물성에 있다. 곧장 말해 <미끼>는 시대착오적인 영화다. 볼렉스 16mm 필름 카메라로 촬영한 <미끼>는 아리 알렉사나 레드 에픽으로 만들어진 디지털 영화 애호가들의 혀를 차게 만드는 영화다. 흑백 필름의 훼손은 영화가 끝날때까지 계속 나타나며, 후시녹음으로 덧붙인 음향은 아날로그 모노로 녹음을 했나 확인해야 할 정도로 뭉그러져 들린다. <미끼>는 디지털의 깔끔함을 거부하는 러다이트 영화다. 마치 게스트하우스의 세련됨과 반대되는 어부의 투박함처럼 말이다.

마크 젠킨은 이런 시청각적인 도구를 이용해 서사 영화의 기본 화술과 격렬한 몽타주를 조합한다. 소리가 있긴 하지만, <미끼>의 방법론은 무성 영화에 가깝다. 좀 더 정확히는 독일 표현주의와 소련 몽타주 영화에서 많은 영감을 얻고 있다. 일부 평자는 케네스 앵거 같은 미국 아방가르드 영화 감독들을 언급하기도 했는데, 확실히 <미끼>의 몽타주는 <스콜피온 라이징>이나 <불꽃놀이> 같은 앵거의 영화에서 자주 보였던 꿈결같으면서도 불온한 긴장감으로 넘실거리는 초현실주의적 몽타주에서 많은 영감을 받은 모습을 보인다. 파편화된 거친 이미지가 편집으로 끊임없이 덧대지면서 불꽃놀이처럼 시각을 교란하는 영화를 생각하면 좋겠다. 바닷가 배경과 고전적인 시청각적인 도구들에서 로버트 에거스의 <더 라이트하우스>를 연상할수도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미끼>는 <더 라이트하우스>보다 훨씬 투박하고 거칠다.

이런 영향 속에 마크 젠킨은 서사에 필요한 숏들을 배치한 후, 그 뒤로 서사의 감정이나 감각을 포착한 파편적인 숏을 붙이는 식으로 캐릭터가 느끼는 감각과 감정, 심지어 시공간까지 끊임없이 확장하고 늘린다. <미끼>가 선택한 연출이 상당히 튀긴 하지만, 쉽사리 바닥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서사 영화에게 요구되는 기본기를 갖추고 핵심을 찌르는 숏을 정교하게 붙여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마틴이 리 가족의 아들인 휴고가 가재를 몰래 훔쳤다는 사실을 알고, 술집에서 휴고에게 다가가는 시퀀스를 보자. 이 장면은 캐릭터에 대해 가지게 되는 선입견 (투박하게 생겨서 마구 폭력을 휘두를것 같은 어부)을 뒤엎는 반전과 유머를 파편을 이어붙이는 몽타주로 구성해 서스펜스와 집중력을 선보이고 있다. 이런 편집은 동시에 서사와 관계 없이 지극히 표현주의적으로 심상과, 감정적 긴장을 끌어내기도 한다. 휴고가 훔친 가재로 저녁을 먹는 팀과 산드라의 시퀀스가 대표적이다. 밥을 먹는다는 단순한 행위지만, 젠킨은 이 단순한 행위에 노동 계급의 노동을 착취한다는 죄책감과 탐욕, 먹는다는 행위의 본능적인 감각을 드러내 불편하면서도 관능적인 분위기를 만든다 이외에도 젠킨은 닐의 죽음을 일부러 초반에 예지몽처럼 배치한다던가, 인물의 시점에서 불가능한 숏을 집어넣는 방식으로 몽타주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이런 표현주의적인 접근은, 린 램지처럼 마크 젠킨을 키친 싱크 사실주의에서 멀리 도약하려는 부류의 영국 영화 감독군에 포함하고 있다.

<미끼>가 영화를 만드는 방식은, 모든 것을 '생성'하는 디지털 CG 시대의 영화 만들기를 전면적으로 저항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이미지는 컴퓨터로 생성한 것이 아니라 직접 찍은 것이며, 편집이라는 기초적인 도구로 관객의 지각을 교란하고 자극한다. 이런 방식은 영화 속 어업과 일치하는 구석이 있다. 짐작했겠지만 <미끼>는 어업의 과정을 세세하게 보여주면서 행위와 질감을 잡는데 주력하고 있다. 그리고 그 질감은 영화의 투박한 모양새하고 닮아있다. 이와 관련해 사소하지만 주목할 소도구가 있다. 바로 스마트폰이나 노트북 같은 디지털 기기다. 동시대가 배경임에도, <미끼>는 이런 디지털 기기가 의도적일 정도로 비중이 낮다. 정확히는 마틴이나 닐 같은 어부들을 묘사할때는 디지털 기기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게스트하우스에 있는 리 가족과 관광객들이 디지털 기기를 쓴다.

이 배제와 사용은 명백히 의도적이기에, 러다이트적인 모양새와 함께 보면 아날로그 문화와 디지털 문화에 대한 서브텍스트로 읽힐 여지가 있다. 이 서브텍스트의 관점에서 보면 <미끼>는 필름-아날로그 문화와 이 문화를 밀어내고 주류로 차지한 디지털 문화 간의 충돌로 읽힐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젠킨의 입장은 명백하게 아날로그 문화를 옹호하고 있다. 어업이 1차 산업에 인간 생활에 필요한 식량을 생산하는 직업이라는 걸 유념하면 확실해진다. 사람은 서비스업 없이도 살수는 있지만, 먹을 것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마크 젠킨은 필름이 가지고 있는, 유물론적이고 즉물적 표현과 편집이라는 기초적인 도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1차 산업인 어업과 동일시한다. 디지털 시대에도 아날로그 영화은 필요하며 사멸하면 안 된다고 역설한다.

영화 도입부에서 앞을 노려보며 뚜벅뚜벅 걷는 마틴의 숏은 그 점에서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첫번째는 마틴이 느끼는 현실에 대한 불만이다. 두번째는 마틴의 강건한 표정에서 뿜어져나오는 고독한 뚝심이다. 이 도입부가 영화의 마무리에 붙여도 이상하지 않다는 점도 주목할만 하다. 선원으로 키우려던 닐이 휴고와의 다툼 끝에 우발적인 사망하고, 이 사건을 계기로 마틴과 스티븐은 분노하면서도 화해를 한다. 이때 스티븐은 과거의 흔적이 사라진 게스트하우스를 둘러보면서 말한다 "이 놈들은 우리 가족에 관련된 물건을 전부 치워버렸어!". 이 대사의 과녁이 어떤 계급과 문화를 겨냥하고 있는지는 명백하다. 마지막 장면. 이제 스티븐의 배는 관광업을 포기하고 어업을 나선다. 마을 현실에 불만이 많았던 웬나가 닐의 자리를 대신한다. 그렇게 어업을 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이 결말은 양가적이다. 먼저 긍정적인 면을 보자. 웬나가 닐을 대신한다는 점은 젠더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마초적인 부계 가족이 해체된 자리에, 이전엔 성차별적 인식으로 끼어들수 없었던 어업 현장에 여성이 끼어든다는 점에서 변화와 약간의 희망을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 결말은 씁쓸히 사멸을 받아들이고 그럼에도 자신의 길을 가겠다는 고독함도 포함하고 있다. <미끼>는 그 점에서 자본을 뒤쫓아 과거의 문화를 투박하고 느리다는 이유로 지나치게 빨리 치워버리는 현 시대에 대한 총체적인 비극을 다루는 영화라 할 수 있다. 그 '과거의 문화'는 콘월이라는 변두리 지방 문화권과 어업에 대한 것이기도 하며, 필름 영화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이런 과거의 문화에 대한 애착과 소멸을 논하는 영화를 디지털 영화 매체인 DCP나 코로나-19 사태로 VOD으로 본다는 사실은 그 점에서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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